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 왕의 자격(完) >
흡성대법. 상대의 마력과 생명력을 갈취하는 극악무도한 술법이다. 그렇기에 익힌 자가 매우 드물며, 공공연연하게 금지된 이 술법은 ‘검은 야차의 인’과 일면 닮아있었다.
‘대아귀의 습격, 둠의 출현으로 나찰각이 망가졌지만 이 책만은 남아있었지.’
본래 대라선이 되어야만 보는 게 허락되는 서고가 따로 있었다. 하지만 아귀와 둠으로 인해 그 서고조차도 무너진 상태였고, 그나마 멀쩡한 서책만을 따로 챙겨 던전으로 옮겼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흡성대법이었다.
내가 흡성대법을 오룡과 나 사이의 ‘열쇠’라고 보는 이유는 간단했다.
‘투쟁.’
서로가 서로의 명줄을 걸고 줄다리기를 하는 것. 극한의 상황에 몰리면 숨겨둔 재주를 하나, 둘 풀어내기 마련이다. 천천히 시간을 들일 생각이었지만, 시간이 없었다.
‘언제 다시 전쟁이 재개될지 모른다.’
잡은 실마리를 조금이라도 풀어내야 한다. 그래서 강경책이다.
월천은 말했다. 오룡이 태어나기 위해 들어간 재료가 바로 ‘용’이라고. 그것도 수십 마리의, 지금의 내가 생각해도 상상이 안 가는 규모였다.
그것을 깨운다.
하지만 한 명도 깨우지 못한다면 모두 죽을 것이다.
그건 내게도 꽤 큰 피해였다. 지금의 나는 흡성대법을 사용한다 하더라도 능력치의 상승이 없다. 단지, 저들을 각성시키기 위한 촉매일 뿐이다.
“시작하지.”
쿠아아아앙!
마력을 흘려 넣자 진이 요동쳤다. 이곳은 전장의 한복판. 데몬로드인 나는 이곳, ‘저주받은 신전’을 빠져나갈 수 없었다. 니드호그 때문이다.
진법의 발동으로 몇몇 데몬로드들이 신경을 쓸 수도 있다. 최악의 경우 둠이 오룡들을 눈치 채고 나를 의심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해야 한다. 빠르게, 적어도 하나의 힘은 깨워야 했다.
‘오룡이 각성하면 나 역시 강해진다.’
정확히는 월천, 검이 숨기고 있는 비밀이 개화할 것이다.
내겐 그게 필요했다. 월천이 죽어가면서까지 나에게 남긴 선물을 뜯을 때였다.
오룡에겐 미안하지만 그들에게 거부권은 없었다. 어차피 그들이 각성하지 않으면야차의 미래는 불 보듯 뻔하다.
“죽고 싶지 않다면 발악해라. 나는 결코 봐주지 않을 테니.”
진법의 도중 입을 여는 건 금기시 되어있다. 마력이 꼬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마력의 조정에 관해선 스페셜리스트였다.
오히려 오룡들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집중하고 있었다.
그들도 아는 것이다. 이게 내가 내린 시련이자 기회라는 걸.
쿵! 쿠릉! 쿠르르릉!
생명력과 생명력, 마력과 마력이 충돌한다.
다섯 개의 힘이 나 하나를 감당하지 못하고 있었다. 진법에는 주체가 없다. 고로, 강한 자가 이기는 단순한 구조다.
그리고 오룡의 힘이 나에게 서서히 끌어당겨지고 있었다.
“쿨럭!”
가장 먼저 피를 토한 건 연혼제다. 검룡 연혼제. 은후의 대장간에서 녀석과는 한 번 부딪혀본 적이 있었다. 인내심이 부족해서인지 진법의 영향을 크게 받은 모양이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남은 건 넷.’
적룡 구화린, 암룡 유설, 무룡 무백, 잠룡 주가람.
그들은 심호흡을 하며 마력을 자신의 몸에 가둬두려고 안간 힘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모든 건 비우는 것에서 시작한다.
마력의 밀도를 한 단계 높이자.
“끄으으으으······!”
무룡 무백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사시나무처럼 몸을 떨어대며 모든 모공이란 모공에서 피를 쏟아대기 시작했다.
마력이 약해서? 아니다. 오히려 이중 제일 마력이 높았다.
마력의 높고 낮음은 상관이 없었다.
삶에 대한 집념. 그리고 투쟁심이 있어야 한다.
남은 건 셋. 적어도 떨어진 둘보단 가능성이 있으리라.
‘많은 걸 바라진 않는다. 하나만, 단 하나만 각성하면 된다.’
하지만 남은 셋의 얼굴도 썩 좋지는 않았다. 당장 죽어도 이상할 게 없을 정도로 핏기가 없었다. 누군가가 툭 건드리기만 해도 풀썩 쓰러질 것이다.
