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 왕의 자격(5) >
우리엘 디아블로. 문득 그가 떠올랐다. 그가 자신에게 해줬던 말들. 엘레나에 관한 건 알고 있었지만, 전대의 태양왕에 대해선 전혀 들은 바가 없었다.
하지만······.
‘나를 길러주신 건 우리엘이시다.’
누가 낳은 건 중요한 게 아니다. 라이라가 ‘기억’을 시작했을 때부터 그녀의 근처엔 우리엘이 있었다. 그녀가 담고, 말하고, 마주한 모든 것들이 우리엘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그분이야말로 세상의 중심이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전대의 태양왕’을 운운한들 라이라가 흔들릴 리 없잖은가. 설령 우리엘이 전대의 태양왕을 죽이는데 일조했더라도······.
라이라는 자신의 등 뒤에 솟은 하얀색의 날개를 쓰다듬었다.
반신 발키리, 엘레나.
그녀의 축복이 담겨있는 날개!
‘이 날개는 이토록 아름다우니.’
그리고 이 날개는 오로지 우리엘에 의해 발현 된 힘이었다.
따듯하다. 그래서 확신할 수 있다.
엘레나가 우리엘을 멀리했다면 결코 날개는 솟아나지 않았을 것이다.
빼앗았다고?
우리엘이 자신의 어머니인 엘레나를 전대의 태양왕에게서?
‘그분은 무언가를 쉽게 빼앗는 성격이 아니시거늘.’
빼앗아야 하는 것만 빼앗는다. 그의 행동 모든 것엔 이유가 있다. 오히려 사신의 출현으로 인해 라이라의 믿음은 더욱 견고해졌다.
동시에, 자랑스러웠다.
저들은 태양왕의 전복을 노리는 강자들.
감히 말하건대, 자신이 없다면 찾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자들이 우리엘과 라이라, 둘 간의 사이를 이간질하려 한다.
왜?
‘그분이 까다롭기 때문에.’
최약체의 데몬로드, 가장 늦게 시작한 그가 가장 빠르게 달리고 있었다.
우리엘이 그저 그런 상대였다면 그들이 이처럼 번거로운 수를 쓸 리가 없으니까.
라이라는 자긍심을 느꼈다. 동시에 책임감도 느꼈다.
그분은 달리다 못해 하늘을 나는 중이다. 하지만 라이라, 그녀 자신은?
발목을 잡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그의 새로운 모습을 볼 때마다 심각하게 고민하고 난처해하는 자신이 계속해서 내키지 않았다.
그러니······ 오히려 이번 건은 기회일 수도 있었다.
‘내가 그분의 날개가 되어드려야 한다.’
자기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갈 수 있는, 그런 날개가 되어드리고 싶었다.
* * * * *
엘레나. 그녀를 안은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선물. 그들이 선심 쓰듯 던져주고 간 것.
나 또한 감정이 복받쳐 올랐다.
‘어떻게 하고 싶느냐, 우리엘 디아블로여.’
나는 물었다. 엘레나에 관한 건 온전히 우리엘의 소관이다. 그가 살아생전 모든 걸 바쳤던 존재 중 하나가 바로 엘레나였으니 말이다.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몸이 가는 대로, 솔직한 우리엘의 ‘마음’을 투영하고자 했다.
그러자······.
화가 났다.
‘엘레나는 라이라를 낳고 죽었다. 그녀의 몸은 심연에서 버틸 수 없었지. 라이라를 낳을 때까지 버틴 것 자체가 기적이다. 기적이지만.’
애당초 엘레나가 심연으로 오지 않았다면 죽지 않았을 것이다.
‘엘레나를 심연으로 끌어들인 욕심쟁이들. 우리엘, 너는 그들을 죽이고 싶은 모양이구나.’
대화는 필요하지 않았다.
우리엘은 내가 되고자 했고, 나는 우리엘이 되고자 했다.
서로가 서로를 원했기에 지금의 ‘나’가 이곳에 있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엘의 마음 역시 알 수 있었다.
‘그들은 라이라 또한 이용하려 들 것이다.’
이용당하고, 죽는다.
우리엘이 가장 아끼는 존재들이 허무하게 스러져간다.
하지만 우리엘. 너는 혼자가 아니다.
“복수가 너의 소원이라면 들어주마. 우리엘 디아블로.”
내가 있다. 내가 하지 못한 것들을 너는 해냈지만, 마찬가지로 네가 하지 못하는 것 역시 내가 할 수 있다.
