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 왕의 자격(2) >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신조는 태양왕의 증표와 같은 존재. 그 존재가 나를 따기 시작했으니 태양왕의 심기가 편할 리 만무했다.
게다가 의도치 않았지만 거하게 뒤통수를 때렸다. 내가 ‘지배’하며 확정사안이 되었으니 말이다.
‘영원한 우군은 없다.’
이곳은 심연이다.
나는 태양왕을 찾아가 그에게 둠을 조심하라 말하며 경계심을 세웠을 뿐이다. 애당초 내가 바라는 건 서로 싸우며 공멸하는 것이었다.
그의 우군이 될 생각은 없었다.
아니, 애당초 이곳 심연의 모든 ‘왕’이라 칭하는 것들이 내 적이다. 그들을 이용할지언정 우정이나 쌓으며 하하호호 시간을 보낼 생각 따윈 추호도 없었다.
무엇보다 태양왕 역시 나를 이용하려 하지 않았던가?
‘태양왕은 그런 자다. 이용하기 위해 들어주는 척을 할 뿐.’
내게 이용가치가 있기에 어울려줬을 것이다.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단순히 둠과 사자왕이 동일한 존재라는 ‘말’만으로는 그가 움직일 리 없었다.
그 역시 내게 바라는 게 있다는 뜻이겠지. 우리엘의 기억을 더듬어보면 보다 확실해진다.
서로가 서로를 이용한다. 누가 더 ‘잘’하느냐의 차이를 제외하면 우호를 다지기엔처음부터 무리가 있는 관계다.
무엇보다······.
‘본능적인 거부감.’
이 거부감은 우리엘에게서 나온 건가?
태양왕을 대하는 내내 가슴이 거북했다. 인간인 내가 가진 감정일지, 아니면 우리엘의 거부감일지 모르겠으나 결코 가까이 하고 싶지 않다는 느낌이 계속됐다.
물론 신조 람을 지배한 건 대놓고 그에게 반기를 든 것이다. 어차피 내가 바라는 판은 만들어졌으니 그에게서 더 도움을 바랄 건 없었다.
‘오히려 지금이 적기지.’
내가 바라는 판이 만들어졌으니, 더는 그에게 의지할 이유가 없다. 오히려 신조를지배하여 그의 화를 돋우는 건 내 입지를 만들 수 있는 것과 동시에 그의 입지를 갉아먹는 역할을 할 것이다.
당장 주변의 반응만 보더라도 알 수 있었다.
“허, 믿기지 않는군.”
“그럼 지금의 태양왕은 더 이상 태양왕이 아니란 거냐?”
“그럴 리가. 그들이 말했지 않나. 사천왕의 위치는 그들 스스로의 ‘인정’으로 성립된다고. 이곳에 있는 사천왕이 우리엘 디아블로를 인정하지 않았으니······.”
“하지만 신조는 태양왕만을 따른다고 하던데?”
의문은 증폭됐다. 모두가 의해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신조가 바라본 건 내가 가진 ‘신성’이었다. 거신을 죽이겠다는 일념. 태양을 부수고 새로운 태양을 만들겠다는 의지!
아마도 신조가 따르는 자의 조건 자체가 그런 것이었겠지. 가짜가 아닌 ‘진짜’에게 더욱 끌린 것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더욱 ‘적법한 태양왕의 계승자’라는 말과도 일맥상통하지 않을까?
‘우연치곤 기가 막히지만, 이 기회를 먹을 수 있느냐 마느냐는 온전히 내 행동에 따라 바뀐다.’
그럴싸하지만 위험한 도박이다.
태양왕은 강하다. 허나 그가 가진 힘은 미지수였다. 둠이 내민 도전장을 기꺼이 응수할 정도의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
그래도 이번 판을 잘만 활용한다면, 이끌어갈 수 있다면······.
‘모든 걸 바꿀 수 있겠지.’
앞으로의 미래. 절망으로 가득 찼던 그 나날들을 바꿀 힘!
그것을 얻을 수 있으리라.
모든 것은 의혹에서 시작된다.
이미 안달톤 브뤼시엘이 사자왕의 자리에 올라선 전례가 생겼으니, 누가 아는가?
우리엘 디아블로가 새로운 태양왕으로 등극하게 될지 말이다.
쿵!
신조가 배를 보이고 드러누웠다.
항복의 의사다. 나는 녀석의 배를 쓰다듬으며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눈은 태양왕에게 가 있었다.
자. 내 의사는 명확하다. 나는 여기서 끝낼 생각이 없었다. 신조 람을 시작으로, 네가 가진 모든 걸 차지하겠노라고.
여유롭게 미소지어보였다.
‘우리엘 디아블로 또한 그것을 바라고 있을 터.’
심장이 뛰었다.
그의 의지가 곧 나의 의지다.
나 또한 그의 파멸을 바라고 있었다.
* * * * *
“우리엘 디아블로? 그 100년 잠에서 깨어난 녀석 말이냐?”