“못해······ 구웩! 먹겠······ 네!”
그러던 도중 잠룡 주가람이 포기를 선언했다. 어느새 꺼낸 단검으로 허벅지를 찔러서 깨어난 후 진법에서 벗어난 것이다.
과연. 판단력은 좋았다. 이대로 계속하면 정말로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주가람은 아예 진법에서 벗어났고, 그 즉시 쓰러졌다.
삶에 대한 집착은 인정할 만 했다.
하지만 아쉬웠다. 결국 주가람에겐 투쟁심이 부족했다.
남은 건 둘.
‘내가 잘못 생각한 건가?’
구화린과 유설. 여자 야차만 남았다.
어쩌면 둘 다 실패할 수도 있다. 아니, 실패할 확률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다섯이 받던 압박을 둘이서만 받고 있는 셈이다.
‘실패인가······.’
내심 혀를 찼다.
실마리를 얻고, 바로 실행에 옮겼지만 아직 시기상조인 듯싶었다.
어쩌면 내 욕심일지도 모른다. 이들은 준비가 안 됐다.
나는 진법을 해제시키려고 했다. 더해봤자 개죽음만 늘어날 뿐일 것 같아서.
빠드득!
그 순간, 구화린과 유설이 동시에 이를 악물었다.
마력의 움직임이 변했다.
나를 노리면서 동시에, 둘은 싸우고 있었다.
‘대단한 욕심이군.’
어이가 없었다. 나 하나만 해도 죽을 게 명확한데, 그 사이 구화린과 유설이 맞부딪히기 시작한 것이다.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환하게 빛날 수 있었다.
나는 잠시만 이 상황을 지켜보고자 하였다.
* * * * *
“오룡치곤 좀 약하지?”
“집안도 대단한 게 없잖아. 구화랑 대주 후광을 업은 건지······ 쯧쯧.”
구화린. 그녀는 만년 꼴등이었다.
오룡들 중에서도 언제나 말석. 매번 그녀가 비교당하는 건 같은 오룡이 아니라 친오빠인 구화랑이었다.
그게 너무 싫었다. 그래서 구화랑을 멀리했고, 철저하게 마음을 닫았다.
하지만 그날. 구화랑이 죽었다고 생각한 그날.
구화린은 자신의 나약함에 신물이 났다. 결국 자기 스스로의 자존감을 지키고자 모두를 멀리한 것이다. 정작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할 줄 모르면서.
‘더 이상 무력하고 싶지 않아.’
오한성도 처음엔, 별 거 아니라고 생각했다. 자신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처지. 오히려 오한성이야말로 ‘밑바닥’이 아니었던가.
검은 야차라고 멸시받으며, 어쩌면 자기위안을 위해 그를 끌어들이자고 생각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의 오한성은 무려 대라선이다. 그는 시련을 깨부수고 ‘둠’마저 몰아내며 자신의 가치를 입증했다.
‘나도 그처럼 빛나고 싶어.’
구화랑이 살아있다. 야차들의 결속은 더욱 단단해졌다. 삶의 터전을 부순 둠에게 복수하려면 이 정도로 만족해선 안 된다.
최고가 되어야 했다. 다른 오룡들보다 강해지고 싶다는 생각이 더 간절해졌다. 단순한 자기방어기제가 아닌, ‘꿈’으로 완성된 것이다.
그리고 이전부터 유설과는 경쟁구도에 있었다.
‘유설. 너는 그렇게 생각 안 하겠지만 말이야.’
유설. 매번 흐리멍텅한 표정을 짓고 있는 미인. 그녀는 존재만으로도 시선을 모으는 재주가 있었다. 강하고, 도도하며, 아름답기 때문이겠지. 자기 자신에 대한 수련도 열심히 임했다.
귀여운 걸 한없이 좋아하지만, 그런 건 유설이란 야차를 표현하는데 일말의 티도 되지 않았다.
그래서 구화린은 언제나 유설을 이기려고 했다.
한 번도 이긴 적이 없지만.
‘이번에야말로 이기겠어.’
뒤에서 만족하는 자는 결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구화린은 마력을 더욱 끌어올렸다. 진원진기. 생명의 원천이라 불리는 힘마저도 모두 끌어냈다. 손상되면 절대로 수복할 수 없다고 전해지는 힘이지만, 데몬로드 우리엘 디아블로는 자신들에게 ‘한계’를 돌파하길 바라고 있었다.
‘아······!’
그리고 지금, 자신의 전쟁에 유설이 참가의사를 밝혔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도 지길 싫어하고 있었다. 본래 유설은 승패에 그다지 연연하는 성격이 아니지만 이번만큼은 구화린이 자신을 넘어서길 바라지 않는 듯싶었다.
