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 구화랑, 구화린(2) >
인도자!
인도자란 무엇인가.
앞에서 이끌어주는 존재를 말함이다.
시련을 완료하고 나는 ‘정수’를 얻었다. 그리고 이 ‘정수’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심장의 보석과도 매우 비슷했다.
‘지배자의 힘조차 통하지 않았었지.’
나 역시 그러한 성질을 가지게 된 것이다.
다만, 그 힘이 평범하지 않다는 것 정도가 다를 뿐이었다.
과연 둠과 정체모를 신마저 바라고 바랐던 ‘정수’가 내게 얼마나 도움이 될지 기대되었다.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화천과 둠을 상대하며 상당한 숫자의 야차와 나찰이 죽어나갔다. 특히 십이나찰 중에선 절반이 비었다. 여섯. 둠 하나를 상대하며 무려 여섯이 명을 달리한 것이다. 전율이 일수밖에 없었다.
‘둠······!’
전율과 공포의 존재. 최강의 데몬로드 중 하나라고 칭해지는 괴물다웠다. 아무리 나찰들이 강하다고 할지라도 심연의 최강자를 상대하기란 어려웠던 모양.
말인 즉, 인도자가 되어 이들의 힘을 얻는다고 할지라도 마음을 놓아선 안 된다는뜻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불안해할 필요도 없었다.
‘나는 강해졌다.’
나의 미련함으로 인해 월천을 잃었지만, 이제는 실수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은 완전하지 못하다지만 대신 계속 보완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성질을 지녔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과거를 인정했으나 받아들이지 못했던 그 실수를, 이제부터라도 만회하려고 노력할 것이었다.
같은 실수는 한 번이면 족하다. 재차 반복하는 건 미련한 짓이다.
적어도······ 월천이 함께하는 한, 그의 정신을 이으려 노력하리라.
“은후는 어디 있지?”
흑풍검을 함께 만들었던 백원후. 그를 부르자 거대한 몸집을 내세우며 상처투성이인 은후가 내 앞에 나왔다.
“부르셨습니까?”
전과 달리 말투가 공손해졌다.
처음부터 고개를 조아린 채 저자세로 일관하고 있었다.
은후 역시 나를 인도자로 받아들인 것이다.
나는 짧게 말했다.
“나와 함께 검 한 자루를 연마해야겠다.”
“검이라면······?”
“이거다.”
검. 월천의 신체는 가루가 되어 검 한 자루로 변모했다. 둠이 말한 ‘반쪽’이 바로 이 검인 셈이다. 나머지 반은 ‘허무’로 향했다고 하니, 아주 영원히 그를 잃어버린 것은 아니다.
다만, 검을 나에게 맞추고 암령의 힘을 자유로이 다룰 수 있도록 조정하는 과정이필요했다. 확실한 건 월천의 검으로 말미암아 나는 더욱 강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 처음 보는 재질이군요.”
“월천 그 자체니까.”
“설마, 경질화 되신 겁니까?”
“경질화가 뭐지?”
“격 높은 야차, 혹은 나찰이 죽었을 때 아주 희박한 확률로 그들은 또 다른 형태를 띠게 됩니다. 모양, 성질, 모든 게 가지각색이죠. 우리는 그것을 경질화라고 부릅니다만······ 이처럼 또렷한 검의 형태는 처음 보는군요.”
은후는 신기하다는 듯 검을 이리저리 살폈다.
그의 눈엔 열기가 있었다.
대장장이의 본능이 깨어난 것일 테다.
‘흑풍검마저 깨졌지만······.’
흑풍검은 지상에서 가장 단단하다고 칭해지는 철 중 하나인 현철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그 현철마저도 화천과 대립하며 망가졌다. 내가 더 강했다면 물론 흑풍검의 손상을 막을 수 있었을 테지만, 검 자체의 성능만으로 최강자들을 버티기엔 한계가 있었단 말이다.
‘하지만 월천 그 자체인 이 검이라면 어떨까.’
내 부족한 부분을 그가, 이 검이 보완해줄 것이다.
“문제는 시설입니다. 둠의 공격으로 검을 연마할 수 있는 모든 장소가 파괴되었습니다.”
“그 문제는 걱정하지 말도록.”
어차피 여왕과의 약속이 있었다. 꽃의 여왕 호라는 현계로 나를 보내주는 대신, 자격자임을 증명하거든 모든 야차와 나찰들을 데리고 떠나줄 것을 원했다.
이제 그 계약의 내용을 지킬 차례다.
-어, 여왕님이다!
