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신사냥꾼-169화 (170/251)

< 40. 태양왕(2) >

노곤함마저 느껴지는, 그 특유의 목소리에 나는 잠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태양왕의 피가 흐른다고?’

태양왕. 우리엘 디아블로는 그를 피해 달아났다. 라이라를 지키고자 그곳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우리엘의 기억 속에 태양왕과 관련 된 모든 것은 공포로 얼룩진 무정한 얼굴들뿐이었다.

헌데, 혈육이다?

피가 이어진?

‘둠의 거짓이거나, 우리엘도 몰랐거나.’

확실한 건 우리엘의 기억 속에 태양왕의 피와 관련 된 일화는 없었다는 것이다. 만약에 우리엘이 태양왕의 피가 이어진 혈육이라면······ 어쩌면, 모든 ‘후보자’를 죽였으면서도 그가 유일하게 우리엘만 살린 이유가 될 수도 있겠다.

더불어 라이라와 우리엘의 도주를 방관한 것 역시.

‘이상하다곤 생각했지.’

무려 심연을 네 등분 한 왕 중의 왕이다.

아무런 힘없는 우리엘과 라이라가 도피하는 걸 못 잡을 리 만무했다.

최대한 은신하긴 했지만, 그래봤자 독 안에 든 쥐와 같지 않나.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가능성의 이야기다.

둠이 중립의 데몬로드들에게 정당성을 부여하고자 허세를 놓고 있을 수도 있었다.

“우리엘. 너 자신조차도 몰랐을 것이다. 아니, 누가 알았을까? 가장 최근에 즉위했으나 베일에 가려진 태양왕, 그의 자식이 너라는 걸 말이다.”

“······ 근거는?”

진지하게 물었다. 우리엘에게 숨겨진 비화가 있다니. 어쩌면 이 진실이야말로 나머지 동화율을 올리는 결정적인 열쇠가 될지도 모른다.

둠은 느긋하게 답했다.

“사자왕의 숨겨진 비동에 존재하는 특급기밀이다. 그곳에 너와 태양왕의 관계에 대해 꽤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었지. 권능의 유사성, 바로······ ‘미래선택’에 관해서 말이다.”

미래예시 따위가 아니다.

미래의 선택. 수많은 가능성 중 하나를 잡는 게 우리엘 디아블로의 진정한 권능이었다.

그리고 우리엘 디아블로는 그 가능성 중 하나로 나를 잡았다. 나와 동화하고,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어보이고자 모든 걸 걸었다.

헌데, 태양왕 역시 그러한 권능을 가지고 있단 말인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로군. 미래를 선택할 수 있다면 지금 내가 이 자리에 있지 않았겠지.”

일단 부정했다.

둠은 고개를 끄덕였다.

“미래선택에 관한 내용은 확실히 부실하지. 하지만 ‘별의 기록’을 보면 미래가 크게 두 번 틀어졌음을 알 수 있다. 태양왕의 즉위, 그리고 우리엘 디아블로의 출현. 이 두 가지와 맞물리며 기록이 달라지지. 우연치곤 묘하지 않느냐?”

“별의 기록······?”

“알고 있느냐? 모든 가능성은 결국 하나로 귀결된다는 것을. 사자왕은 그것을 ‘별의 기록’이라고 부르더군. 별의 탄생과 종말은 정해져있다는 거다.”

둠은 움직이지 않았다. 둠은 자리에 앉은 자세 그대로, 이미 모든 이들이 자신이 내던진 떡밥을 물었다는 자신감으로 말하고 있었다.

“또 다른 말로는······ 그래, ‘미미르의 샘물’이라고도 하더군. 지식의 샘, 본래라면 위그드라실에 있어야 하는 것이지만.”

“우주수(宇宙樹) 말이냐?”

팔콘이 관심을 보였다. 태양왕의 후원을 받는 데몬로드로, 매우 흥미가 깊다는 듯나와 둠을 바라보던 중이었다.

