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 태양왕(5) >
둠이 사자왕이라는 추측은, 오로지 나만이 낼 수 있는 결론이었다. 나찰각에서 둠을 보고 이곳 심연에서 비교할 수 있었던 나만이 도달할 수 있는 유일한 길.
물론 틀릴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가능한 하나만으로도 모든 걸 뒤엎기엔 충분하다. 태양왕 역시 뒤통수를 맞기는 싫을 것이기에.
하지만 태양왕도 온순히 손을 내민 것은 아니었다.
‘나의 가치를 증명하라.’
그는 그렇게 말했다.
우리엘 디아블로. 네가 정말 데몬로드라면, 그만한 가치를 증명하라고.
태양왕은 현명했다. 적어도 자신의 주관이 뚜렷하며 몇몇 데몬로드와 달리 사리분별이 정확한 듯싶었다.
가치의 증명. 그 외에 그가 내게 던져준 단서는 없지만, 얼추 감은 잡은 상태였다.
‘팔콘.’
태양왕은 팔콘을 쳐냈다. 자신이 후원해주던 파벌과 그 수장 모두를 아무런 미련 없이 버려버린 것이다.
동시에 힘의 공백이 생겼다. 그 힘을, 내가 취할 수 있는 기회였다.
허나 태양왕을 후원자로 둘 생각은 없었다. 어디까지나 내가 바라는 건 동등한 관계에서의 ‘협조’였다. 그의 휘하로 들어가는 순간 수렁에 빠질 것은 자명했으니.
‘내가 태양왕과 접선한 사실은 아무도 모른다.’
우리엘은 마족이지만 오한성은 인간이다. 심연의 존재가 아니기에 누구의 감시도받지 않는다. 고로, 내가 몰래 태양왕과 ‘협약’을 맺었다는 걸 데몬로드 중에선 누구도 모른다는 뜻이다.
이 두 가지 입장을 이용해 충분히 혼선을 줄 수 있을 것이었다.
“우리엘? 우리엘 디아블로?”
생각은 깊었고 행동은 빨랐다.
결딴을 한 즉시 나는 팔콘의 진영을 찾아갔다. 그는 제법 내게 관심을 갖고 있었다. 내가 태양왕의 ‘혈연’이기 때문이다.
팔콘은 의외라는 듯이 나를 쳐다봤다.
“태양왕에 대해 할 이야기가 있다.”
“······ 그와 우리는 전쟁 중이다.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겠지?”
내심 웃고 말았다.
전쟁 중이라고?
몰래 전령을 보내 간을 보던 게 팔콘이란 걸 나는 알고 있었다.
전령이 죽자 그의 진영에도 혼선이 찾아왔다.
아마도 팔콘은 자신의 전령을 태양왕이 그토록 쉽게 죽일 줄은 몰랐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대놓고 웃을 수는 없다. 지금의 나는 우리엘 디아블로. 같은 데몬로드의 입장에서 그를 찾아온 거니까.
“나는 그의 약점을 알고 있다.”
“약점이라. 그 약점을 내게 말하려고 찾아온 거냐?”
팔콘은 우습다는 듯, 약간은 깔보는 어조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럴 만도 했다. 데몬로드, 그들은 철저한 마족이고 심연은 약육강식의 세계다. 데몬로드의 입장에 있는 자가 다른 이를 찾아가 이르는 꼴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여타 다른 데몬로드였다면 절대로 하지 않을 행동.
자신의 권위와 격을 떨어트리는 걸 자처하는 셈이다.
하지만, 나는 이용할 수 있는 건 모두 이용할 생각이었다.
‘나는 그들과 다르다.’
그들의 규칙대로 움직여줄 생각 따윈 터럭만큼도 없었다.
그들이 생각하는 명예를 중시할 생각 또한 없었다.
나는 오로지 승리를 위해 움직인다. 처절하고 철저하게 그들을 농락하고 분열시킬 것이다. 그것만이 내가 이길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기에!
“내가 태양왕의 혈연이라는 건 둠에게 들었으니 알고 있겠지.”
“미래선택 말이냐?”
미래선택. 말 그대로 미래를 선택하는 권능. 절대적이며 가능하다면 무적이라 칭할 수 있는 권능이다. 미래를 마음대로 선택해버리는데 어떻게 대항하겠는가.
팔콘은 고개를 저었다.
“터무니없다. 그게 가능했다면 태양왕은 사천왕이 아니라 유일신이 되었겠지. 너역시······.”
“미래선택은 한 번밖에 사용할 수 없다.”
그제야 팔콘의 눈에 흥미가 깃들었다.
