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신사냥꾼-173화 (174/251)

< 40. 태양왕(6) >

잘못 들은 게 아니다. 잘못 보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태양왕은 둠이 사자왕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알고서’ 나왔다. 내가 전해준 말을 귓등으로 흘려듣지 않은 이상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없을 텐데도.

무슨 자신감이지? 아니면 잠시 머리가 돌아버린 건가?

‘심안.’

나는 다시 제 3의 눈을 열었다. 심안으로 살펴본 정보창은 객관적인 기준을 나열해준다. 분명히 둠과 태양왕의 능력 차이는 확연했다. 하지만 혹시나 내가 놓친 게 있을 수도 있으니 다시금 살피기 위해서다.

이름: 태양왕(value-지배불가)

직업: 사천왕

명예: 260,855

칭호:

● 태양왕(10Lv, 모든 능력치+8)● 비밀을 삼키는 자(10Lv, 마력+18)능력치:

힘 108(100+8) 민첩 108(100+8) 체력 108(100+8)지능 125(100+25) 마력 156(110+46)잠재력(510+95/510)스킬: 심연(11Lv), 전능자(10Lv), 마안(10Lv)착용 중인 장비: 태양의 시대(지능+17), 아홉 개의 심장(마력+20)분명히 낮은 능력치는 아니다. 총합능력치 605. 우리엘 디아블로, 지금의 나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이조차도 소위 ‘템빨’에 의한 경향이 컸다. 태양왕의 쓰고 있는, 불처럼 이글거리는 문양이 새겨진 투구는 지능을 무려 17이나 올려주는 극한의 장비였다.

하물며 아홉 개의 심장은 어떤가. 무슨 장비인지 외관상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마력을 20이나 올려주는, 나로선 살아생전 처음 보는 엄청난 것이었다.

오딘의 보물창고에서조차 저 비슷한 것도 본 적이 없을 정도였으니.

하지만 저 두 개를 가지고도 둠에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격차가 너무 커.’

둠은 더욱 강해졌다. 급격하게 강해져서 여타 다른 데몬로드들 보다 한 차원 높은곳에 올라갔다. 태양왕이 약한 건 아니지만, 차이가 확연했다.

다시금 시선을 돌려 이번엔 둠을 바라봤다.

이름: 둠(value-지배불가)

직업: 데몬로드

칭호:

● 둠(10Lv, 모든 능력치+8)

● 파멸의 전조(10Lv, 모든 능력치+8)● 갈망하는 자(7Lv, 모든 능력치+4)능력치:

힘 140(120+20) 민첩 140(120+20) 체력 140(120+20)지능 140(120+20) 마력 140(120+20)잠재력(600+100/600)스킬: 심연(11Lv), 파멸(10Lv), 지옥도(10Lv), 버닝 둠(10Lv)단순히 능력치의 계산만 하더라도 거의 백 가량의 차이가 난다. 이는 어른과 어린아이의 싸움만큼이나 큰 차이였다. 능력치는 높아질수록 기하급수적으로 그 효율이증대하는데, 지금 둠의 경지는 나로서도 상상이 힘들 수준이니 말은 다했다.

그런데 둘이서 1:1로 싸운다고?

‘자살행위.’

나였으면 절대로 안할 짓이다. 아무리 믿는 구석이 있어도 저만한 ‘격의 차이’를 따라잡긴 힘들 것이므로.

무슨 자신감일까?

태양왕은 내가 한 말을 한 귀로 흘린 걸까?

‘게다가······ 심안과 비슷한 스킬을 태양왕도 가지고 있다.’

마안이라 칭해지는 것. 무려 10Lv의 관찰계열 스킬이다. 심안과 무엇이 다른지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그의 눈은 분명히 둠을 꿰뚫어보고 있었다.

그런데도 도전한다?

‘뭘 믿는 거지? 권능?’

권능은 상태창으로 온전하게 확인할 수 없다.

예컨대 우리엘이 사용했었던 미래선택, 그리고 지금 사용하고 있는 관리자의 권한 등등은 상태창에 나타나지 않는 고유의 것이었다.

그러니······ 심안으로 놓친 게 있을 순 있다.

있을 순 있지만, 그래도 저 차이를 극복할 수 있느냐하면 회의적일 수밖에 없었다.

“태양왕이여. 모두가 성 밖으로 나오지 않는 너를 궁금해 했다. 새로이 즉위한 뒤로 이렇다 할 행보를 보여준 적이 없지 않느냐? 솔직히 너만큼은 이번 전쟁에 참여하지 않을 줄 알았다만······.”

전쟁이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둠과 태양왕의 대결. 이는 모두가 궁금해 하는 대전이었다. 어쩌면 전쟁의 승패가이 싸움 한 번으로 나뉠 수도 있는 것이다.

게다가 이번 싸움은 태양왕의 데뷔전과도 같았다.