둠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사천왕은 ‘위대한 별’이 심연에 안착하는 것을 대가로 위그드라실의 지혜를 손에넣었다. 사자왕은 미미르의 샘물을, 나머지는 또 다른 것들을.”

“대가라면, 누구에게서 받았다는 거냐?”

“그 이름을 입에 담아선 안 되는 자. 말해봤자 너희들은 모를 것이다.”

고블린의 신에게서, 가짜에게서, 그리고 둠에게서도 같은 이야기가 나왔다.

이름을 입에 담으면 안 되는 자······ 대체 누구란 말인가.

이어, 둠이 처음으로 재밌겠다는 듯 조소를 지어보였다.

“하지만 그를 이곳에 초청하는 것도 꽤 재밌겠군. 니드호그, 그 추악한 뱀을 말이다.”

······ 니드호그?

모든 뱀들의 왕. 위그드라실의 뿌리를 먹으며 살아가는 절대악이다.

신화 속 존재이지만 요르문간드가 등장한 시점에서 이미 모든 신화와 전설들이 뒤섞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쿠릉!

순간, 땅이 뒤틀리는 소리가 들렸다.

두근!

심장부근이 저릿하다. 전신에서 털이 쭈뼛 서는 것만 같았다.

상상을 초월하는 마력이 감지되었기 때문이다.

모든 데몬로드들이 동시에 느꼈다.

둠은 눈을 좁히며 그런 데몬로드들을 바라봤다.

“그는 격조 높은 죽음을 먹어치워야만 사라진다. 신을 잡아먹는 뱀이니, 적어도 사천왕의 목숨이나 데몬로드의 절반은 죽어야 만족하며 돌아가겠지.”

“무슨 짓을 한 거지?”

내가 물었다.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저 이름을 불렀다고 소환되는 건 이상하다. 니드호그. 그 이름이 금기처럼 여겨진 건 사실이지만 이는 두려움과 공포 때문일 가능성이 높았다.

둠은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주받은 신전’의 중심부. 이곳에 일정 이상의 마력이 모이면 ‘절대악’이 강림하기에 더없는 대지가 된다. 이미 한 번 해봐서 그런지 잘된 모양이군.”

둠은 나찰각에 강림한 적이 있었다.

설마 그게 예행연습이었다고?

그제야 다른 데몬로드들도 자신들이 이용당했음을 깨달았다.

“둠······! 우리들을 촉매로 삼은 게냐?”

“어이가 없군. 무엇을 소환하려는 건지는 몰라도 너 역시 이곳에서 살아나가진 못할 것이다!”

대다수의 데몬로드들이 둠을 노려봤다. 압축 된 분위기가 단번에 터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둠은 느긋했다.

“나를 죽인다? 그다지 추천할 만한 선택지는 아니로군. 니드호그는 적군과 아군의 경계가 없다. 하지만 만족할 만한 죽음을 먹어치우면 사라지지. 죽기 싫으면, 죽여라. 마침 사천왕이라는 먹이가 다가오고 있지 않느냐?”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젠장 할!

설마 이런 함정을 파고 기다리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나만이 아닌 모든 데몬로드들에게 해당되는 사항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깨달았다. 둠의 말을 듣고서 알게 된 게 있었다.

나는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설마 사천왕을 죽일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게······.”

“바로 그렇다. 니드호그, 그 죽음의 뱀은 모든 것을 먹어치운다. 진정한 불멸마저도! 사자왕은 이것을 이용해 다른 사천왕을 죽이려고 했지. 설마 자신이 준비한 방법으로 죽을 줄은 꿈에도 몰랐겠지만 말이다.”

더 이상 뒤가 없는 건 둠도 같았다.

그는 나를 비롯한 모두에게 선택을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잡아먹힐 것이냐, 잡아먹을 것이냐?

이제는 사천왕과 데몬로드의 생존을 건 전쟁이 되었다.

고오오오오오오-!

신전이 떨렸다. 급히 신전을 빠져나와 하늘을 바라보자, 정말 거대하기 짝이 없는······ 거대하다고밖에 할 수 없는 뱀의 배 부분이 보였다.

