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신사냥꾼-184화 (185/251)

< 42. 신들의 황혼(4) >

수많은 미래. 수많은 절망.

그중 하나를 보았다.

미래선택이란 ‘가능성’의 하나를 아예 바꿔버리는 것이었다.

나는 가능성을 바꿨다. 그 가능성이란 바로.

‘내가 태양왕이 될 가능성.’

본래라면 불가능했을 것이나, 나는 선택했다.

곧이어······.

푸욱!

태양왕의 심장이 나의 검이 꿰뚫렸다.

모든 공간이 걷히고, 다시금 ‘현재’로 돌아와, 나는 모두에게 천명했다.

나, 우리엘 디아블로가 새계를 다시 건설할 진정한 왕임을!

* * * * *

주변을 둘러봤다.

요르문간드의 모습은 온데간데 보이지 않았다.

영겁의 공간 속에서 그녀는 내게 도움을 줬으나, 그녀의 본체는 아직 이곳에 당도하지 못한 것이다.

“어, 어떻게 네놈이······.”

태양왕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그의 불멸이 꺼졌다. 그가 내 손에 죽었다. 니드호그가 아닌, 온전한 나의 손에 의해.

“허나 날 죽여도 변하는 건 없다. 고작 가능성의 하나. 네놈 앞에 열린 길은 무한한 불가능이 기다리는 지옥일 터······!”

스르르륵.

그는 재가 되지 않았다. 숨을 거뒀으나, 니드호그가 불멸을 거둔 게 아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척이나 컸다.

비로소 우리엘 디아블로는 불멸자를 죽일 수 있는 자가 된 것이다.

모든 사천왕들의 눈이 내게 닿았다.

끼아아아악!

신조 람이 내 주변을 돌았다.

“나는 주장하겠다. 왕위를 찬탈했노라고.”

태양왕의 자리, 내가 먹어주마.

* * * * *

요르문간드는 나의 ‘운명’에 간섭했고, 그로 인해 나는 태양왕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미래선택. 서로의 권능을 잡아먹고자 벌인 전쟁 아닌 전쟁 말이다.

나는 그의 권능을 포식했고, 동시에 수많은 미래의 가능성을 엿보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엘처럼 100년간 잠들어 있으며 모든 가능성을 점칠 시간 따윈 없었다. 나는 당장 이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 법’을 강구해야 했고, 그래서 단 한 가지를바꿨다.

우리엘은 미래선택으로 말미암아 오한성을 찾아내고, 내가 그의 몸에 깃들게 만들었다. 그게 가능하다면 반대도 가능할 것이다.

‘태양왕의 육체와 내 육체를 동기화시킨다.’

파트리오의 자폭을 막아서며 내 육체는 엉망진창이 됐다. 태양왕도 나와 같은 상태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왜인지 우리엘의 경우처럼 태양왕에게 ‘침입’하는 건 안 됐지만, ‘미래선택’으로 나는 그와 나의 운명을 엮어버렸다.

태양왕의 상태가 순식간에 일변했다.

“미래선택을······! 쿨럭!”

그가 피를 토해냈다.

동시에 깨달았다.

불멸이 사라졌노라고.

애당초 우리엘도 불멸 따윈 갖고 있지 않다. 그런 우리엘과 동화되었으니, 그 역시 불멸을 가지고 있을 리 없다.

“미래선택으로 ‘운명의 선’을 엮어버린 것이냐? 어리석긴! 그래봤자······ 나를 죽이면 너 또한 죽는 게 아니냐?”

“너에게 말 안 해준 게 있었지.”

그의 말이 맞다. 태양왕을 죽이면 나도 죽는다.

하지만 그가 모르는 사실이 있었다.

“나는 하나이며 둘이다.”

나는 두 개의 운명을 지니고 있었다. 태양왕에 비해 질은 부족할지 몰라도 양은 두 배가 많았다. 타격이 없진 않겠으나 죽진 않는다.

이게 내가 선택한 최후의 가능성.

“설마!”

