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 정령왕(1) >
구화린을 비롯한 오룡 전원, 압도되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말 자체가 필요 없는 그런 상황이었다.
용은 거대했다. 대아귀와 비슷할 정도의 크기. 찍어 누르며 대아귀와 힘싸움을 벌이는 용의 위용에 잠시 꿈을 꾸는 건가 싶었다.
“검은야차······ 맞아?”
“내가 뭘 잘못보고 있는 건가?”
1년하고 조금 더 시간이 지났을 뿐이다.
그 시간 전의 검은야차 오한성은, 자타공인 약골이었다. 적어도 야차들 사이에선 ‘노력하지만 부족한’ 전사로 불렸다.
물론 당시에도 빠르게 강해지긴 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모두가 자신이 질 거란생각은 좀처럼 하지 않았다.
한차례, 오룡 중 한 명인 연혼제가 알 수 없는 힘, 암령의 괴력에 눌려 패배한 적은 있었다. 그러나 대결 자체가 승복할 수 있는 종류의 내용이 아니었다.
문제만 일으키고 그를 좋아하는 야차는 별로 없었다.
월천의 제자가 되었다고 들었을 땐, 월천이 드디어 미쳤다고 말하는 야차도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 1년 전의 오한성이라고?’
1년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그 사이에 용을 길들이고, 대아귀와 싸울 힘을 손에 넣었다고?
끼에에에에에에에엑!
대아귀가 비명을 내질렀다. 이타콰라 불린 용과 함께하는 오한성은 마치 신이라도 된 듯싶었다. 검에 맺힌 뚜렷한 검기(劍氣)에 대아귀의 피부가 두부처럼 썰려나갔다
‘검기라니!’
구화린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저렇게 뚜렷한 검기는 거의 본 적이 없었다. 화련대의 대주였던 그녀의 친오빠인 구화랑도 겉핥기식으로밖에 검기를 전개하지 못했다.
그런데 저 검기는 대관절 무어란 말인가.
1년 전과 같은 야차라곤 믿어지지 않는 수준이었다.
아니, 애당초 권도 겨우 내지르던 녀석이 1년 만에 어떻게 검기를 깨우치고 활용할 수 있단 말인가.
아기가 겨우 걸음마를 뗐다고 바로 달릴 순 없는 노릇이었다. 설혹 달린다고 하더라도 고작 몇 걸음이어야 정상이다.
그런데 지금 저 모습은 걸음마를 뗀 아기가 한 번도 넘어지지 않고 나찰각을 최고속도로 한 바퀴 달리는 것과 다를 게 없었다.
게다가······.
꽈릉!
검을 내지를 때마다 천둥이 울렸다. 살점이 베이며 피부와 살이 분리된다. 저토록현묘한 묘리라니. 백보신권과 검법을 조화시킨 것 같았다.
순백의 용보다 구화린은 그의 성장을 주목하고 있었다.
같은 시간을 보냈음에도 이렇게 차이가 날 수 있는 걸까?
그 무시하고 모멸 찬 시선을 받았던 검은야차라곤 상상할 수 없었다.
끼아아아아아아악-!
괴성과 함께 대아귀가 침몰했다.
다리가 꺾이고 그대로 주저앉아 움직이지 않았다.
대아귀가 죽자, 소아귀들의 움직임도 둔해졌다.
그 사이 오룡들은 주변의 소아귀들을 모두 정리할 수 있었다.
정리할 수 있었지만, 시선은 여전히 ‘그’에게 향해있는 상태였다.
“······ 믿기지 않는군.”
“움직임이 전과 비교하면 하늘과 땅의 차이야.”
“원래부터 실력을 숨기고 있었던 거 아니야?”
무룡, 잠룡, 그리고 특히 검룡 연혼제가 격렬하게 반응했다.
1년 만에 나타난 검은야차는 더 이상 약골이 아니었다. 백원후에게 얻어맞으며 뒤에서 욕을 먹던 그와는 아예 달라져 있었다.
원후왕이라고 상대가 될까.
“······ 멋있어.”
암룡 유설이 작게 내뱉었다.
