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신사냥꾼-178화 (179/251)

< 41. 왕의 자격(4) >

심연. 어둡고 사악한 감정이 지배하는 악의 울타리. 그 안에서 우리엘은 엘레나를만나고 처음으로 ‘사랑’에 빠졌다.

그의 기억 속 편린들을 보면, 우리엘은 그것이 사랑인 줄도 모르고 방황하다가 엘레나가 죽은 다음에야 그 감정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그녀의 딸인 라이라와 함께 도망을 결심한 것이고······ 결국 무한한 가능성 끝에 ‘나’를 찾아 미래선택을 행했다.

“그녀가 새로운 황녀로 등극하는 걸 도와준다면 이것을 선물로 주마. 하지만 거절한다면 너희 모두가 불행해질 것이다.”

문신의 마족은 당장이라도 공격을 해올 기세였다.

이미 연달아 싸운 여파로 내 마력은 고갈 된 상태.

나는 선택해야 했다. 애초에 이들을 믿을 수 있는가? 현재의 태양왕을 배제시키려 하는 것처럼, 라이라도 배제시킬 수 있는 노릇 아니겠는가.

하물며 이들이 정상적으로 라이라를 따를 것 같지도 않았다.

‘이들이 원하는 건 꼭두각시다.’

뻔하다. 정말 뻔하디 뻔한 레파토리였다.

그들은 오로지 그들에 의한 집권을 바라고 있었다.

만약에 아무런 대책도 없이 그저 고개를 끄덕인다면, 라이라는 그들의 꼭두각시가 되고 그녀와 나 사이의 연결고리도 차단될 것이다.

그렇다고 무작정 거절할 수도 없었다.

‘이들은 자신이 있다.’

단순히 라이라 하나가 추가됐다고 태양왕을 전복시키는 게 가능할 리 없다. 분명히 그만한 힘을 지니고 있을 것이었다.

거절할 경우 그들의 힘이 나를 옥죄어올 수도 있었다.

무엇보다 엘레나가 계속해서 눈에 밟힌다.

‘우리엘. 우리엘 디아블로. 네가 진정으로 바라는 게 무엇이냐.’

지금 내가 보인 눈물은 우리엘의 신체에 남아있던 마지막 본능과도 같은 것이었을 테다. 우리엘 본인이 가진 감정이 극도에 달해 마침내 눈물로 승화했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여기서······ 나는 우리엘의 감정을 존중해주기로 했다. 그의 기억을 읽은 나는 우리엘이 엘레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잘 알고 있다.

라이라와 같은, 어쩌면 그 이상의 애정.

자신의 목숨과 영혼도 가볍게 버릴 수 있을 정도의 사랑!

심연의 괴물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순수한 감정이었다.

‘심안.’

이름: 파트리오(value-3,000,000)능력치:

힘 100 민첩 100 체력 100

지능 100 마력 100

잠재력(500/500)

특이사항:

-오로지 싸우기 위해 만들어진 병기입니다.

-용과 발록을 비롯한 수많은 인자가 뒤섞여 있습니다.

-너무나 강력한 탓해, 봉인이 되어있습니다.

-봉인이 해제될 때마다 세포의 노화가 급속도로 빨라집니다.

강력해서 봉인이 되어있다. 가치로 추측하면 그 힘의 크기가 무시할 수 없을 정도라는 걸 알 수 있다. 신조 람보단 떨어지지만, 신조의 경우 그 특이성 때문에 가치가가파르게 올라간 것도 있을 테니까.

하지만 파트리오. 이놈은 그저 강자였다. 강력한 힘을 봉인해둬야 할 정도로 불완전하다는 것이겠지만······ 나는 최대한 머리를 굴렸다.

저들과 나는 공생할 수 없다.

라이라를 건네주고 약속의 이행을 바란다?

그것도 장담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라이라만 잃게 될 가능성이 높다.

‘거절할 경우 나를 죽이라는 명령도 내렸겠지.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거다.’

그렇다고 무작정 반대한다면 언제나 등 뒤를 걱정해야하는 신세가 될 수도 있었다.