태양왕의 눈이 커졌다.

“넌 우리엘 디아블로가 아니구나······!”

눈치 챈 것이다. 내가 그에게 보냈던 전령, 오한성이 바로 나임을 말이다.

그는 굳이 우리엘과 직접대면을 고집할 필요가 없었다. 이미 오한성을 만났으니. 그때 그가 나를 포식하려 들었다면, 나는 손쓸 틈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몰랐다. 알아챈 게 너무 늦었다.

그래서 죽는다.

“이제 그만 끝내도록 하지.”

만신창이가 된 나와 태양왕.

누가 더 질긴 생명력을 갖고 있는지, 승부였다.

* * * * *

둠. 그가 심연으로 가득 찬 눈빛을 태양왕과 우리엘 디아블로에게 보냈다.

태양왕이 우리엘 디아블로의 검을 맞고 쓰러진 순간, 그의 불멸이 사라졌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니드호그라는 초강수를 써가면서까지 사천왕을 죽이려고 했다. 그런데 우리엘 디아블로, 놈이 홀로 그 불멸을 꺼트렸다.

어떻게?

빠드득!

‘추의 중심이 기울었다.’

태양왕을 죽이는 건 자신이 되어야 했다. 그래야만 모든 게 순리대로 흘러가게 되어있었다. 처음부터 계획을 짰을 때, 우리엘 디아블로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런데. 그럴진대!

‘무슨 마법을 부린 것이냐. 아니면 그것이 너의 권능인가?’

불멸을 꺼트리는 게 우리엘 디아블로의 권능이라고?

그렇다면 사천왕의 천적이다. 사천왕은 모두 겁이 많아서, 데몬로드들이 불멸을 없앨 방법을 안 순간 처리해버리려고 했을 정도다.

“나는 주장하겠다. 왕위를 찬탈했노라고.”

우리엘 디아블로가 말했다.

왕위의 찬탈. 태양왕의 자리를 넘보겠다는 뜻이다.

하물며, 정당성도 있었다.

끼아아아악!

신조 람!

신조가 울부짖으며 더욱 활활 타올랐다. 왕의 탄생을 신조 람이 허락한 것이다. 태양왕을 상징하는 가장 오래 된 새가.

하물며 현재 즉위한 태양왕은 모두를 죽이고 그 자리를 찬탈했다. 마찬가지로, 우리엘 디아블로 역시 그를 죽이며 왕위의 찬탈을 천명했다.

“우리엘 디아블로······!”

계획을 망쳤다. 그림이, 찢어졌다.

처음부터 우리엘 따윈 안중에도 없었다. 최약체의 데몬로드. 세력조차 일구지 못한, 홀로 존재하는 중립의 데몬로드가 무얼 하겠는가?

멸제의 카르페디엠을 죽이고, 간혹 이상한 결과들을 귀로 듣긴 했으나, 그래봤자한계가 있다고 여겼다.

그런데 지금, 그는 한계를 깼다.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깨고 있었을지도.

‘인정한다. 내가 너를 너무 얕봤다.’

하지만 둠은 자신의 실수를 인정했다. 모든 가능성과 변수를 넣지 않은 자신의 잘못이었다. 그리고 잘못을 했다면, 바로잡으면 그만이다.

그에게는 그럴 힘과 영향력이 있었다.

“우리엘 디아블로가 태양왕의 자리에 정상적으로 올라서게 할 수는 없다. 라이라, 라이라 디아블로를 잡아와라. 또한 안달톤 브뤼시엘, 그를 죽이도록 하지.”

이미 안달톤 브뤼시엘이 사자왕의 자리에 올라버렸다. 그 또한 변수이긴 했으나, 어차피 이번 전쟁만 승리하면 그만이라고 여기고 신경을 껐다.

애당초 당장 안달톤은 혼자였으니까.

하지만 데몬로드 중 둘이나 사천왕이 되어버리면 문제가 많다. 파벌구도에 지대한 영향이 생길 것이 자명했다.

