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신사냥꾼-155화 (156/251)

< 37. 구화랑, 구화린(4) >

구화랑이 심연으로 건너온 건 검은 귀신, 암흑인들이 최초로 나찰각을 공격할 그때다. 당연히 이후에 벌어진 일들에 관해선 무지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정도라는 게 있다. 이곳에서 보낸 시간이 몇 년 되지도 않았건만 그 사이에 대라선이 바뀌며 모든 야차들이 이주를 결심했다는 게 언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화천이 배신하고 데몬로드라는 녀석이 쳐들어왔어. 대라선께서 돌아가시고 그 자리를 오한성님이 채우신 거야.”

“데몬로드······?”

구화린의 짧은 설명을 듣고 구화랑은 경악했다.

데몬로드!

심연에 존재하는 72명의 왕들. 우리엘 디아블로 역시 그중 하나였다.

그런데 데몬로드가 나찰각에 쳐들어왔다니?

뿐만 아니라 화천. 자신이 따랐던 나찰이 배신했다는 것도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우리도 자세한 사항은 몰라. 다만, 그분이 ‘정통의 자격을 잇는 자’라는 건 모든 나찰께서 확인하셨어.”

“환장하겠군.”

구화랑이 이마를 짚었다.

이곳엔 나찰들도 있었다. 정확하게 6명. 십이나찰 중 절반만 온 것이다. 굳이 더 안 물어도 알 것 같았다.

데몬로드를 상대하며 대라선과 6명의 나찰이 죽었다. 초유의 사태였다.

하지만 구화랑은 나찰산과 나찰각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다. 모든 야차라면 그러할 것이다. 이만한 풍파를 겪었으니······.

“그럼 그 데몬로드라는 녀석은 죽인 거냐?”

무려 대라선과 십이나찰의 희생이다.

신이라도 죽일 수 있을 것만 같은 조합이지 않은가.

하지만 구화린이 고개를 저었다.

“너무 강했어. 우리는 손을 쓸 수가 없었어. 다시 원래 있던 곳으로 돌려보내는 것밖에는······.”

구화린의 표정이 침울해졌다.

그녀만이 아니었다. 모두가 울분을 곱씹고 있었다. 이만한 굴욕은 그들 모두가 처음 느껴보는 것이었다.

설마 데몬로드의 힘이 이토록 강대한 것일 줄이야.

구화랑 또한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그 역시 분노를 느꼈다.

그렇다면 우리엘 디아블로도 그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다는 걸까?

‘우리의 복수를 위해선 그가 필요하다.’

야차는 당하고만 사는 종족이 아니다. 당하면 갚는다. 엄청난 죽음을 말미암아 그대로 침묵한다면 야차가 아니다.

이곳은 심연과 연결되어 있는 던전이었다. 심연에는 당연히, 이제는 71명이 되어버린 데몬로드가 있고, 그중에는 나찰각을 무너트린 장본인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오한성이 야차들을 이곳으로 이끌고 온 것은 그것을 위해서가 아닐는지.

“그런데 아까 이야긴 뭐야? 우리엘······ 디아블로라고 했던가?”

오한성이 이곳을 온전히 자신에게 맡긴 건 이들에게 어느 정도의 설명을 하라는 무언의 지시였다. 구화랑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가 오한성님이다. 이제는 대라선이라고 불러야겠지만.”

“오한성님의 다른 이름이라도 된다는 거야?”

“아니······ 다른 몸이야. 이곳을 지배하는 왕. 그가 우리엘 디아블로지.”

구화린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게 정상적인 반응이다.

“조만간 보고 알게 될 거다. 그보단 우선 이곳을 설명하는 게 먼저일 것 같은데.”

“정말 여기가 우리의 새로운 터전이라고?”

“아름답지? 저 나무는 세계수고, 저 작은 난쟁이들은 드워프라는 종족이다. 그들은 어지간한 백원후보다 더 손재주가 있지. 물론 은후보다 뛰어난 대장장이는 없지만······.”

은후의 대장장이 기술은 이미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 아무리 드워프가 태어나서부터 철을 다룬다고 할지라도 은후를 이길 순 없다.

허나 평균치는 백원후들을 웃돈다.

