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 둠(1) >
등록되지 않은 장소라니?
처음 보는 문구였다. 적어도 과거에는 이런 문장을 본 적이 없었다. 누군가가 봤다는 이야기도 들어보지 못했다.
장소의 추가. 그리고 보상.
그것도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의 보상이었다.
내가 멸제의 카르페디엠을 죽이고 암흑상회로부터 얻은 보상이 1,000,000pt였다. 그런데 사분의 일에 달하는 보상을 그저 지도를 ‘추가’하는 것만으로 주겠다고?
‘뭔가가 있군.’
각성자들을 비롯한 모든 이들이 사용하는 이 상태창. 이 모두가 ‘위대한 별’로부터 발현된 것이었다. 데몬로드들의 전쟁이 끝날 때 각성자들은 ‘위대한 별’의 나머지를 채우는 용도로 사용된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 장소는 그 ‘위대한 별’의 영향이 닿지 않은 곳이란 뜻이다. 암흑인들 역시 그 존재조차 모르고 있었기에, 이러한 ‘미지’를 발견하는 자에게 보상을 내거는 것 같았다.
‘나찰산과 구분 된 장소.’
암흑인들은 나찰각의 균열을 열고 공격해왔다. 애당초 나찰산의 존재를 아예 모르진 않았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런데 ‘현계’만은 그들도 짐작하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그래서 정보를 아주 비싼 값을 주고 사려고 한다.
어쩌면, 이 ‘미지’에는 그 이상의 가치가 있을지도 모른다.
마지막 꽃잎을 밟고서 현계에 올라섰다.
주변에 보이는 것이라곤 안개뿐. 허공을 휘저어도 아무 것도 잡히지 않는다. 바닥은 구름이었고, 밟으면 그 순간 떨어질 것만 같았다.
-저희도 이곳은 처음 들어와 봐요.
-여기서부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아무 것도 안 보여!
풀잎 세자매들도 혼란해하긴 마찬가지였다.
적어도 하나는 분명했다.
‘눈’으로 보는 모든 게 부질없다는 것.
오감으로 느껴지는 모든 것이 이곳에선 확실하지 않다는 것!
눈을 감았다. 기감(氣感)을 열고 주변에 마력을 흩뿌렸다.
콰드드득!
그러자 근육이 미친 듯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암령이 날뛰었다. 녀석이 내 심장을뚫어버리고 나올 듯한 격통에 잠시 이를 악물었다.
-크하하! 멍청한 놈. 천마의 육신이 잠든 곳에 가까이가려 하느냐?
목소리가 들렸다. 집중하지 않았다면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바로 암령의 목소리였다.
-현계는 물질계가 아니다. 이곳에선 나 역시 자유를 얻을 수 있지!
두근! 두근!
콰직!
미친 듯이 뛰어대던 심장이 끝내 몸을 관통하고 튀어나왔다.
재차 눈을 뜨자 내 눈앞에서 심장이 쿵쾅거리고 있었다.
뚫린 가슴에선 피가 줄줄 흘렀으며, 튀어나온 심장을 움켜쥐려하자 그곳에서 손과 발, 그리고 얼굴이 솟아났다.
놀라운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심장은 변형하며 이내 나와 같은 크기로 성장했다.
그리고 나와 같은 얼굴을 하고서 나를 바라보는 중이었다.
“현계가 무엇을 하는 장소인지도 모르고 발을 들인 것이 실수다. 크흐흐! 현계는 삼라만상(參羅萬像)의 세계이니 네가 가진 개념 정도로는 나를 잡아둘 수 없도다!”
“쿨럭!”
피가 역류했다.
암령은 내 심장과 함께 빠져나가 형태를 만들었다.
심장을 잃자, 빠르게 전신이 식어갔다.
암령은 죽어가는 나를 보며 코웃음을 쳤다.
그러곤 고개를 돌려 먼 곳을 바라봤다.
“천마의 신체를 얻어 무적이 된다. 이 녀석의 심장이라면 멈춰버린 천마조차도 다시 움직일 수 있을 테지! 크하하하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암령은 내 심장을 가지고서 천마를 깨우려고 하고 있었다.
가슴을 움켜쥐며 자리에서 쓰러졌다.
풀잎 세자매가 놀라 내 주변을 맴돌았지만, 점점 의식이 멀어지는 중이었다.
-이곳에선 모든 현상이 허용되고 부딪히며 재구성된다.
그때였다.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온 건.
암령이 아니다. 멸제도 아니다.
현장!