파트리오에게 ‘의심’을 심었으니 그를 움직이기가 더욱 수월해질 것이다.
겉으로는 따라주는 척을 한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에······ 둘 다 무너트린다. 그 뒤에, 엘레나의 시체를 묻을 것이다.
‘내 마력으로 숨겨둬야겠군.’
엘레나. 그녀는 죽어서도 아름다움을 유지하고 있었다. 겉으로만 봐선 죽었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고귀했다.
나는 칠흑의 손길을 사용해, 그녀를 나의 공간 안에 잠시 가두었다.
라이라가 알 필요는 없다. 그녀를 라이라가 본다면 분명히 혼란할 것이었고, 어쩌면 복수를 위해 돌발적인 행동을 취할 수도 있으므로.
“로드시여.”
양반은 못 되는 모양이었다.
라이라가 급히 나를 찾아왔다.
“무슨 일이지?”
“정체모를 사신이 제게 접근해왔습니다.”
“알고 있다.”
“제가 전대 태양왕의 피를 이었다고······ 알고 계셨습니까?”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 사실을 파트리오에게 듣고 알긴 했지만.
그렇다고 모른다고 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라이라의 의사는 중요했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실이다.”
“······ 제가 태양왕이 된다면, 로드를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온갖 오물이 다 묻은 그 자리에 오르겠다고?”
“로드를 도울 수만 있다면 그보다 더한 자리라도 감내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너를 왕으로 세운들 가만히 둘 것 같으냐?”
“꼭두각시로 사용할 생각이겠죠. 하지만 그들은 저를 모릅니다. 어떤 심정으로 100년을 버텨왔는지.”
아아. 그녀의 말이 맞다.
라이라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무려 100년이나 우리엘 디아블로를 지켰다.
10년도 아닌 100년을!
수많은 고통과 유혹도 참아내면서.
그녀가 진짜 태양왕이 된대도 잘해나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불현 듯 들었다.
기특하다.
하지만 그 자리에 라이라가 오르는 걸 내가, 우리엘 디아블로가 바라지 않았다.
“고맙구나. 하지만 그럴 필요 없다.”
“왜죠? 평소의 로드시라면······.”
“기회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아쉽구나. 네가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나를 약하게 보기 때문이 아니냐?”
“아, 아닙니다. 결코 그런 뜻이.”
“그러니 보여주마. 네가 모든 걸 내던져 돕지 않아도 이 사선을 뛰어넘을 수 있다는 걸. 태양왕도, 그 뒤에 숨은 세력들도 나를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
마음만 받겠다.
게다가 라이라의 마음은 견고할지 몰라도, 그들은 태양왕조차 전복시키려고 하는 자들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라이라를 꼭두각시로 만들 테지.
“······ 죄송합니다. 제 믿음이 부족했습니다.”
라이라가 살짝 울상이 된 채 고개를 떨어트렸다. 나를 돕겠다는 것. 그 자체가 실수였음을 인정한 것이고, 어쩌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에 슬퍼진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도움이 필요 없다는 뜻은 아니었다.
“하지만 적이 적이다 보니, 너의 도움 없이는 힘들 것 같구나.”
“아! 제가 도울 일이 있다면 무슨 일이든 말해주세요. 반드시, 반드시 성공시키겠습니다.”
즉시 태세가 바뀌었다. 나는 작게 웃으며 말했다.
“연기. 한동안 나와 사이가 좋지 않음을 보여주고, 그들의 말에 따르는 ‘척’을 해다오.”
“연기······ 요?”
“할 수 있겠느냐?”
“예. 할 수 있습니다.”
꼬리를 살랑살랑 흔드는 것만 같은 저 태도를 보아하니 잘 할 수 있을지가 의문이었다.
하지만 라이라는 나를 실망시킨 적이 없다.
“그리고 오룡을 암암리에 불러다오.”
단순한 머리싸움으로는 한계가 있다.
우선 나 자신이 강해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오룡이 필요했다.
‘실마리는 잡았다.’
내 안엔 아직도 암령과 멸제의 마력이 싸우고 있었다.
또한 심연의 초강자들과 싸우고, ‘신조 람’과 계약하며 마력의 형질에 대한 본격적인 깨달음의 실마리를 얻었다.
의아하지만, 신조는 오룡들에게 매우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그들과 나 사이에 연결된 ‘무언가’를 본 게 분명했다.
그것을 파악한다.
“명령을 따르겠습니다.”
