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 정령왕(2) >
머리를 차게 식힌다. 오른발을 앞으로 내민다. 차가운 시선으로 전방을 주시하자 야차들이 저마다 자세를 잡는 게 보였다.
러시아의 군인 수십만을 상대했을 때와는 전혀 다른 중압감.
나이를 불문하고 전사인 게 바로 야차다. 오로지 신체의 힘만을 극도로 끌어올려 상대를 제압하는 방법을 유구한 시간동안 발전시켜온 게 그들이었다.
‘이 공기가 좋다.’
전투 직전의 극도로 팽창한 긴장감. 총이나 전차, 전투기 따위를 상대할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주먹과 주먹, 신체와 신체가 맞닿아야 제대로 전투를 치룬 것 같다. 게다가 이들은 일원화(一元化) 되어있지 않다.
그들 개인이 가진 무공은 모두가 달랐다. 백 명과 싸우면 백 가지 맛이 나는 게 야차들의 특징이었다. 짧은 시간이나마 그들을 경험하며 나는 밑바탕을 쌓았고 그게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 그럼 확인해보자.
‘내가 얼마나 담을 수 있는지.’
나는 강해졌다. 단순히 수치상으로는 이곳의 누구보다 강할 것이다.
하지만 수치를 뛰어넘는 무언가가 있다. 지금껏 내가 다져온 건 그저 단순한 강함이었다. 하지만 이들을 상대하고 배우며 그 단순함을 뛰어넘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기대가 됐다.
솔직히 능력치의 상승에 비해 내 ‘무공’의 발전은 더뎠다.
‘상대가 없었기 때문에.’
태을무극심법과 탈혼무정검, 금강불괴와 백보신권.
모두가 일정 수치 이상으로 뻗어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초심을 잃었다. 이곳에 있을 때의 절박함이 다소 누그러진 게 사실이다.
그러니 다시 집나간 초심을 찾아올 때였다.
나는 흑풍검을 꺼내지 않았다.
대신 천천히 주먹을 내밀며 기를 갈무리했다.
쉬익!
옆구리를 치고 들어오는 권. 다리를 스치는 채찍. 목을 노리고 달려든 검. 심장을 날카롭게 후비는 창.
하나하나가 절초다. 오랜 시간 발전해온 무학. 오로지 죽이고자 만들어진 살인기술.
콰직!
오른발을 들어 팔을 꺾었다. 그대로 채찍의 끝을 쥔 채 크게 흔들며 검을 묶었다. 그 상태로 검면을 내리쳐 창의 행로를 바꿨다.
이 일련의 움직임이 한 동작처럼 물 흐르듯 이뤄졌다.
쿵!
그대로 주먹을 뻗어 허공에서 덮쳐오는 남자의 흉골을 때렸다. 묵직한 소리와 함께 바닥을 구른 남자가 피를 토해내며 즉시 자리에서 멀어졌다.
다른 이들의 방해가 되지 않고자 본능적으로 움직인 것이다.
첨예하게 짜인 검진으로 사방에서 압박하자 놀라울 정도로 틈이 없었다. 대아귀만 아니었다면 나찰각의 수복 정도는 문제가 없어 보일 수준.
남녀노소. 주먹을 휘두르는데 여지를 두지 않았다. 그들 모두를 같은 전사로 묶어두고 상대했다.
그들은 그간의 울분을 풀 듯 미친 듯이, 쉬지 않고 나를 물어뜯는 중이었다.
꽈드득!
살이 파이고, 뼈가 부러진다. 어깨가 꺾이고 주먹이 파열되어 쓰러지면 즉시 다음야차가 빈자리를 채웠다. 내 전신에도 조금씩 상처가 늘어났다.
하지만 입가엔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박투. 이 얼마나 오랜만의 싸움인가.
[‘검은 야차의 인(印)이 빛나며 대상의 마력을 0.001 강탈합니다.]
