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신사냥꾼-151화 (152/251)

< 36. 둠(完) >

시야 속에 월천이 담겼다.

월천. 십이나찰 중 한 명이며 나의 스승이기도 한 존재.

그와 나의 인연은 과거로부터 시작했다. 우연히 나찰산에서 맞닥트리며 그가 전해준 탈혼무정검 덕분에 나는 최후의 영웅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후 나는 그의 모습을 잊었다. 그는 과거의 존재였고 나는 미래를 살아가는 중이었기에.

앞으로 나아가려했고,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봐선 안 된다고 여겼다.

다시 나찰산에 들어온 이후에야 그를 떠올릴 수 있었다.

그리하여 새로운 관계가 형성됐다. 더욱 긴밀하게 결속해 스승과 제자라는 형태로 남았다. 그래서 알 수 있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자, 월천이 아니라는 걸.

‘둠.’

무겁게 가라앉은 무정한 눈빛.

그 안에서 나는 죽음과 파멸을 보았다.

둠이다. 월천의 껍데기를 빼앗아 선화의 동굴로 들어온 게 분명했다.

아마도······ 십이나찰은 패배했으리라. 하지만 둠 역시 무사하지만은 않은 게 틀림없었다. 아니었다면 그가 굳이 월천의 껍데기를 강탈할 리 없으므로.

“오늘은 아주 놀라운 날이다. 심연의 강자들 외에 그토록 강한 존재가 외부차원에 존재한다는 걸 처음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둠, 그가 감탄했다. 순수하게 감탄하고 있었다.

그는 여태껏, 아주 오랜 세월 심연에서만 살아왔다. 그만이 아닌 모든 데몬로드가똑같다. 균열이 아니었다면 그들은 더욱 오랜 세월 심연에 틀어박혀 있었을 것이다.

아직 데몬로드가 강림할 정도로 균열이 커지진 않았지만, 둠은 계약과 균열석이란 편법을 사용해 이곳 나찰산에 들어왔다.

둠이 심연을 내게 던졌다.

“그리고 그들을 움직인 게 인간인, 바로 너라는 걸 알았을 땐 더욱 흥미로웠다.”

흥미롭다고?

무정하고 무표정하고. 얼굴색 하나 바뀌지 않는 그런 무색무취의 시선은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전신을 오싹하게 만든다.

이길 수 없다. 월천의 껍데기지만, 어째서인지 더욱 강화되어 있었다. 느껴지는 ‘격’의 차이가 실로 대단할 수준이었다.

그저 둠이 조종하는 것일 뿐인데 이만한 차이가 나는 건 왜일까?

“하지만 너는 인간이기에 완성될 수 없다. 이곳은 ‘완성자’를 기리는 공간일지니.오로지 완성자만이 ‘정수’를 얻을 수 있지.”

알 수 없는 말과 함께 그가 양 손을 옆으로 뻗었다.

쿵! 쿠르르릉!

그러자 세계가, 우주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의 의지를 따라 새로운 형태로 발돋움하려는 것이다.

둠은 완성자였고, 그것은 물리적인 면을 초월하는 듯싶었다. 내가 있는 이곳 우주의 의지가 그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완성자. 정수가 뭔지는 몰라도 내가 깨달아야 하는 게 무엇인지는 알았다. 어쩌면내게 보였던 환영도 그를 위해 준비 된 시련이 아니었을지.

‘늦지 않았다.’

본능이 말한다.

둠에게 그 정수라는 것이 결코 넘어가선 안 된다고.

이만한 일을 벌이며 여기까지 온 건 그 ‘정수’라는 것 때문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것은 능히 균열석보다 가치가 있는 것일 터.

만약 그가 그것을 원하는 대로 갖게 되면, 심연에서조차 그를 막을 자가 없을 것이다. 무소불위의 힘을 떨치며 내가 미처 준비하기도 전에 전쟁을 끝내버릴 수도 있었다.

‘결코 그렇게 두진 않을 것이다.’

허나 방법이 없진 않았다.

모든 의지가 둠에게로 향하기 전에, 깨달으면 될 뿐이었다.

과거의 나 자신을 용서하고 받아들인다면 그가 말하는 완성자에 나도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으리라.

그리고 내겐 시간이 많았다.

[저장된 힘 500을 사용해 반경 결계 속 우주의 ‘시간’을 느리게 만들었습니다.]

[5,407,288만큼의 힘이 저장되어 있습니다.]

[120분간 지속됩니다.]