시야로 확인할 수 있는 건 뱀의 ‘일부’뿐이었다.

일부는 계속해서 증식하며 심연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모든 부위가 소환되면 모두 죽을 것이다. 놈을 돌아가게 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 사천왕을 죽이고 그들의 죽음을 바치는 게다.”

한 가지는 아니다.

‘신성’을 가진 나는 더욱 절실하게 니드호그의 존재를 실감하고 있었다.

욕이 절로 나오려는 걸 애써 참았다.

이곳에서 유일하게 나만이 ‘신성’을 가지고 있다. 그 신성은 저 뱀에게도 여실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니드호그 역시 ‘거신(巨神)’으로 취급하는 것이다!

[절대악, 니드호그가 강림하고 있습니다.]

[신성 ‘거신사냥꾼’이 발동하며 니드호그를 상대할 때 모든 능력치가 50% 상승합니다.]

[허나 니드호그 역시 ‘거신사냥꾼’의 기척을 알아차리고 가장 먼저 달려들 것입니다.]

바로 이거다. 거신과 나는 대칭점의 관계. 천적과 천적이니 가장 먼저 제거하려 들 게 뻔했다.

또한 가장 먼저 나를 잡아먹으면 니드호그는 돌아갈 것이었다.

항시 50%의 능력치가 상승한다면 이 전쟁을 내가 끝낼 수도 있겠으나, 애석하게도 이 능력치의 상승은 ‘거신’을 상대할 때에만 한정된다.

그리고······ 설령 그만한 능력치의 상승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길 수 없다.’

처음이었다. 이만한 전율, 이만한 압도감.

우리엘 디아블로의 신체로 전이한 이후에는 더더욱.

니드호그. 그는 신을 잡아먹는 뱀이다. 세계를 멸망시키고, 모든 것의 종말을 바라는 절대악이었다.

이제야 알겠다.

내게 힘을 준 관리자들이 모두 그에게 살해당했다는 걸.

‘가짜 알레테이아가 말했지. 그녀가 잠들고 그들이 깨어났다고. 그들 중 하나가 니드호그라면 나머지 하나는 흰 독수리 흐레스벨그다.’

신화 속 이야기를 토대로 가정했다.

위그드라실의 뿌리를 먹는 니드호그, 균열을 일으키며 날갯짓을 하는 흐레스벨그. 그녀는 둘의 사이를 중재하는 ‘라타토스크’가 분명했다.

이 모든 게 그 셋에게서 비롯되었다면 니드호그를 막을 수 있는 진정한 방법은 잠든 그녀를 깨우는 것일 테다.

하지만 당장은 방법이 요원했다.

애당초 니드호그는 왜 신들을 잡아먹고 다닌단 말인가?

‘모든 것은 위대한 별을 채우기 위해······.’

가정이다. 모든 건 가정이었다.

균열을 일으키는 게 흐레스벨그라면, 그 힘을 지금 이 순간에 가장 잘 이용하는 자들은 당연히 암흑상회와 암흑인들이었다.

그리고 암흑인들은 오로지 ‘위대한 별’을 위해 일한다.

여태껏 위대한 별의 대변자 정도로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라 흐레스벨그의 부하였다는 건가?

니드호그와 흐레스벨그의 사이는 최악이다. 신화가 전해다주는 이야기가 모두 진실이라면, 그녀가 잠든 지금 니드호그를 막을 수 있는 건 흐레스벨그 뿐이었다.

그리고 정말 ‘위대한 별’이 흐레스벨그의 작품이라면, 니드호그를 막을 열쇠 역시거기에 있지 않을까?

‘위대한 별을 가진 자, 모든 것을 얻는다.’

달라진 건 없었다.

결국은 위대한 별이었다. 허무, 니드호그, 세계······ 모든 열쇠들이 그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당장은 요원한 일이었다. 데몬로드 중 하나만이 그 자리에 올라설 수 있다. 어쩌면 그조차도 부족할지 모르는 현실이었다.