[‘검은 야차의 인(印)이 빛나며 대상의 힘을 0.003 강탈합니다.]
[‘검은 야차의 인(印)이 빛나며 대상의 민첩을 0.002 강탈합니다.]
내가 강해진 만큼 능력치를 강탈하는 폭도 좁아졌다.
하지만 티끌모아 태산이다. 게다가 지금의 내게 있어선 이만한 성장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싸우는 족족 나는 강해지고 있었다.
단순히 그들의 능력치를 강탈해서만은 아니다.
맞고, 때리며, 그 간단명료하기 그지없는 행동을 반복하는 와중에도 내 기둥은 더욱 튼튼해져갔다.
만에 달하는 각기 다른 무공. 이런 것을 어디서 경험해보겠는가. 돈을 주고도 할 수 없는 진귀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금강불괴의 숙련도가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습니다.]
[백보신권의 묘리가 더 자연스럽게 적용됩니다.]
[수많은 무공을 접하며 인식의 폭이 넓어집니다. 지능이 1 올랐습니다.]
보통 지능은 마력과 비례한다. 항마력이라고도 불리는데, 지능이 높으면 마법적인 저항력이 강해지는 것이다. 이는 당연히 내게 좋은 현상을 가져왔다.
멸제와 암령. 두 섞이지 않는 마력을 평상시에도 얌전하게 만들려면 결국 나 스스로가 제어하는 수밖에 없고, 그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게 지능인 탓이다.
다행스럽게도 마력과 비교하여 지능이 아주 낮은 편이 아닌지라 겨우겨우 균형이유지는 되고 있었다. 하지만 이는 ’타오르는 샛별(8Lv, 지능+13)‘의 덕분이며 아직까지도 내 골칫거리로 남아있는 부분이었다.
지능을 마력과 비슷한 수준으로 맞춰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더욱 많은 것을 경험하고 배우며 이해할 필요가 있었다. 지능은 보통 그러한 ’이해‘에 따라 오르는 경향이 있었으니.
“끄으으으······.”
“지치지도 않는 건가?”
몇 시간을 싸웠을까. 태양이 가라앉고 어둠이 찾아왔다. 주변에 널브러진 야차가 수천을 헤아렸다. 그런데도 나는 움직이고 있었다.
솔직히 제정신이라고 하긴 어렵다. 현기증과 울렁거림이 이미 한계를 넘어섰다. 무기를 쓰는 것밖에 모르는 러시아 군인을 상대할 때와는 천차만별이었다.
오로지 지구력으로 버티는 중이다.
아무리 야차가 타고난 전사라고 할지라도, 쉬지 않고 수천의 야차를 쓰러트린 자에 대해선 경각심과 경외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인정하지! 너는 위대한 전사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겁쟁이인 것은 아니다!”
그들은 투지를 새로 다졌다.
싸우면 싸울수록 심지가 얇아지기보다 두꺼워졌다.
다시금 달이 지고 해가 떴다.
그리고 주변엔 비명과 신음만이 남았다.
“후우우우······.”
숨을 크게 들이쉰다. 전신은 이미 땀투성이였다. 땀이 수증기가 되어 열기처럼 모락모락 피어났다.
[모든 야차와의 싸움에서 승리했습니다.]
[힘이 4, 민첩이 4, 체력이 3, 지능이 6(5+1), 마력이 1 상승했습니다.]
[소수점 이하의 능력치는 검은 야차의 인장에 저장되며, 누적되어 1 이상이 쌓였을 때 능력치로 환산됩니다.]
[계속된 압도적인 싸움의 결과로 인해 ‘놀 궤멸자(5Lv, 체력+7)’의 칭호가 ‘전장의 싸움꾼(7Lv, 힘+4 체력+7)’으로 진화합니다.]
칭호의 진화!
타오르는 샛별을 얻을 때와 비슷한 맥락이었다.
원래부터 칭호가 진화하는 경우가 없진 않았지만, 연속으로 두 번이나 나타난 건 이례적이다.
