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신사냥꾼-167화 (168/251)

< 39. 데몬로드(完) >

월천.

그와의 인연은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나찰산 중턱에서 쫓기듯 도망가던 그를 만났고, 반쪽짜리에 불과하지만 나는 탈혼무정검이 담긴 검법서를 양도받았다.

그로 인해 내 검술실력은 일취월장했으며······ 천재들의 발끝까지 쫓아갈 수 있었다.

그리고 회귀한 이후 다시 한 번 만나 정식으로 제자가 되었다.

‘인연.’

인연의 힘이란 참으로 묘하지 않은가.

돌고 돌아 다시금 만나 비슷한 형태를 갖추었으니.

완전하게 달라진 인연은 나와 우리엘 디아블로 뿐이었다. 그를 제외하면, 회귀한 후에도 ‘인연’의 양상은 크게 달라진 게 없었다.

‘하지만 형태는 달라질 수도 있지.’

설마 그가 죽어 검이 될 줄이야. 경질화. 나찰이 죽으면 아주 낮은 확률로 그들은 자신의 ‘형태’를 시체 대신 남긴다.

월천은 검이란 형태로 세계에 남았으나, 다른 누구의 손길도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다.

나라고 가능할까.

은후도, 드워프들조차 혀를 내두르며 포기했건만.

‘해보자.’

더는 피할 수 없다.

검을 마주한 다음에야 나는 내 생각 이상으로 그를 받들고 있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월천의 두 글자가 의외로 내 마음 깊숙이 자리매김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부딪혀야 할 때다. 더 뒤로 미루는 건 월천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까앙-!

모루 위에 놓인 월천을 망치로 때렸다. 그가 죽어 검이 되었다면, 그것은 누군가가 사용하게 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지이잉!

검이 울리며 공명음이 퍼져나갔다.

한 번 망치질을 할 때마다 심력이란 심력은 모조리 소모되는 느낌이었다.

전신에서 땀이 흐르고 눈꺼풀이 바르르 떨렸다.

까앙-!

무겁다. 망치가, 이 소리가, 너무나도 무거웠다.

월천의 무게였다. 더불어 나와 월천이 엮인 인연의 무게였다.

“후욱! 후욱!”

두 번.

고작 두 번 망치질을 했을 뿐인데 정신이 아득해졌다. 입에선 단내가 풍겼고 손가락엔 힘 한점 들어가지 않았다.

결국 망치를 놓아버리고 나서야, 결코 쉽지 않으리란 걸 깨닫게 되었다.

‘반응이 있다.’

은후도, 드워프들도 이 검에서 반응을 이끌어내진 못했다. 불에도 녹지 않고 그저힘에 의존하여 때려 봐도 아무런 효과가 없으니 모두가 포기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두 번의 망치질로 검에 엮인 거대한 힘을 읽었다. 헤일과 같이 거세고 억세며 태풍처럼 휘몰아치는 잠재력이 검 안에 잠들어 있었다.

‘합을 맞춰야 한다. 나와 월천의······.’

월천의 힘은 정제되지 않았다. 날것 그대로의 것이었다. 내 힘과 부딪히며 거대한반발을 일으키는 중이었다.

반발을 없애려면 합을 맞춰야 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적응하는 과정과 시간이 필요하다. 이 과정은 내게 주어진 사명과 같았다.

‘마지막까지 제게 숙제를 남기셨군요.’

아직 그에게 받은 것들을 자신의 것으로 온전히 만들지도 못했건만.

피식 웃으며 애써 손을 다시 들었다.

그리고 망치를 쥔 뒤 검을 두드렸다.

적막한 공방 안에 검 두드리는 소리만이 요란했다.

* * * * *

시간은 유수와 같이 빠르게 흐른다.

30일. 그 시간이 지나도록 민식이는 의식불명이었다. 아마도 자신의 내면에 잠든것을 어느 정도 흡수하기 전까지는 깨어나지 못할 듯싶었다.

허나 그 30일간 녀석의 신체는 놀라울 정도로 ‘진일보’했다. 우리엘 디아블로의 마력으로 조금 도움을 주자 본능적으로 힘을 제어하고 스스로 갈무리하며 자연스럽게 녹아내기 시작한 것이다.

‘원래부터 감은 좋은 녀석이었지.’

이 정도면 혼자서 인류의 영웅을 자처하긴 충분할 듯싶었다. 물론 여기서 깨어난 다음에도 시련이 없지는 않겠으나 잘 이겨낼 거라고 믿었다.

거기까지 내가 도와줄 순 없다.

나는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했기에.

“로드시여. 이제 출발해야 합니다.”

