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 왕의 자격(3) >
망설임은 있었다. 데몬로드의 몸, 그것도 우리엘 디아블로의 몸으로 검을 다룬다면 얼마나 강해질 수 있을지.
하지만 만약 우리엘 디아블로의 몸으로 모든 걸 채득하고 행할 수 있다면······ 본래의 ‘나’는, 오한성이란 인간은 필요 없는 게 아닐까하는 그런 의구심은 있었다.
그래서 망설였고, 그래서 구분하고 있었지만,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역시 이 몸에는 맞지 않군.’
내가 익힌 검술은 야차에게서 비롯한 것이었다. 그나마 구조가 비슷한 인간이었기에 그 힘을 끌어낼 수 있었지만, 마족의 몸에는 역시 익숙하지 않다.
그러나······ 파괴력은 달랐다. 맞지 않음에도 단번에 적을 압살했다.
‘태을무극심법을 익히지 않은 몸으로는 힘의 절제가 안 돼.’
문제는 마력의 소모다. 탈혼무정검은 오로지 공격일변도의 검법. 검을 펼치는 순간 내 모든 걸 쏟아내게 된다. 그래서 필요한 게 균형을 잡아주는 태을무극심법이었다.
하지만 우리엘은 태을무극심법을 익히지 못했다. ‘암령’의 존재가 없는 이상, 우리엘이 그 심법을 익힐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래서 검에 모든 마력이 실렸다. 한 방, 한 방에 산마저 베어낼 정도의 힘이 담겨있었다.
“······ 우리엘 디아블로가 이겼다?”
“저 검은 별은 우리엘 디아블로의 권능인가?”
“하지만 검술은······ 고작 검 따위를 휘두르며 저만한 위력이라니. 특수한 재료로 만들어진 검인가보군.”
웅성임이 잦아들지 않았다. 엘더 리치, 놈은 지옥왕의 왼팔이다. 왼팔 격의 존재를 ‘검’으로 압살했다. 소란이 날만 했다.
나는 천천히 월천을 바라봤다.
우리엘 디아블로의 마력. 월천은 그 이질적인 마력조차 견뎌냈다. 도리어 흡수하고 더욱 강한 힘으로 방출했다.
‘월천은 완성된 게 아니야.’
만약 월천이 완성된다면, 어쩌면 파벌의 수장들마저도 상대할 수 있는 ‘검’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열쇠는 여전히 오룡이 쥐고 있었다.
오룡의 각성, 그것을 위해선 우선 이 전쟁에서 이겨야 한다.
적은 많다. 고작 하나를 베었다고 멈춰있을 순 없는 노릇.
‘오래 싸우진 못하겠군.’
무분별한 마력의 남용으로 기껏해야 한, 두 번을 싸우면 탈진이 올 듯싶었다. 그러니 그 안에 보다 강렬한 ‘이미지’를 심어주고, 최대한 싸우지 않는 방향으로 끌고나갈 필요가 있었다.
키아아아아아악!
신조 람.
내 승리를 축하하며 기운차게 울었다.
동시에 태양왕의 진영에서 눈에 띌 정도의 흔들림이 있었다.
신조 람은 태양왕의 상징. 그 상징이 나를 따르게 되었으니, 저들로서도 나를 상대하기 여간 껄끄러울 터였다.
그 틈을 노린다.
‘내 모든 기지를 발휘하여 압도적으로 이긴다면.’
가능할까?
이곳은 강자의 축제다. 심연의 모든 강자들이 이곳에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곳에서, 최약체의 데몬로드였던 내가 중심이 될 수 있을까?
하지만 그게 가능하다면, 이변이 일어날 것이다. 적어도 진정한 강자들이 나를 경계하며 섣불리 건드리지 못하는 계기는 될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전제조건은 하나였다.
나는 태양왕을 바라봤다.
언짢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그를.
‘내가 태양왕이 된다.’
내겐 그 자격이 있었으니.
* * * * *
“······ 항복하겠다.”
태양왕의 표정이, 처음으로 무너졌다.
그의 하수인 중 하나가 던진 ‘항복의사’ 때문이다.
우리엘 디아블로. 그리고 신조 람!
둘의 존재가 태양왕의 진영을 뒤흔들고 있었다.
태양왕은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왕이다. 그 정통성을 벌써부터 의심받는다면,동시에 기반과 힘을 잃는다.
“나는 오로지 태양왕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신조 람, 태양왕의 상징이 따르는 너를 공격할 순 없다.”
게다가 지금 항복을 선언한 존재의 출현으로 인해 진영은 더욱 흔들렸다.
태양왕의 직속기사단, 그중 제 3군단장을 맡고 있는 자!
역대로 태양왕을 호위해온 심연의 절대강자 중 하나였다.
“3군단장이?”