“흘려들을 수 없는 말이군.”

그 말을 듣고 처음으로 드워프들이 반응했다.

여태껏 무시로 일관하던 드워프들이 다가와선 입을 연 것이다.

“드워프가 아닌데 우리의 기술을 뛰어넘는 자가 있다고?”

구화랑이 피식 웃었다.

그의 얼굴엔 자부심이 가득했다.

“그대들은 그대들이 최고라고 여겼겠지만, 우리 백원후의 기술도 만만치 않아.”

“부디 그 솜씨를 볼 수 있으면 좋겠군.”

“서로의 경쟁은 우리엘님의 허락을 받고 해라.”

“흠······ 좋다. 비록 우리가 고용된 몸이라지만 우리보다 뛰어난 기술을 가졌다는데 가만히 듣고만 있을 순 없지.”

드워프들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그들이 고집 센 종족이라 해도 우리엘 디아블로의 이름 앞에선 순한 양과 다를 바가 없었다.

야차와 백원후들도 관심이 생겼다.

주변에 늘어선 수많은 집들. 장인의 솜씨가 묻어나지 않은 게 없었다. 이것을 저들이 만들었다면, 분명히 대장장이 백원후들과도 한판 해볼 만한 솜씨라는 이야기다.

구화랑이 고개를 돌렸다. 그러곤 활짝 웃어보였다.

“자자. 놀라운 건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저기 세계수 옆에 가장 큰 집이 보이십니까? 바로 우리 화린이와 저의 알콩달콩 한 사랑이 시작될 아름답기 짝이 없는······!”

콰득!

“커헉!”

“난 저기서 안 살 거니까 분명히 알아둬.”

구화린이 구화랑의 발을 세차게 밟았다.

한참 발을 붙잡고 끙끙대던 구화랑이 입을 내밀며 말했다.

“화린아. 원래 남매는 함께 사는 거란다.”

“닥쳐. 너랑 살면 무슨 짓을 당할지 모르잖아!”

“어허. 누가 들으면 이상한 짓이라도 하는 줄 알겠네. 기껏해야 머리카락 냄새 맡고 배 좀 쓰다듬는 게 전부 아니냐? 남매라면 모두가 하는······.”

“일반적인 남매는 그런 걸 하지 않아!”

“변했네, 변했어. 어렸을 땐 그렇게 좋다고 따라다니더니.”

“죽고 싶어?”

“이미 죽이지 않았니. 내 사진을 그렇게 밟아댔다고 하더라.”

“그,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오빠라는 호칭도 사라졌다. 이게 원래 둘의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둘의 이러한 사이를 아는 야차들은 ‘또 시작됐네.’라는 표정으로 둘을 바라볼 뿐이었다.

“말했잖아? 우리엘 디아블로가 우리의 새로운 대라선이라고. 그분께서 말해주셨다. 설마, 설마 했는데 진짜였단 말이지······.”

“그, 그건, 네가 너무 허무하게 죽어서.”

“화린아. 오빠는 너무 슬프다. 나는 너를 그렇게 막나가는 아이로 키운 적이 없는데.”

“네가 키운 적 자체가 없잖아!”

“무슨 소리야? 내가 너 아기 때 속옷도 갈아주고, 똥오줌도······.”

“그만!”

주먹이 먼저 날아갔다. 퍼억! 소리와 함께 구화랑이 바닥을 굴렀다.

“하하하!”

“오랜만에 저 모습을 보니 긴장이 풀리는군.”

“그래. 역시 저 둘이 있어야지.”

야차들의 웃음은 전염이 되었다. 구화랑과 구화린 남매는 나찰산 자체에서 워낙에 유명한 인사들이었다. 둘을 모르는 자가 거의 없을 정도.

이내 웃음바다가 되어 분위기가 상당히 누그러졌다.

구화린은 얼굴을 더없이 붉게 물들이며 고개를 숙였다. 본래 그녀의 도도한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모습.

하여간 구화랑, 저 작자와 연결되면 제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는 생각과 함께, 구화린은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뿐만이 아닙니다. 외형뿐이긴 하지만.”

다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구화랑이 그들을 이끌고 세계수의 뒤편으로 다가갔다.

그곳엔 큰 성이 있었다.

