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신사냥꾼-143화 (144/251)

< 35. 정령왕(3) >

내겐 두 개의 시점이 있다.

오한성으로서의 시점과 데몬로드 우리엘 디아블로로서의 시점.

두 시점은 상당히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그렇기에 나는 더 넓게 사고하고 더 자세하게 파고드는 게 가능하다.

이번 일도 마찬가지였다.

한 가지 시점만 가지고 있었다면 의문만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두 가지 시점 모두를 적극적으로 활용했고, 그 결과 상당한 진실에 접근할 수 있었다.

‘처음, 나찰각에 문이 열렸을 때 모든 게 시작되었다.’

지난 며칠간 나는 전이하여 ‘크리퀴’를 통해 자세한 사항을 알아오도록 지시했다.신경을 안 쓰고 있을 땐 몰랐지만 신경 쓰며 알게 된 사실은 내게 적잖은 충격을 주었다.

‘그날 심연으로 넘어온 게 구화랑과 야차들만이 아니었다, 라······.’

심연으로 막 넘어온 것을 경매하는 장소에서, 나는 구화랑을 비롯한 야차들을 사들였다. 당연히 그들이 넘어온 전부인 줄 알았다. 그 외에 또 다른 자가 있을 것이라곤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랬는데.

‘그것도 자의로 넘어온 자가 있었다니.’

뒤통수를 거하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나찰각에 균열이 열리고 암흑인들은 대아귀를 조종하며 쳐들어왔다. 모든 야차와나찰, 대라선이 나서서 어찌어찌 막은 걸로 보였다. 도망가며 구화랑과 야차들 소수가 잡혀가긴 했지만 거기까진 ‘선방’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균열’에 관심을 가진 누군가가 있었던 모양이다.

‘십이나찰 중 하나가 그 균열로 넘어갔다. 은밀하게, 누구도 모르게끔. 그리고 암흑인들과 내통하기 시작했다.’

내통자다.

어딘가에 또 다른 균열을 파고 암흑인들과 내통하는 나찰이 있었던 것이다.

크리퀴가 알아온 건 그 당시 균열로 들어온 게 구화랑과 야차들만이 아니란 것이었다. 당시의 ‘목록’에 적혀있었다고. 이름은 없지만 숫자가 하나 더 많았다.

외통수.

내가 놓친 한 명이 있었다.

‘암흑인이 나찰 중 한 명의 정신을 빼앗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처음부터 나찰이 계획하고 실행했던 거다.’

십이나찰 중 누군가가 내통자 역할을 하며 균열석에 대한 걸 파악하고 취했다. 아니면 애당초 의도하고 균열석을 지구에 흘린 것일 수도 있고.

암흑인들은 나찰계, 나찰산을 상당히 높은 등급으로 지정했다. 그들은 침략행위를 하며 균열을 넓히고 계급을 올린다. 높은 등급으로 지정된 나찰계를 털어먹으면 몇 단계의 진급이 가능할 터.

서로의 이득을 위해 그 의문의 나찰과 유착한 암흑인이 있다. 크리퀴도 거기까지 알아내진 못했지만, 이는 굉장히 중요한 사안이었다.

‘누구지? 균열석으로 무엇을 하려는 거지?’

애당초 균열석이란 무엇인가.

균열을 모아둔 저장고다. 균열석으로 말미암아 ‘사슬’이 적용된 걸 보았다. 알 아락사르, 원후제, 어쩌면 대라선에게까지 영향을 끼쳤을지 모르는 힘.

아마도······ 예상컨대, ‘지배’와 관련 된 힘인 것 같았다.

그래서 내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했던 거다.

나 역시도 지배자의 권능을 가지고 있었기에. 내게 패한 자들은 검은 야차의 인장과 더불어 지배자의 힘이 약간이나마 적용되어 별 힘을 쓰지 못하는 것이고.

‘지천(地天)을 죽였다는 건 다른 나찰들도 노릴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그렇다는 건 나찰들은 그 지배의 힘에서 비교적 자유롭다는 건가?’

추리에 추리를 거듭했다.

지배의 힘이 정상적으로 작용한다면 굳이 죽일 필요가 없다.

지배하여 뜻대로 움직이면 그만이니까.

그런데도 죽였다는 건,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는 뜻이다.

예컨대 대라선을 고립시키려는 그런 의도가 아닐까?

“그때 보이지 않았던 나찰들은 누가 있지?”

“그때라니?”

한참이나 나를 주시하던 구화린이 고개를 갸웃했다.

나는 다급히 말했다.

“검은 귀신이 정리되었을 때! 싸울 때는 있었지만 그 뒤로 모습이 보이지 않던 나찰이 있을 거다.”

내 표정이 심상치 않다는 걸 확인한 구화린도 진지하게 답했다.

“범천님과 제석천님, 염마천님과 비문사천님은 봤어.”