그녀도 양반은 못 됐다.
풀잎 요정 라율이 외치자, 그와 동시에 나찰각 주변으로 꽃들이 만개하며 순식간에 사방에 풀들이 자라났다.
쿵! 쿵! 쿠우웅!
그리고 거대한 나무들과 함께, 그녀가 날갯짓을 하며 나타났다.
호라. 정령왕이자 꽃잎의 여왕인 그녀의 행차였다.
“죽음 숲의 귀신!”
“금지를 벗어난 건가? 어떻게?”
“대라선을 지켜라!”
야차와 나찰들이 내 앞을 막아섰다. 꽃잎의 여왕 호라. 그녀는 정령이지만 막대한존재감으로 인해 모두의 눈에 명확하게 비춰졌다. 그 형태가 다르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분명히 ‘공포’를 느끼고 있었으니.
끊어질 듯한 긴장감. 나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괜찮다. 그녀는 나와의 계약을 위해 몸소 나타난 것이다.”
“역시 우리 아이들의 계약자로군요. 말이 통해서 좋아요.”
호라가 씽긋 웃으며 내 지척까지 날아왔다. 야차와 나찰들은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듯.
나는 잠시 고개를 갸웃하곤 물었다.
“그런데 너는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는 게 아니었나?”
“맞아요. 그러나 이번 일로 저의 영향력이 넓어졌죠. 나찰각을 지키던 힘 자체가 소멸하고, 그대에게 깃들었으니까요. 그리고 그대는 나를 싫어하지 않죠.”
내가 바라지 않았다면 그녀도 이곳으로 당도하기 힘들었을 거란 의미다.
이 역시 ‘정수’를 말함이었다. 정수의 힘으로 말미암아 정령왕인 그녀조차도 나찰각에 손을 대지 못했다는 뜻.
그렇다면 정수는 누군가의 힘을 제한하는 용도란 건가? 아직은 더 연구가 필요할듯싶었다.
호라가 씽긋 웃었다.
“새로운 대라선에 등극한 걸 축하해요. 이제 그대는 마음대로 ‘현계’를 오갈 수 있어요. 정식적인 관례를 마치면 정통의 힘을 잇게 되겠죠.”
“약속은 지킬 것이다.”
“믿어요. 저는 순수하게 축하의 의미로 온 거랍니다. 약간의 선물과 함께 말이죠.”
호라가 씽긋 웃었다. 다른 이들에게는 공포의 상징과 같은 존재였으나, 꽃잎 세자매 덕분인지 그녀는 내 앞에서 한없이 자애로웠다.
이윽고 호라가 날개로 나를 감쌌다. 그러곤 내 양 얼굴을 쓰다듬으며, 이마와 콧볼, 그리고 입술에 차례대로 입을 맞췄다.
“저의 호의를 담았답니다. 후에 저와 같은 ‘존재’들을 만나게 된다면, 도움이 될 거예요. 감히 저, 호라를 무시하지 않는다면 말이죠.”
호라가 살짝 부끄럽다는 듯 눈을 내리깔았다.
“그리고 조심하시길. 그대가 갖게 된 힘은 너무 위험한 것이랍니다.”
“이 힘의 사용법을 아는가?”
“아직 ‘개화’하지 않았어요. 천마는 그 힘으로 야차와 나찰들을 만들었죠.”
만들었다고?
야차와 나찰들은 자연적으로 생성 된 종족이 아니라는 말이었다. 쉬이 믿기지 않았다. 내가 ‘정수’를 갖자 그들 모두가 급격하게 친절해지고 나를 따르게 된 건, 내가 단순히 대라선이라서가 아닌 모양이었다.
“신은 자신과 닮은 종족을 만들 수 있기에 신이랍니다. 그래서······ 버림받은 신들은 그대의 그 힘을 노릴 거예요.”
“신이 될 자격이라도 된다는 말 같군.”
“그건 생각하기 나름이에요.”
내겐 진화의 힘이 있다. 하지만 완벽한 ‘창조’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지금 내가 갖게 된 이 힘은, 그 창조를 실현하게 해준다는 것이다.
창조의 힘. 둠이 욕심을 낸 이유를 알겠다. 더불어 왜 ‘버림받은 신’이 나를 노린다는 것인지도 알게 되었다.
“여기까지 해야겠군요. 그대라면 제 산에 놀러 와도 좋아요. 가끔 제 아이들과 함께······.”
“그러지.”
“아! 고마워요.”
호라가 싱그럽게 미소를 지었다.