‘균열석.’

동시에, 시간이 느리게 흐른다.

정화된 균열석은 시간을 다루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을 이곳 우주 전체에 펼쳐낸다.

몸이 느려진다. 둠을 향해 몰려들던 우주도 한없이 느려졌다.

하지만 정신의 속도는 그대로다.

이것은, 깨달음의 싸움이었다.

내가 먼저 깨닫느냐 그가 이 우주의 의지를 이어 정수를 얻느냐.

“발, 악, 이, 로, 군.”

나의 행동을 둠이 일축했다.

발악. 맞다. 나는 지금 발악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뭐든지 해봐야 하지 않겠나. 패배가 확정되었다고 손가락만 빨면서 바라보는 건 내 성미에 맞지 않다.

‘나를 받아들인다.’

문제는 이것이다. 오랜 세월 거부해온 것을 그저 급하다고 마음 깊숙한 곳에서부터 받아들일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내가 오한성이며 동시에 우리엘 디아블로인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에도 많은 시간이 들어갔다. 동화율이 그렇게나 높았는데도 말이다.

그리고 지금 나는 과거의 나와 동화율 0%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것을 높이며 동화시키려거든 직접 마주하는 수밖에 없다.

‘과거의 나······.’

하지만 어떻게?

기억조차 나지 않는 걸 어떻게 마주한단 말인가.

-보여주지. 네가 절망했던, 그래서 잊고자했던 과거들을.

그때, 내 앞으로 다시금 나의 환영이 나타났다.

그제야 알았다.

‘이곳은 완성자를 위한 공간이 아니라 완성자를 만들기 위한 공간이다.’

환영 역시 시련의 일부였음을.

내가 강하게 염원하자 환영이 나타나 나를 인도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스팟-!

나는 환영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 * * * *

“야! 빨리 올라와!”

가장 친한 친구였다.

수학여행으로 향한 행선지인 한라산에서, 녀석과 나는 특이하게 생긴 ‘틈’을 발견했다.

저녁이 되어 몰래 빠져나온 뒤 우리는 그곳으로 향했다.

“이게 대체 뭘까?”

‘틈’을 앞에 두고 친구가 고개를 갸웃했다.

세상의 어그러짐이라 해야 할까.

확실한 건 일반적인 현상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어렸고, 호기심이 넘쳤다.

누군가에게 알리거나 도움을 요청하기보단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길 바랐다.

그것이 큰 재앙으로 돌아올 줄은 꿈에도 모른 채.

“어······ 어어? 나, 나 좀 잡아줘, 한성아!”

그리고 친구는 ‘틈’을 향해 손을 뻗었다.

뻗은 즉시 ‘틈’은 끈적이처럼 달라붙어 친구를 안으로 빨아들였다.

나는 한참을 망설였다. 도움을 구했지만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발을 동동 굴리다가 나도 손을 뻗었고, 나 역시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괴물에게 먹히고 있는 친구를 보았다.

나는 도망갈 수밖에 없었다. 다시 돌아가자 ‘틈’은 사라져버렸다.

학교에선 난리가 났다. 아무도 내 말을 믿지 않았고, 나는 용의선상에 올랐다가 그럴 이유가 없다는 이유로 끝내 실종처리 되었다.

‘고칠 수 없는 미래.’

머리를 부여잡았다.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내가 돌아온 시점은 이 이후다. 이미 일어난 일, 내가 손댈 수 없는 일······.

손을 뻗어도 닿지 않았다. 한없이 무력할 수밖에 없으니 나는 잊고 있었다. 잊으려고 했다는 게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이곳이 나의 시작이다.

한라산. 마검사의 시작이 담긴 곳.

후에야 나는 다시 이곳을 찾을 수 있었다. 문득 그런 기억이 떠올랐다.

‘아아.’

후회가 인다.

그때, 친구의 손을 잡아줬더라면.

어쩌면 많은 게 변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잡지 못했다.

내가 크게 절망한 최초의 기억이다.

스팟-!

빛이 아롱졌다. 그 순간 나는 다시 현실로 끌려왔다.

우주가 거의 둠에게 빨려 들어간 상태였다.

‘시간을······ 돌린다.’

나는 다시금 균열석을 손에 쥐었다.

그러자.

[저장된 힘 500을 사용해 반경 결계 속 우주의 ‘시간’을 되돌렸습니다.]

[5,406,788만큼의 힘이 저장되어 있습니다.]

반복한다.

