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 김민식(3) >
쟈낙. 심연의 지평선의 영주이자 다크엘프 엘더인 그녀는 세계수를 이용해 ‘지혜의 나무’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갈 수 있는 존재라고 했다.
우리엘 디아블로. 나 역시도 세계수에게 주인이라 인정받으며 이동이 가능해졌지만, 쟈낙만큼이나 자유로운 이동 자체는 불가능했다.
아마도 그녀의 특성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또한 세계수에 대한 더욱 방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용병이다.’
그러나 쟈낙은 용병이었다. 과거 인연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녀는 라이라 디아블로를 팔려고 했던 전적이 있었다.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쪽으로 움직인다는 뜻이다.
그러니 세계수에 관하여 직접 물을 수가 없다. 내가 세계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정보로 삼아 다른 곳과 거래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나 스스로 알아봐야 한다.’
‘나무’의 전승을 가진 종류는 크게 세 가지가 존재한다.
지혜의 나무, 세계수, 그리고 이그드라실.
지혜의 나무는 ‘축복받은 나무’라고 불리며 넓은 영역을 수호한다. 세계수는 말 그대로 하나의 세계를 떠받치는 나무이며, 이그드라실은 그 모든 세계수란 줄기들이 모여 하나로 구성된 우주의 집합체였다.
세계수를 강화한다고 하더라도 이그드라실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실존하는지조차 불분명한데다가, 그 이름은 그저 모든 세계를 통합한 총체의 이름일 뿐이라는 이야기도 있었다.
어쨌거나.
‘정화의 균열석.’
세계수의 뿌리가 나를 나무의 중심으로 인도했다.
세계수의 중심에는 사람 크기 정도의 텅텅 비어있는 장소가 있었다. 그곳의 출입이 가능한 건 세계수에게 인정받은 나뿐이었다.
발을 옮겨 들어가자, 경계가 모호해지고 어둠이 찾아왔다.
‘공허하다.’
아주 오랜 시간 방치되어 있었기 때문일까.
안은 텅 비어있었다.
나는 그곳에, 정화된 균열석을 던져 넣었다.
그러자 균열석에서 빛이 번지며 공허한 장소가 환희로 물들기 시작했다.
작은 빛은 마치 생명의 태동처럼 이윽고 태아의 모습을 만들었다.
움츠린 채 꿈틀대며 점차 번져나가더니 빠르게 자라났다.
시간을 초월한 모습. 정화된 균열석이 ‘시간’을 다뤘기 때문일까.
이윽고 빛은 하나의 형상으로 완성되었다.
초록색의 머리칼과 짙은 초록빛의 눈동자를 지닌 정령.
[세계수의 정령이 생성되었습니다.]
[특수한 힘이 작용하여 보다 완전해졌습니다.]
[정령왕의 인자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름을 붙여주시겠습니까?]
초록색의 정령은 나를 정면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이타콰와 이그닐과 마찬가지로, 이 녀석 역시 나와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수. 네 이름은 ‘수’다.”
끄덕!
수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수’가 태어난 다음부터 세계수는 변하기 시작했다. 보다 푸르러졌고, 동시에 최하급이지만 정령들이 잉태되었다.
아마도 수가 정령왕의 자격을 가지고 있어서인 듯싶었다.
정령왕. 그와 비슷한 존재를 본 건 호라가 처음이었다. 호라를 처음 봤을 때의 충격은 아직도 이루 말할 수가 없을 정도다.
최하급의 정령들은 태어나자마자 나무를 타고 놀며, 야차와 함께 살아갔다. 밭이나 논의 경작이 훨씬 빨라지고 야차들은 그들 정령과 어울려 살게 되었다.
본래라면 보는 것조차 불가능하지만, 세계수를 보호하는 대상으로 야차가 선정되었기 때문인지 그들은 서로 간에 소통이 가능했다.
그리고 내 주변에는 항상 수가 함께했다.
이그닐, 그리고 이타콰와 마찬가지로 수 역시 나를 보고 배우며 익숙해져갔다. 하지만 그 둘과 다른 점이 있다면 자신의 힘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대라선님. 대라선님의 얼굴이 새겨진 산이 솟아올랐습니다.”
“농작물이 과도하게 자라났습니다. 심지어 몇몇 농작물은 진짜 생물처럼 변해서 주변을 공격하더라니 까요?”
넘침은 부족함보다 못하다고 했던가?
균열석 때문인지 수는 상상이상으로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넘치는 힘을 주체하지 못했고, 그것이 엉뚱한 방향으로 발현되곤 했던 것이다.