순백의 용에게 하는 말인지, 오한성에게 하는 말인 지 모호했지만.
원체 말이 없는 그녀다. 일전 그녀는 오한성이 권법에 버벅대고 있을 때 조언을 해준 바가 있었다. 그녀는 미련할 정도로 노력하는 자를 좋아했고, 오한성이 딱 그런 경우였기 때문이다.
그 말을, 구화린도 부정하긴 힘들었다.
‘뭐, 조금 멋있네.’
기회가 되면 약골이라 놀렸던 걸 사과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내심 고개를 끄덕이는 구화린이었다.
대아귀 두 마리가 쓰러졌다.
소아귀도 전멸시켰다.
그래도 안심하긴 이르다.
“시간이 지나면 더 많은 아귀들이 들이닥칠 거야. 빨리 해결해야 돼.”
구화린이 지시하고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오룡의 안내를 받으며 걸어 나갔다.
‘탑’에 오르는 건 처음이다.
대라선을 한 번 본적은 있지만, 그때의 전율은 아직도 잊히지 않았다.
천하의 무서울 거 없는 요르문간드마저도 꼭꼭 숨어있을 정도였지 않나.
‘탑 안은 조용하군.’
아귀들은 탑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아마도 대라선이 쳐놓은 결계가 작용하고 있는 듯싶었다.
이그닐이 있었다면 결계를 무시하고 즉시 꼭대기 층으로 갈 수 있었을 텐데, 이그닐이 없는 게 약간 아쉬워지는 순간이었다.
꼭대기 층에 다다르자 거대한 백색의 원숭이 하나가 눈을 시뻘겋게 달군 채 문을 지키고 서있었다.
“······ 원후제님!”
원후제!
백원후들의 제왕이라 불리는 존재다. 원후왕은 본 적 있지만 원후제는 나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대라선의 명령만을 따른다고 전해지는 게 원후제이며, 야차들도 그를 존경했다.
구화린이 다가서자 원후제가 한 발자국 물러났다.
“가라······ 이곳을······ 떠나라······!”
“원후제님. 아귀들이 나찰각을 점령했습니다. 십이나찰님들께서도 모습을 감추셨어요. 저희의 희망은 대라선님 뿐입니다!”
“대, 대라선······ 께선······ 이미······ 크흐흑!”
원후제가 몸부림을 쳤다.
그의 전신에 검은 사슬이 보일 듯 말 듯 걸쳐져 있었다.
‘아카식 레코드’에 의해서 보이는 것이다. 다른 이들은 왜 원후제가 발버둥치는 지 알지 못했다.
또한, 난 저 사슬을 어딘가에서 본 적이 있다.
‘알 아락사르를 붙잡았던 사슬!’
알 아락사르를 강제적으로 끌고 간 사슬이다. ‘보라색의 문’이 생겨나 9레벨 최상위의 괴물마저도 그 사슬을 거부할 수 없었다.
“왜, 왜 그러시나요?”
“구화린! 피해라!”
휘익!
오룡들이 외치며 움직이기 전에, 내가 먼저 구화린의 어깨를 부여잡고 옆으로 던져버렸다. 그 자리를 원후제가 들이박았다.
엄청난 속도. 축지법이라 해도 믿겠다.
“그르르륵······!”
이성을 잃었다.
그러나 알 아락사르 때와 다른 건, ‘보라색 문’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보라색 문은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열리는 문이다. 그 시간동안 괴물들은 봉인 돼있으며 봉인이 풀리면 지구에 모든 증오를 쏟아낸다.
그런데 그 문이 없었다.
오로지 사슬만으로 원후제를 제압하고 이성을 흩어놓았다.
‘균열석의 힘이다.’
보자마자 깨달았다. 이런 일을 벌일 수 있는 건 균열석뿐이다.
원후제도, 어쩌면 십이나찰도 균열석에 의해 무슨 일이 일어난 게 분명했다.
뿐만이 아니었다.
“가, 갑자기 몸이 안 움직여!”
“아아악!”
오룡들에게도 이상이 생겼다.
마치 전염되듯 ‘사슬’이 생겨나며 오룡을 포박했다.