세 번을 이겼다고 자만해선 안 된다.

나는 약자다. 철저하게 약자라서, 이용할 수 있는 모든 걸 이용해 이길 따름이었다.

내 패는 거의 보여준 것이나 다름없었고, 그 패들을 염두에 두며 이놈, 파트리오를 보낸 것일 터였다.

설령 내가 파트리오를 이긴다 해도 끝이 아닐 게 자명한 상황.

“거래를 하지.”

“우리의 거래를 받아들이겠단 건가?”

“아니. 나는 그들이 아닌 ‘너’와 거래하고 싶다. 파트리오.”

“허튼 수작. 네가 ‘보는 것’에 일가견이 있다는 건 나도 알고 있다.”

파트리오가 경계했다. 말한 적 없는 자신의 이름을 내가 호명하자 살짝 놀란 기색도 있었지만, 금세 원래의 태도로 돌아와 도리어 경계심을 높였다.

자. 여기서 부터가 시작이었다. ‘보는 것’은 알지만, 내가 어디까지 볼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오로지 나만이 안다.

‘불완전한 병기.’

파트리오라 이름 붙은 이 마족은 태생부터가 병기로 만들어졌다. 용과 발록 등의 인자들이 무작위로 뒤섞인 키메라. 하지만 생각보다 강력하여 봉인되었고, 불완전한 상태를 계속해서 이어가고 있다는 뜻이다.

“파트리오. 보다 완벽해지고 싶지 않나?”

대화를 하자. 너의 감정이 부딪히는 방향을 내게 알려다오.

그리 된다면 나는 너의 ‘기억’을 엿볼 수 있다. 관리자의 권한으로!

하지만 그것도 파트리오가 미끼를 물어야 성립된다. 파트리오는 나를 경계하고 있었다. 그러니 혹할 만한 미끼를 하나 더 제시할 수밖에 없었다.

“오해하지 마라. 네 말대로 나는 ‘보는 것’에 능하다. 하지만 모든 걸 알 수 있는 건 아니야. 그러니 너를 통해 그들의 저의를 알아보고 싶은 거다. 괜찮다고 생각되면 라이라를 ‘태양왕’으로 즉위시키는데 적극적으로 동의하마.”

“그거랑 내가 보다 완벽해지는 게 무슨 상관이지?”

“불완전한 상대와 거래를 하는 것만큼 멍청한 일은 없지 않느냐? 너의 봉인과 그 불완전함. 만에 하나를 대비해 ‘버리는 패’로 사용하기 위함이겠지.”

파트리오는 버려도 ‘좋은’ 패였다. 혹시나 일이 꼬이면, 파트리오만 버리고 그들은 더욱 깊숙한 곳으로 숨어들 것이다. 내가 태양왕에게 가서 말한다고 해도 그가 쉽게 믿을 리 없거니와 증명할 방법도 없으니, 모든 걸 숨긴 채 오로지 파트리오만 보낸 거겠지.

그러나 그들에겐 버려도 좋은 패일지 몰라도, 내겐 승부를 위한 히든카드였다. 그러니 계속해서 파트리오를 자극할 생각이었다.

버리는 패라는 말을 들었을 때 파트리오의 반응은 어떨까?

“내겐 많은 생각이 허용되지 않는다. 싸울 수만 있으면 좋다.”

그다지 감흥은 없는 듯싶었다.

그렇다면 우회다.

“전사 그 자체로군. 하지만 봉인이 있는 한 속 시원하게 싸울 수도 없었을 거 같은데.”

“부정하지 않겠다. 그러나 봉인은 강대한 적을 만나면 풀린다. 우리엘 디아블로, 네가 우리의 거래를 거절한다면 나와 싸우게 될 것이다.”

“봉인이 해제 됐을 때 부담을 안겠지. 발록은 정말 위험한 괴물이니 말이야.”

“······.”

아주 살짝, 흔들렸다.

발록. 심연에 존재하는 괴물 중에서도 당연히 최상위의 괴물이다.