가뜩이나 칭호는 얻기 어려운 분류에 속했고, 같은 결과를 낸다고 하더라도 나타나지 않은 경우 역시 많았다.
하여 보통 칭호의 개수는 아무리 많아도 4개를 넘지 않았다.
데몬로드나 라이라 디아블로도 몇 개의 칭호를 가지고 않은 이유는 끊임없이 칭호를 진화시켜왔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계속된 압도적인 싸움이란 건 아마도 러시아 군부대와 이번 야차들과의 싸움을 묶어서 말하는 것일 터였다.
‘싸움꾼이라니.’
틀린 말은 아니지만 묘하게 웃겼다.
허공에 십자 인을 그리자 변경된 내용이 일목요연하게 나타났다.
이름: 오한성
직업: 천지인(天地人)
칭호:
● 오한성(無, 순수마력 10당 모든 능력치+1)● 타오르는 샛별(8Lv, 지능+13)● 전장의 싸움꾼(7Lv, 힘+4 체력+7)능력치:
힘 90(77+13) 민첩 86(72+14) 체력 94(71+23)지능 91(64+27) 마력 97(83+14)잠재력(370+91/499)흔히들 종합능력치가 9레벨로 들어서면 성장이 극악해진다고 말한다. 하지만 지금 내 종합능력치는 무려 461에 달했다. 10레벨 초입으로 들어선 것이다.
‘그들과 내 기준이 다르기 때문이겠지.’
나 역시 의외였다. 편법이라면 편법일 수는 있지만 굉장히 자연스럽게 9레벨을 넘겨버린 것이다. 아마도 내가 평범한 인간과는 전혀 다른 틀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일 터였다.
10레벨!
9레벨이 그냥 재앙이라면, 10레벨의 괴물은 ‘적앙(積殃)’으로 취급받는다.
11레벨부터는 ‘대앙(大殃)’이라 불리며 12레벨은 ‘백앙(百殃)’으로 분류됐다.
12레벨은 유일하게 ‘우리엘 디아블로’에게 부여된 이름이고, 대앙은 과거 두 번 지구를 덮친 적이 있었다.
재앙, 적앙, 대앙, 백앙.
재앙은 말 그대로 재앙이며, 적앙은 거듭 된 재앙을 말한다. 그리고 대앙은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재앙을, 백앙은 백 개의 재앙을 합친 만큼의 힘이라 불리는 것이다.
어느 것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다. 결국 모든 영웅이 죽은 뒤 나조차 그냥 재앙 앞에 목숨을 잃었으니까. 알레테이아를 상대하며 힘을 상당부분 소진했기 때문이긴했지만 말이다.
지금 나는 적앙(積殃)의 초입에 발을 들였다. 통상적으로 10레벨에 도달한 인간은 몇 없다. 영웅들이라 불리는 자들 중에서도 극소수.
‘그래봤자 나찰 하나를 겨우 상대할 수 있을 정도다.’
허나 전차원적으로 강자는 많다. 인류에 한정해선 안 된다.
나찰각의 십이나찰이라 불리는 나찰들도 10레벨에 들어서지 않은 자가 없었다. 최대 ‘대앙(大殃)’급의 괴물이며 대라선은 어쩌면 백앙(百殃)에 도달한 자일지도 몰랐다.
내가 보았던 가장 강한 괴물은 제로다.
능력치총합 620. 13레벨. 굳이 이름 붙이자면 ‘천앙(千殃)’이라 해야 할까. 아득하다. 우주 위의 우주였다.
하지만, 강하게 주먹을 쥐어본다.
‘할 수 있다.’
내 성장속도가 인류의 기준과 다르다는 걸 확인했다.
‘마의 구간’이라 불리는 구간마저 단번에 돌파하며 더욱 높은 도약이 가능함을 확인한 것이다.
우리엘 디아블로가 강해지는 만큼 내 한계도 넓어진다. 또한 나는 우리엘 디아블로와 다른 무기들도 가지고 있었다.
