소설리스트

거신사냥꾼-188화 (189/251)

< 43. 크투가(2) >

보인다. 수염의 형태, 눈동자의 모양, 머리카락의 개수까지 셀 수 있을 정도로 뚜렷하게 보였다.

하지만, 답을 해줘야 하나?

프투가의 상위정령, 살아있는 불꽃 그 자체인 크투가!

프투가의 언행을 보면 확실하다.

분명히 그가 ‘신의 자취’였다. 역대의 태양왕들은 크투가의 형태를 읽곤 그것을 ‘신의 자취’로 규정해버린 것이겠지.

그렇다면 시련은 이미 깬 거나 다름이 없다. 문제는 ‘봉인’되어 있다는 것. 이곳엔나의 우호적인 세력이 없으니 지금 잘못 엮였다간 골치만 아파질 수도 있었다.

-이 자식아, 내가 보이냐고!

-크투가님. 그는 모든 정령을 볼 수 있습니다.

-아냐. 정령을 보는 역대 태양왕이 없었는 줄 아냐? 그래도 나는 못 보더라. 내 ‘격’을 따라온 놈이 없기 때문이겠지. 모질이 놈들 같으니.

실망 가득한 어조로 혀를 찬 크투가가 내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다. 나는 그쪽으로전혀 시선을 주지 않았고, 한참을 생각한 뒤에야 고개를 끄덕였다.

“보인다.”

-늦잖아! 보이면 보인다고 빨리 말하라고!

위험부담은 있지만 ‘신의 자취’의 봉인을 풀고 더욱 인정받는 계기가 될지도 모른다. 내가 언제 정해진 길을 걸은 적이 있던가. 일단 부딪히고 보는 게 어느덧 일상이됐다.

“전형적인 아저씨의 모습이로군.”

-이 모습은 내가 인정한 남자의 것이다. 그나저나 내 모습이 정확하게 보인단 말이지? 그렇다면 어서 봉인의 해제를······.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네가 계약한 프투가에게 힘을 준 게 나다. 내 봉인을 해제하면 너에게도 마땅히 엄청난 힘을 주마. 어떠냐, 끌리지?

“전혀.”

엄청난 힘?

그야 최상급 정령의 힘이라면 구미가 당길 만 하다.

하지만 그 하나의 힘으로 지금의 상황을 타파하기엔 많이 부족했다.

아니, 설령 그 힘을 준다고 하더라도 거의 필요가 없었다. 최상의 정령의 힘조차도 지금 우리엘 디아블로의 무력을 뛰어넘진 못하는 탓이다.

크투가가 이맛살을 구겼다.

-내 제안을 거절하다니. 욕심이 많구나. 좋다. 그럼 ‘진화의 정수’를 주마. 네놈의부하들을 더욱 강하게 만들어줄 수 있지. 사천왕인지 뭔지하는 놈들도 가볍게 꿀릴 수 있을 것이다.

“필요 없다.”

진화의 정수. 그게 뭔지 대충은 이해가 간다. 하지만 나 역시도 ‘진화의 힘’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진화의 힘이 만능이 아니라는 것도 안다. 크투가는 진화를 하는데 시간이 걸리고, 노력도 필요하단 말을 교묘하게 숨긴 것이다.

크투가의 표정이 더욱 어려워졌다.

-네가 몰라서 그러는데 내가 가진 ‘진화의 정수’는 신들도 매우 탐냈던 것이다. 이건 정말 엄청난 특혜라고. 거절하면 네놈은 바보 천치다.

나는 어깨를 으쓱해보일 따름이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프투가가 조심스럽게 크투가에게 다가가 말했다.

-크투가님. 실은······ 그 역시 ‘진화의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뭐? 마족이? 그럴 리가 없는데?

-여러 차례 제 눈으로 확인했습니다.

-정말? 거짓말 아니고? 허풍 조금 섞어서 그러는 거 아니고?

-아닙니다.

-이런 젠장. 어떻게 마족이 멸망한 애시르 신족 중에서도 소수만 가지고 있는 권능을 갖고 있는 거야?

진화의 힘이라는 게 본래는 애시르 신족의 고유 권능 같은 것이었나 보다.

그런데, 잠깐.

멸망한 애시르 신족이라니?

‘애시르 신족이라면 북유럽의 신들일 텐데.’

오딘이나 토르와 같은 신들이 바로 애시르 신족이었다.

요르문간드와도 인연이 깊은 자들.

하지만 요르문간드는 오딘에게 맹렬한 증오를 품고 있었다. 그녀가 살아있었으니, 오딘이나 토르도 있을 줄 알았건만.