그 성을 보고 모두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나찰각?”

“허······!”

나찰각이었다. 지금은 무너져버린 성. 100% 일치 한다 보기는 어렵지만 외형만은 나찰각을 빼닮았다.

구화랑이 미소를 지었다.

“아직 완공되진 않았지만 나머지 세세한 부분은 우리 야차들과 백원후가 함께 힘을 합쳐 복원해나가면 되지 않겠습니까?”

아주 작은 배려였다.

새로운 터전에 적응하도록 하기 위한 배려.

그것을 야차들이라고 모를 리 없었다.

“우리는 다시 이곳에서 일어날 것입니다. 더욱 강하게, 더욱 넓게······!”

구화랑이 주먹을 쥐었다.

검은 귀신의 주인들이 데몬로드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들이 언제고 나찰각을 노릴 수 있다는 것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설마 이토록 빠르게 나찰각이 공격당하고, 와해될 줄은 몰랐지만, 어떤 기가 막힌 술법을 부렸는지 오한성이 대라선이 되었다.

또한 그는 유일하게 호의적인 데몬로드이기도 하였다.

뭐가 본체인지 정체성에 혼란이 오기는 하지만, 이런 장소마저 미련 없이 내어준다는 건 그의 배포가 장난이 아님을 말해주는 것이다.

‘야차는 죽지 않는다.’

야차의 분노는 조용하고, 맹렬하다.

그들의 눈에 새겨진 그 경동(傾動)을 구화랑 역시 읽었다.

작은 경동은 이내 지각변동을 일으켜 거대한 헤일처럼 적을 덮치리라.

그리고 그 토대를 마련하는데 ‘세계수’는 더없이 좋은 바탕이 될 것이었다.

* * * * *

모두가 자리를 잡으며 이곳 던전에 대해서 익숙해져갈 무렵.

오룡(五龍)은 다시 한 번 모였다.

“대라선께선 왜 모습을 보이지 않는 거지?”

무룡 무백이 넌지시 말을 꺼냈다.

벌써 십여 일이 더 지났지만 대라선은 한 번도 이곳에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그에 관해 야차들도 하나, 둘 의문을 가지고 있는 상태였다.

“현계에서 ‘계승의 의식’을 받고 있다고 해.”

구화린이 답했다.

계승의 의식. 대라선이 되기 위한 의식을 말하는 거다.

“하지만 역대의 기록들을 살펴보면, 그 의식이 7일이 넘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무룡이 한숨을 내쉬었다.

역대의 대라선 중 7일 이상 의식을 계속한 존재는 없었다. 그 정도만 해도 충분히‘대라선’의 이름을 달 수 있다는 뜻.

하지만 오한성. 그는 10일이 넘도록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그가 돌아와야 비어있는 십이나찰의 자리를 채울 수 있다. 십이나찰의 임명은 대라선의 고유 권한이니까.”

“무룡. 설마 네가 나찰이라도 되겠다는 거야?”

“구화린. 모두가 마음 깊숙한 곳에선 불안해하고 있다는 걸 너도 알 거다. 그 불안함을 잠식시키기 위해선 십이나찰의 힘이 필요하다.”

“네 말이 맞다고 하더라도, 계승의 의식을 받고 있는 대라선을 강제로 데려올 순 없어.”

“아니. 화련대주가 말하지 않았나? 대라선이 우리엘 디아블로라고.”

“그건 비유 같은 게 아닐까 싶은데.”

무룡은 고개를 저었다.

“화련대주 구화랑, 그가 허언을 할 자는 아니야. 너는 너의 친오빠라는 이유로 크게 믿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다만.”

“설령 그게 맞다고 쳐. 그러면 우리엘 디아블로를 찾아가겠다는 거야?”

“바로 그렇다. 우리는 그에 대한 정보가 하나도 없다. 정말 그가 대라선과 동일 인물이라면 우리는 이를 확인해야할 필요가 있다. 나찰의 임명 외에도 말이야.”

무백의 말은 타당했다. 나찰의 임명을 제외해도, 우리엘 디아블로에 관하여 확인할 필요는 있었다.

순간 무백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게다가······ 우리엘 디아블로. 그가 데몬로드라는 이야기도 있더군. 우리를 공격한 자와 같은······.”