‘당장은 살아남는 것만 생각해야겠군.’

우리엘 디아블로의 죽음은, 오한성의 죽음과도 같다. 동화율이 현격하게 높아져서 서로가 서로에게 강한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그러니 살아야 한다.

“마침 오고 있군. 사천왕······ 그들도 눈치 챘겠지. 이제 더 이상 뒤가 없음을 말이다.”

둠은 팔짱을 낀 채 웃고 있었다.

그리고 지평선 너머에서, 셀 수조차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군단이 몰아닥치는 중이었다.

그 숫자는······ 만 단위가 아니다.

억!

심연의 모든 괴물을 모아 놓은 것만 같은 현상에, 나조차도 정신이 아찔해지는 것만 같았다.

‘정말로 둘 중 하나가 끝나야 하는 건가?’

사천왕이 죽거나, 데몬로드들이 죽거나.

정말 선택지가 그 둘밖에 없는 걸까?

허나, 나는 살아야 했다. 살아서 끝을 봐야했다.

내 종착점은 이곳이 아니었기에.

“선택해라! 저들을 죽일지, 이대로 죽음을 받아들일지!”

둠이 모든 데몬로드에게 강요하고 있었다.

그리고 결과는 정해진 것과 같았다.

사천왕이라 칭해지는 절대자들은 누군가를 위해 자신을 희생시킬 족속들이 아니다. 이곳에 모인 모든 데몬로드를 ‘반역자’로 보고 처형할 생각인 것이다.

후원자. 그러한 개념이지만, 원래부터 서로간에 소통이 원활하지 않다는 것 정도는 알겠다. 사천왕과 데몬로드의 관계는 형식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만약 사천왕의 ‘불멸’을 깨부술 방법이 존재한다면, 데몬로드들은 그 특성상 사천왕이라 칭해지는 그들에게 진즉 반기를 들고도 남았다.

그럴 방법이 없어서 수그리고 있었을 뿐.

‘자신들을 죽일 방법을 알게 된 이상 살려둘 순 없다는 거겠지.’

심연에 존재하는 무수한 괴물들.

데몬로드를 대체할 수 있는 건 많다는 걸까?

또한 사천왕도 ‘니드호그’가 무슨 존재인지를 알고 있다면, 저처럼 필사적으로 달려드는 것도 이해는 되었다.

둠은 재미있다는 듯 광소했다.

“이 전쟁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진정한 ‘최강’이 된다. ‘최강’의 전쟁을 시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만 남는다면, 그야말로 모든 별의 지배자라 할 수 있을 터!”

둠이 손가락으로 지평선 너머를 가리켰다.

“저들은 방해물이다. 우리의 앞을 막는 존재다. 지금이야말로 오래 된 왕조를 끝내고 새로운 우리들의 시대를 시작할 때다. 데몬로드! 우리들이야말로 진정한 왕임을, 우리들이야말로 진정한 세계의 적격자임을 알릴 때란 말이다!”

둠은 광분하고 있었다.

자신이 벌린 판에,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미래를 내다보며 전율하는 중이었다.

그야말로 파멸의 전조라 할만 했다. 그 이명만큼이나 파멸적인 행사에 심연의 모든 절대자들이 휘말렸으니 말이다.

“둠, 너는 마음에 안 들지만······.”

“사천왕의 불멸을 끝낼 수 있는 기회인 것만은 확실하군.”

하나, 둘, 데몬로드들이 자신의 군단 앞으로 나아갔다.

전쟁의 준비를 위해서다.

사천왕이라 칭하며 위에서 자신을 바라보던 처사에 데몬로드들도 그간 기분이 별로였음을 알려주는 대목이었다.

반대는 없었다. 지금 분위기에서 반대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반대하는 순간, 가장 첫 번째 먹잇감이 될 게 분명했으므로.

결국 모든 분위기가 둠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마음대로 하게 둘 수는 없지.’

< 40. 태양왕(2) > 끝

ⓒ 온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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