하지만 멸종 된 상태다. 종족 특성상 매우 호전적인 발록은 발록끼리도 싸우기 때문이다. 암수 구분 없이 싸워만 대니 대대로 자손을 번식하지 못하고 지금은 멸종되었다고 알려진 괴물이었다.

그런 발록의 피를 구해 어떻게 합성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발록의 인자를 이었다면 분명히 특유의 호전적인 성격도 함께하고 있을 터였다.

그렇다고 봉인을 풀면 반대급부의 무언가를 잃는다. 욕구불만족의 상태라는 뜻. 충분히 건드려볼 가치는 있었다.

“봉인의 부담감 없이 마음껏 싸워보고 싶지 않나?”

“나를 현혹할 생각이라면 버려라. 이미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찾아보았으니.”

“일단 들어보아라. 나는 너희가 가진 힘을 모른다. 너처럼 불완전한 이를 내세울 정도라면 그 뒤가 얼마나 구린지는 알 수 있지. 허나, 나는 네가 가진 그 불완전함을해소시켜줄 수 있다.”

파트리오는 답하지 않았다.

나는 한 마디를 더 보탰다.

“싸우기 위해 태어났으나 마음대로 싸울 수조차 없는 답답함. 내가 거절한다면 너는 나를 상대로 전력을 다하겠지만, 나는 전력을 다해 도망갈 것이다. 파트리오, 그리 되면 너는 그대로 ‘처분대상’이 되겠지.”

“······!”

그래. 도망갈 것이다.

이길 수 없는 싸움을 왜 하나?

파트리오도 알고 있을 게 분명했다. 자신이 ‘버려도 좋은 패’인 것을 무덤덤하게 받아들인 걸 보면 말이다.

하지만 나를 상대로 마음껏 싸워볼 생각이었겠지.

아서라. 바람대로 움직여줄 내가 아니다.

“마지막으로 봉인을 풀고 싸워본 게 언제지? 키메라는 그 성격상 수명자체가 짧지. 가뜩이나 짧은 수명이 봉인의 해제 여파로 더 짧아지고 있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1회성’일지도 모르겠군. 너는 철저하게 ‘자폭’을 위해 만들어진 거다. 아쉽구나, 부작용만 없었다면 일당백의 전사가 되고도 남았을 텐데.”

“······.”

정곡을 찔렀나?

수많은 인자. 나처럼 ‘폭식’과 같은 스킬이 없는 한, 그것들을 모조리 받아들이고 정상의 생활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니 ‘자폭’의 용도로 사용하는 것이다. 데몬 로드 같은 강자를 잡고자.

파트리오의 눈에 혼란이 잦아들었다.

오른쪽 팔을 긁어대기 시작했다.

먹혔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실패작이군. 36,700구의 실험체 중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았는데, 결과적으로 실패를 하고 말았어.

-그래도 잠력은 뛰어나군. 한 번 폭발시키면 사천왕조차 죽일 수 있을 것이다.

-죽이고, 죽어라. 너의 활용가치는 그게 전부이니.

-너의 동생 말이냐? 흐흐, 그 아이도 꽤 적성이 있었다만, 조금 부족했다. 그래도걱정 마라. 너의 팔 한쪽은 네 동생의 것이니.

-쓸데없는 감정이 너무 많군. 세뇌를 해야겠어. 어디보자, 우선은 ‘고통’을 건드려볼까?

-너는 오로지 싸우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 외엔 아무런 생각도 말도록.

기억이다. 파트리오의 기억이 내게 흘러들어왔다.

싸우기 위해 만들어졌으나, 싸우지 못해 생긴 감정의 골이 조금씩 폭발하기 시작한 것이다.

‘세뇌가 걸려있군.’

골치가 아팠다. 잘못 건드리면 엉망이 되는 게 세뇌라는 것이다.

하지만 깰 수 있는 방법은 있었다. ‘기억’을 건드리는 거다. 물론 잘못되면 백치가될 수도 있지만, 본래의 정신력이 강한 자였다면 몇 개의 키워드를 던져주는 것만으로도 깨고 나올 수 있었다.

“동생의 이름이 뭐지?”