라이라가 무장을 한 채로 내 앞에서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숙연한 표정, 무거운 분위기, 그만큼 앞으로 벌어질 일들이 결코 가볍지 않다는 걸 알려주고 있었다.

그래. 이 앞은 가시밭길이다. 나조차도 알 수 없는 전장의 늪이었다.

‘데몬로드의 회의.’

단순히 회의만으로 끝날까?

온갖 모략이 판을 칠 것이다. 어쩌면 가장 먼저 ‘사냥’당하는 쪽이 될 수도 있었다. 비록 내가 멸제의 카르페디엠을 죽였다곤 하나, 아직까지도 여전히 최약체의 데몬로드였으니.

그러니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결코 얕보여선 안 된다. 그들에게 먹기 좋은 사냥감이라는 인식을 줘서도 안 된다. 도리어 건들면 큰코다친다는 인상을 줘서 경계토록 만들어야 했다.

“아빠! 이그닐, 예뻐요?”

이그닐이 꽃무니 치마를 입은 채 문 앞에 나타나 빙그르르 돌았다. 그러자 라이라가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이그닐. 제가 줬던 옷은 어디 뒀죠?”

“그거, 별로 안 예뻐!”

“놀러가는 게 아니랍니다.”

“놀러가는 거 아니야?”

이그닐이 고개를 갸웃했다.

정말로 놀러가는 줄 알았단 말인가.

“······ ‘저주받은 신전’에 놀러가는 이는 없어요.”

“그래도 그 옷 별로 안 예쁜데.”

“라이라, 놔둬라.”

내가 한 마디 거들자 라이라가 나를 뻔히 쳐다봤다.

“로드시여. ‘저주받은 신전’에 온갖 마물들이 모입니다. 가뜩이나 이그닐은 눈에 띄는데 저런 차림은······.”

“전쟁을 치르러 가는 게 아니지 않느냐? 저들의 장단에 우리가 맞추는 게 아니라, 우리의 장단에 저들이 맞추게끔 하면 그만이지.”

“그건 그렇습니다만······.”

라이라가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뜩이나 앞으로 있을 일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터질 만큼 무거운데 이그닐마저 그럴 필요는 없었다. 오히려 이그닐의 저런 모습이 내 긴장을 풀어주는데 특효약이었다.

나는 잠시 잠든 민식이를 한 차례 내려다보곤, 몸을 돌렸다.

‘저주받은 신전. 심연에서조차 저주받았다고 여겨지는 금지.’

심연은 어둠의 끝자락이다. 그런 곳에서조차 저주받았다고 칭해질 정도면 얼마나악독한 장소일까?

알 수 없지만······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는 건 분명하다.

이윽고 성을 나오자 장대한 행렬이 나를 반겼다.

오로지 우리엘 디아블로만을 따르는 충실한 500기의 창기병들.

천여기에 달하는 쉐도우 나이트까지 합쳐지자 나름 근사한 군대가 되었다.

그리고 오룡.

기사들의 바로 옆에서 오룡들이 복잡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다. 나는 이번 행렬에 오룡을 포함시켰다.

‘오룡들은 더욱 많은 걸 보고 배워야 한다.’

오룡은 대라선과 월천이 내게 남긴 마지막 유산이다.

경질화 된 월천의 검을 다루며 그 생각은 더욱 확신에 가까워졌다.

오룡의 각성, 그리고 월천의 검의 관계가 결코 무관하지 않을 거라는 것.

더불어 오룡의 각성은 어쩌면 내 생각보다 더 대단한 힘을 보유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

단순한 나찰의 수준이 아닌······ 그 이상의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는 그런 확신 말이다.

구화린을 포함한 오룡들에게 한 차례 시선을 준 나는 다시 고개를 돌리곤 말했다.

“출발하지.”

* * * * *

저주받은 신전은 심연의 중심부에 있다.

심연은 동, 서, 남, 북으로 나뉘어져 있고 그 네 방위를 모두 사천왕이 지배하고 있었다. 지옥왕, 태양왕, 천왕, 그리고 사자왕.

멸제의 카르페디엠과 제로는 지옥왕 소속이었고, 둠은 사자왕에 속해 있었다. 하여간 그 사천왕이 금지로 심연의 중심부인 ‘저주받은 신전’을 설정한 것이다.

누구도 들어가선 안 되는 그곳에 발을 들였다는 건, 이번 회의를 사천왕 역시 암묵적으로 동의했다는 뜻이 된다.

‘우리엘 디아블로의 기억 속에 있는 태양왕······ 따지고 보면 그 힘은 그렇게 강하지 않았지.’