그 현묘하기 그지없는 목소리가 다시금 내 귓가에 울려퍼지고 있었다.
-관념을 깨라. 불도, 바람도, 물도, 대지도, 모든 것이 상상하기 나름일지니.
심장이 없으면 사람은 죽는다.
자연의 이치이며 상식 중의 상식이다.
하지만 그 법칙을 깨트릴 수 있는 게 현계라는 장소였다.
상상하라. 현장은 내가 고정관념을 깨고 나오길 바랐다.
애당초 심장이 형태를 갖춘다는 것도 말이 안 되지 않나.
녀석이 할 수 있다면, 나라고 불가능할 리 없었다.
‘돌아와라.’
너는 나의 심장이다. 내 것이며 내 허락 없이는 움직이지 못한다. 이미 나의 ‘지배’ 하에 있으니 돌아오라.
그 순간이었다. 암령의 신체가 점점 작아지기 시작했다.
“······ 허튼 수작을! 그래봤자 이곳에선 내가 너의 힘을 능가한다!”
암령의 입가에서 웃음기가 지워졌다.
오히려 더더욱 몸집을 부풀리며 내게 공포를 심으려고 했다. 순식간에 주변이 어둠에 잠기고 암령의 신체가 우주 그 자체처럼 변했다.
“보았느냐? 아무리 발버둥 쳐도 너 따위가 이길 수 없는 힘이니라. 고작 100년을사는 인간이 어찌 나를 흉내라도 낼 수 있겠느냐?”
인간의 삶은 짧다.
내가 두 번의 삶을 산다고 할지라도 암령이 버텨온 세월에 비하면 태양과 반딧불이 정도의 차이가 났다.
이길 수 없는 적을 만났을 때의 무력감, 패배감이 무럭무럭 자라났다.
그러나······ 이러한 감정은 내겐 일상과 같았다.
그렇기에 더욱 치열하다.
녀석이 내게 주는 공포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이미 그보다 더한 좌절을, 절망을 나는 맛보았으므로.
‘돌아와라.’
그저 말한다. 돌아오라고.
나는 차갑게 암령을 바라봤다.
그러자 암령이 기겁했다.
“어찌! 인간의 본성은 나약함이 아니었나? 이길 수 없음을 알면서도 도전할 셈이냐!”
쿠아아아아앙!
놈이 덮쳤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무수한 어둠!
하지만, 두렵지 않았다.
나는 분명히 나약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약함이 있기에, 나약함을 알기에, 나는 나 자신을 경계하며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다.
‘돌아와라.’
“아아아아아아아아아-! 나는, 나느으으은! 절대로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오랜 시간이 걸려도 반드시! 반드시 네놈들만은······!”
모든 어둠이 뚫렸던 가슴으로 다시 돌아오기 시작했다.
후우우웁!
하아아아아!
크게 숨을 내쉬었다. 찢어진 상처가 아물고 심장이 다시 본래의 기능을 찾았다.
그리고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그가 있었다.
“대라선.”
원숭이였다. 예전에 보았을 땐 70cm 정도의 크기에 인간인지 원숭이인지 모를 외견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사이 무슨 일이 생긴 건지 더욱 원숭이에 가까운 모습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본 순간 그가 대라선임을 알아봤다.
현계에 평범한 백원후가 있을 리 만무했으니.
끼이익!
끽! 끽!
원숭이의 비명과 가까운 목소리를 냈다.
설마 의사소통마저도 불가능해진 걸까?
이어 대라선이라 추정되는 원숭이가 등을 돌리며 걷기 시작했다.
그러곤 힐끔힐끔 나를 바라보며 재촉했다.
‘따라오라는 소리로군.’
넓은 사원.
수많은 묘비가 늘어서 있고, 그 끝에 한 남자가 앉아있었다.
‘천마.’
하지만 혼이 없다. 오로지 육신뿐이었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것이라곤 차가움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의 육체는 ‘완성’되어 있었다.
나는 이만큼이나 완성된 육체를 본 적이 없다.
‘암령이 욕심낼 만하군.’
혼비백산. 넋이 날아가고 흩어졌다. 그 육체를 접한 것만으로도 다시금 심장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내가 재단할 수 없다. 내 상식 바깥의 존재였다.
끼긱! 끼기긱!
과거 대라선이었던 원숭이는 천마의 곁을 뱅글뱅글 돌았다. 그러자 그의 머리 위로 희미한 연기 같은게 천마를 향해 빨려들어가고 있었다.
아아. 그제야 주변에 놓인 수많은 ‘묘비’들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있었다.
