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신사냥꾼-144화 (145/251)

< 35. 정령왕(完) >

화르르르.

마치 불이 번지듯 꽃봉오리가 넓게 전개하며 펼쳐졌다.

그 안에는 꽃이 있었다. 꽃잎 왕관을 쓰고, 꽃잎 날개를 두른 꽃의 여왕이 그 안에서 천천히 눈을 떴다.

이윽고 풍겨오는 달콤한 내음에 정신이 아찔했다. 강렬한 매혹의 향이다. 그것도 여태껏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종류의.

눈이 풀리고 근육이 풀어진다. 멍한 눈초리로 그 모습을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다.

호라.

야차들에게 있어선 공포의 대상, 정령계에서 가장 뛰어난 힘을 지닌 자. 그녀가 바로 꽃의 정령왕이다.

‘아아······.’

입이 벌어졌다. 정신력에 있어선 당할 자가 없다고 자부하는 나조차도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호라가 미소 지었다.

그 미소에 더욱 넋이 나갔다.

그러며 호라가 천천히 꽃의 계단을 내려왔다.

‘호라는 변덕쟁이다. 이건 그녀의 시험이다.’

마음의 안정이 필요했다.

게다가 그녀의 눈빛은 마냥 호의적이지 않다.

시험이다. 매혹의 시험. 통과하지 못하면 죽을 것이다.

불균형을 균형으로 맞추기 위해선 다소 강압적인 방법이 필요한 법.

스릉!

흑풍검을 꺼냈다.

그대로 팔을 그었다.

피가 철철 넘치며 바닥에 떨어졌고, 이내 그 자리에 나와 비슷한 얼굴을 가진 꽃이 자라났다.

그리고 내 정신 역시 돌아왔다. 매혹의 향 대신 짙은 피 냄새가 코끝을 간질이자 그제야 나는 제대로 호라를 바라볼 수 있었다.

“제 아이들과 계약할 자격은 있는 것 같군요.”

호라가 싱그럽게 미소 지었다.

식은땀이 흘렀다.

정령왕. 그저 상상속의 존재였거늘, 이 정도였던가.

정면으로 마주하자 알겠다.

그녀가 가진 ‘격’의 차원이 아예 다름을.

나는 급히 ‘심안’을 열었다.

그러자.

[‘차원의 간섭’으로 인해 계측이 불가능합니다.]

[상대의 지능이 매우 높습니다. 심안의 사용을 간파 당했습니다.]

“‘보는 것’이 그대의 권능인가요?”

“어떻게······?”

당황했다.

그럴 수밖에.

데몬로드들조차, 가장 강했던 제로조차 나의 심안을 완전하게 특정 짓진 못했다. 하지만 호라. 꽃의 정령왕인 그녀는 단번에 눈치 채고 여유를 보였다.

“저는 이 숲의 신이랍니다. 숲에 있는 모든 것을 관할하지요. 그대가 저의 숲에 발을 들인 이상 제 손바닥 위나 마찬가지.”

동시에 시간이 한없이 느려졌다.

바람이 멈추고 공기의 흐름조차 멎었다.

그 속에서 나와 호라만 움직이고 있었다.

호라가 천천히 걸어와 내 턱을 쓸었다.

“그대, 세계수의 축복을 받았네요?”

“별 걸 다 알 수 있는 모양이군.”

손을 쳐내며 경계했다. 내 모든 걸 간파한 듯 말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설혹그녀가 진짜 신이라고 하더라도.

“전부는 아니에요. 그대에게 ‘섞인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까지는 몰라요. 처음 그대를 보았을 때는 니알랏인 줄 알았어요. 그는 그야말로 혼돈 그 자체인 존재니까요. 하지만, 그대는 인간이죠.”

맞다. 나는 인간이다. 모습이 바뀌어도, 그 토대는 언제나 인간임을 망각하지 않고 있었다. 잊어버렸다면 ‘작은 샛별’로 변형했을 때 이미 나는 악마 그 자체가 되었을 것이다.