태양왕은 오롯이 서서 둠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그의 얼굴엔 여전히 표정이라 할게 나타나지 않았다. 자신감도, 공포도, 이렇다 할 어떠한 감정마저도.

대신 고개를 들어 소환 중인 니드호그를 바라봤다.

“태초의 저주, 저 만능의 성배를 보고 가만히 있을 순 없었지. 저주받은 신전에 모인 저주만으로는 부족했을진대, 무슨 마술을 부린 것이냐?”

하지만 무표정한 얼굴 뒤에는 분명히 궁금증이 묻어있었다. 저렇게 무미건조하게물을 수 있다는 것도 놀랍지만 둠은 얕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애당초 태양왕이 전쟁에 참여한 이유는 다른 사천왕과 달랐다. 그의 관심은 오로지 니드호그에게 가 있었다. 저 저주받은 뱀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나를 이기면 알려주마. 과연 너는 사자왕만큼이나 강할지 모르겠군.”

둠은 자신만만했다.

그 역시도 느끼고 있을 것이다. 힘의 차이는 커지면 커질수록 여실하게 차이를 드러내는 법이었으니까.

태양왕은 무심히 말했다.

“굳이 답할 필요는 없노라. 너의 머리를 뜯어 뇌를 유린하면 그만이니.”

둘을 중심으로 거대한 원이 만들어졌고, 팽배한 긴장감이 맴돌았다.

나는 가만히 둘을 지켜보다가 주먹을 쥐었다.

‘이대로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 순 없다. 모두의 시선이 저 둘에게 쏠린 사이 내가 할 수 있는 게 있을 거다.’

하지만 얌전히 구경만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저 둘이 싸워서 미래를 결정한다? 내가 개입할 여지가 없는데다 결과의 승부도 순전히 운에 맡겨야 한다. 그다지 바람직한 상황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제 와서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태양왕과 둠. 사천왕과 데몬로드 최강자의 싸움이다. 우리엘 디아블로는 고작해야 말단의, 우호적인 세력 하나 없는 아웃사이더였고.

‘둠을 부추긴 건 성공했지만······.’

태양왕에게 일부러 둠을 공격하지 말라고 했다. 팔콘은 전장에서 멀어졌고, 둠이 의심을 받게 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전쟁을 주도한 둠이 의심받으며 전쟁은 당위성을 조금씩 잃어가고 있었다. 이대로 시간이 흐르면 희망이 없다는 걸 둠도 알았을 테고, 그래서 태양왕과의 맞대결을신청한 것이겠지.

오해를 직접 풀겠다는 의미다.

‘외통수였어.’

솔직히 나는 둘 다 패배하길 바라는 심정이었다. 그나마 최선이라면 태양왕이 아슬아슬하게 이기는 건데, 그래도 모든 게 ‘엉망’이 되길 바라는 내 기대와는 거리가 먼 결과였다.

‘판을 망칠 수 있는 획기적인 수.’

그게 필요했다.

둘은 부딪히기 직전이었다. 뭔가, 다른 수가 없을까?

나는 시선을 돌렸다. 내 시선에 또 다른 데몬로드가 들어왔다.

‘안달톤 브뤼시엘.’

유일하게 나와 안면이 있으며 나름대로 호의를 보였던 데몬로드가 그다.

둠은 그를 사자왕의 배다른 형제라고 했다.

그리고 현재, 공식적으로 사자왕은 죽었다.

계승권······ 유일한 계승권이 그에게 있는 게 아닌가?

그러고 보니, 둠이 굳이 안달톤 브뤼시엘에 대해서 언급한 건 중립 성향의 데몬로드들도 결집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경고’의 의미가 아니었을까.

‘아.’

둔기로 뒤통수를 크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둠은 일부러 말을 많이 한 게 아니다. 한 마디, 한 마디에 모두 의미가 있었다. 안달톤 브뤼시엘. 사자왕을 죽인 둠이 직접 사자왕의 배다른 형제를 언급한 건, 미리 선수를 쳐서 그의 ‘정당성’을 잃게 만들기 위함이다.

사천왕은 우리의 적이다. 사자왕의 배다른 형제여, 네가 그것을 언급하는 순간 너역시 우리 모두의 적이 될 것을 각오하라고!

‘지금이라면.’

생각보다 행동이 빨랐다.

모두의 시선이 중앙으로 쏠린 사이 나는 안달톤 브뤼시엘에게 다가갔다.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을 건가?”

“우리엘 디아블로. 그건 무슨 의미지?”

“사자왕을 죽인 둠이 태양왕마저 죽인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나?”

“이 전쟁이 일방적으로 끝나겠지. 아마도 ‘위대한 별’ 역시 그의 아래로 떨어질 것이다.”

안달톤 브뤼시엘은 먼 미래마저 보고 있었다.

저 둘의 승패에 따라, 둠이 승리한다면 모든 전쟁의 ‘종결’을 의미했다.