그 전에 막아야 한다. 최소한 둘 중 하나라도 죽이거나 방해해야 한다.

“판을 깨겠다는 말입니까?”

산하의 데몬로드 하나가 말했다. 일일이 설명을 해줘야 이해하는 어리석은 놈. 둠은 작게 웃어보였다.

“우리가 언제부터 판을 지키며 전쟁을 해왔지? 이곳은 심연이다.”

잠깐 그런 ‘척’을 해줬을 뿐이다.

여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젠······ 천하의 둠조차도 여유가 없다.

* * * * *

이제부터가 진짜다. 살얼음판의 시작이었다.

내가 태양왕의 자리에 즉위하며 생길 변수들. 그것을 최대한 읽어내야 한다.

그리고 내 편이 되어줄 자와 적이 될 자들을 보다 확실하게 나눠야 했다.

“제 1군단장과 5군단장을 제외하면 전부 동의하는 모양이군.”

태양왕 산하의 군단은 총 7개다. 7개의 군단을 맡은 군단장 중 무려 다섯 명이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했다. 나머지 둘, 1군단과 5군단을 제외하면 말이다.

‘대놓고 반대하는 쪽이 오히려 신용이 가지.’

그래서 나는 이 둘은 제외시켰다. 반대파, 둠과 붙어 배후를 조종하는 자들 중에 저 둘은 아닐 거라고.

반대파의 정체와 규모를 빠르게 파악해야 한다.

그래야만 내가, 라이라가 안전하다.

“나는 태양왕을 죽였으나 그의 피를 이었으며, 신조 람의 인증을 받았다. 왕의 적격자로 더 이상 가는 조건은 없을 것이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한 마디, 한 마디가 중요하다.

새로이 즉위한 왕. 지금이 가장 강한 ‘말의 힘’을 가지고 있을 때였으므로.

“또한 나의 휘하에 있는 라이라 디아블로는 전대 태양왕의 피를 이었다. 나는 라이라를 나의 정통한 대리자로 임명할 것이다.”

대리자. 나와 같은 힘을 지닌 존재로 인정한 것이다. 공식선상에서 발언한 이야기니 이제 라이라는 나와, 태양왕과 비슷한 대우로 취급된다.

라이라를 공격한다는 건 태양왕을 공격한 것과 같다.

“왕의 대리자라니?”

“힘을 반으로 나누겠다?”

“미쳤군.”

모두가 경악했다. 그럴 만도 했다. 심연은 힘의 논리로 돌아가는 곳이다. 아무리 피를 이었대도 서로의 등을 찌르는 일은 파다했다. 당장 태양왕의 경우만 봐도 그렇다.

그런데 힘을 양분한다?

다시금 ‘반란’이 대두돼도 할 말이 없다.

하지만 나는 라이라를 믿는다. 그녀가 결코 배신할 리 없었다. 이곳 심연에서 피어난 유일한 꽃이 그녀였으니.

아직 끝이 아니다.

“그리고.”

모두의 주목을 모았다.

이제 결정타를 날릴 때였다.

“안달톤 브뤼시엘, 새롭게 사자왕으로 등극한 그는 나의 맹우다. 나는 그와의 연대를 제안한다.”

힘없는 자들끼리 뭉쳐야지 살 수 있다.

게다가······.

나는 저 너머에 있는, 둠을 쳐다봤다.

둠. 네가 뭘 할지는 뻔하다.

* * * * *

부르르르르!

수가 막혔다.

시작하기도 전에.

주먹을 쥔 둠의 전신이 파르르 떨렸다.

라이라를 납치해, 금단의 술로 세뇌를 시켜 태양왕을, 우리엘 디아블로를 저격하려고 했다.

동시에 힘없는 안달톤 브뤼시엘을 죽이며 구도를 새로 만들려고 하였다.

안달톤. 놈이 이 전쟁에서 벗어나 돌아가면 힘을 얻는다. 물론 그만한 시련을 겪어야겠지만 귀찮아질 여지가 있었다.

그런데······.