우리엘 디아블로는, 디아블로의 이름을 얻기 전까지 태양왕이란 그늘 아래에 있었다. 라이라를 위해 그 울타리에서 도망친 것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태양왕의 힘은 고작해야 중간급 데몬로드 정도였다. 강한 건 분명하지만 심연을 네 등분 시킬 만큼 강하진 않다는 의미다.

‘심연이 그들에게 주는 권한이 있다. 우리엘의 기억 속에서도 자세한 내용은 없는것 같지만······.’

본래 우리엘 역시 태양왕의 후보자 중 한 명이었다. 그러나 도태됐고, ‘권능’이 알맞지 않다는 이유로 탈락했다.

말하자면 ‘태양왕’에 어울리는 권능이 있다는 말이다. 예로부터 그 권능을 가진 존재만이 왕의 자격을 거머쥘 수 있었다.

하지만 정작 그게 무엇인지는 우리엘도 모르는 듯싶었다.

‘그 힘이 데몬로드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건 분명하다.’

자기보다 약한 자의 아래에 있을 성질이 아니다. 데몬로드라는 족속은 말이다. 물론 그 ‘힘’이라는 범주에는 사천왕이 가지고 있는 세력도 포함해야겠지만, 절대적 강함을 숭상하는 심연의 괴물들은 왕이 약하면 잡아먹으려는 성질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 그런 데몬로드들을 움쩍달싹하지 못하게 하는 ‘족쇄’가 있다고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그 ‘족쇄’가 있기에 데몬로드가 ‘위대한 별’을 계승해도 그것을 다스릴 자신이 있는 것이고.

“저기 보이는군요. ‘저주받은 신전’에 거의 도착했습니다, 로드시여.”

라이라가 거친 흑마를 탄 채로 아래에서 내게 말을 건넸다.

나는 이타콰의 등에 올라, 저 너머에 있는 검은색 신전을 바라봤다.

‘지금은 회의에 집중하자.’

잡념을 털어낸 뒤 정신을 최대한 가다듬었다.

벌써부터 주변엔 괴물들이 넘쳐났다.

하지만 하급종은 어디에도 없었다.

대부분이 상급종, 최상급종이었고 희귀종까지도 넘쳐났다.

그 숫자는 헤아릴 수가 없을 수준이었다.

‘못해도 천만 이상.’

모든 데몬로드들이 자기를 따르는 정예만을 데려온 것이다. 그에 비해 내가 끌고 온 군단은 군단이라 하기도 창피할 정도였으니 말은 다했다.

“제길, 괴물이 넘쳐나는군.”

“······ 다들 정신 바짝 차려. 여기에 ‘놈’이 있다는 거 같으니까.”

뒤에서 오룡들이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룡들도 ‘둠’을 다시 만날 것을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물론 최대한 야차인 게 들통 나지 않도록 전신갑주를 입혀놓은 상태였다.

‘심장이 내려앉을 정도로 무거운 분위기로군.’

이곳에 모인 전력이면 지구를 수십 번은 멸망시킬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애써 침착해하며 신전의 입구까지 다다랐다.

“이곳부턴 데몬로드께서만 들어가실 수 있습니다.”

둠의 오른손이라 칭해지는 ‘둠 나이트’ 한 기가 라이라의 앞을 막아섰다.

라이라가 나를 바라보자, 나는 고개를 끄덕임으로써 자리를 지킬 것을 명했다.

그러곤 천천히, 신전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둠이 가득한 문을 넘어서자 곧 바닥이 늪처럼 깊게 패이며 나를 끌어당겼고, 다시 눈을 떴을 땐 거대한 원탁이 내 앞에 놓여 있었다.

‘조용하다.’

그리고 그 주변으로 모여 앉은 가지각색의 괴물들이 보였다.

그들이 바로 데몬 로드다.

그들은 일체의 말없이, 무서울 정도로 오만하게 자신만의 세계를 노니고 있었다. 다른 이들 따윈 신경조차 쓰지 않겠다는 듯이.

하지만 결코 이는 무관심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곳에서 보이는 작은 반응 하나하나가 큰 영향을 끼칠 것은 알고 자제하고 있는 것이다.

포인트로 싸우는 경매와는 달리, 싸워선 안 된다는 불문율이 있는 암흑상회와는 달리, 이곳에선 그러한 규칙 따위가 하나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전쟁은 이미 시작되었다.

절대로 긴장을 늦춰선 안 되는, 무섭도록 적막한 전쟁의 서막이었다.

< 39. 데몬로드(完) > 끝

ⓒ 온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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