‘역대의 대라선들.’
대라선이라고 불린 자, 천마의 곁에서 잠이 드는 것이다.
천마가 그들의 혼을 거두고 안정을 찾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천마. 하늘이 내린 마귀라는 이름과는 전혀 다른 모습.
‘현장······!’
그제야 깨달았다. 눈앞에 있는 자는 천마이면서 동시에 현장이었음을.
나의 내면 안에서 내게 가르침을 주고 깨달음을 주었던 자. 암령을 제어하고 만물을 보살폈던 선인이다. 그가 왜 천마라고 불리게 된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꽃의 정령왕 호라에겐 도둑이라 불렀으니, 이보다 더 모순적인 일은 없을 듯싶었다.
죽었음에도 숨을 쉬는 것만 같았다.
끼기긱!
곧이어 과거의 대라선, 지금은 그저 원숭이인 존재가 ‘천마’가 쥐고 있던 작은 청동거울 하나를 내게 건넸다.
“이게 증표인가?”
대라선의 허락을 받았다는 증표. 십이나찰을 모을 증표가 이 청동거울인가 싶었다. 하지만 원숭이는 답하지 않았다.
그저 청동거울만을 넘긴 채, 천마의 무릎 위로 올라가 잠을 청했다.
천천히. 그의 모습이 흐려진다. 힘을 다하고 마지막 안식을 천마에게서 얻고 있는것이다.
‘대라선이 죽었다. 단순히 균열석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해.’
이곳에 온 다음에야 나는 깨달았다. 천마를 보고, 그에게 귀의한 전대 대라선을 보며, 그저 또 다른 ‘검은 야차’가 그를 해할 수 없음을 알게 됐다.
빠르게 다른 십이나찰과 합류하여 진상을 규명하고 이겨야 했다.
천마이자 현장인 그 존재를 돌아봤다.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움직여선 안 된다.
이곳이 발각되면 안 된다는, 그런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25만 포인트는 분명히 큰 액수지만 진짜 천마의 가치와 비교하면 조족지혈에 불과했다. 거래자체가 성립이 불가능하단 뜻이다.
시선을 내려 청동거울을 바라봤다.
[‘심안’으로 확인이 불가능합니다.]
[강력한 보패의 기운이 느껴집니다.]
내가 가진 권능으로도 확인이 불가능한 청동거울.
그러나 이게 ‘열쇠’임은 분명하다.
나는 그것을 강하게 쥔 채, 현계를 내려가기 시작했다.
* * * * *
월천(月天)이 어깨를 부여잡으며 뛰었다.
주변을 호위하던 다섯 개의 단 중에 살아남은 야차는 없었다.
나찰인 그만이 겨우 목숨을 부지한 채 달아날 수 있었다.
‘괴물······!’
월천은 전율했다.
그만한 괴물은 살아생전 처음 보았다.
그가 검은 야차일 때, 암령의 힘을 어느 정도 사용할 수 있을 때, 월천은 모두에게‘괴물’이란 소리를 들었지만, 아서라.
저 ‘어둠’과 비교하면 우스울 수준이다.
비교 자체가 창피한 일이었다. 월천이 아는 힘의 논리를 완벽하게 깨부쉈다.
전무후무. 과거에도, 앞으로도 없을 괴물!
십이나찰 모두가 덤벼도 이길 수 있을지 의문일 정도의 ‘어둠’에 월천은 압도되어있었다.
‘어둠’은 불현 듯 나타났다.
순식간에 대라선의 결계를 깨트리고, 지천(地天)을 죽였으며, 천에 달하는 야차들을 말살시킨 그 어둠은, 감히 범접불가의 영역에 있었다.
어둠을 앞에 둔 채 월천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 어둠 앞에 월천은 벌레와 다름이 없었기에.
‘모두에게 알려야 한다!’
그렇다고 죽을 수 없었다. 죽어선 안 된다.
아직 남은 야차들이라도 살려야 했다. 남은 십이나찰과 함께 일을 도모하며 후일을 기약해야 한다. 이곳에 있다간 모두 죽을 것이다.
어둠은 그저 느긋하게 사냥을 즐기고 있었다.
하지만 어둠은 월천을 흥미롭게 눈여겨보았다.
월천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마지막까지 살려두며, 그가 자신에게 내뱉은 말이 귓가를 떠나지 않았다.
-나는 둠(Doom). 최강의 데몬로드이며, 모든 죽음과 파멸의 이름이니라.
< 36. 둠(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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