‘나보다 몇 수 앞을 내다본다는 것이냐?’

마치 자신의 생각을 읽고 있는 것 같지 않은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온전히 둠, 그만을 의식하고 있는 것 같았다.

왜?

동시에, 만에 하나지만.

‘내 정체를 알고 있다······.’

그럴 가능성도 이제 배제할 수 없었다.

지금은 둠의 껍질을 뒤집어썼으나, 그는 사자왕이었다. 힘이 약해진 둠을 잡아먹고 그의 껍데기를 뒤집어썼다.

그 사실은 온전히 자신만 알고 있었다.

누구도 알 리가 없다. 알 수 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우리엘 디아블로, 그는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어떻게?

‘안달톤 브뤼시엘과 연대를 제안하며 판이 넘어갔다. 다른 사천왕들도 이제 태양왕을 건들기 껄끄러울 것이다.’

애당초 데몬로드 진영에 있던 우리엘이 사천왕이 됐다. 사자왕의 경우와는 완전히 달랐다. 우리엘은 혼자의 힘으로 그 자리에 즉위한 것이다.

게다가 불멸을 꺼트렸다. 그들로썬 우리엘 디아블로가 꺼림칙한 존재 그 자체였다.

라이라 디아블로도, 안달톤 브뤼시엘도 이젠 손 댈 수가 없다.

빠드득!

‘전쟁을······.’

오랜 시간 모든 걸 준비하며 오로지 이번 전쟁에 매진하고자 했다.

하지만 모든 수가 막혔다.

발악하면 입지만 좁아진다. 뒤를 기약할 수가 없다.

‘전쟁을······ 끝내야겠군.’

하지만 아직, 아직 끝난 게 아니다.

둠과 반대파는 아직도 힘을 지니고 있었다. 우리엘 디아블로, 놈이 방심했을 때 그 뒤를 치기엔 충분하다.

그러려면 다음 기회를 노려야 할 듯싶었다.

마침 니드호그도 배가 불렀는지 조금씩 사라지고 있지 않나.

‘니드호그의 배에 저런 상처가 있었던가?’

그러다가 한 부분에 시선이 쏠렸다. 니드호그. 저주의 덩어리인 니드호그의 배에 작은 구멍이 나 있었다.

이질적이다. 작은 구멍 속에서 쉴 새 없이 저주가 주변에 흩뿌려지고 있었다. 배가 불러서가 아니라, 그 상처가 신경쓰여 모습을 감추는 듯한 인상이다.

이제는 하나부터 열까지 그의 손을 벗어나버렸다.

‘오냐. 이번에는 내가 졌다. 하지만, 이걸로 끝났다고 생각하지 마라.’

방심해라. 승리를 만끽해라.

모든 게 끝났을 때, 오롯이 서 있는 자는 나일 테니!

* * * * *

태양왕이 교체되고, 열다섯의 데몬로드가 죽었다.

본래 72명이었어야 할 데몬로드가 이제는 56명뿐이 남지 않은 상황.

파벌구도에 지각변동이 생겼다.

게다가 지옥왕과 천왕은 ‘불가침’을 선언했다. 자신들을 자극하지 않으면 더 이상그들의 싸움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뜻을 내비친 것이다.

이는 ‘물주’가 사라졌음을 뜻했다.

본래 데몬로드들에게 괴물을 퍼주고 힘을 키워준 게 그들이었으니.

‘경매’의 중요성이 더욱 부각된 순간이었다.

아직 둘이 남긴 했지만, 태양왕과 사자왕은 이제 막 즉위한 풋내기다. 그 둘이 온전하게 자신의 힘을 행사할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시간이 걸리고, 그 과정 중에 죽을 수도 있는 노릇.

-전쟁이 끝났지만, ‘데몬로드만의 전쟁’이 시작됐다.

모두의 뇌리에 떠오른 말이다.

최후를 향하는 전쟁의 서막이 열렸노라고.

이것만은 둠의 말대로 되었다.

< 42. 신들의 황혼(4) > 끝

ⓒ 온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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