구화랑은 이에 대해 말을 아꼈다. 굳이 지금 꺼내봤자 좋은 이야기는 아니라는 거겠지. 하지만 야차들, 그중에서도 오룡은 바보가 아니다.

“만약 그가 데몬로드라면 어떻게 할 건데?”

“우리는 우리를 공격한 자와 비슷한 존재를 대라선으로 모시게 된 거다. 직접 확인해야 모든 진상이 규명이 되겠지만, 그다지 낙관적인 상황은 아니라는 거지.”

“위험한 발상이야. 무백, 너의 그 생각이 우리 모두를 곤란하게 만들 수도 있어.”

“안다. 그래서 너희만 따로 모은 것이다. 우리의 독단으로 처리하게끔. 나 혼자서하면 더 좋겠지만, 만나줄 것 같지가 않아서 말이야.”

무백의 시선은 정확히 구화린에게 가 있었다.

오룡은 구실이고, 실체는 구화린이다. 구화랑의 친동생인 구화린이 직접 보고 싶다고 한다면 얼추 구색이 맞춰지니 말이다.

하지만 우리엘 디아블로. 그가 분노한다면?

말이 동일인이고, 사실은 다른 존재라면?

사소한 의문조차 파국이 될 수 있다. 데몬로드, 둠. 그의 두려움을 그들은 직접 겪었지 않나.

“너희 모두의 동의가 필요하다. 그를 확인하러 가겠나?”

무백이 무겁게 말했다.

동시에, 남은 네 명 모두가 침을 꿀꺽 삼켰다.

* * * * *

‘전이가 완료되었다’는 문구와 함께 나는 눈을 떴다.

“빠~! 아빠!”

가장 먼저 나를 반긴 건 이그닐이었다.

마치 고양이처럼 손으로 몸을 붙잡고 내 어깨까지 오른 이그닐이 열심히 뺨을 비벼댔다. 며칠에 한 번씩 전이를 하지만 그때마다 이러한 반응이니 마음이 즐거웠다.

“많이, 보고 싶었어요!”

게다가 이그닐의 언어구사 능력도 제법 상향되었다. 완벽하진 않지만 이러한 표현 정도는 곧잘 하게 되었다.

나는 이그닐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시선을 옮겼다.

내 앞에 무릎 꿇고 있는 여자.

“로드시여.”

“라이라.”

라이라 디아블로. 그녀가 얕은 미소와 함께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가만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멸제의 카르페디엠이 죽고 짧지 않은 시간이 흘렀다. 심연은 급격한 변화 속이었다. ‘계승의 의식’을 받고 있다고 하더라도 내가 계속 전이를 할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둠에 대한 정보는 진척이 되었나?”

“아직 입니다. 그에 대한 것들은 온통 의문투성이인 게 많아서······ 최근엔 모습조차 보이고 있지를 않다고 합니다.”

특히 둠.

녀석에 관한 조사를 라이라에게 시켰다.

나찰각을 공격하고 역소환 된 이후, 뚜렷한 변화라고 할 게 없었다.

어쩌면 내 예상대로 엄청난 타격을 받았을 수도 있겠다.

‘둠이 타격을 받았다는 정보만 확실해지면, 좋은 협상카드로 사용될 수 있다.’

둠. 네 개의 파벌 중 하나를 다스리는 수장. 그에 대한 정보는 비싸게 팔린다. 쓰기에 따라 지금 나의 입지를 더욱 크게 넓힐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로드시여.”

“······?”

내가 바라보자, 라이라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오룡이라 칭하는 야차들이 로드를 뵙기를 원합니다.”

오룡이라.

야차 중에서도 으뜸의 잠재력을 가진 존재들.

수십 마리의 용을 희생해서 낳은 아이들이라고 했다. 그 잠재력이 폭발한다면 라이라처럼 커다란 변화가 생길 수도 있었다.

게다가 십 일간 거의 방치해 두었으니 궁금증이 도질 만도 하였다.

이 몸으로 그들을 맞이하는 건 처음이지만, 언제고 해야할 일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들라하라.”

< 37. 구화랑, 구화린(4) > 끝

ⓒ 온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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