“벌써 셋······ 신조 람의 비호를 받는 자를 공격할 순 없다는 건가?”
“하지만 새로이 즉위한 태양왕께서 멀쩡히 살아계시는데?”
“저들이 충성하는 건 오로지 태양왕이란 이름뿐이다. 누가 왕에 오르든 따르는 충신들이지. 헌데 우리엘?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이군.”
“‘피의 숙청’이 일어날 때 유일하게 살아남은 후계자의 이름이 우리엘이었지. 설마 그 겁쟁이를 살려둔 게 화의 근원이 될 줄이야.”
“그 ‘보는 것’이 전부였던 무능한 왕자 말인가······.”
남은 군단장들과 몇몇 마족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우리엘 디아블로. 새로이 격상한 ‘자격’을 지닌 자에게.
또한, 우리엘이 조명받자 그의 휘하에 있는 라이라 역시 주목을 받았다.
라이라의 날개 한쪽이 새하얗게 빛났다. 라이라는 분명히 ‘광명’을 다루고 있었다. 엄청난 속도를 가지고 있으면서 주체하지 못하는 모습이 몇 번이나 나타났다.
“라이라. 반신격을 지닌 ‘발키리의 딸’이로군. 그러고 보니 그녀 역시 ‘정통의 핏줄’이 아니었던가?”
“전대 태양왕 말이지······.”
“전대 태양왕은 새로이 즉위한 왕에게 먹혔지만, 아직은 전대의 왕을 따르는 자들이 더 많아. 저 힘을 제대로 다룰 수만 있게 된다면 많은 자들을 등 돌리게 할 수도 있겠군.”
태양왕은 말 그대로 태양이다.
하지만 새로이 즉위한 왕은 온전히 모든 것을 가지지 못했다.
피의 숙청. 강제로 먹고 삼킨 탓에 소화되지 않은 힘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힘들은, 암암리에 잠들어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라이라의 존재를 몰랐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왕’이라 칭하기엔 너무 약한지라 기회만 보고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지금 보이는 저 모습은, 완성되진 않았으나 충분한 가능성을 사사해주고 있었다.
“신조 람과 전대 태양왕의 핏줄. 충분한 명분이지 않나? 제 3군단장은 중립이지만, 명분을 엎고 왕이 바뀐다면 우리에게 동조해줄 것이야.”
“라이라 디아블로와 접선해보도록 하지.”
“우리엘 디아블로는?”
“그가 왕으로 즉위한다면 지금의 ‘반대파’를 흡수할 수 없다. 하지만 ‘라이라 디아블로’는 아주 아름다운 꽃이지. 우리에게 필요한 건 ‘거래’야.”
“거래라. 내용이 중요하겠군.”
“그녀가 왕으로 즉위한다면, 전면적인 협조를 약속하면 되겠지. ‘위대한 별’은 모든 데몬로드가 바라는 게 아닌가?”
암암리에 전복을 꿈꾸는 자들.
그들은 위대한 별 따위에 관심이 없었다.
새로운 왕조를 내세우며 태양왕을 자신의 꼭두각시로 부리는 것!
오로지 그것만을 위해 모인 게 그들이다.
그리고 우리엘 디아블로는 이 먹이를 결코 반대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맨 손으로는 갈 수 없지. 그것’을 그에게 전달하도록.”
“그것을? 하지만, 너무 아깝지 않나? 태양왕의 눈을 피해 겨우 빼돌린 것인데.”
“어차피 우리가 사용할 수 없는 힘이다. ‘그것’을 받는다면 우리엘 디아블로는 감히 거부하지 못할 터. 파트리오, 네가 전해주어라.”
파트리오라 불린 마족. 전신에 알 수 없는 문신이 새겨진 검은 머리의 마족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방대한 마력이 저 문신 안에 봉인되어 있었다.
봉인이 풀리는 순간 광범위한 천재지변이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에 하나 그가 거절한다면 그를 죽여도 좋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오로지 비운의 황녀뿐이니까.”
“······ 알았다.”
파트리오라 불린 마족이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전장의 중심으로 알 수 없는 기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 * * * *
3번을 이기고, 3번의 항복을 받아냈다.
마력은 고갈상태였다. 더는 싸우고 싶어도 싸울 수가 없었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전쟁은 잠시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니드호그의 움직임이 멈췄다.’
심연으로 강림하던 니드호그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 추이를 보고자 모두가 잠시 전쟁을 중단한 것이다.
니드호그가 잘못 강림하면 모두가 죽는다. 아니, 심연 자체가 멸한다. 그것을 모를 자들이 아니었다.
‘신을 먹는 신.’
니드호그. 모든 신들조차 감히 그 이름을 입에 담지 못했던 전율스러운 존재. 둠이 공포의 전조라면, 니드호그는 공포 그 자체였다.