장난도 아니다. 수에겐 장난의 개념이 아직 없다. 그저 내가 고민하던 것을 들어주고자 행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고민만 해도 결과가 나타나는군.’
본래 산에서 살던 야차들이 불편함이 없도록 하고자 산을 만드는 건 어떨까, 고민만 했다. 입 밖으로 꺼낸 적조차 없건만 그것을 수가 읽고 행동으로 옮긴 것이다.
농작물 역시 마찬가지였다. 현대의 경작법을 도입하여 더 빠르고 건강한 농작물을 재배하려고 고민하고 있을 찰나 수가 과도하게 성장을 시켜버린 것이었다.
힘을 조절할 줄 모른다.
내가 말을 해도 고개만 갸웃할 뿐이었다.
‘제대로 교육을 시키는 것도 고민해봐야겠어.’
지금의 내가 보이는 행동 하나하나가 수에게 큰 영향을 끼친다. 이그닐, 그리고 이타콰의 경우를 봐서 안다.
작은 행동거지 하나라도 조심을 해야 할 때였다.
그런 고민과 함께, 나는 고개를 돌렸다.
광장에는 수많은 드워프와 백원후, 그리고 야차들이 모여있었다.
서로가 대장장이 기술을 대련하기 위함이었다.
건전한 방향의 대결을 굳이 막을 필요는 없다고 보았다. 동시에 내가 바라던 것도해결할 수 있다면 일석이조 아니겠는가.
“주제는 하나다. 이 검을 다룰 수 있는 자를 승자로 정하겠다.”
월천. 그가 죽은 뒤 경질화하여 하나의 검으로 탈바꿈했다.
하지만 검은 너무 딱딱했다. 누군가가 다루기엔 그 성질이 너무 완고하여 적당히 담금질을 해줄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이 과제를 드워프, 혹은 백원후들이 해결하도록 비책을 마련한 것이다.
“시간제한은 없다. 서로가 서로의 기술을 뽐내보도록.”
“흠, 어려울 것 없군요. 드워프들의 저력을 보여드리지요.”
드워프들은 자신했다.
검 한 자루를 담금질 하는 것 정도야 어려울 게 없다고 판단하는 듯싶었다.
하지만 백원후들은 조용했다.
이 검이 ‘월천’이 경질화하여 만들어진 것임을 아는 까닭이다.
미지의 철을 다루는 게 쉬울 리 없었다.
‘누가 이기든 내겐 이득이다.’
월천. 그가 내게 남긴 검이다. 하지만 그가 남긴 검을 내가 당장 사용하기엔 무리가 많았다. 서로가 성질이 너무 강하여 억지로 사용하면 서로에게 상처만 남길 것이다.
나는 월천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서로가 성질을 죽이는 과정이 필요했다.
드워프나 백원후. 둘 중 누가 이겨도, 과제만 해결된다면 내겐 이득이었다.
어깨를 으쓱한 뒤 순간 느껴지는 시선에 광장의 저 너머를 바라봤다.
‘요르문간드.’
그곳에 요르문간드가 있었다.
폭발적인 아름다움의 소유자. 한때 세계를 집어삼켰던 뱀.
암령은 내게 경고했다. 그녀를 조심하라고.
한동안 보이지 않던 그녀가 불현 듯 나타나 내게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요르문간드의 호박석 같은 눈빛이 내게 닿았다.
“이상한 것을 달고 다니는구나.”
“‘수’라고 한다. 이번에 새로 태어난 정령이지.”
수는 내가 어딜 가도 나를 따라왔다. 이타콰나 이그닐에 비하여 공간적 제약도 없기 때문에 말릴 수도 없었다.
요르문간드는 흐음, 하는 소리와 함께 본론을 꺼냈다.
“계약자인 너의 존재력이 급속히 증가하여 짐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그 과정에서 너는······ ‘그릇’을 얻은 모양이구나.”
요르문간드의 눈이 내 전신을 훑었다.
그릇. 천마의 힘을 계승하고, 내 신체는 극한의 순정상태가 되었다. 말하자면 지금 내 신체는 무엇을 하든 그것을 모두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가 된 것이다.
천지인과 맞물려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발휘할 건 자명하지만, 그만큼 위험하기도 했다. 좋은 것과 나쁜 것 모두를 받아들이게 된다는 뜻이었으므로.