호라가 멈춰버린 풀잎 세자매에게 다가갔다.

“우리 아이들을 강하게 만들어줘서 고마워요. 그대는 좋은 계약자인 것 같네요. 우리 아이들은 장난꾸러기인 만큼 감정에도 매우 민감하거든요. 혹시 바라는 게 있나요?”

“현계까지의 안전한 길을 알려주면 고맙겠군.”

“현계······.”

호라가 잠시 입을 닫았다.

그리고 고민을 하는 듯싶다가 무언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 부탁은 들어줄 수 없어요. 바깥에 있는 야차들과 관련 돼 있는 일이겠죠?”

고개를 끄덕이자, 호라는 더욱 노골적으로 싫은 티를 냈다.

“역시 그렇군요. 하지만 살려두고 있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내게 고마워해야 해요. 오로지 이 아이들의 계약자인 그대를 봐서 죽이지 않았을 뿐이니까요.”

“야차들과 무슨 억하심정이라도 있는 건가?”

“당신은 집에 무단으로 들어온 도둑들과 평화롭게 지낼 수 있나요?”

도둑?

표현이 과하다.

야차들은 심각할 정도로 호라라는 이름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무언가 관계가 있음이 분명하다.

“이 산이 그쪽의 산이라도 된다는 말 같은데.”

“이 산은 태어날 때부터 저의 산이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제게 머리를 조아리며 산의 일부분을 빌려달라고 부탁했죠.”

“그럼 도둑은 아니지 않나?”

“하지만 ‘그’는 빌리는 것에서 만족하지 못하고 제 영향력을 뺏고, 숲을 파훼했답니다.”

선뜻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숲 안에 있는 그녀는 신과 같았다. 모든 걸 자기 손바닥 위에 놓을 수 있는 괴수 중의 괴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그녀에게서 힘을 빼앗을 수 있는 존재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가 누구지?”

“그는 스스로를 천마(天魔)라 했어요.”

천마!

지금 내게 깃든 암령, 제천대성을 완전하게 사육하고 길들였던 자의 이름이다.

그 이름만으로도 충분히 광오했으며 그럴 자격을 가진 자.

나는 월천으로부터 그 이름을 전해들은 바가 있었다.

천마가 모든 야차들의 시조 격이었던 걸까?

만약 그가 정말 천마라면, 이 미친 암령조차 얌전히 만든 게 그라면, 호라의 힘을 견제할 수도 있을 듯싶었다.

또한 이곳 나찰산에 자리 잡고 나찰각을 지은 게 아무래도 그인 것 같았다.

“그런데 그와 함께 온 도둑들을 도우라는 소린가요?”

“야차들이 멸망하길 바라는 건가?”

호라는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대강이나마 알고 있는 낌새였다. 알고도 방관하고 있다. 오히려 부추기는 감도 있었다.

“계약자여. 왜 인간인 그대가 야차의 편을 드는지 모르겠군요.”

“나는 인간이며, 동시에 야차이기도 하니까.”

내 밑바탕을 쌓은 데 야차들의 도움이 컸다. 과거로부터 이어진 인연의 끈을 쉽게끊을 수 있을 리 만무하다.

“그리고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엔 내 책임도 있으니까.”

나는 분명히 말했다.

지금 일어난 일, 당시 나찰각에 균열이 열린 건 온전히 나의 탓이다.

내가 억지로 그곳에 문을 만듦으로써 암흑인들이 침략할 여지를 줬다.

아니었다면 한참 후에야 벌어졌을 일이다.

그 책임에서 감히 자유롭다고 말하긴 어렵다.

그러니, 이 문제의 해결 역시 내가 해야 맞다.

더불어 균열석이 헛된 자의 손에 넘어가는 것도 경계해야 했으니.

“······ 거짓말은 아닌 것 같네요.”