“멸망했다는 게 무슨 말이지?”

-뭐야, 라그나로크도 모르냐? 라그나로크는 모든 차원에서 공통 되어 존재하고 있을 텐데. 쯧쯧, 공부를 덜했구만.

“요르문간드와 에기르가 건재했다. 그런데 신들이 멸망했다니, 믿기지 않는군.”

-다 가짜지. 하지만 걱정마라. 이 몸은 진짜니까. 으하하!

“가짜······?”

-위그드라실에서 만들어진 모조품들이다. 이제 태양왕이 됐으니 너도 ‘그곳’에 들어가면 진실을 알게 되겠지.

모조품이란 단어가 크투가의 입을 타고 흘러나왔다.

이어, 크투가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하지만 너는 유일하게 이 몸을 보았으니, 특별히 ‘그곳’에도 없을 진실을 알려주마. 아직 살아있는 ‘신’이 하나 있다. 그는 본래 인간이었으나 죽은 뒤 신의 반열에 올랐지. 혹, 헤라클레스라고 아느냐?

“안다.”

헤라클레스. 그리스 신화에서 최고의 영웅으로 묘사되는 남자다. 그 이름이 크투가의 입에서 튀어나올 줄은 전혀 예상조차 하지 못했다.

오딘과 토르가 북유럽 신화라면, 헤라클레스는 남유럽에서 파생된 신화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균열이 생기고 모든 신화나 전설들이 세계와 혼합되었다는 건 이해했지만 그 모두를 크투가가 알고 있을 줄이야.

-나는 그를 한 번 본 적이 있지. 위그드라실의 위조품들이 나오기 전의 일이니, 그가 진짜 신성을 가진 신일 것이라고 추측만 하고 있는 거지만. 어쨌든 지금 그의 신성은 ‘위대한 별’의 모태가 되었다.

“위대한 별은 루시퍼가 아니었나?”

-그것도 루시퍼를 본 따 만든 가짜지. 그 태를 유지하고 있는 건 결국 헤라클레스의 신성이야. 그 속에서 그는 살아있다. 크흐흐, 이걸 아는 건 극소수밖에 없어. 넌 운이 좋은 줄 알아라.

“별 영양가 없는 소리로군.”

진짜든, 가짜든, 결국 모든 건 ‘위대한 별’로 귀결된다. 나는 그것을 부수고 정상적인 현상을 되찾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크투가는 고개를 저었다.

-전 차원 어딘가에, 그의 생전 육체가 있을 것이다. 몇몇 존재들이 그의 육체를 찾아 나섰지만 결국 못 찾았거든. 찾을 수만 있다면 엄청난 일이 벌어질 거다.

“네가 탐을 낼 정도로 엄청난 일이 가능한 건가?”

크투가. 모든 불의 정점인 그가 탐욕적인 목소리를 냈다. 그러니 그 ‘엄청난 일’이라는 걸 한 번쯤은 들어도 나쁘지 않을 듯싶었다.

-암. 그렇고말고. 그 육체에 걸맞은 영혼을 넣기만 해도 그 즉시 반신 급의 힘을 얻는 것이다. 내가 만났을 당시의 그는 이미 육체를 벗어던진 상태였지만, 몇 개의 영혼을 데리고 있었지. 분명히 하나는 현장(玄?)이라 불렀던 것 같은데······.

“······.”

잠시 할 말을 잃었다.

현장? 내가 아는 그 현장이 맞나?

태을무극심법에서 내게 가르침을 내려주던 목소리의 정체가 현장, 삼장법사라 불리는 존재였다.

그리고 그가 깃든 육체는 천마라 불렸다.

나는 천마의 육체가 어디에 있는지 안다. 나찰산 100층, 현계에 있었다.

그의 육체를 본 순간 ‘완벽하다’는 인상을 받긴 했다. 이보다 더 완벽한 신체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영혼을 넣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들어가는 순간 산산조각이 나겠지.’

그만큼 뛰어난 육체다. 맞는 영혼을 구하는 것조차 힘들 정도로.

“그 정도로 뛰어나다면 웬만한 영혼은 버티지 못하겠군.”

-뭐, 그건 그렇지.

“네가 들어간다면 어떨까?”

-나 말이냐? 이 몸이라면 당연히 초특급이다. 아무리 대단하다 하더라도 움직일 수 있지.

역시. 왜 뜬금없이 그 말을 꺼내나 했더니, 욕심을 내고 있었던 모양이다.

정말로 가능하다면, 최상급 정령 몇 마리로도 해낼 수 없는 힘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럼 봉인을 풀어주고 헤라클레스의 신체를 준다면, 나를 따를 수도 있겠군.”

