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 구화랑, 구화린(完) >
적룡 구화린.
암룡 유설.
무룡 무백.
검룡 연혼제.
잠룡 주가람.
오룡으로 대표되는 다섯의 호칭과 이름이었다.
어려서부터 뛰어난 재능으로 두각을 나타냈고, 세상 두려울 게 없다고 생각하던 게 바로 오룡이었다. 모두가 찬양하고 우러러 보던 존재. 일반 야차들의 시선에서 오룡은 감히 구름 속의 신선과 다를 게 없었다.
하지만 그날, 나찰각이 무너진 이후 모든 게 송두리째 바뀌었다.
오룡은 자신이 얼마나 무력한지 알게 됐다. 차원이 다른 ‘격’을 만나며 그간 자신들이 얼마나 우물 안의 개구리였는지 깨닫게 된 것이다.
데몬로드, 둠.
그 파괴적인 절망 앞에 오룡이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고작 아귀들을 상대로도 허덕이지 않았나.
그리고 지금.
그들의 눈앞에, 그 ‘둠’과 같으면서도 다른 존재가 있다.
‘우리엘 디아블로!’
모두가 숨을 죽였다.
일단, 거대했다.
4m는 넘을 것 같은 몸집.
그 공허하기 짝이 없는 눈빛에는 무료함까지 담겨있었으니.
산양의 뿔과 검은 날개에서 느껴지는 기운에 정신이 아찔했다. 왕좌에 앉아, 턱 끝으로 오룡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 여자는 뭐지?’
그리고 구화린의 신경을 계속 긁는 여자가 있었다. 흰색 날개와 검은색 날개를 한장씩 가진 여자는 진심 가득한 살기와 함께 오룡을 주시하는 중이었다.
아름답다.
장신의 여자는 같은 여자가 봐도 질투가 날 정도로 아름다웠다. 하지만 무정한 시선엔 살얼음이 동동 떠 있었다.
자그마한 실수 하나라도 용서하지 않겠다는 듯.
그녀에게서 발산되는 기운은 이미 평균적인 나찰의 수준조차도 넘어서 있었다.
‘십이나찰이란 이름이 땅에 떨어졌구나······.’
오룡 모두의 머리에 공통적으로 든 생각이다.
대라선을 제외하면 십이나찰은 무소불위의 강자였다. 누구도 이길 수 없기에 강자고 누구도 범접하지 못해서 나찰이다. 하지만 그날 이후, 그것이 얼마나 안일한 발상이었는지 깨닫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 ‘심연’이란 곳엔 대체 얼마나 많은 강자가 드글거린단 말인가. 나찰이 되어도 어찌할 수 없다면 사실상 복수도 허울 좋은 꿈같은 게 아닌지.
“나를 보고자 한 이유가 있을 텐데.”
“······!”
묵직한 중저음이 그의 입을 타고 흘러나오자, 가뜩이나 긴장한 오룡들 모두가 다시금 굳었다. 포식자의 입 안에 들어간 토끼와 다를 게 없는 모습.
가장 먼저 나선 건 구화린이다.
“대라선과 우리엘 디아블로, 그대가 같은 존재라고 들었습니다.”
“구화랑이 말한 모양이군.”
“같은 존재라고만 했습니다. 저희들은 그것을 비유적인 표현이라고 생각했습니다만······ 대라선이 아닌 이를 모실 수는 없습니다.”
통보, 혹은 선 긋기다.
그제야 왜 오룡이 저토록 비장한 표정을 하고 있는 건지 알 것 같았다.
‘목숨을 담보로 찾아왔군.’
그들은 데몬로드가 얼마나 강력한 존재인지 이제는 안다. 둠만큼은 아니지만 우리엘 디아블로와 싸우면 거의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을 것이라는 것도 안다.
그러니 이는 오룡의 독단이다.
목숨을 버릴 각오로 찾아온 것이다.
“그와 나는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는 관계다.”
하지만, 대놓고 사실을 말해주진 않았다. 그들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해야 할 것이다.
구화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비유적인 표현이 맞았나 보군요. 그렇다면······.”
“허나 나의 던전에 들어왔으니 그 값은 해야겠지.”
동시에 오룡 모두의 얼굴이 잿빛이 되었다.
그가 자신을 정말 주인이라 생각한다면.
야차들은 대라선이 아닌 자를 따르려하지 않을 것이다.
충돌이 생길 것이고, 그 결과는 파멸이었다.
“값을 치루라는 건가요?”
“당연하다.”
“하지만 저희는 가진 게 없습니다.”
둠의 침공 이후 모든 것을 잃었다. 땅을 빌려준 값을 원한다고 하더라도 제대로 대가를 지불할 수 없다는 말이다.