그래서 나는 조심하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잘못 나갔다간 아예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는 걸 나 스스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 그릇에 무엇을 채울지, 무엇을 채워서 어떠한 것으로 거듭날지, 짐은 궁금하도다. 아마도 가장 먼저 네가 마음먹은 ‘강렬한 의지’에 따라 그 그릇은 형태를 변형할 테지. 괴물이 되는 것도, 신이 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허나 그러한 그릇은 우리에겐 더할 나위 없이 농익은 과실이기도 하다.”
농익은 과실.
요르문간드는 한차례 혓바닥을 날름거렸다.
“그러니 빨리 너의 ‘의지’를 개화시키는 게 좋을 것이다. 그러지 못한다면 짐이 너를 잡아먹을 것이니.”
“경고를 하려고 온 건가?”
“짐의 존재력이 과도기에 이르러, 탈피의 과정에 들어갈 것이다.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을 것이나 짐이 탈피를 마칠 때까지 너의 그릇이 개화하지 않는다면, 짐은 본능적으로 너를 잡아먹게 되겠지. 탈피를 막 끝냈을 때의 짐은 무척이나 배가 고플테니 말이다.”
경고가 맞았다.
그나저나 탈피라. 허물을 벗어 성장하게 된다는 의미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미리 경고해줘서 고맙군.”
“더불어, 너의 세계는 하나가 아니다. 네가 선택했으니 하나에만 집중하게 된다면 나머지 것들이 부서지고 파멸할 터. 세계는 너의 생각보다 훨씬 더 참혹하다는 걸 명심해라.”
그 말과 함께, 요르문간드가 등을 보였다.
그 순간 어둠에 동화되더니 이윽고 사라졌다.
‘나의 세계는 하나가 아니다.’
나는 욕심쟁이다. 내가 가진 모든 것들을 잃을 생각이 없었다.
그것을 요르문간드가 상기시켜준 것이다.
아무래도 다짜고짜 잡아먹힐 일은 없을 듯싶었다.
‘돌아갈 때가 되었군.’
지구로, 나의 고향으로.
* * * * *
시리아는 고민하고 있었다. 유서희와 대화할 땐 당황하여 그냥 넘겼지만, 갈수록 의혹이 짙어진 것이다.
‘오한성님이 선생님이라고 했지?’
선생님.
유서희의 ‘선생님’에 대한 의혹은 많았다.
그녀가 매번 말하는 선생님이라는 존재가 겉으로 나타난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서희의 검술은 매우 기술적이고 고명한 것이었고, 그 후보로 낙점된 사람들 몇 명이 있기는 했다.
그중 한 명이 ‘아르켄’이었다.
‘설마.’
시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었다.
아르켄. 러시아의 군부를 때려 부수고, 모든 가문들을 몰살한 악!
그는 악이다.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아무리 시리아가 군부의 자식이라지만 그가 행한 학살은 눈뜨고 못 봐줄 정도였다. 사람의 목숨이 벌레의 그것보다 더 하찮게 여겨질 수준이었으니 말은 다했다.
-저어기! 저어어어기서 느껴져요.
-계약자가 가까운 곳에 있어요.
-싸우고 있나본데?
시리아는 오한성의 집 주변에서 풀잎 세자매를 찾을 수 있었다.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목소리는 들렸던 것이다.
그 셋에게 오한성을 찾아주길 부탁했고, 한참을 헤맨 끝에 도달하게 되었다.
콰르르릉!
도시의 한복판.
그곳은 이미 전쟁터였다.
“알레테이아 만세! 알레테이아여, 영원······ 크아악!”
“우리의 신성에 도전하는 악이여!”
“정화되지 않는 악은 불로 태워······ 꺼어억!”
육망성이 그려진 흰색 후드를 뒤집어쓴 인간들. 바로 알레테이아의 신도들이다. 그들이 ‘문’을 열고 괴물과 함께 은빛의 갑주를 입은 기사와 싸우고 있었다.
기사, 아르켄은 무자비했다.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명쾌하게 목숨을 빼앗았다.
순식간에 알레테이아의 신도들이 몰살당하고, 아르켄이 전신에 피칠을 한 채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시리아와 눈이 마주쳤다.
순간 시리아는 눈앞이 깜깜해졌다.
저 눈!
악마의 그것과 다를 게 없었다.
알레테이아의 신도들을 학살할 때의 그의 눈은, 무자비하기 그지없었다. 러시아에서 보인 모습보다도 더욱 더.
-아! 저 모습일 땐 안 되는데······.
-크, 큰일 났어요.
-망했다!
풀잎 세자매는 실수했다는 듯 어쩔 줄 몰라 했고, 시리아는 멍하니 아르켄을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한성님······ 이 아르켄이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