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신사냥꾼-170화 (171/251)

< 40. 태양왕(3) >

모든 선택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서로가 서로를 끝장 낼 때까지 죽이거나, 둠의 말로 움직이며 그 의도대로 흘러가게 내버려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조커다. 모든 판을 뒤집어엎을 수 있는 단 한 장이 되어야 했다.

“······ 로드시여.”

내가 다가가자 라이라가 불안한 눈빛을 감추지 않고 말했다.

그녀의 옆에 있던 이그닐도 공포에 몸을 떨어대고 있었다.

저 멀리서 다가오는 기척들, 그리고 하늘 위를 좀먹은 ‘니드호그’의 존재.

뭐 하나 정상적인 게 없으니 불안할 것이었다.

“설명할 시간이 없다. 전쟁을 준비하라.”

“저만한 군단. 상대는 사천왕입니까?”

“사자왕을 제외한 모든 사천왕이다.”

“명령을.”

라이라가 짧게 고개를 숙였다.

사건의 심각성을 단번에 파악한 것이다.

나는 고민했다. 내 한 마디에 그녀는 자신의 생사를 신경 쓰지 않고 전장으로 뛰쳐나갈 것이다.

그리고 아주 높은 확률로 죽을 것이었다.

이는 내 목적에, 우리엘 디아블로의 소망으로도 거리가 먼 상황이다.

‘내게 유리한 점을 살려야 한다.’

다른 데몬로드들과 다르게 내게 유리한 점이 있다면······.

‘신성. 그리고 정보와 전이.’

신성은 거신과 싸울 때만 한정되니, 이는 최후의 보루였다.

결국 정보와 전이. 두 가지로 상황을 타파해야 한다.

이대로 전쟁에 아무 준비 없이 나가는 건, 죽음을 의미했다.

게다가 갑자기 만들어진 이 판도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데몬로드가 멸망하는 것은 내가 바라마지않는 거지만 그래선 진실로 모든 ‘끝’이 아니었으니.

‘진정한 끝을 보기 위해 내가 취해야할 행동.’

생각한다.

결국 모든 실타래는 ‘위대한 별’과 이어져 있었다.

실타래를 풀지 않고선 미래를 바꿀 수 없다.

데몬로드 모두가 죽어도 누군가가 ‘위대한 별’을 탐하는 이상 지구는 멸망할 것이다.

둠의 말처럼 온전한 ‘우리의 전쟁’을 해야 했고, 그러기 위해 사천왕을 죽이는 것도 언뜻 타당하게 들리지만, 반대로 그처럼 정상적인 전쟁은 내가 승리할 가능성 자체를 없애버리는 것이었다.

‘정상적인 전쟁은 내가 바라는 게 아니야.’

온전한 데몬로드의 전쟁?

아서라.

틈이 필요하다. 사천왕의 존재는 그 틈을 벌릴 훌륭한 매개체였다.

물론 니드호그가 강림했으니 누군가는 죽어야 한다.

그러다가 둠이 말한 이야기에서 이상한 바를 포착했다.

‘사자왕이 죽고 니드호그가 사라졌다면, 굳이 모두를 죽일 필요는 없다는 거겠지.’

사천왕 중 하나의 죽음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뜻.

내겐 다른 데몬로드들이 가진 사천왕에 대한 적의가 없다.

그러니 더욱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에 태양왕과 접촉할 수단이 존재하고, 그의 마음을 돌릴 수만 있다면, 전쟁의 승기가 완전히 이쪽으로 기울 터.

하지만 태양왕이 다른 사천왕과 같이 자신의 불멸성을 지키고자 모든 데몬로드들을 죽일 작정이라면 이 작전도 별 소용이 없다.

그러나 아예 손 놓고 있는 것보단 나았다.

‘게다가 둠이 정말로 사자왕을 죽이고 적대적인 관계로 돌변했는가에 대한 신빙성이 없다.’

교묘한 말로 감췄지만, 정말로 사자왕은 죽은 걸까?

믿을 수 있는 객관적인 정보가 없었다.

그저 사라졌다는 게 전부.

다들 시간과 상황에 쫓겨 액면 그대로의 말에 신뢰성을 던진 것에 불과했다.

모든 걸 믿을 수 없으니 나만의 ‘길’을 모색해야 했다.

‘문제는 이곳에서 태양왕에게 접근할 방법이 전무하다는 건데.’

혼자 따로 노는 건 불가능하다. 전장에 본격적으로 돌입하게 되면 이탈은 곧 죽음이다. 무엇보다 다짜고짜 데몬로드인 내가 움직인다면 모든 것들이 경계할 게 분명했다.

데몬로드들도, 사천왕들도.

이그닐을 바라봤다.

“이그닐.”

“으응?”

“‘문’을 열어 다른 사람을 보낼 수 있나?”