없는 걸 있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
사실 그대로를 말하자, 우리엘 디아블로가 구화린의 전신을 훑었다.
“훌륭한 몸이 있지 않느냐?”
그 순간 구화린의 표정이 더없이 굳었다.
설마, 했지만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저 무감정한 눈빛 뒤에 색욕이 도사려도 이상할 건 없었다. 구화린은 눈을 감았다.
그가 자신의 몸을 바란다면, 야차들의 새로운 터전을 지키기에 도리어 싼값이었다. 지난 십여 일간 머물며 새로운 터전이 얼마나 대단한 곳인지 새삼 느끼고 있지 않나.
세계수는 그 자체만으로도 야차들의 기운을 복 돋아줬다.
아마도 그 세계수라는 건 주변에 있는 것만으로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다주는 게 분명했다.
하물며 무기로 쓸 수 있는 좋은 재료가 많았고, 차크라가 넘쳐서 야차들은 하루가다르게 강해지고 있었다.
그야말로 천혜(天惠)의 보고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찰산보다도 더욱 풍부한 기운은 믿기지가 않을 수준이었다.
“알겠어요. 하지만 저 하나로 만족해주시길.”
구화린이 참담한 얼굴로 무겁게 입을 열었다.
나머지 오룡들 모두가 구화린을 바라봤다. 그녀 스스로가 희생을 자처한 것이다.
“무언가 착각한 것 같군.”
그때, 우리엘 디아블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너의 몸을 탐하겠다는 말이 아니다. 너희의 훌륭한 노동력을 중요시하겠다는 거지.”
노동력!
수만의 야차가 들어왔다.
그들은 나이가 적어도, 많아도, 육체적 건강함은 이루 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다.
안 그래도 상단의 일과 관련하여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던 참.
착각. 구화린의 얼굴이 붉어졌다.
“대가도 지불하겠다. 허나 일은 똑바로 해야 할 것이다.”
수만 명의 야차들이 먹고 사는데 막막하지 않았다면 거짓이다. 집은 지어져 있었지만 논과 밭이 경작되어 있는 건 아니었다. 가져온 씨앗들을 심어봤지만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여 대부분이 괴사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엘 디아블로가 대가를 지불하며 노동력을 사겠다는 말은그야말로 단비와 같은 발언이었다.
“······ 그게 전부입니까?”
“원한다면 그 몸뚱이를 탐해줄 수도 있겠지.”
“아, 아닙니다. 헌데 저희의 힘이 필요한 곳이 어딘가요?”
“가장 중요한 일은 ‘용병’의 임무다. 나의 상단을 호위하며 물자를 운반할 용병이 필요하다.”
나찰산에도 용병의 개념이 없는 건 아니었다.
종족은 같아도 부족이 다른 경우 간혹 전쟁이 벌어졌으며, 용병을 고용하여 승리를 노리기도 했던 것이다.
“더불어, ‘둠’을 감시하는 조 또한 편성할 것이다.”
“······!!”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둠!
그 절망의 이름이 우리엘 디아블로에게서 튀어나온 것이다.
“그가, 이 세계에 있습니까?”
“그렇다. 그는 나와 같은 데몬로드이며, 나와 적대적인 관계다.”
두근! 두근!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원수가 이곳에 있다. 야차와 나찰들을 죽이고, 나찰각을 부순 놈이 버젓이 살아 있었다.
“이 세계에서 너희들이 알아야할 것들이 많다. 그렇기에 용병으로 상행에 동행한다면 많은 도움이 될 터.”
“저희를 도와주시는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아무리 봐도 그에게선 야차들에 대한 호의가 있었다. 아니라면 나올 수 없는 제안이었다.
“너희들의 가능성을 높게 보기 때문이다.”
“······ 우리엘 디아블로님은 우리의 편이라고 생각해도 되겠습니까?”
구화린이 더욱 긴장하며 물었다.
여기서 그가 부정한다면 더욱 진지하게 일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었다.
우리엘 디아블로. 그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둠을 상대할 때에 있어서만큼은 그리 생각해도 좋다.”
“알겠습니다. 허나, 저희가 독단으로 처리할 수 없는 일입니다. 물론 대라선께서 허락하신다면 대부분의 야차들이 기꺼이 그 일을 맡을 것입니다.”
“그건 문제없다.”
우리엘 디아블로는 자신했다. 대라선이 자신의 말을 들어주리라고 확신하는 분위기였다.
‘전혀 다르잖아.’
같은 자라고 하더니, 역시 비유적인 표현이었던 모양이라고 구화린은 생각했다.