“꽤 흥미롭군. 하지만 그게 앞으로의 전황과 무슨 관계가 있다는 거지?”
“적어도 두려워하진 않아도 되겠지. 데몬로드라도 공포를 느끼지 않는 건 아니니말이다.”
맞다. 모두가 은연중 위축되어 있었다. 내게 보내는 시선도 조금은 달라진 상태였다. 모두가 둠이 말한 ‘미래선택’ 때문이다.
하지만 그 권능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면, 두려움을 걷어낼 수 있다. 그것만으로도 전장의 상황이 바뀔만한 것이었다.
팔콘이 긴 날개를 펼쳤다. 모든 데몬로드 중에서 그의 날개가 가장 크고 아름다웠다.
“두려움이라······ 내가 태양왕을 무서워한다고 생각하는 거냐?”
“설마. 하지만 휘하의 모두가 괜찮은 건 아닐 것이다.”
하나라도 흐트러지면 전체에 영향이 간다. 전쟁이란 그런 것이다. 작은 파츠 하나가 더할 나위 없이 비대해지는 경우도 있었다. 흔히 말하는 나비효과를 가장 여실히맞이하는 곳이 바로 전장이었다.
나는 계속해서 말했다.
“그리고 그 자체가 그의 약점이 되기도 한다.”
“미래를 선택할 수 없다는 게 말이냐?”
“한 치 앞을 볼 수 없다는 것. 태양왕이 즉위한 이후 처음으로 맞이하는 유례없는전쟁이다.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가지 수는 많지 않아. 불안함을 감추고자 무리수를 두기도 하겠지. 예를 들자면······ 이미 다른 자와 손을 잡았다거나.”
“다른 자와 손을 잡았다?”
팔콘의 표정이 굳었다.
태양왕이 그를 쳐낸 직후다. 그러한 가능성에 대해서 생각자체를 안해본 건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 생각에 나는 지금 쐐기를 박고 있었다.
“가장 가능성이 높은 건 둠이다. 그는 사자왕의 비고에서 나와 태양왕의 관계, 그리고 권능을 알았다고 하지만, 과연 그럴까?”
“하지만 둠은 안달톤 브뤼시엘에 관해서도 알고 있지 않았느냐?”
어조가 달라졌다.
그저 그런 흥미에서, 집중도 높은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반은 왔다.’
앞으로 한 걸음.
이제는 더욱 예쁘게 포장을 할 차례였다.
“안달톤 브뤼시엘이 사자왕의 배다른 형제라는 사실. 그것이야말로 비고에서 찾은 기밀이겠지. 둠이 사자왕을 죽였으나, 살기 위해 이곳에 모든 데몬로드들을 끌어들였다. 니드호그라는 저주받을 뱀을 소환해가면서! 말과 행동은 그럴싸하지만, 둠과 같은 자가 한 우물만 파둘 리는 없겠지.”
“그래서 태양왕과 손을 잡았다······.”
팔콘이 생각에 잠겼다.
근거도 없지 않았다. 나와 태양왕의 관계에 대해 알고 있다는 것 자체가 근거다. 빈약하지만, 의심을 하기엔 충분하다.
작은 의심 하나가 큰 틈을 만든다.
“둠과 태양왕이 손을 잡았다면, 그런 행동을 한 이유도 설명이 되는군.”
“그런 행동?”
짐짓 모르는 척 되물었다.
아마도 자신의 전령을 죽인 것에 대해 스스로 답을 내린 것이겠지.
내가 한 말들은 씨가 되어 훌륭하게 발아했다. 팔콘의 눈과 귀를 어지럽히며 그가잘못 된 길을 가도록 안내하고 있는 셈이다.
팔콘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게 있다. 다소 의아스럽긴 하지만, 너의 말에도 일리는 있는 것 같군. 그래서, 네가 바라는 게 무엇이냐.”
팔콘. 그가 내 말에 올라탔다.
태양왕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했으면서, 실상은 다른 것 같았다.
아니라면 이처럼 쉽게 동조할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에게 파격적인 행사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무리한 요구는 들어주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어느 정도 서로가 타협이 가능한 선에서의 길을 제시할 필요가 있었다.
“전장에 참여하는 것을 최소화해라.”
“도망치라고? 불가하다. 다른 이들의 조롱거리가 되는 건 사절이다.”
“도망치라는 게 아니다. 그저 전장에서 조금 멀어져, 싸우는 ‘척’만 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둠과 태양왕의 관계가 드러나게 될 테니.”
“단순히 그것만으로 말이냐?”
고개를 끄덕였다.