그녀는 숲의 모든 걸 관장한다. 당연히 내가 진실을 말하는지 거짓을 말하는 지 정도는 파악할 수 있을 터였다.

“좋아요.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으니 약속은 지켜야겠죠. 다만, 조건이 있어요.”

“조건?”

“그들이 이 산에서 물러나는 것.”

그들. 야차를 말함이다.

호라는 양보할 생각이 없어보였다.

이 산은 본래 그녀의 것이었으며, 천마가 아니었다면 지금도 온전히 그녀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야차들의 주거에 관한 결정을 내가 내릴 수도 없었다.

“내 권한을 넘어선 일이다.”

“아니요. 그대의 권한 내에서 충분히 가능합니다.”

호라가 고개를 저으며, 이어서 말했다.

“그대는 이미 ‘지도자’의 자격을 얻었어요. 십이나찰 중 과반수의 동의를 얻기만 하면 대라선이 되는 것도 꿈은 아니죠.”

“지도자의 자격······?”

“검은 야차의 인.”

휘이이잉!

빛나기 시작했다. 내 귓불에 새겨진 인이 빛나며 내 주변을 감쌌다.

호라가 입을 가리며 웃었다.

“그 인장은 지도자의 자격을 나타냅니다. 수천, 수만 년에 한 번씩 거대한 시련과함께 나타나 대라선과 경쟁을 하죠. 그런 운명인 거예요.”

대라선과의 경쟁이라니.

야차들은 이 인을 저주받았다고 했다.

과거 나타난 검은 야차는 학살을 자행하며 끝내 죽었다.

“과거 그 자격을 가진 자들은 스스로 타락하거나, 포기했어요. 아, 그래요. 일전 그 인장을 가진 자가 새롭게 십이나찰 중 하나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월천이라고 했던가요?”

월천이······ 그 역시 검은 야차의 인을 가지고 있었단 말인가?

월천은 처음부터 내게 호감을 보였다. 단순히 내가 무공서적을 가까이해서 그런 줄 알았다. 그런 게 아니었던 거다.

그의 말투에서 알 수 없는 회의감이 느껴졌었는데, 이런 이유 때문이었을 줄이야.

“그러니 그대는 선택할 수 있을 거예요. 경쟁을 하며 지도자임을 증명하던가, 포기하는 것.”

호라가 날개를 펼쳤다.

그리고 내 주변을 한 바퀴 휘리릭 돌았다.

“십이나찰의 동의를 얻는 방법은 그들이 내리는 시련을 해결하거나, 그들을 죽이는 거예요. 그리고 지금 한 명이 죽었죠. 그대가 죽인 건 아닌 것 같은데. 누가 죽였을까요?”

“누가 그랬는지 알고 있군.”

“놀랍더군요. 검은 야차가 어떻게 동시대에 두 명이 있을 수가 있는지!”

호라. 꽃의 여왕은 또한 변덕스럽다.

그녀는 진심으로 재밌어 죽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저 아름답기만 한 줄 알았던 꽃의 가학적인 면모가 드러난 것이다.

나는 진지하게 물었다.

“누구지? 월천인가?”

“월천이요? 그는 검은 야차의 자격을 스스로 포기했는데요? 또한 그는 대라선을 바로 옆에서 따르는 최측근이죠.”

그렇다. 호라의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포기하고, 암령마저 내게 넘긴 월천이 다시금 욕심을 부린다는 건 말이 안 된다.

“그럼······ 화천인가?”

호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맞아요. 그는 원래부터 욕심이 많았어요.”

승천자의 의식을 끝냈을 때, 화천이 나를 나찰각으로 인도했다.

어쩌면 그는 지도자의 자격을 가진 내가 나타난 걸 보고 욕심을 품기 시작한 게 아닐까?

경쟁의 때가 찾아왔음에.

하지만 어떻게 화천이 자격을 얻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균열석으로 인한 것임은 분명하다. 어쩌면 ‘검은 야차’라는 게 혼돈의 힘을 가진 자라는 뜻일 수도 있고.