이후 호라는 날개를 풀고, 다시금 하늘로 두둥실 떠올랐다.
“부디 꽃길만을 걷기를 바랄게요.”
휘이이이이.
바람이 불고, 꽃잎이 사방에 마구 흩날렸다.
그 광경은 벚꽃 잎이 만개한 것처럼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호라와 함께 온 자연의 군단이 멀어지자, 야차와 나찰들은 그제야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나를 놀랍다는 듯이 쳐다봤다.
그들에게 있어서 공포 그 자체인 호라가, 내게 저만한 호의를 보일 줄은 몰랐기 때문이겠지.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동시에 선언했다.
“모든 의식이 끝나면 나찰산을 버리고 새로운 터로 향한다. 그곳은 ‘잠자는 별’이라 칭해지는 장소이며, 그곳에서 우리는 새롭게 시작할 것이다.”
“나찰산을 버린다고?”
“그, 그게 무슨······!”
그들의 모든 터전이 이곳 나찰산에 있다. 그 터전을 버리고 새로운 곳에서 정착하자는 말이니 쉽게 받아들일 리 만무했다.
하지만 나는 밀고나갔다. 마침 그들을 위해 생각해놓은 장소도 있었다.
‘세계수의 담당을 맡기면 되겠군.’
보통 세계수라 하면 엘프가 떠오르지만, 야차들이라고 못할 이유가 없었다.
* * * * *
나는 즉시 현계에 올랐다.
검은 야차의 인을 사용하여 현계로 이동하는 게 자유로워진 덕이다.
하지만 이전 대라선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원숭이의 형태로 돌아다니던 그가, 아예 사라진 듯싶었다.
오로지 천마만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 따름이었다.
천마. 세상에 완전한 건 없지만, 그나마 완전한 게 있다고 한다면 바로 천마일 것이다. 그는 죽었으나 압도적인 존재감을 떨쳐내고 있었다.
나는 가만히 그 앞에 섰다.
대라선의 의식. 모든 대라선은 의식을 위해 이 장소를 찾는다.
번뜩!
그 순간, 천마의 눈이 떠졌다.
그리고 내 심장부근에서 ‘정수’가 반응하며 빛을 뿜기 시작했다.
‘아!’
내 인식이 넓어졌다. 세상을 바라보는 순이 바뀌어갔다.
그리고 나는 천마의 의식을 약간이나마 탐할 수 있게 되었다.
광활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다. 천마의 힘은 상상을, 사상을 초월했다.
이것이 의식이다.
대라선이란 천마의 힘을 이어받는 존재를 뜻하는 것이었다.
얼마나 받아들일 수 있을지는 대상에 따라 다르다. 이전의 대라선도 천마의 힘을 아주 약간밖에 이어받지 못했다.
그것만으로도 야차와 나찰들을 이끌기에 충분했다는 게 더욱 믿기지 않는 점이었지만.
얼마나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앞으로의 내 한계가 달라질 터.
나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겸허히 그 힘을 받아들였다.
* * * * *
구화랑이 인상을 찌푸렸다.
“한 달 안에 수만 명이 살 수 있는 보금자리를 만들라고요?”
“그렇다.”
나는 전이하여 우리엘 디아블로가 된 상태였다. 일단 최소한의 준비라도 끝마치고 움직여야 하기 때문에 한 달의 기간을 둔 것이다. 오한성의 몸도 현계에서 ‘의식’을 치루느라 바로 행동할 수 없었다.
구화랑이 머리를 긁적였다.
“그냥 천막만 치는 수준이라면 모를까, 제대로 된 장소를 만들려면 시간이 너무 촉박합니다.”
“야차들이 올 것이다.”
“······ 네?”
“모든 야차와 나찰들이 이곳으로 올 것이다. 힘들다면 어쩔 수 없군.”
“제, 제가 뭘 잘못 들은 겁니까?”
구화랑은 나찰산에서의 일을 모른다. 일일이 설명해줄 생각도 없었다. 하지만 힘들다고 한다면, 그들이 와서 직접 만들게 하는 수밖에.
“설마······ 화린이도 옵니까? 화린이가 살아있습니까?”
하지만 그런 이야기보다도 구화랑은 자신의 여동생의 생존여부가 더욱 궁금한 듯싶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성심성의를 다해 짓겠습니다!”
“시간이 촉박하다고 하지 않았나?”
“제 좌우명이 안 되도 되게 해라거든요. 하하하.”
“그건 마음에 드는군.”
“그럼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구화랑이 달려 나갔다.
“이것들아! 일할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