그들은 볼 수 없었으나 나에겐 분명히 보였다.
‘전염병 같군.’
“왜, 왜들 그래?”
“뭔데 갑자기 난리야? 아무런 기(氣)도 느껴지지 않는데······!”
하지만 정상인 자가 둘 있었다.
적룡 구화린과 검룡 연혼제.
사슬이 생겨나긴 했으나, 그 둘을 포박하지 못하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 다른 힘에 밀려나듯.
그리고 그 둘의 공통점을, 나는 알았다.
‘나와 싸웠던 야차들.’
확실하진 않다. 그러나 ‘검은 야차의 인’이 반응하고 있는 걸 보면 아주 틀린 가설은 아닌 듯싶었다.
구화린과 연혼제는 나와 싸웠고, 졌다.
동시에 ‘검은 야차의 인’이 가진 기능으로 그들의 능력치를 극소량 강탈한 바가 있었다.
설마 그게 영향을 끼친 건가?
“몸이 멋대로 움직인다! 제길, 피해라!”
무룡이 검을 휘둘렀다. 암룡 유설과 잠룡 주가람도 주변에 있는 모든 걸 공격하기시작했다.
원후제의 ‘격’으로도 버티는 게 고작인데 고작 촉망받는 야차 정도인 오룡이 견뎌낼 리 만무했다.
나는 잠시 고민했다.
내 가설이 확실하다면, 왜 십이나찰과 대라선마저도 모습을 감췄는지 알 것 같았다.
전염병. 퍼지는 걸 막기 위해선 모습을 감출 수밖에.
“제천대성이시여······ 요, 용서를······!”
원후제가 그 말을 끝으로 완전히 이성을 놓아버렸다.
크르르르르!
“구화린, 연혼제. 물러나라.”
다른 오룡은 모르겠지만, 원후제는 쉽지 않은 상대다.
바깥에 있었던 대아귀보다도 까다롭다.
원후제의 움직임은 언제나 최적의 동선이었다. 내 눈에도 겨우 잡힐 정도로 빠르고, 매섭다.
마력보단 순수기술이 더욱 중요하다.
검을 늘어놓았다. 그리고.
‘탈혼무정검.’
제대로 된 검법을 펼쳤다.
* * * * *
구화린과 연혼제를 제외한 모두가 빈사상태에 빠졌다.
탑의 상층부는 완전히 무너져 내렸고, 오룡 중 나머지 셋은 그대로 기절한 상태였다.
원후제의 가슴엔 검이 꽂혀 있었다.
흑풍검이 심장 부근을 찌르자 그제야 사슬의 제약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후욱, 후욱.
땀을 흘렸다. 과연 원숭이의 제왕. 모두가 존경하는 이유가 있었다.
원후제의 눈은 혼탁했다. 붉은 기운도 빠졌지만 원래 있어야할 원기 역시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대라선께선······ 이곳에 안 계십니다······.”
“그럼 어디 있지?”
“십이나찰과 함께 결계를 치던 중······ 갑자기 변하셨습니다. 그분께선······ 자신을 지키고자······ ‘현계’로······ 쿨럭!”
“현계?”
“나찰산 100층, 입니다. 십이나찰들께서도······ 이, 이상을 느끼고 따라가셨지만······.”
돌연 원후제가 이를 갈았다.
“십이나찰 중 한 명이······대라선님을 병들게 만든 게 분명합니다. 트, 특히······월천(月天)님이 방을 들어가시고 나올 때마다······ 대라선께서 발작을······ 일으, 일으키셨습니다.”
“월천······.”
“월천님을, 조심하십시오. 그분, 역시, 예전의 그분이······ 아니니.”
월천. 그는 나의 스승이기도 하다. 암령의 본래 주인이며, 진정한 탈혼무정검을 가르쳐준 장본인. 그가 범인이라는 건가?
“부, 부디, 제천대성이시여. 대라선님을······ 구해, 주시옵소서.”
나는 원후제를 처음 본다.
원후제 또한 그러할 것이다.
하지만 그는 나를 알아봤고, 부탁하며 눈을 감았다.
