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 둠(5) >
보는 순간 알았다. 균열석. 저것이 지금 이 상황을 만든 근본적인 원인임을.
하지만 화천에게서 느껴졌던 균열의 힘은 미약했다. 정화의 보석과 월천이 띄운 달이 균열석마저 정화를 시킨 듯싶었다.
쩌적!
쩌저적!
하지만, 거울도 멀쩡하진 못했다.
천마의 보패(寶貝). 값으로 따질 수 없을 만큼 귀하고 소중한 물건이 바로 그것일진대, 균열석의 힘을 정화시키다가 한계를 맞이하여 균열이 간 것이다.
채에에엥!
결국 거울이 깨졌다. 대신 균열석의 좋지 않은 기운만은 모두 가져갔다. 천천히, 땅에 떨어진 균열석을 쥐었다.
[‘정화된 균열석’과 접촉했습니다.]
[‘아카식 레코드’의 레벨이 3으로 상승합니다.]
[순수한 지능이 5 상승합니다.]
아카식 레코드. 무한의 개념에 대한 깨달음을 얻고 가장 처음 내가 본 건 정령이었다. 그 다음은 숨겨진 장소였고, 한 걸음 더 도약한 지금 또 다시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선.’
주변을 둘러봤다. 무수히 많은 ‘선’들이 이어져 있었다. 내게서, 야차들에게서 이어진 선들은 각기 다른 색깔을 띠었고 연결되며 ‘관계’를 나타냈다.
‘인연. 운명.’
인연. 어쩌면 운명이라 부를 수 있는 그것!
지금 내게서 이어진 선들 중 내 주변에 있는 가장 뚜렷한 색깔은 연한 분홍색이었다. 구화린과 연결되어 있었으며, 또한 이타콰와는 피보다 더욱 진한 붉은색으로 이어져 있었다.
이건······ 이 선은, 운명의 선이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관계까지 통틀어 색깔로 나타내는 것이었다.
적잖게 놀라고 말았다.
이 힘이야말로.
‘미래예시이지 않은가.’
방법은 달랐지만 분명히 그와 같았다. 미래에 어떠한 방식으로 서로 연결될 지에 대한 지침인 셈이다. 그리고 이 지침들은 내 행동에 따라 바뀔 가능성이 있었다.
말하자면, 미래를 읽고 변화를 주는 것도 불가능하진 않다는 말이다.
아카식 레코드. 우주의 기록. 어쩌면 아카식 레코드의 레벨이 올라갈수록, 내가 다룰 수 있는 ‘이면’과 ‘운명’의 힘이 강해지는 건 아닐는지.
작게 전율했다. 그러나 마냥 기뻐할 순 없었다.
화천이 마지막에 남긴 말이 내 귀에 또렷하게 박혀있었기 때문이다.
‘알레테이아······ 분명히 알레테이아라고 말했다.’
왜 화천의 입에서 그 이름이 나온단 말인가.
이번생에선 들을 리 없다고 생각한 그 이름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예상하지 못한 자에게 튀어나왔다.
알레테이아. 죄악의 근원. 인류의 최대 해악이 된 단체!
그곳과 나는 지독한 인연으로 묶여있었다. 녀석들을 소탕하고자 십년을 넘게 허비했고, 그 사이 죽어나간 사람이 천만 단위를 넘는다.
하지만 알레테이아는 시간의 ‘크로노스’를 따르고 있었다.
‘알레테이아의 뜻은 진리다. 화천이 부른 건 단순한 진리의 이름인가? 아니면······.’
섣불리 확정지어선 안 된다.
그러나 화천의 상태창에서 이상한 부분이 있긴 있었다.
데몬로드 둠의 권능을 나눠받은 것이 끝이 아니었다. 그 바로 밑, 알 수 없는 신의신도가 되었다는 내용이 있었다.
고개를 털어냈다.
어쨌건 일단 한 고비는 넘겼다.
그러나 아직 아주 큰 산이 하나 남아있었다.
‘둠.’
화천이 죽고 균열석이 정화되었다지만, 그는 분명히 나찰산에 있었다. 아직은 움직임에 제한을 받는 모양이지만 놈이 이곳에 있는 이상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낼 것이다.
나는 즉시 월천에게로 다가갔다.
현재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의 중심에 월천이 있었다. 그라면 또 다른 해답을 내려줄지도 모른다.
“스승님. 머지않아 ‘둠(Dooom)’이 찾아올 겁니다.”
월천의 상체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무척이나 가볍게 들렸다. 얼마나 많은 양의 피를 쏟아냈는지 당장 죽어도 놀랍지 않을 수준이었다.
하지만 월천은 버텼다. 버티고 있었다.
“어둠······ 쿨럭! 그가, 그가 ‘동굴’에 닿아선 안 된다.”
“선화의 동굴 말입니까?”
선화의 동굴은 야차들이 숨어있던 장소다.
“그곳은······ 결계의 중심이다. 너, 너는 일전에 내가 내린 시련을 기억하느냐?”
그가 내게 내린 시련.