“흠, 둠이 말하길 그 역시 태양왕의 피를 이었다는군.”
“그래봤자 최약체의 데몬로드 아닌가. 멸제의 카르페디엠 따위를 잡았다고 머리가 돌아버린 것은 아니겠지?”
“분명한 건 처음으로 태양왕의 얼굴에 ‘금’이 갔다는 거다. 적어도 우리엘 디아블로와 신조의 반항으로 인해 태양왕이 흔들리기 시작했다는 것은 확실.”
“······ 일이 재밌게 돌아가는군.”
팔콘 파벌의 데몬로드들이 서로 대화를 나눴다. 이러한 대화는 그들만이 아니라 모든 데몬로드들이 은연중 나누고 있는 것이었다.
태양왕이 흔들렸다. 그의 철면과 같았던 가면이 드디어 깨졌다.
어느 정도 ‘격’을 지닌 인물들은, 단순한 감정의 변화만으로도 보다 많은 의미를 내보일 수 있었다. 그리고 태양왕 정도 되는 자의 흔들림이라면 보다 강한 격변을 선사할 것이다.
기회였다. 그를 끌어내릴.
“팔콘님. 왜 인상을 찌푸리고 계십니까?”
허나 팔콘은 팔짱을 낀 채 인상을 구기고 있었다.
데몬로드 하나가 그 이유에 대해 묻자, 팔콘은 고개를 저었다.
“마음에 들지 않아.”
“무엇이 말입니까?”
“태양왕과의 협상은 결렬되었다. 결국 우리 둘 중 하나만 살 수 있다는 뜻이지.”
“그 태양왕조차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절호의 기회입니다.”
“허나 그 기회를 부여한 게 ‘우리엘 디아블로’다. 어떻게 신조를 길들인 건지는 모르겠지만 태양왕 휘하의 놈들에게도 적잖은 영향을 줄 테지.”
“그래봤자 우리엘 디아블로입니다. 놈 혼자서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맞는 말이다. 우리엘 디아블로는 태양왕의 근간을 흔들었다. 사천왕 중 하나만 무너져도 이 싸움, 확실한 우위를 점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엘 디아블로. 놈이 걸린다.
“어떻게 살아있는 거지?”
“살아있다니요?”
“멸제의 카르페디엠을 죽였다. 그 제로가 그것을 가만히 방관하고 있는다고?”
계속해서 걸리는 점이었다.
제로. 그 역시 파벌의 수장이고, 지옥왕에게 후원을 받는 존재였다.
솔직히 모든 수장들 중에서도 제로가 가장 베일에 싸였다. 놈은 도무지가 알 수가없는 녀석이었다.
그리고 지금, 제로는 지옥왕과 그의 하수인들을 상대로 미친 듯한 존재감을 뿜어내는 중이었다. 모두를 죽이고 죽이며 어쩌면 지옥왕조차 무릎꿇릴지 모른다.
그의 악명대로였다. 마음에 들지 않는 모든 것을, 자신의 것을 건드리는 모든 자들을 말살해버리는 제로다웠다.
그런데······ 아무리 멸제의 카르페디엠이 최약체라 하더라도 제로 파벌에 속해있건만, 그를 죽인 우리엘 디아블로를 묵인한다?
‘이상해.’
뭔가가 있다.
그 제로가 이만한 사건을 그냥 넘어갈 리 없잖은가.
“소문입니다만, 제로가 우리엘 디아블로에게 손을 내밀었다고 합니다.”
“무슨 의미지?”
“멸제의 자리를 대신해서 들어오라는 것이었지요.”
“흠, 그렇다면 당연히 손을 잡았겠군.”
아주 납득이 되는 건 아니지만 이해할 수 없는 범위는 아니었다. 그러나 말을 건넨 데몬로드가 고개를 저었다.
“거부했다고 하더군요. 물론 뜬소문일 수도 있습니다만.”
“그럼 더욱 놈이 살아있는 게 이상해지지 않나?”
“하지만 코끼리가 굳이 개미 하나하나를 찾아가며 밟지는 않지 않습니까?”
“아니다. 분명히 우리엘, 놈에겐 무언가가 있다.”
제로는 봤지만 자신은 보지 못한 것.
분하지만 그런 게 있을 수는 있었다.
그게 무엇인지 파악해야 한다. 따지고 보면 이 판을 새로 만들고, 태양왕의 가면을 깬 것 모두 우리엘 혼자서 해낸 일이었다.
다른 데몬로드들이 ‘고작 우리엘 디아블로’라고 칭하는 녀석이 말이다!
‘대체 뭐냐. 무엇을 갖고 있는 거냐.’
팔콘은 우리엘 디아블로를 주시했다.
자신이 놓친 게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
* * * * *
[권능보다 상위의 격을 지닌 ‘신조 람’을 지배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지배자의 권능이 가진 범용성이 넓어집니다.]