이그닐은 모든 문을 열 수 있다. 화천과 싸울 때의 현상은 그때가 처음이었지만 다른 걸 보내는 게 가능하다면 사람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이그닐이 고개를 끄덕였다.

“있어!”

좋다. 전송이 가능하다면 내가 취할 수 있는 선택의 폭이 넓어진다.

태양왕에게 누구의 주목도 받지 않고 다가갈 수 있는 존재가 필요했다. 더불어 본신의 능력이 우수하며 만일의 사태에서 살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어야 한다.

라이라도, 이그닐도, 이곳에 있는 누구라도 눈에 띈다.

하지만 제 3자. 전혀 연관이 없을 것처럼 보이는 존재가 있었다.

“또 다른 ‘나’를 이곳으로 전송시킬 수 있겠느냐?”

“이그닐, 아빠 말 잘 들어. 해볼게.”

물론 위험은 동반한다. 그래도 걸어볼만한 도박이었다.

우리엘의 시선으로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 둠의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우리엘과 태양왕이 ‘혈연관계’라면 풀리지 않았던 의문점들이 풀린다.

내가 태양왕에게 전할 것은 하나뿐이었다.

-미래선택에 관해 할 이야기가 있다고.

어디까지나 확률은 반반이다.

실패는 곧 죽음이다. 하지만 걸어볼만 한 도박이었다.

반대로 성공한다면······.

‘판을 뒤엎을 수 있다.’

둠이 만든 판이 아닌 온전히 나만을 위한 ‘판’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둘 중 하나만 살아남는 건 내가 바라는 게 아니다.

사천왕이 승리할 경우 나는 죽을 것이며, 둠을 비롯한 데몬로드들이 승리할 경우 내 바람은 멀어진다.

그러니······ 일회성이 아닌, 서로가 계속해서 끊임없이 싸우도록 만들 구실이 필요했다. 이 상황만 잘 타개하면 ‘틈’은 벌어지고 내 영향력이 더욱 비대해질 기회를 얻을 수 있을 터였다.

‘판을, 뒤엎는다.’

반드시 그래야 했다.

* * * * *

왕들이 저 너머를 바라봤다.

거대한 뱀은 조금씩 소환되며 먹이를 노리는 중이었다.

저 뱀, 니드호그가 완전하게 깨어나기 전에 결착을 지어야 한다. 왕들도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

태양왕.

그도 그중 하나였다. 사천왕 중 가장 젊은 피였으며, 모든 게 베일에 쌓여있는 신비주의자.

그리고 그의 앞에 ‘전령’이 도착해 있었다.

“태양왕이시여. 팔콘께선 지금의 충정을 저버릴 생각이 없다고 하십니다. 당장이라도 필요하다면 둠의 목을 바칠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태양왕.

거대한 거구의 마족이 전령을 바라봤다.

전령은 몸을 떨어대며 최대한 조아렸다.

태양왕이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 뼈저리게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공포’는 팔콘조차도 두려움에 떨게 만들기 충분했다.

다른 사천왕과 달리, 새로이 즉위한 태양왕은 자신의 적들을 모두 깨부수며 올라갔다. 그 과감함과 비정함은 모두의 충의와 공포를 사기에 차고 넘쳤다.

“둠의 목 따위는 내가 알 바가 아니다.”

태양왕이 거대한 손을 들어 목을 긁적였다. 수천만의 괴물을 다스리는 심연의 왕.그의 말 한 마디에 모든 게 이뤄진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는 힘이 그에겐 있었다.

“어찌하면 저희의 충정을 알아봐주시겠나이까?”

“뱀을 잡아오라.”

“······ 뱀이라 하시면?”

태양왕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주제도 모르고 하늘을 뒤덮은 저 녀석 말이다.”

“니드호그 말입니까?”

“그런 이름이었지. 나는 저 뱀에게 ‘위대한 별’을 먹이고 그 배를 가를 것이다. 뱀의 배에서 나온 정수의 힘은 감히 세계를 재구성할 정도의 것일 테니.”

······ 보는 게 다르다.

다른 왕들은 사냥개가 자신을 사냥감으로 보는 것에 대한 반발로 공격을 시작했지만, 애당초 태양왕은 그런 건 안중에도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둠의 말에 따르면 저 뱀을 잡는 건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저 뱀은 태초의 저주와 같은 존재. 뱀을 잡으려면 그와 같은, 그 이상의 저주가 필요하다.”

태양왕의 눈이 지평선 너머를 바라봤다.

“그런데 마침 이곳에 알맞은 먹이들이 있지 않느냐?”

알맞은 먹이는 데몬로드를 뜻하는 것이었다.

전령이 정색했다.

“······ 태양왕이시여. 팔콘님을 저버리실 생각입니까? 그분은 왕을 위해 여태껏 헌신했습니다.”