“내겐······ 동생 같은 존재는 없다.”

“그럴 리가. 네 팔의 한쪽은 네 동생의 것이지 않느냐?”

“내 팔이······?”

“아까부터 계속 오른쪽 팔을 긁고 있더군. 시원하던가? 헌데 이상하군. 너는 아무런 ‘감촉’도 느끼지 못할 텐데 말이야.”

한 발자국, 크게 내딛었다.

그리고 파트리오의 오른손을 강하게 쥐었다.

“······!!”

파트리오가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몸을 부르르 떨고, 눈동자가 쉴 새 없이 움직이며 불안한 감정을 보였다.

내가 손을 잡았음에도 거부반응이 없다. 그만큼 혼돈을 느끼고 있다는 거겠지.

여기까지다. 더 이상 하면 위험할 듯싶었다. 파트리오가 망가지는 건 나도 바라지않았다. 그는 내 히든카드로 활동해줘야 했으니까.

하지만······ 내심 미소를 지었다.

‘심는 것’에는 성공했다.

동생과 오른팔, 봉인과 해제 등.

그게 뭐가 되었던 파트리오는 내게 맞춰 생각하고 행동하게 될 것이다.

“봉인을 해제하고 싶다면 안정이 된 후 나를 찾아와라. 그리고······.”

작게 웃으며 말했다.

“‘그들’에게 전해다오. 선물은 잘 받았다고 말이야.”

* * * * *

라이라.

그녀에게도 사신이 찾아왔다.

“우리의 왕이 되어주시옵소서.”

“······ 뜬금없군. 누구지?”

“라이라. 우리의 태양이시여. 전대 왕의 피를 잇고, 반신 발키리의 힘을 가진 그대만이 우리의 위에 설 수 있습니다.”

검은 후드를 뒤집어쓴 사신. 하지만 그에게서 풍기는 마력은 전율적이었다. 라이라는 긴장하며 검을 뽑으려고 했지만, 사신의 말을 듣고 의아한 부분이 있었다.

“내가 태양왕의 피를 이었다고······?”

“그렇습니다. 전대 태양왕의 피를 이으셨지요. 하물며 그 날개는, 아아, 무척이나 아름답군요. 발키리의 힘 역시 그대로 계승한 게 분명합니다.”

라이라는 자신의 출생에 대해 명확하게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엘과 피가 이어지지 않았다는 것도 근래에 알았다.

그 부모에 대해선 누구도 모르고 있을 줄 알았건만.

“상관없다. 내 위에 서실 분은 오로지 우리엘 디아블로, 그분 뿐. 내가 왕이 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허어. 우리엘 디아블로, 놈이 가증스러운 가면을 쓰고 우리의 태양을 현혹한 모양이군요. 이를 어쩐다······.”

“내 앞에서 그분의 욕을 하는 건 참을 수 없다.”

스릉!

라이라가 검을 뽑았다.

그대로 목을 내리치자, 짙은 안개처럼 그대로 검이 통과했다.

‘실체가 없다.’

진짜가 아니라는 말.

환영이다.

사신은 물러나지 않았다.

“아셔야 합니다. 전대의 태양왕이 죽은 건 우리엘 디아블로가 ‘보았기’ 때문이라는 것을요. 새로이 즉위한 태양왕이 그를 살려둔 이유는, 온전히 그러한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 음해는 통하지 않는다. 죽어야 정신을 차리겠군.”

“동정심이었을까요? 아니면 속죄를 위해서였을까요. 전대 태양왕의 아내인 ‘엘레나’마저 빼앗고서, 이제는 그 딸인 저희의 태양마저 이토록 어지럽혀놨으니, 우리의 왕이시여. 부디 잘 생각하시길 바랍니다.”

전대의 태양왕······ 엘레나······.

그들이 자신의 부모라고?

라이라는 잠시 말을 잃었다.

“조만간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우리의 태양, 우리의 왕이시여.”

사신이 안개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라이라는 인상을 찌푸린 채, 사신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 41. 왕의 자격(4) > 끝

ⓒ 온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