나는 가만히 니드호그를 올려다보았다.
거신. 도저히 이길 수가 없을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위대한 별’을 거머쥔다 해도저 괴물을 이길 수 있을까?
‘태양왕이 괜히 태초의 저주라 칭한 게 아니겠지.’
태초의 저주.
어쩌면 모든 것의 시발점이 되었을 수도 있는 괴물이었다.
위그드라실의 뿌리를 먹는 니드호그, 균열을 일으키며 날갯짓을 하는 흐레스벨그. 그녀는 둘의 사이를 중재하는 ‘라타토스크’.
가짜 알레테이아의 말이 사실이라면, 라타토스크가 잠들며 니드호그의 봉인이 풀렸다. 흐레스벨그는 뭐하는 존재인지 알 수 없으나, 그가 균열과 매우 연관이 깊다는 건 확실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위대한 별’을 손에 넣고 모든 인과의 매듭을 맺는 것이다. 어쩌면 저 니드호그와 싸우거나 라타토스크를 직접 깨워야할 수도 있었다.
‘모든 열쇠는 위대한 별로부터······.’
하지만 이게 전부는 아닐 것이다.
애당초 라타토스크를 재운 건 누구인가?
아직, 내가 더 알아야할 것들이 있는 것 같았다.
그러기 위해선 사천왕들이 ‘위대한 별’을 심연에 두는 조건으로 받았다는 ‘지혜의정수’가 필요했다. 태양왕이 되면 그것을 손에 넣을 수 있겠지.
“······ 누구냐.”
고개를 돌렸다.
심연의 어둠 속에 몸을 감춘 그림자가 하나.
내가 말하자, 그림자가 그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태양왕의 측에 있었던 놈이로군.”
내 기억력은 좋은 편이다. 오한성의 몸으로 태양왕을 접했을 때, 그를 지키던 ‘괴물’ 중에 하나가 바로 저놈이었다.
헌데 몰래 나를 찾아왔다?
태양왕의 전언인가?
“우리엘 디아블로. ‘거래’를 하자.”
“내가 항복이라도 해주길 바라는 건가?”
“그 반대다. 우리는 새롭게 즉위한 태양왕의 소멸을 원한다.”
“······ 태양왕도 고생이 많은 모양이군.”
내심 웃고 말았다.
흔들림이 없는 집단은 존재하지 않는다.
태양왕은 이제 막 즉위했기에 그 흔들림이 더욱 큰 모양이었다.
아마도 내가 ‘신조 람’을 지배하며, 태양왕을 흔드는 원흉들이 접선을 해온 것이겠지.
겉으로는 태양왕을 지키는 척 하면서, 사실은 칼을 갈고 있었다?
하여간 누가 심연의 악당들 아니랄까봐.
“그리고 우리는 ‘라이라 디아블로’가 태양왕의 자리에 즉위하길 원한다.”
“내가 아닌 라이라가 말이냐?”
“그녀는 전대 태양왕의 피를 이은 존재. 하물며 ‘반신 발키리’의 힘을 갖고 있다. 그 잠재력은 모든 사천왕을 뛰어넘겠지.”
“거절한다. 그 아이에게는 너무 큰 짐이로군.”
라이라를 높게 봐주는 건 고맙다. 나도 동의하는 부분이었다. 라이라가 저 힘을 제대로 다룰 수 있게 된다면, 그 포텐은 어마어마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라이라가 그 무거운 자리에 앉는 게 달갑지 않았다. 무엇보다 내가 태양왕이 되어야만 ‘세계의 비밀’을 파헤칠 수 있었다.
“네가 ‘위대한 별’을 거머쥘 수 있도록 도와주마. 또한, 그 외의 선물도 있다. 이것을 보면 마음이 달라질 것이다.”
“일단 보고 판단하지.”
팔짱을 꼈다. 놈이 출현한 순간부터 이 주변의 공간이 단절됐다. 잠시나마 내가 있던 공간을 다른 공간으로 전이시킨 듯싶었다.
데몬로드의 ‘격’조차 움직일 수 있다니, 보통 놈은 아니다. 심안으로 살핀 결과 ‘봉인’의 흔적도 찾을 수 있었다.
이윽고 놈이 그림자 속에서 또 다른 무언가를 꺼냈다.
“······!”
부르르르!
그것은 본 순간, 정신이 새하얘졌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이 눈물은 내가 흘린 눈물이 아니다.
이 눈물은······ 우리엘 디아블로, 그 본연의 것이었다.
‘엘레나.’
반신 발키리.
‘믿음’의 존재, 그리고 싸우는 처녀.
그녀의 시체가 내 앞에 있었다.
그녀의 시체를 본 순간, 나는, 우리엘 디아블로는, 하염없이 울 수밖에 없었다.
< 41. 왕의 자격(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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