내가 검은 야차의 인을 가진 게 운명이라면, 화천은 억지로 그 운명을 거머쥔 것이다.

“서두르는 게 좋을 거예요. 대라선이 죽기 전에 그의 ‘허락’을 받아내야만 흩어진 십이나찰을 모아서 자격을 증명할 수 있을 테니까요.”

“대라선이 곧 죽을 거라는 말처럼 들리는군.”

“현계는 신선들의 무덤이랍니다. 역대 대라선들이 모두 그곳에 묻혀있죠.”

대라선이 현계로 간 이유는 죽음을 대비한 것이라는 의미였다.

호라가 나를 바라봤다.

그녀는 더 이상 매혹의 향도 뿜어내지 않았다.

나는 선택의 기로에 섰다.

그들의 지도자가 되어, 모든 야차들을 나찰산에서 옮긴다. 그런 약속이다.

방법이 아예 없진 않았다.

‘던전.’

내겐 던전이 있다. 그들을 품을 장소가 있었다.

정말로 지도자가 되어 그런 자격이 생긴다면, 충분히 해볼 만한 일이었다.

“좋다. 거래하지.”

“현계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을 안내해드리죠.”

째깍. 째깍.

어디선가 시계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린 듯했다.

곧이어 멈췄던 시간이 풀리고 주변의 모든 생명들이 숨을 쉬었다.

바람이 불고, 풀잎 세자매도 깨어났다.

쪽!

호라가 내 이마에 입술을 맞췄다.

[꽃잎 여왕 호라로부터의 계약이 성사되었습니다.]

호라가 씽긋 웃었다.

그러자 그녀의 뒤로 꽃잎들이 이어지며 계단을 만들었다.

계단은 하늘까지 이어져 있었다.

이윽고 계단이 완성되자 호라가 꽃잎 세자매를 바라봤다.

“계약자를 잘 안내해드리렴. 나의 귀여운 아이들아.”

* * * * *

계단을 오른다.

호라는 절대로 ‘아래를 내려다보지 마라’라고 말했다.

아래를 보는 순간 경계에 삼켜질 거라고.

현계로 가는 길, 신선들의 무덤이라 일컬어지는 그 장소는 오로지 안개뿐이었다. 모호함. 모든 것의 경계. 헤어 나올 수 없는 늪······.

빠지는 순간 끝이다.

“저를 두고 가시는 건가요?”

가장 먼저 라이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잠시 멈칫했으나, 애써 외면했다.

“아악! 사, 살려주세요, 로드시여!”

라이라 디아블로. 그녀가 비명을 질렀다. 곧 기다란 무언가에 찔리는 소리와 함께그녀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이를 악물었다. 현실이 아니다. 지금 들리는 목소리는 환청에 불과하다.

요르문간드가, 시리아가, 유서희가 죽었다.

이그닐이, 이타콰가 비명을 내지르며 죽어나갔다.

환청이란 걸, 환상이란 걸 알지만, 소리를 들을 때마다 억장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를 악물었지만, 그들의 죽음에 나는 더 이상 초연할 수가 없었다.

-안 돼요.

-악령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말아요.

-아! 아아! 으아아! 이러면 안 들리지?

꽃잎 세자매는 어떻게든 내가 유혹에 빠지는 걸 막으려고 애썼다. 세자매가 내 손을 잡고 나를 계단 위로 이끌었다.

이 자매들이 없었다면 정말로 유혹에 빠졌을지도 모른다.

한참을 걷고, 또 걸었다. 유혹은 계속해서 있었다.

하지만 모든 유혹을 이겨냈다.

그러자.

[‘현계(???)’에 입장했습니다.]

[등록된 장소가 아닙니다. 추가하시겠습니까?]

[추가할 경우 최초입장 보상과 함께 암흑상회로부터 250,000pt를 선물 받게 됩니다.]

< 35. 정령왕(完) > 끝

ⓒ 온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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