환영이 재차 나타났고, 그 시간 동안 나는 나의 절망을 염탐했다.

그리고 끝없이 좌절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얼마나 반복하여 내 절망을 엿본 걸까.

현실로 돌아올 때마다 나는 무기력해졌다.

이제 그만하자고, 돌려봤자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머릿속으로 점칠 되기 시작했다.

친구가, 부모님이, 이런 나조차도 사랑해주었던 여인이, 내게 꽃을 건네며 웃어보이던 아이가······.

나는 그들의 손을 잡아주지 못했다.

[114,450만큼의 힘이 저장되어 있습니다.]

확실한 건 굉장히 오랜 시간 반복되었다는 것.

둠조차도 이변을 눈치 채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언제까지 공간의 시간을 돌릴 수 있을 것 같으냐? 결국 발악에 불과한 것을. 너는 결코 완성자가 될 수 없다.”

돌리면 돌릴수록, 보면 볼수록 나는 깨닫고 있었다.

‘병신 새끼!’

과거의 나를 향한 욕이다. 어쩜 저렇게 무력할 수 있단 말이냐. 저 모습을 받아들이고 사랑하라고? 그게 가능했다면 나는 벌써 열반에 올랐을지도 모른다.

그 실수를 만회하고자 나는 자그마한 실수도 용납하지 않았다. 오로지 앞만 보고 달렸다. 그게 틀렸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 돌린다.’

허나 한 번 더 돌린다.

다시 마주한다.

끝까지,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니까.

“그마아안!”

째깍. 째깍.

둠의 비명과 함께 나는 다시 돌아갔다.

* * * * *

“사랑해요.”

시리아. 이제는 데미도프란 성을 달고 있는 여자.

그녀가 내 어깨 위에 기댔다.

그리고······.

“희생(sacrifice).”

우리엘 디아블로가 한국에 강림하고, 그녀는 자신을 희생시켜 대마법을 발동시켰다.

그녀의 몸이 불타올랐다. 신성한 십자가에 묶여, 스스로를 불태웠다.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바라보는 것밖에는.

‘이런 일이 반복되어선 안 된다.’

그래서 돌아온 이후에도 나는 시리아 역시 거리를 두고 대했다. 은연중 그녀의 불타는 모습이 뇌리에 새겨졌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지만.

현실로 돌아오자, 둠이 내 앞에 있었다.

“찢어 죽여주마. 갈기갈기 찢어발겨 영혼마저 부숴버리겠다.”

결국 깨닫지 못했기에 둠의 역공이 시작됐다.

계속해서 시간을 돌렸으나 완성자가 될 수 없었다.

이윽고, 둠의 손이 내게 닿았고.

“노옴! 감히, 나의 의지를 반하려느냐!”

그가 몸을 틀어대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의 눈에 감정이 샘솟았다. 나를 죽이려던 손이 천천히 나를 껴안았다.

“불쌍한 녀석. 너는 너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구나.”

그는 월천이었다.

잠시의 시간, 둠으로부터 제어권을 빼앗은 것이다.

기적 같은 일이었다. 계속 된 반복의 속에서 피어난 한 줄기 희망 말이다.

이윽고, 월천이 모든 모공에서 피를 토하며 말했다.

“나를 죽여라. 내 심장을 부숴라. 지금이 이곳에서 둠을 쫓아낼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이니.”

자신을 죽여 달라고.

그래야만 둠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그리고 알아야 한다. 너를 좋아하는 자들이 많다는 걸. 네 주변에 있는 온기를 나는 알 수 있단다.”

월천이 내 손을 잡고 자신의 가슴에 대었다. 두근대는 심장이 느껴졌다.

“스스로를 아껴라. 스스로를 사랑해라. 실수를, 실패를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전해줄 수 있는 마지막······ 가르침이다.”

푹!

나는 손을 빼냈다. 하지만 월천은 혼신의 힘을 다해 내 손을 그의 피부 속으로 비집어 넣었다.

두근! 두근!

심장의 소리가 손끝으로 느껴진다.

그러자, 다시금 월천의 표정이 바뀌었다.

“그만! 이곳에서 죽으면 영혼마저 탈락한다는 걸 모르지 않을 텐데! ‘허무’조차도너를 받아주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둠이 빼앗은 건 입뿐인 듯했다.

그의 손은 여전히 나를 굳세게 잡고 있었다.

그리고.

두근! 두근!

퍼억!

< 36. 둠(完) > 끝

ⓒ 온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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