오한성. 새로운 대라선의 자리에 오른 그는 뭐랄까, 조금 더 귀여운 구석이 있다. 하지만 우리엘 디아블로는 딱딱하기 그지없었다.
물론 무거운 말투나 분위기는 비슷한 면이 없잖아 있지만 그래도 역시 오한성 쪽으로 더 시선이 가는 건 왜일까.
“용무가 끝났으면 나가보도록.”
“······ 예.”
오룡들 모두가 천천히 몸을 돌려 바깥으로 걸어 나갔다.
뻣뻣하기 그지없는 발걸음. 그만큼 긴장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이윽고 문이 닫히며, 방 안에는 정적이 찾아들었다.
* * * * *
“······ 어떻게 생각해?”
방을 나선 즉시 구화린이 말했다.
“둠을 상대할 때만큼은 동료라고 생각해도 좋다고 했지. 적어도 야차들을 착취하거나, 적으로 돌리진 않을 거라는 건 확실하다.”
무룡 무백이 답했다.
“살 떨려 죽는 줄 알았네. 정말 저런 놈들이 70명 넘게 있다는 거야?”
잠룡 주가람이 너스레를 떨었다.
심연. 이곳은 강자들의 세계가 분명하다. 저런 존재가 71명이나 있다니. 진즉에 세계 자체가 멸망하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였다.
“만약 그가 우리를 공격한다면, 막을 수 있을까?”
구화린이 자못 심각한 어조로 물었다.
나머지 네 명이 입을 닫았다.
우리엘 디아블로. 그 자체만으로도 강하지만, 그의 주변에 있는 여자도 만만치 않다. 하물며 그게 그가 가진 저력의 전부도 아닐 것이었다.
“······ 우리에겐 시간이 필요하다. 대라선께서 계승의 의식을 끝마친다 하더라도당장 그 힘을 쓸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우리도 피해를 복구할 시간이 있어야 하긴 매한가지지.”
무백이 참담한 심정으로 말했다.
지금 상황에선 그를 적으로 돌려서 좋을 게 없다.
오히려 그가 호의적으로 나온 이때에, 최대한 협력하며 관계를 쌓아나가는 게 좋을 수도 있었다.
“돌아가자.”
구화린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더 말해 무엇하랴.
“그래. 그런데 구화린, 결국 구화랑이랑 같이 살게 됐다면서?”
그때 주가람이 장난조로 입을 열었다.
구화린은 이를 바드득 갈며 주먹을 쥐었다.
“더 말하지 마.”
“······ 구화랑의 비명소리가 끊이질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말이야. 거, 죽이진 말라고······?”
“죽지 않을 만큼 조절하고 있으니까 괜찮아. 애초에 이상한 짓만 안 하면 맞을 일도 없잖아?”
구화린이 서슬퍼렇게 웃었다. 주가람이 식은땀을 삐죽 흘리며 애써 외면했다.
“그건 구화랑에게 숨을 쉬지 말라는 것과 똑같은 말이야······.”
이상한 짓. 한 치 앞을 예상할 수 없는 괴랄한 행동!
그것을 하지 말라는 건 구화랑에게 죽으라는 말과 똑같았다.
* * * * *
“에취!”
구화랑이 기침을 하며 콧물을 닦았다.
“누가 내 욕을 하나?”
춥지도 않은데 한기가 찾아왔다.
구화랑은 성의 입구에서 불침번을 서고 있었다.
‘내 동생은 내가 지킨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구화랑이 솔선수범하여 불침번을 서고 있는 것이다.
던전의 9층. 지난 10여 일간 주변을 탐색한 결과 이곳엔 괴물도 없었다. 괴물은 4층 이하에서만 서식했고, 적이라고 할 만한 생명체 자체가 없는 그런 장소였으니 불침번도 사실 별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구화랑은 눈에 불을 켜고 주변을 살폈다.
얼마나 만나고 싶었던가. 어려서부터 구화린을 업어 키운 게 구화랑이었다. 그는 사랑하는 여동생을 위해서라면 간도 쓸개도 빼줄 용의가 있었다.
그러길 몇 시간이 지났을까.
저 멀리서 웬 인영 하나가 보이기 시작했다.
‘누구지?’
구화랑이 검을 들었다.
수상한 자라면 벨 것이고, 수상하지 않아도 야차가 아니라면 벨 것이다.
극도의 긴장감.
이윽고 대상을 확인한 구화랑의 눈이 더없이 커졌다.
그리고 검을 바닥에 내던지며, 성내를 향해 크게 외쳤다.
“······대라선께서 돌아오셨다!”
< 37. 구화랑, 구화린(完)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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