‘죽진 않았다.’
심장이 뛰었다. 엄청난 재생력 덕분이다.
다만, 기절하여 한동안은 못 일어날 듯싶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돌렸다.
“이제 어쩔······ 셈이야?”
구화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녀는 사슬에서부터 자유로웠다. 옆에 멍하니 있는 연혼제도 마찬가지였다.
우선 내가 해야 할 일은 명백했다.
내가 남은 세 명을 쓰러트리자, 오룡 모두가 사슬에서 자유로워졌다.
그렇다면 남은 자들도 똑같을 터.
“싸워야지.”
월천이나, 대라선을 뜻하는 게 아니다.
모든 야차들과 싸우겠다는 의미였다.
그로 인해 나는 그들의 능력치를 얻고, 그들은 사슬로부터의 자유를 얻는다.
‘작은 샛별은 최후의 방법이다.’
작은 샛별로 변하지 않고도 나찰들을 상대할 힘이 있어야 한다.
원후제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들 중 하나, 혹은 그 이상의 숫자와 싸워야할 수도 있었다.
균열석의 행방이 대강 확정된 순간이었다.
십이나찰, 혹은 대라선. 그들 중 하나에게 있음이 확실하다.
그리고 어쩌면.
‘십이나찰 중 한 명이 암흑인에게 지배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면 모든 이야기가 들어맞는다.
십이나찰 중 하나가 암흑인에게 ‘침략’ 당해 조종되고 있다면, 누구보다 빠르게 균열석에 대한 정보를 얻고 대라선에게 접근하는 것 역시 가능했으리라.
그러니······ 그자가 부디 월천은 아니길 바랄 뿐이다.
동굴 바깥으로 모두가 모였다.
대략 일만에 달하는 야차들. 대부분이 노약자로 이루어져있었지만 그들 역시 전사다.
나는 그들을 모아놓고 중심에서 말했다.
대라선이 ‘탑’에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 모두가 상심했다.
“그럼 오룡들은 어디 계시고 검은 야차인 너만 여기 있는 거냐?”
“그들은 죽었다.”
죽지 않았지만, 죽은 걸로 해두었다.
야차들이 술렁거렸다.
“죽었다고······?”
“다 너희가 겁쟁이처럼 숨어만 있었기 때문이지.”
“뭐?”
그들의 물음에 정색하며 답해주었다.
“너희는 약하다. 약하기에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욕설과 진배없는 말들을 퍼부었다.
“십이나찰과 대라선은 이곳에 없다. 우리는 이제 우리 스스로 살 길을 모색해야 한다. 더 이상 겁쟁이처럼 도망만 칠 순 없다는 말이다.”
“우리가 도망치고 싶어서 도망친 줄 아느냐!”
“겁쟁이라고? 검은야차 따위가 무슨 자격으로······!”
나에 대한 인식은 여전하다.
오룡들이야 내가 싸우는 모습을 봤지만 저들은 동굴 안에 숨어서 누군가가 구출해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피식 웃었다.
“버러지들. 입만 살았군. 어쩌면 십이나찰과 대라선이 도망친 걸지도 모르겠구나. 겁쟁이들과 함께하는 것보단 그게 더 살 가능성이 높으니. 실제 오룡들도 죽지 않았나?”
“그분들을 모욕하지 마라!”
“이 빌어먹을 새끼······!”
전사의 투지를 자극한다.
아무리 어려도, 나이를 먹어도, 남자이건 여자이건 관계없이 그들은 전사였다.
자신들이 모시는 자를 모욕하거나 스스로를 욕보이면 반응하게 되어있다.
나는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그럼 덤벼라. 덤벼서 너희가 겁쟁이가 아니란 것을 증명해보도록.”
일일이 설명하며 싸우는 건 귀찮다.
단순히 대전형식으로 싸워봤자 있으나 마나한 능력치를 강탈할 뿐이다.
차라리 제대로 투지를 자극해서, 검은 야차의 기능을 극대화시키는 게 낫다.
그러기 위한 도발이었다.
그리고 도발은 제대로 먹혀들었다.
< 35. 정령왕(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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