그가 말하는 게 맞다. 사천왕을 둘이나 죽인 둠은 결국 위대한 별을 거머쥘 것이다. 내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결과를 바꾸긴 어려우리라.

“누가 이겨도 그다지 좋은 결과는 나오지 않는다. 허나, 안달톤 브뤼시엘이여. 너에겐 저 대결에 ‘참가’할 자격이 있다.”

“참가할 자격이라······ 내가 사자왕의 배다른 형제가 맞다손 치더라도, 받아들인건 태양왕이다. 끼어들 명분이 없는데?”

“그저 ‘발언’만 하면 된다. 사자왕이 죽은 지금, 너는 유일한 계승자가 아닌가?”

안달톤 브뤼시엘은 답하지 않았다.

무언의 긍정이었다.

역시나. 예상이 맞았다. 유일한 계승의 자격이 지녔기에 굳이 둠이 언급하면서까지 견제한 것이다. 이 판을 뒤엎을 수 있는 유일한 ‘하나’이기 때문에!

“내가 왜 중립을 자처하는 줄 아느냐.”

“사자왕과 연관되기 싫은 기억이라도 있는가보군.”

“나는 그가 싫다. 그의 모든 걸 부정한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계승자임을 선포하란 말이냐?”

염치없는 짓이다. 누구도 바라지 않고, 심지어 안달톤 브뤼시엘마저 원치 않았다.

나는 그와 정면으로 마주했다.

“그럼 이대로 ‘위대한 별’이 둠의 손에 넘어가는 걸 보고 있을 건가?”

“우리는 모두가 경쟁자다. 강한 자가 얻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둠은 편법을 사용하려고 하고 있다. 그는 ‘우리의 전쟁’을 말했지만, 결국 이 대전의 결과에 따라 ‘둠의 전쟁’이 되어버리겠지. 승자가 정해진, 아무런 의미도 없는.”

또 다시 안달톤 브뤼시엘이 입을 닫았다.

나는 그를 봤다. 거신, 위대한 별의 앞에서.

‘너는 나의 것이다’라고 말하는 그를 직접 봤으니 알 수 있다.

안달톤 브뤼시엘은 누구보다도 ‘위대한 별’을 갈망하고 있었다.

“우리는 모두가 평등한 경쟁을 해야 한다. 저런 편법을 가만히 보고 있다면, 위대한 별의 가치도 그만큼 떨어질 수밖에 없겠지.”

“가치가 떨어진다······ 특이한 말을 하는군.”

“둠이 가질 바엔, 네가 갖는 게 낫다. 또한 이번에야말로 사자왕의 그늘을 벗어날절호의 기회일지도 모른다.”

나는 둠에 대한 적의를 보였다.

동시에 둠과 사자왕에 관한 짧은 정보를 던졌다.

이야기를 들은 안달톤 브뤼시엘이 가만히 나를 바라봤다.

그러더니 피식 웃었다.

“지금의 너를 평하자면, 협잡가다. 허나 이번만은 어울려주마. ‘그’도 너를 유심히 지켜보라 하였으니.”

“······ 그?”

“랜달프 브뤼시엘. 악신 말이다.”

아.

에인션트 원의 권한을 얻었을 때, 여섯 개의 세계 중 하나에서 악신 랜달프 브뤼시엘을 잠깐 본 적이 있었다.

그때 영혼이 하마터면 소멸할 뻔 했지만······ 설마 그 악신과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는 건가? 다른 데몬로드들은 권능만 받고 끝났지만, 안달톤과 악신의 관계는 조금 더 가까운 듯싶었다.

“내가 무엇을 하면 되지?”

내심 주먹을 불끈 쥐었다.

됐다.

* * * * *

태양왕과 둠은 거리를 둔 채 서로를 한동안 직시하고 있었다.

간을 보는 거다. 먼저 움직이는 쪽이 ‘패’를 보이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초강자의 대결이란 자그마한 실수로도 치명상을 입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길 수분 여.

둠이 먼저 움직였다.

태산과 같은 기세로 태양왕을 몰아치기 위해서다.

“잠깐.”

하지만 막 공격이 닿으려는 찰나, 그는 멈춰 설 수 밖에 없었다.

안달톤 브뤼시엘. 그가 둘의 사이로 끼어들었기 때문이다.

“······ 뭐하는 짓이지?”

둠이 표정을 굳히며 물었다.

그러자 안달톤 브뤼시엘이 어깨를 으쓱했다.

“나는 사자왕의 계승권을 가진 안달톤이다. 사자왕이 죽은 지금 나는 유일한 계승권자기에 임시이나마 그 권한을 이어받을 자격이 있지.”

둠의 표정이 더욱 굳었다.

태양왕은 약간이나마 흥미롭다는 듯 안달톤을 바라봤다.

안달톤이 이어서 말했다.

“그러니 고한다. 이 싸움······ 조금 더 판을 키워보지 않겠는가?”

판을, 엎을 수 없다면 키운다.

미친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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