기억난다.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나는 현실과 같은 꿈을 꿨고, 작은 동굴과 같은 장소에 갇힌 채 십이나찰의 시련을 풀어낸 바가 있었다.
고개를 끄덕이자 월천이 이어서 입을 열었다.
“선화의 동굴에······ 십이나찰의 비석들이 잠들어있는 그곳에, 내가 알려주는 대로 비석의 순서를 바꾸면 길 하나가 열릴 것이다.”
아아. 선화의 동굴에 있는 비석자체가 열쇠였다는 뜻이다. 그것도 모르고 오룡과 나는 십이나찰과 연결되지 않아 실망만 하고 있었다.
월천이 내게 그 순서를 알려줬다.
“그 열린 길의 끝에서······ 시련을 풀어내라. 둠. 그 무서운 어둠이 닿기 전에, 네가 해내야 한다. 어쩌면 지금 네가 쥐고 있는 그 돌이 아주 큰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 같구나.”
월천이 바닥을 짚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현상태에서 움직이는 건 무리다. 그럼에도 그는 딛고 일어났다.
순간 월천에게서 마력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 마력은 ‘진원’이다. 생명력 그 자체를 끌어다가 쓰고 있는 것이다.
“스승님. 더 무리하면 안 됩니다.”
“아니다. 네가 화천을 끝장낸 덕분에 ‘어둠’ 역시 약해졌다. 화천은 그를 나찰산에 소환하기 위한 매개체로 사용되었으니. 시간을 끌고 결계를 가동하면 그는 다시 원래의 세상으로 돌아갈 것이다.”
정령의 소환, 그리고 계약과 비슷했다.
화천은 데몬로드와 계약을 맺었고, 그 자체와 균열석의 힘을 이용해 차원을 넘어 둠을 소환한 것이다.
하지만 계약자가 죽었다. 균열석도 정화되었다.
둠은 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나를 노리고, 결계를 가동시키지 못하도록 막을 게 자명했다.
“수천(水天)이 나머지 나찰들을 모으고 있다. 균열의 힘이 사라졌으니 더는 ‘역병’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우리가 그를 막겠다.”
“나도 가세하지.”
전신이 반쯤 타버린 일천이 월천의 옆에 섰다.
십이나찰 중 둘. 더 많은 나찰들이 모이면, 어쩌면 그 둠조차도 이길지 모른다. 정말 계약자의 죽음으로 둠이 약화된 상태라면!
나는 시선을 내려 정화된 균열석을 바라봤다.
<정화된 균열석(value-???)>
● 강력한 힘의 저장고입니다. 미친 듯이 날뛰던 힘이 균형을 잡고 평온한 상태를유지하는 중입니다.
● 균열석이 존재하는 장소를 중심으로 넓은 반경이 균열로부터 안전해집니다.
● 던전코어 등과의 결합 시 ‘강화’가 가능합니다.
● 정화 된 균열석은 저장 된 힘에 따라 ‘시간’을 지배할 수 있습니다. 사용된 힘에따라 지속시간과 범위가 결정됩니다(저장된 힘-5,407,789).
화천과 같이 흡수하여 마력이 날뛰도록 하지는 않지만, 또 다른 부수적인 기능들이 생성되었다. 균열로부터의 안전함. 야차와 나찰들에게 영향을 끼쳤던 ‘사슬’과 같은 것에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뜻이다.
강화는 당장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시간의 지배는······.
‘멈췄다.’
마치 비디오를 느리게 돌리는 것처럼, 천천히 주변의 시간이 느려진다. 이것은 꽃의 여왕 호라가 자신의 숲을 지배하며 숲의 시간을 멈춰버린 것과 비슷했다.
균열석 역시 주변반경의 시간을 조종하는 기능이 있는 듯싶었다. 그 범위까지 확인할 순 없으나 이는 굉장한 힘이었다.
물론 모두가 완전하게 멈춘 건 아니다.
월천과 일천. 그들은 2분의 1정도 반응이 느려진 상태였다.
나 역시도 그 영향에서 아주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저장된 힘 1을 사용해 반경 500m의 ‘시간’을 느리게 만들었습니다.]
[5,407,788만큼의 힘이 저장되어 있습니다.]
‘이게 최소치.’
그렇다. 최소치인 1을 사용했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나찰에게까지 영향을 끼쳤다. 물론 나 역시 느려지긴 했지만······.
[똑같은 힘을 사용하면 균열석 주변에 적용된 시간을 되돌릴 수 있습니다.]
[사용하시겠습니까?]
더욱 놀라운 건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는 것!
고개를 끄덕이자, 균열석이 빛을 발하며 30초 전으로 돌아갔다.
이는 균열석의 힘으로 말미암아 느려진 시간이었다. 그 이상으로 되돌릴 순 없는 듯했다.
‘그것만으로도 엄청나다.’
침을 꿀꺽 삼켰다. 어쩌면 그냥 균열석보다 정화된 지금의 상태가 더욱 쓸모가 많을 것 같았다.