그다지 어려운 부탁도 아니고, 팔콘도 어느 편에 설지 아직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때 둠과 태양왕 간의 밀착관계가 드러나면 둠은 입지를 잃는다.
태양왕 역시 사천왕들의 눈총을 받으며 이 사태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내가 바라는 건 혼란이다.’
나는 어느 쪽의 편도 들 생각 자체가 애당초에 없었다.
분란을 일으키며 ‘서로가 믿지 못하는 전쟁’을 만드는 게 나의 목적이었다.
등을 맡기지 못하는 동료는 동료가 아니다. 서로가 불신하며 상처를 후벼 파도록 만드는 게 내가 바라는 이상적인 전쟁이었다.
사천왕 vs 데몬로드가 아니라.
모두가 모두를 불신하는 그런 전쟁 말이다.
‘판을 엎고 새로 만든다.’
오로지 그것만을 위해, 나는 움직이고 있었다.
* * * * *
전쟁은 치열했다. 수많은 비명과 피의 웅덩이. 시체가 산을 이뤘고, 언뜻 보기엔 정말로 세기말이 찾아온 듯 보였다.
하지만 모든 전장이 그런 것은 아니었다.
둠과 그의 휘하 데몬로드들, 그리고 태양왕의 군단은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 태양왕이 노골적으로 둠과 그의 진영을 피하고 있는 것이다.
“둠. 네가 일으킨 전쟁이다. 어째서 싸움에 소극적이지?”
“가장 앞에서 더욱 많은 적을 도륙해야 하는 게 너의 역할 아닌가? 우리는 너의 입맛에 따라 희생당할 생각이 없다.”
하나, 둘, 데몬로드들이 의심하기 시작했다.
본래라면 팔콘이 태양왕의 상대를 맡아야 하지만, 그가 뒤로 빠지자 둠이 자연스럽게 그를 대신하게 되었고 주목을 받은 것이다.
둠은 그들의 의혹을 짧게 일축했다.
“태양왕은 나를 두려워한다.”
“그렇다면 태양왕을 짓밟아라. 진정으로 너를 두려워한다면 더욱 쉽게 짓밟을 수있겠지.”
둠이 인상을 구겼다.
태양왕. 그는 가장 상대하기 까다로운 적이었다. 알려진 게 매우 적었기 때문이다.
미지의 상대를 향해 돌격하는 건 미련한 짓이었다.
하지만 이 전쟁의 시발점인 둠은 사소한 것조차도 크게 부각될 수밖에 없었다.
“태양왕은 본래 팔콘의 상대가 아니었나? 그가 뒤로 빠져서 내가 빈자리를 채운 것이다.”
“태양왕이 공격하지 않을 것을 알고 일부러 튀어나간 걸 수도 있지.”
“태양왕과 손을 잡은 것 아니냐?”
온갖 의혹이 빗발쳤다.
더 이상 물러날 데가 없다는 걸 둠은 본능적으로 깨우쳤다.
“······ 좋다. 내가 태양왕의 상대를 맡겠다. 너희와 달리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주마.”
더 사태가 악화되면 걷잡을 수 없어진다.
결국 둠이 이를 갈며 앞장섰다.
* * * * *
얌전히 뒤에서 상황을 지켜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은 계획대로.’
둠과 태양왕을 부딪치게 만든다.
가장 좋은 건 아슬아슬한 우위로 태양왕이 승리하는 것이다.
최악의 경우는 둠이 손쉽게 태양왕을 제압하는 것이었다.
“태양왕! 겁쟁이처럼 숨어있지 말고 앞으로 나와라. 나, 파멸의 전조 둠이 너와의직접 대결을 청하노라!”
하지만 둠이 저렇게 무대포로 나올 줄은 나도 예상하지 못했다.
태양왕과 1:1이라니.
절대로 받아줄 리가 없다. 우리엘 디아블로의 기억이 정확하다면, 태양왕의 무력으론 둠을 절대 이길 수 없었다.
태양왕의 힘은 기껏해야 지금 내 수준이다. 반면 둠은 비약적으로 강해진 상태였다. 다른 파벌의 수장들이 힘을 합쳐야 둠 하나를 당해낼 수 있을 정도로.
능력치가 전부는 아니라지만 척도는 되었다.
그리고 그 척도의 차이가 너무나도 컸다.
태양왕은 무섭도록 냉정하고 합리적인 자이니 결코 받아들여주지 않으리라.
“받아주마.”
······ 미친.
태양왕이 모세의 기적처럼 괴물들의 물결을 반으로 가르며 앞으로 튀어나왔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할 말을 잃었다.
< 40. 태양왕(5)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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