오룡들이 잠시 고민하며 하나씩 입을 열었다.

“난 수천님과 함께 부상자를 나르고 있었다.”

무룡 무백이 말했고,

“나찰천님과 풍천님은 뚫린 문을 보수하셨지.”

연혼제가 턱을 쓰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사나천님······ 대아귀의 시체를 치우셨어.”

암룡 유설이 작게 말했다.

“난 일천님을 봤지. 대라선님과 함께 나왔으니까.”

잠룡 주가람이 마지막으로 답했다.

총 아홉의 이름이 나왔다.

이중 지천은 죽었으니 남은 건 둘이다.

화천, 월천.

“화천과 월천을 본 자는 없나?”

다른 야차들에게도 공통된 질문을 던졌다.

그때 당시 나찰각에 있었던 야차들 모두가 고개를 저었다.

‘화천, 그리고 월천······.’

둘로 축약됐다.

둘 중 하나가 범인일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아니면 둘 다 공범자일 수도 있고.

화천은 승천자의 시련을 끝낸 나를 나찰각으로 인도한 나찰이다. 월천은 내게 많은 가르침을 준 스승이었다.

그러니 내심 월천은 아니길 바랐다.

나는 죽은 지천(地天)의 시체를 살폈다.

온 몸이 낭자당하고 피가 한 방울도 없었다. 무언가에 빨린 듯 미라처럼 말라버린상태였다. 이것만 봐서는 누가 그랬는지 알기 힘들다.

“현계로 가야겠다.”

“우리들만으로는 무리야. 나찰각은 90층의 경계에 있어. 91층부턴 대아귀가 득실대지. 네가 강한 건 알지만······.”

“대아귀만 있는 건 아니지.”

‘라임, 라율, 라온.’

풀잎 정령들을 불렀다.

나찰산에는 정령들도 산다.

하지만 야차들은 정령과 사이가 나쁘다. 아마도 상성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정령들 역시 ‘귀신’으로 취급했다.

-부르셨어요?

-오랜만에 돌아왔네요.

-어! 여기 나 알아!

상급 정령으로 진화한 풀잎정령 세자매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즉시 죽어있던 땅에서 줄기가 솟고 풀이 자라났다.

“설마 정령들?”

구화린이 눈을 부릅떴다.

야차와 정령은 상극이다. 내가 정령을 부리는 모습에 화들짝 놀란 것이다.

“‘정령의 길’을 통할 것이다. 나와 계약한 정령들의 ‘여왕’과 이야기를 하면 현계로 가는 길을 알려주겠지.”

처음, 나찰산에서 풀잎정령들과 계약할 때 녀석들은 ‘여왕’의 존재를 언급한 바가있었다.

정령계의 여왕이라 불릴 수 있는 존재는 극히 드물다. 최상급 정령도 그러한 칭호를 갖진 못한다.

‘정령왕.’

그래. 정령왕만 가능하다.

최상급 정령들보다도 상위의 존재!

그때는 무심하게 넘겼으나 지금 생각하면 놀라운 것이었다.

그리고 당연히 풀잎정령 세 자매는 평범한 정령이 아니었다.

당시 내게 유일하게 다가왔던 정령들. 데몬로드의 마력을 느끼고도 도망치지 않았던 정령은 이 셋이 유일했다.

덕분에 이타콰를 찾고, 이타콰를 구할 수 있었지 않나.

‘정령왕의 아이들.’

나도 진짜 정령왕을 본 적은 없다.

그들은 어지간하면 현계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너무나도 강력하여, 그 존재를 담을 매개(계약자)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령왕의 아이’라 불리는 정령은 한 번 본 적이 있다.

‘같은 급보다도 더 강한 힘을 발휘했지.’

지금의 풀잎세자매가 그렇다. 상급으로 진화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존재력만큼은 어지간한 상급 정령을 상회하고 있었다.

아직 그 힘을 제대로 다룰 줄 몰라서 제대로 된 활약을 하진 못했지만, 머지않아 내 든든한 저력이 될 것은 자명했다.

-여왕님이랑 이야기하시게요?

-여왕님은 무서운 분인데.

-허락 안 받고 계약했다고 혼날지도 몰라!

풀잎 세자매가 시무룩해졌다.

놀란 건 구화린도 마찬가지였다.

“설마 ‘호라’를 말하는 거야?”

하지만 단순히 놀란 것만은 아닌 듯싶었다.

그 얼굴엔 공포가 담겨있었다. 본능적인 두려움. 두려울 게 없는 구화린마저 공포에 떨게 만들 정도라면 그 이름이 가져다주는 중압감이 상당한 모양이었다.

-맞아요. 여왕님 이름이 ‘호라’에요.

-여왕님이 좀 유명하시죠.

-그만큼 무섭지만.

풀잎 세자매가 고개를 끄덕였다.