“어서 들어가거라. 이곳은 우리 나찰들이 지킬 터이니.”
월천이 말했다.
그는 시간이 되돌아갔음을 인지하지 못하는 듯싶었다.
하여간, 실험은 여기까지였다. 더 시간을 들일 순 없었다.
“저도 지키겠어요.”
그때 구화린이 앞으로 튀어나왔다.
그녀는 붉은 용이 그려진 기다란 도 한 자루를 쥐고 있었다.
구화린이 나서자, 나머지 오룡들도 함께 나섰다.
그리고 오룡들이 나서자, 남은 야차들이 함께했다.
월천도 그들의 의지를 막을 수 없다고 판단했는지 곧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허나 전방은 우리에게 맡기고 우리의 원호를 부탁하마. 처절한 싸움이 될 것이다.”
다시 나를 바라본 월천이, 내 어깨 위로 손을 올렸다.
그의 전신에서 아지랑이가 피어나고 있었다. 생명력이 지금 이 순간에도 소모되고 있는 것이다. 저 아지랑이가 끊기는 순간, 그의 생명 역시 바스라질 것이었다.
“너밖에 할 수 없는 일이다. 대라선께서 너를 선택했으니, ‘자격자’임을 증명해보여라.”
자격자.
대라선의 위치를 경쟁할 수 있는 자격을 지닌 자.
화천은 죽었지만, 아직 모든 시련이 끝나지 않았다.
진정한 시련은 이제부터였다.
“······ 알겠습니다.”
“믿는다. 다시 만날 땐······ 스승이란 소리는 다시 못 듣겠지만.”
월천이 미소 지었다.
자격자임을 증면하면 나는 새로운 대라선으로 등극한다.
대라선은 야차와 나차를 통틀어 최고지휘자다. 대라선의 자격을 지닌 자가 나찰을 스승이라 높여 불러선 안 된다는 뜻이다.
나 역시 작게 웃었다.
부디 이 미소를 다시 볼 수 있기를.
크르릉!
이타콰도 가슴을 쳤다.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이제는 시간싸움이었다.
‘시간은 나의 편이다.’
그러나 균열석으로 인해 시간은 나의 편이 되었다.
시련이 얼마나 어려울지 모르겠지만.
안 되면 될 때까지, 그저 무한하게 반복할 따름이었다.
* * * * *
구름조차 걷혔다. 달은 모습을 감췄다.
완전한 어둠.
칠흑과 같은 어둠이 도처에 깔렸다.
한 치 앞조차 분간이 안 되는 세상.
그곳에서, 그림자처럼 ‘그’가 모습을 드러냈다.
스르르르르!
순간 안개가 꼈다. 지독한 독과 물기를 품은 안개였다.
차르르르륵!
세상 전체를 감염시켜 버릴 듯 강력한 전기가 안개를 덮었다.
쉬이이이!
콰콰쾅!
하늘에서 거대한 사슬이 내려와 ‘그’의 신체를 묶었다.
쓰아아아아아아아!
거대한 태풍은 마치 감옥처럼 ‘그’를 가두었고.
키에에에엑!
수많은 수렁의 괴물들이 달라붙고 죽으며 순식간에 굳어버린 뒤 ‘그’를 위한 무덤을 만들었다.
무덤. 무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남은 십이나찰들이 만든 지고의 무덤이었다.
갇힌 이상 절대로 빠져나올 수 없도록 철저하게 설계 된.
“수라나찰묘(修羅羅刹墓)에 갇혔으니 영원히 빠져나오지 못할 것이다.”
월천이 염원을 담아 말했다. 수라나찰묘는 적어도 최근 일만 년 이내에는 깨진 적이 없는 절대지경의 진법이다. 나찰이 아니라 나찰 할아버지가 와도 홀로 저 묘지에서 빠져나올 순 없다.
쿠릉!
쿠릉!
쿠르르릉!
묘 내부에서 귀가 파열될 듯한 광음이 재차 울렸다.
“흥! 발악을 하는군.”
“십이나찰 모두가 모여 행한 진법은 아니지만, 열 명이 모였으니 제아무리 놈이 괴물이라 해도 파훼하진 못하리라.”
나찰들은 자신했다.
쾅! 쾅! 쾅!
그리고 죽음으로 빚어진 무덤이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쩌적!
고작 30초가 지나지 않아, 묘의 가장자리에 균열이 갔다.
균열은 점점 커져갔고,
스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수많은 절망의 얼굴을 가진 악령들이 튀어나와 주변을 마구 휩쓸었다. 그리고.
쿠르르르르르르릉!
무덤이 폭사하며, 거대한 악령의 소용돌이가 ‘그’를 중심으로 돌았다.
이내 ‘그’가 고개를 들었다. 나찰들과 야차들을 바라보며.
“나는 너희의 죽음과 파멸을 원하노라.”
콰아아아아아앙!
쾅! 쾅! 콰르르릉!
하늘을 가득 채울 듯이 커다란 검은 번개가 쉴 새 없이 나찰과 야차들 위로 쏟아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