멀지 않았다. 결국 시간과의 싸움일 뿐.
“오, 오한성! 너, 이게 대체······!”
구화린을 비롯한 오룡 전원이 헐레벌떡 동굴 앞으로 뛰어왔다.
그들은 탈 것을 만들고 기절한 원후제를 눕혀왔다. 구화린이 모두를 돌보는 사이에 나는 판을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오룡님들이다!”
“오룡 모두 사, 살아 계신다!”
기진맥진 쓰러졌던 야차들이 오룡을 보곤 발작하듯 몸일 튕겼다.
죽은 자식이 살아 돌아온 걸 본 것 마냥.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입을 열었다.
“너희가 정말로 싸울 의지가 있는지 확인했을 뿐이다. 겁쟁이는 아닌 것 같군.”
모두가 내 장단에 놀아났다는 걸 확인한 그들이 허탈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하지만 일만에 다다르는 야차들 모두가 그저 허탈해하지만은 않았다.
나를 바라보는 눈빛 자체가 달라져 있었다.
그저 검은야차라고, 과거의 약골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오히려 반쯤은 존경의 시선마저 보내는 중이었다.
누가 이런 미친 짓을 벌이겠는가.
“몸을 추슬러라. 모두가 회복하고 원후제가 깨어나면 그 즉시 움직이기 시작할 것이다.”
십이나찰. 대라선과 균열석.
그리고 그중에 숨어있는 암흑인!
‘아무래도 크리퀴를 보내 더 자세히 알아봐야겠군.’
전이까지 생각했다.
내가 사용할 수 있는 카드는 하나만이 아니었으므로.
* * * * *
‘미쳤어!’
구화린은 기가 찼다.
원후제와 미친 듯이 싸우고는 바로 모든 야차와 아주 전쟁을 벌였다.
아무리 싸움을 좋아하는 야차라도 이렇게 무모하리만큼 싸우진 않는다. 다들 정도라는 게 있었다.
그런데 오한성, 그는 정도가 없었다.
부딪히면 부딪히는 대로 미친 듯이 나아갔다. 혹시 생각이라는 게 없는 건 아닐까?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옳았다. 불만과 불안으로 가득 찼던 야차들이 통합되었다.오룡들은 나이가 어렸기에 그들을 모두 제어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해냈다. 단 한 번의 싸움으로 말이다.
그리고 고작 이틀이 지나지 않아 그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심각한 얼굴로. 오룡들과 원후제, 그리고 야차들 모두가 나찰각을 버린 채 십이나찰의 행방을 좇았다.
그리고 발견했다.
더욱 많은 시체를!
“아, 아아······!”
“지천(地天)께서 돌아가셨다!”
“대체 누가? 누가 이런 잔인한 짓을!”
씨를 뿌리고 열매를 맺게 하는 게 지천의 역할이다. 모든 야차들의 사랑과 존경을받았던 지천은 미라처럼 말라붙은 채 죽었다.
십이나찰 중 하나. 천외천의 존재가 이토록 허무하고 허망하게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에 그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대아귀 몇 마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하지만 주변에는 대아귀의 시체도 없었다. 누군가가 저지른 일이라는 뜻인데.
오한성. 그의 표정이 더욱 굳었다. 급격히 어두워졌다.
구화린이 슬그머니 다가와선 물었다.
“혹시······ 짚이는 게 있어?”
그가 이를 갈며 말했다.
“처음부터 모두 계획적이었군. 그날, 문이 열린 그때부터······.”
무슨 계획이었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러기엔 그의 분노가 너무나도 강했기 때문이다.
구화린은 그가 이처럼 화가 난 모습을 처음보았다.
세계의 모든 활화산이 터지기 직전의 광경을 보는 것만 같은 기분에, 구화린은 열려던 입을 천천히 닫을 수밖에 없었다.
< 35. 정령왕(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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