지배가 불가능했던 것들이 가능하게 변했다. 지배자의 권능이 가진 한계는 10Lv 안팎의 존재들이었으나 신조를 길들이는데 성공하며 그 범위가 넓어진 것이다.
물론 당장은 사용할 수 없었다. 포인트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능성은 더욱 많아졌다. 단순히 포인트만 있다면 강력한 존재들마저 내 휘하로 들일 수 있다는 뜻 아니겠는가?
“우리 왕께서 너에게 관심이 있으시다. 항복하겠다면 중히 사용해주마.”
상대는 지옥왕의 하수인, ‘엘더 리치’라 불리는 존재였다. 최상위의 리치 종으로, 나도 직접 보는 건 처음이다. 심연에서조차 두려워하는 리치라니.
그리고 지금 지옥왕이 내게 러브콜을 보내온 것이었다. 태양왕의 신조를 길들였으니, 내가 그의 편에 서면 ‘명분’을 실어주겠다는 거다.
얍삽한 녀석.
“거절한다.”
나는 누구의 아래에도 들어가지 않는다.
무모하지 않느냐고?
어차피 놈들은 괴물이고 악당이다. 밑으로 들어간다고 얌전히 사용해줄 리가 없었다. 잔혹하게 혹사시키고 마지막엔 버리는 패로 사용하겠지.
“무모하군. 아무리 데몬로드라도 엘더 리치인 나를 상대하긴 어려울 텐데.”
엘더 리치. 그는 저주 받은 존재다.
하지만 나도 저주라면 일가견이 있었다.
‘검은 별.’
검은 별. 대상 하나를 지정해 극악의 저주를 선사하는 우리엘 디아블로만의 공격적인 권능!
애당초 우리엘 디아블로는 전투형이 아니다. 그럼에도 전투에 참전한 건, 1:1의 대결이라는 이점 때문이었다.
이 싸움이라면 나도 싸울 수 있다. 싸워서 이길 수 있었다.
휘이이이잉!
곧 내 위로 거대한 검은 별 하나가 떠올랐다.
별이 비추는 자는 엘더 리치. 별을 본 리치가 한 발자국 물러섰다.
“이 저주는 고대에 사라진 것이었을 텐데······! 어찌 데몬로드가 무저갱의 왕의 저주를 사용할 수 있단 말이냐!”
검은 별이 고대의 저주라고?
처음 듣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면, 우리엘이 이 저주의 권능을 얻었을 때의 기억은 없었다. 단순히 갈고 닦은 저주라고만 생각했는데.
동화율이 무척이나 높아진 지금도 오한성의 몸으로는 이 저주를 사용할 수 없었다. 오로지 우리엘만이 사용하는 게 가능했다.
“놀랍지만 그뿐이다. 그래봤자 허약한 마족 따위가 모든 저주의 집합체인 나를 이길 순 없다!”
약화의 저주. 리치의 움직임이 느려졌다.
하지만 여전히 쉽지 않은 싸움이 될 것만은 분명했다.
나는 최대한 냉정히 상대를 바라봤다.
스르릉.
그리고 검을 꺼냈다.
월천. 여태껏 드러내지 않았으나 처음으로 선보인 무기.
월천을 꺼냈다는 건, 내가 작정하고 이 전쟁에 참여하겠다는 의미였다.
‘이긴다.’
그리고 반드시 승리하겠다는 의미였다.
* * * * *
“로드께서 검술을······?”
가장 먼저 라이라가 고개를 갸웃했다.
우리엘 디아블로. 그가 검을 쥐고 흔드는 모습은 살아생전 처음보는 것이었기에.
하지만 놀란 건 그녀만이 아니었다.
“저 검은······.”
“대라선께서 사용하시는 검이잖아?”
오룡. 그들도 적잖이 놀라고 있었다.
더욱 놀라운 건 검술. 심연에는 체계적으로 ‘검술’이라 칭할 만한 사료가 적다. 오로지 자격이 있는 자들이 조심스럽게 계승하는 것이며, 그조차도 조악한 게 대부분이었다.
애당초 ‘기술’이 필요할 정도로 약한 자들이 그런 공부를 하는 것이다. 심연의 강자들은 존재만으로 강한데 뭐하러 기술을 갈고닦을 필요가 있겠는가?
헌데, 강자 중의 강자가 펼치는 검술은 달랐다.
“저, 저 검술······! 대라선께서 사용하는 검술이잖아!”
“어떻게 된 거야?”
“구화린. 뭐 아는 거 있나?”
“······ 나도 몰라.”
미치도록 무거우며 한방한방이 무거운 검무였다. 오로지 적의 목숨을 끊어내고자펼치는 살의의 결정체!
대라선의 검술이다.
마치 대라선인 오한성과 동일인물이라도 되는 것 같지 않은가.
콰드드득!
이윽고 엘더 리치의 전신이 박살나며 흩어지고 승패가 결정 났다.
“······ 로드시여.”
라이라는 놀라움에 사로잡혀 그 장면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 41. 왕의 자격(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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