호라. 꽃의 정령왕의 이름이었다.

나는 세자매에게 안내를 부탁했다. 세자매는 우울한 표정으로 앞서나가기 시작했고, 내가 그 뒤를 따르자 구화린을 비롯한 모두가 경악했다.

“호라라면 그 호라?”

“‘죽음의 숲’을 지배하는 귀신?”

“서, 설마 거기로 간다고? 거기는 금지(禁地)잖아.”

모두가 공포에 떨었다.

하지만 지천의 죽음을 본 이상, 서둘러야 했다. 그를 애도할 시간조차도 없었다.

* * * * *

덜덜덜!

야차들 모두가 하나같이 몸을 떨었다.

오룡이라고 다를 게 없었다. 나무가 번창한 어두운 습지대를 걸으며 주변을 살피는데 여념이 없었다.

“주, 죽을 거야. 여기 들어와서 살아 돌아온 녀석이 없었다구.”

“여기는 대아귀들도 안 들어와. 저기 뼈들 보이지? 오래 전에 들어왔다가 죽은 대아귀들 시체야.”

야차의 심장은 ‘전사의 보석’이라 불린다. 불굴의 투지를 나타내며 실제로 내 지배조차 거스를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도 오랜 시간 축적된 공포만은 어찌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확실히 주변엔 대아귀의 것으로 보이는 뼈들이 심심치 않게 보였다. 설마 나찰각과 멀지 않은 장소에 이런 숲이 있으리라곤 생각도 못했다.

촤르르르륵.

나무가 움직였다.

하늘까지 닿을 듯 거대한 나무가 말이다.

세계수라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인 나무가 움직이자 위압감이 장난이 아니었다.

기둥 째로 뽑히며, 앞을 막아섰다.

“뭐, 뭐야?”

“나무귀신이다! 제기랄!”

“다 죽을 거야!”

야차들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그와는 반대로 풀잎자매들은 웃으며.

-잭 아저씨. 저희 왔어요.

-여왕님 계세요?

-꺄르륵! 아저씨, 더 못생겨졌네!

즐겁게 농담을 던졌다.

추르르륵.

거대한 나무가 다시 옆으로 돌아섰다.

일종의 확인절차였던 걸까?

-안에 계신대요.

-따라오세요. 참, 저희 뒤에 꼭 붙어야 돼요. 여기서 길을 잃으면 저희도 찾을 수가 없어요.

-여왕님은 변덕쟁이라 위험해!

나 역시 긴장했다.

주변에 있는 모든 나무가 ‘자아’를 가지고 있었다.

어째서 이곳이 ‘금지’라 불리는지 알겠다. 그야 대아귀도 피해갈 수밖에.

우리엘 디아블로의 몸으로 찾아왔다 해도, 쉽지 않을 것 같았다.

‘대체 정령왕이 어떠한 존재이기에.’

과거에도 나는 정령왕을 본 적이 없다. 누가 봤다는 이야기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최상급 정령은 재앙~적앙 급의 힘을 갖는다. 그것도 현계에 모습을 드러내며 힘이 축소된 결과다. 정령계에선 그보다 훨씬 강하다고 한다.

이곳은 일종의 만들어진 정령계였다. 나찰각과 함께 ‘경계’에 존재하며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장소!

‘기대되는군.’

최초로 만나는 정령왕이다.

인류 자체로 봐도 유례가 없는 일.

과연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얼마 지나지 않아, 크기가 각각 다른 나무들이 우리 앞을 막아섰다.

-아, 계약자만 들어오라 하시네요.

-야차들은 이곳에 남아야 한데요.

-오늘은 기분이 좋으신가 보네.

“나 혼자만 들어가겠다. 나머지는 여기서 대기하도록.”

“······ 괜찮겠어? 호라는 변덕이 심하고 잔인하다고 들었어. 만약 네가 죽으면······.”

구화린이 걱정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죽으면, 이들도 죽는다. 야차들이 느끼는 두려움을 내가 모를 리 없다.

구화린은 그보단 내가 더 걱정스럽다는 표정이었지만, 그새 정이라도 든 걸까?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반드시 돌아오지.”

한 마디면 족하다.

이어 몸을 돌리고, 걸었다.

내가 지나가자 나무들이 그 중심을 끊으며 막아섰다.

그렇게 몇 분 정도를 더 걷자, 거대한 꽃봉오리가 보였다.

2m남짓한 크기의, 아직 피지 않은 분홍색 꽃봉오리였다.

-여왕님. 저희 왔어요.

-그, 그게, 계약자도 함께 왔는데······.

-잘못했어요! 히끅!

풀잎 세자매가 일단 사과부터 하고 봤다.

이윽고, 꽃봉오리가 열리기 시작했다.

꿀꺽!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시선을 고정시켰다.

정령왕 (3)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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