-크하하! 그게 가능하면 무엇이든 못하랴. 하지만 불가능하다. 아주 깊은 곳에 봉인이라도 해둔 모양이니까. 이곳 심연엔 없어.

“계약을 하지. 그의 신체를 가져오면 군 말없이 나를 따르기로.”

-당장 봉인을 해제해준다는 전제는 당연히 붙겠지?

“그래.”

-푸하하하! 이거 간만에 재밌는 놈이 나타났군. 오냐, 가져만 와라. 내가 네놈 똥구멍도 핥아줄 수 있다.

정말 크투가가 맞는 건가?

어째서 아저씨의 모습이 이토록 연상이 되는 건지.

“······ 필요 없다.”

-혹여나 말을 바꾸면 안 되니 완전한 계약을 해야겠군. 어디보자. ‘영혼계약’을 맺는 게 좋겠어. 어기면 소멸된다. 그런 조건을 붙이면 무조건 지켜야 되지.

크투가는 승리자의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는 절대로 내가 신체를 구하지 못할 거라 여기는 듯싶었다.

스스로 노예가 되는 계약을 걸고 있다는 것조차 모르고서.

* * * * *

신의 자취를 찾는 시련을 완료했다. 그의 자취, 크투가에게서 나오는 ‘불’을 붙여다가 교단에 보이자 교주 코로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신의 불꽃’이 맞군요. 훌륭합니다.”

그의 주변엔 몇몇 군단장들도 있었다. 그중 제1 군단장이 즉각 목소리를 높였다.

“그냥 불을 붙여온 게 아닌가? 어떻게 그게 ‘신의 자취’인지 알 수 있는 거지?”

“신의 불꽃은 한 번 붙여두면 꺼지지 않습니다. 이 작은 나뭇가지에 계속해서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게 증거입니다.”

교주는 나름 객관적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아무런 조언도 해주지 않았지만, 결과물을 보이자 그래도 수긍하고 있는 것이다. 1군단장과는 다르게 말이다.

“다음 시련은 ‘신조 람’의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가장 쉬운 시련이 되겠군.”

“그 뒤에 마족들 앞에서 연설을 해야 합니다. 그들의 마음을 움직여야 진정한 ‘태양왕’으로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연설. 연설이라.

마족들의 마음에 맞는 연설을 할 자신은 없었지만, 어차피 모든 시련은 만족한 뒤다. 게다가 마족들도 나에 대한 기대가 없을 거고. 그냥 으레 겪는 관례일 것이었다.

그보다 중요한 건······ 군단장들.

배신자를 가려내고, 내 편이 될 자들을 골라야 한다.

‘요르문간드의 상태도 확인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갑자기 계약이 끊겼다.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지만, 운명의 선이 끊기며 위치를 특정할 수도 없어진데다가, 무엇보다 여력이 없었다.

당장은 태양왕이 되는데 주력해야 했다. 그 뒤에, 그녀를 찾자. 요르문간드도 내가 도중에 일을 그만두는 걸 바라진 않을 터였다.

“역대 태양왕들의 연설문을 볼 수 있나?”

“예. 준비해드리겠습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대충 보고 대충 비슷하게 하면 되겠지.

최악이었다. 연설문들 모두가 형편없었다.

‘이건 뭐 따르라, 그리하면 보일지니가 전부네.’

모조리 부수고, 파괴하며, 죽이라는 말이 전부였다. 역대 태양왕의 연설문들 대부분이 그랬다. 어쩌면 초대부터 이어진 관례가 이런 거였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조금 고쳐야겠군.’

나는 여러 가지 연설문들을 떠올려보았다.

인류가 존폐위기에 직면했을 때. 모두를 하나로 모을 필요가 있었을 그때.

수많은 위인들이 나타나 연설로 사람들을 끌어 모았다.

그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인류여, 일어나라.’였는데, 언뜻 히틀러의 연설문과 비슷해서 논란이 많았다.

하지만 이들은 마족. 오히려 이쪽이 어울릴 지도 모르겠다.

‘가장 중요한 건 퍼포먼스지.’

대충하려 했지만, 조금씩 진지하게 임하기 시작했다.

백색으로 인해 첫인상은 별로였지만 연설에서 조금은 만회할 수 있을 수도 있었다.

그러니 이왕지사 이렇게 된 거 보다 화려하게, 보다 진지하게, 그들을 사로잡을 열연을 펼치겠노라고 다짐한 것이다.

< 43. 크투가(2) > 끝

ⓒ 온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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