“참고로 연기는 지금 이 순간부터 시작이다. 네가 나를 찾아온 걸 많은 이들이 보았을 테니, 의견이 맞지 않았다는 걸 몸소 보여줘야지.”
“······ 해보겠습니다.”
무겁게 고개를 끄덕인 라이라가 표정을 굳히고, 입술을 잘근 깨물며 바깥으로 향했다.
다소 불안하긴 하지만, 일단은 괜찮을 듯싶었다.
* * * * *
“구화린. 우리들, 살아서 돌아갈 수 있을까?”
검룡 연혼제. 오룡들 중에서 가장 철이 없다고 알려진 연혼제가 구화린에게 물었다.
구화린은 자신의 검을 살피며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가야지. 반드시.”
“나찰산에 있는 모든 괴물을 모아도 여기 모인 것의 절반이 되지 않을 거야.”
“그래서, 자신 없어? 검룡이란 이름이 아깝네.”
“뭐? 그럼 구화린 너는 자신 있다는 거야?”
“자신 없어.”
구화린은 솔직하게 말했다.
자신 있냐고?
주변을 둘러봐라. 자신들보다 약한 괴물은 한 마리도 없다. 그런데 그런 괴물이 헤일처럼 몰려든다.
연혼제가 인상을 찌푸렸다.
“싸우자는 거냐?”
“아니. 굳이 불안하게 생각해서 득 될 게 없다는 거야. 유설을 봐. 우리 오룡들 중에서 진정한 의미로 겁을 먹지 않은 건 유설밖에 없을 걸? 겁을 먹지 않았기 때문에가장 잘 싸우기도 하고.”
유설의 시선은 오로지 한 곳에 고정되어 있었다.
작은 아이. 용의 꼬리를 단 여자아이 말이다. 이그닐이라고 했던가?
설마 인간형 용이 존재한다니, 들어본 적도 없었다.
“귀여워······.”
침이라도 흘릴 기세다.
암룡 유설. 권법을 주로 사용하는 그녀는 전장의 꽃이었다. 오룡들 중에서 가장 두각을 보였다. 뭐, 이그닐이 전장으로 들어가니 급히 따라간 것에 불과하긴 하지만말이다.
하여간 유설만이 본실력을 냈다.
나머지 오룡들은 싸우는데 급급하고 있을 뿐인데도.
툭.
투다다닥.
유설이 이그닐에게 다가가자 이그닐이 급히 라이라의 등 뒤로 숨었다. 라이라가 쳐다보자, 유설은 아쉬운 듯 손가락만 빨았다.
“쟤는 생긴 거랑 다르게 귀여운 거에 환장하니까. 여러모로 얼굴이 아까운 애지.”
“그럼 나는 안 아깝다는 거야?”
“구화린. 넌······ 너도 예쁘긴 한데, 유설이 백자 같이 기품 있는 아름다움이라면너는 가시 돋친 야생마 같단 말이지.”
“가시 돋친 야생마는 또 뭐야? 칭찬 아니지?”
“나도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으니까 알아서 생각해라.”
구화린이 노려보자, 연혼제가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만큼 지금 상황에 중압감을 느끼고 있다는 뜻이다.
라이라 디아블로. 그녀가 오룡을 이곳으로 끌고 왔다.
왠지 익숙한 글자들이 새겨진 ‘진법’이 있는 곳이었다.
쿵.
땅이 울리는 소리와 함께, ‘그’가 모습을 보였다.
우리엘 디아블로!
데몬로드이며 그들과 함께 온 최강자.
그는 등장한 즉시 입을 열었다.
“이 진은 ‘흡성대법(吸星大法)’이라 불리는 것이다.”
“흡성······ 대법?”
모두가 말하고, 경악했다.
흡성대법!
저주받은 진법 아닌가. 금지된 진법이지만 그 이름을 아는 야차들은 많았다.
그것을 어떻게 우리엘 디아블로가 알고 있는 지는 차차하고, 이 진법은 상대의 차크라를 억지로 강탈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강탈당한 상대는 십중팔구 죽는다.
그것도 매우 끔찍하게. 모든 피와 살점이 말라붙어서 죽는다는 말도 있고, 죽을 때까지 고통으로 울부짖다가 죽는다는 이야기도 파다했다.
설마?
“지금부터 이 진법을 사용해 겨뤄보도록 하지.”
우리엘 디아블로가 사형선고를 내렸다.
< 41. 왕의 자격(5)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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