“그러면 끝까지 헌신하라. 몸의 작은 부분 하나조차도 나를 위해 버리라.”

무섭도록 매정한 말이었다.

전령이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진정으로 전쟁을 원하시는 겁니까?”

“전쟁? 코끼리가 개미와 전쟁을 하는 것을 보았느냐?”

태양왕의 말에는 진심이 담겨있었다.

데몬로드들의 반항 따윈 무의미하다는 듯.

“살고 싶다면 내가 혹할 정도의 것을 내놓아라. 둠의 목 따위로는 성이 차지 않노라.”

태양왕은 답을 던져주지 않았다. 알아서 기라는 거다.

전령의 얼굴이 붉어졌다.

“어찌하여! 저희는 오로지 태양왕을 위해······!”

“멍청한 놈. 팔콘이 너를 내게 보낸 이유가 온전한 ‘헌신’을 위해서였다고 보느냐?”

태양왕이 혀를 찼다.

“너를 내게 보냄으로 인해 나는 다른 사천왕들의 주의를 끌게 되었다. 그들은 내가 혹여나 배신을 할까 언제 어디서든 나를 지켜보고 있으니.”

“하, 하오나, 누구도 저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눈은 어디에도 있다. 적어도 모든 ‘심연의 존재’는 그들의 눈을 피할 수 없지. 예의주시하고 있는 곳이라면 더더욱.”

태양왕이 손을 뻗어, 전령의 목을 쥐었다.

“커허헉······!”

“팔콘은 온전히 내게 헌신하지 않는다. 놈의 헌신은 자신을 위한 것일 뿐. 이렇게너를 보내 나를 견제하는 게 목적일 테지. 그 사이 어느 쪽이 더 유리한지 재고 있을터.”

전령이 눈을 부릅떴다.

촤아악!

그리고 그대로 몸과 목이 분리되었다.

태양왕은 이미 시체가 되어버린 전령을 바닥에 버리고, 나른한 눈빛으로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이제 그만 나오거라, 인간이여.”

검은 기류.

그 안에 또 다른 존재가 숨어있었다.

이윽고 검은 기류 안에서 조금씩 무언가가 나오기 시작했다.

칠흑의 손길 스킬로 모습을 숨긴 오한성이었다.

* * * * *

놀랐다. 놀랄 수밖에 없었다.

검은 기류를 파악한 괴물은 많았지만 단번에 ‘인간’인 것조차 알아볼 줄이야.

나는 ‘선’을 볼 수 있었고, 우리엘 디아블로와 이어진 선을 쫓아 이곳에 당도했다.그리고 태양왕으로 추측되는 존재를 찾을 수 있었다.

더불어 팔콘의 전령과 하는 이야기를 들으며 침을 꿀꺽 삼킬 수밖에 없었다.

‘파벌의 수장인 팔콘이 움직였다. 그럼에도 태양왕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데몬로드를 살려둘 생각이 아예 없는 듯싶었다.

그렇다면 내 계획 자체가 소용이 없을 가능성이 높았다.

돌아갈까 생각할 때, 그가 나를 발견한 것이다.

그리고 들킨 이상 도망치는 게 불가능하다는 걸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심연에 인간이 있다니 드문 일이로군.”

“······ 미래선택에 관해 할 이야기가 있다.”

바로 본론을 꺼냈다. 그는 잡담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성격 같았으니.

“미래선택이라. 특이한 말을 하는구나.”

하지만 예상 외로 덤덤하다.

해서 나는 주변을 살폈다.

‘반응이 아예 없는 건 아니야.’

주변의 괴물들이 미묘하게 거리를 뒀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본인은 무덤덤한 척 했지만 아마도 다소 거슬리긴 한 것일 테다.

“방금 전의 일과 같이, 내가 동하지 않는 이야기를 한다면 너는 이 자리에서 찢어져 죽을 것이다.”

“나는 우리엘 디아블로. 그의 전령이다.”

“······.”

하지만 이번에는 명확하게 반응이 있었다.

우리엘이란 이름에 반응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말하길, 미래의 수많은 가능성을 보고 좌절했다고 하였다. 이번 전쟁 역시 마찬가지.”

직구로 던졌다.

솔직히 여기서부턴 임기응변의 싸움이다.

하지만 정말로 태양왕이 같은 ‘미래선택’의 권능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리고 그것을 사용했다면, 결코 허언이 아니라는 걸 알아차렸을 것이다.

‘진실과 거짓을 섞는다.’

그것만이 내가 진정으로 승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진실과 거짓. 그 속에서 피어나는 한 줄기 희망!

과연 내 ‘말’이 태양왕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지, 지금부터가 도박을 걸 때였다.

< 40. 태양왕(3) > 끝

ⓒ 온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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