좋다. 이래야 싸울 맛이 나지.
생명을 걸고 패를 나누는 도박이다.
‘나찰이 될 거야. 화천의 자리에 올라서, 오명을 씻겠어.’
구화린에겐 목표가 있었다.
지금은 공석이 되어버린 십이나찰의 자리 중, 화천의 자리를 노린다.
화천. 둠을 끌어들인 배신자. 나찰의 이름에 먹을 칠했다. 그 먹을, 자신이 깨끗하게 씻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대라선에게 인정받는 나찰이 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쿨럭!”
무리는 화를 부른다.
생명력은 유한하다. 결코 그 한계를 뛰어넘을 순 없다. 뛰어넘는다면, ‘초월’이라 부르기에 마땅하리라.
유설 역시 꽉 깨문 입술에서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둘 다 무리하고 있었다. 각자의 목표를 위해.
‘지고 싶지 않아.’
그래도 한다. 할 수 있다. 반드시 해내야 했다.
이 정도 시련도 넘지 못해선, 나찰이 될 수 없다.
그리고······.
화르르륵!
전신이 불탔다.
아프다. 아프다. 아프다!
불은 스스로를 좀먹었다. 태우고, 또 태웠다.
-백염신공(白炎神功)을 깨운 자, 아홉 번의 삶을 살리라.
금기의 무공이 깨어났다.
* * * * *
나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잠시 넋을 잃었다.
‘믿기지 않는군.’
하나가 아니다.
둘이다.
구화린과 유설이 함께 각성했다.
부르르르르!
그러자 월천의 검이 떨리기 시작했다.
곧 검신에 두 개의 문양이 더해졌다. 하늘을 뚫고 승천하는 두 마리의 용이었다.
그러자 월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금지 된 다섯 개의 무공이 모여 ‘천마신공’을 만든다.
-다섯 마리의 용이 모두 승천하면 온전한 ‘천마신공’의 주인이 되리라.
-천마신공은 진정한 왕의 자격, 모든 하늘을 아우를 수 있는 힘.
천마신공!
설마 천마와 관계 된 이름이 여기서 튀어나올 줄이야.
검은 계속해서 떨렸다. 공명. 구화린, 그리고 유설에게 공명하고 있는 것이다.
[월천의 강화(+2)가 완료되었습니다.]
[+1, 절대로 부서지지 않습니다.]
[+1, ‘체력+9’의 효과가 더해집니다.]
[+2, 신성조차 베어내는 절삭력이 추가됩니다.]
[+2, ‘힘+9’의 효과가 더해집니다.]
[월천을 쥐고 있을 때 체력과 마력의 회복속도가 현저히 올라갑니다.]
월천의 떨림이 멎었을 때, 구화린과 유설도 쓰러져 잠들었다.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성공했다.’
그것도 대성공이었다.
* * * * *
“······ 그가 우리의 말을 따르기로 한 게 확실하겠지?”
“선물을 잘 받았다고 했다.”
“파트리오, 하지만 우리엘 디아블로는 계속해서 승리해 나가고 있다.”
니드호그가 다시 움직이며 전쟁이 재개됐다.
그리고 우리엘 디아블로는 계속해서 승승장구하는 중이다.
도저히 ‘최약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강했다. 저 힘은, 적어도 상위 데몬로드 20% 안에는 들어갈 수 있는 크기였다.
자신들의 말을 알아들었다면 적당한 선에서 패배를 선언하고 ‘태양왕’에게 종속되어야 한다. 그렇게 태양왕을 안심시키는 게 우리엘의 역할이었다.
그런데 그는 계속해서 이기고 있었다.
“우리의 말을 잘못 이해한 건가?”
“그러기엔 라이라와 우리엘의 사이가 별로라고 하더군.”
“그게 다 연기라면?”
“불가. 라이라 디아블로도 생각이 있다면 우리를 따르는 게 득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을 것이다. 굳이 연기를 할 이유가 없지.”
“그럼 우리엘과 라이라의 사이가 우리의 계획대로 틀어졌다고 봐야 하는 건가?”
“다음 단계로 나아가자. 우리도 여유가 많진 않다. 태양왕이 낌새를 챈 것 같다.”
“파트리오. 본래라면 너의 역할은 우리엘 디아블로와 함께 자폭하는 것이었으나······ 그가 받아들였으니 네가 할 일은 하나다. 태양왕과 싸우고, 죽어라.”
파트리오는 자폭병기다. 태양왕을 죽이진 못하겠지만 큰 피해는 줄 수 있을 터.
하지만 파트리오의 눈빛 깊숙한 곳에 흔들림이 생겼다는 걸, 그들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 41. 왕의 자격(完)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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