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 균열석(2) >
현대사회는 시스템으로 돌아간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통령, 장관 등이 죽는다고 해서 국가가 마비되는 시대와는 거리가 멀었다. 약간혼란스러울 뿐 결국은 승계될 뿐이다.
다만, 시스템은 규칙대로 움직여야 했다.
시스템은 결코 누군가가 죽었다고 멈춰선 안 되는 것이다.
러시아는 한국으로 FBS(러시아연방보안국)를 파견했다. 틈만 나면 러시아 전투기가 울릉도와 독도를 오갔고, 극동함대의 영해침범도 빈번하게 일어났다.
무력시위.
일촉즉발의 상황이 연출되었다.
한국사회는 극도의 긴장감에 휩싸였다.
몽골국적이나 중국국적으로 위장한 고려인들이 한국으로 대거 유입되었고, 아르켄과 관련 된 모든 것을 먼지 털듯 털기 시작했다.
국정원을 비롯한 국내 첩보기관과는 거의 전쟁을 방불케 했다. 실시간으로 이루어지는 첩보전에 한국은 몸살을 앓았다.
그리고 공식적으로 파견된 FBS는 공식적인 자리에서 아르켄과의 관계를 집요하게 물어오기 시작했다.
모두가 관계를 부정했지만, 가장 먼저 아르켄이 출현한 장소가 한국임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아포칼립스 길드도 그러한 제약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FBS쪽에서 협조공문이 도착했습니다.”
김민식은 회의실에 몸을 깊숙이 밀어 넣고 앉아서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벌써 몇날며칠 눈치싸움을 이어가고 있었고, 상대는 1분 1초도 쉴 생각이 없어보였다.
긴장하며 공문서를 가져온 남자길드원은 잔뜩 긴장하며 위축되어 있었다. 벌써 세 번 째 협조공문이었다.
“말해봐라. 더 이상 털릴 서버가 남아있는지.”
“그게······.”
안다. 말만 협조공문이지 사실은 반 협박이었다. 이미 세계 각국의 해커들이 서버를 털어간 이후다. 그래도 아르켄과 관련된 게 나오는 것이 없으니 ‘알아서 기어라’라는 뜻이었다.
일방적인 괴롭힘. 세계적인 중대사 앞에서는 천하의 아포칼립스 길드라고 해도 날고 길 수 없었다.
“이 빌어먹은 새끼들······.”
“마스터. 조심하셔야 합니다. 최근 FBS를 비롯한 고려인들이 도처에 쫙 깔렸습니다. 틈만 보이면 물고 뜯을 걸요.”
“이제 내 안방에서 내가 욕도 못하는 건가?”
“이 방도 안전하진 않습니다. 보안레벨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렸습니다만······.”
러시아는 비인간적인 행위로 초인을 생성했지만, 그만큼 초인육성에 관심이 많았다. 기상천외한 스킬을 가진 각성자가 언제 이곳에 들어와서 무슨 짓을 했을지 모르는 일이다.
물론 단순한 각성자의 질을 보자면 아포칼립스 길드가 한수 위다. 김민식은 자신의 친위대를 비롯한 군단을 전문적으로 육성하고 있었다.
그래도 지금의 상황은 조심해서 나쁠 게 없다.
“바람의 노래 길드는? 그곳의 길드마스터는 상당히 어린 걸로 아는데?”
“그게······ 없답니다.”
“뭐가 없다는 거지?”
“그쪽은 우리보다 더 수위를 높게 털었는데 먼지 한 톨 안 나왔답니다. 유서희 그꼬마의 대처도 능수능란해서, 아무래도 뒤에 각본가가 있는 것 같습니다.”
“유서희 뒤에 있는 게 누군지 알아봐라.”
“······ 그게, 이미 알아봤는데요.”
“안 나온 모양이군.”
“대체 누굴까요? 어지간한 프로는 아닌 듯싶은데.”
하아. 김민식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걸 자기라고 알겠는가.
자신이 직접 선출한 전문 사냥개들이 냄새를 맡지 못했다면 정말 귀신이라도 된다는 뜻이다. 아니면 귀신을 홀릴 정도로 실력이 좋거나.
차라리 바람의 노래 길드에서 뭐라도 나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물론 그래선 안 된다는 걸 안다. 아르켄과 관련되어 있다는 객관적인 증거가 확보되는 순간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
러시아가 북한에 대사를 파견하고, 지원을 하며 병력을 전개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새로 선출된 대통령은 어떻지?”
“러시아 말입니까?”
“그 외에 새로 선출된 대통령이 또 있나?”
“굉장히 민주적이라고 하더군요. 그리고 지금 러시아 정세는 굉장히 혼란합니다.그나마 데미도프 가문이 있어서······ 아.”
남자가 급히 입을 닫았다.
시리아가 데미도프 가문의 차기가주가 되었다는 건 공공연연 한 비밀이었다. 적어도 김민식 앞에선 금기처럼 여겨졌다.
“객관적인 물증만 없으면 된다는 거로군.”
김민식은 이마를 부여잡았다. 말이 공조지 한국을 압박하는 모양새다.
하지만 사실 그에게 러시아가 압박을 하는 건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진짜 문제는.
‘아르켄.’
놀랍다. 놀라웠다. 그조차 쉽게 믿지 못했으니까.
러시아를 혼자 상대했다고?
물론 9레벨 이상의 괴물이라면, 현대과학만으로는 상대가 불가하다. 그게 상식이었다.
그렇다는 건 아르켄이 9레벨의 기준인 능력치총합 401~450수준의 초강자라는 뜻이다.
또한 아르켄은 각성자다. 적어도 인간임은 확실했다. 오로지 김민식만이 확신할 수 있었다.
‘고작 2년도 안 되는 시간에······.’
그는 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아르켄은 우주를 노니고 있었다. 보이질 않으니 비교가 불가능했던 것이다. 아예 다른 세상에 있었으므로.
과거에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그리하여 확신했다.
적어도 현재의 아르켄은 과거의 아르켄과 같은 자가 아니라고.
과거의 아르켄과는 그 내용이 전혀 다르다.
‘나처럼 과거로 돌아온 인간이다.’
문제는 누구인지를 모르겠다는 것.
알레테이아의 신도?
그래. 시간의 신에게 공물을 바치고 대규모로 의식을 행한 사람은 알레테이아의 신도들 중에서도 고위급 간부밖에 없다.
누굴까? 그리고 무슨 의도를 가지고 있는가.
아르켄 역시 과거와 전혀 다른 노선을 걷는 자신을 인지했을 가능성이 높다.
‘마룡을 길들였던 제사장. 알레테이아의 지주.’
그림이 맞춰지는 것 같았다.
마룡을 길들였는데 백룡이라고 길들이지 못하겠나.
숨겨진 비밀들로 말미암아 이만한 성장을 이뤄낸 게 분명하다.
‘대체 뭘 하려는 거지? 러시아는 왜 공격한 거고?’
머리가 아팠다. 알레테이아의 제사장이라면 굳이 러시아를 공격할 이유가 없다. 러시아는 미래에 멸망했지만 알레테이아와 비슷한 뜻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회유하고 몰래 유착한다면 모를까.
공격해서 이만큼 이슈를 만든다?
‘그만한 인물이 그저 힘에 취해 휘두를 리는 없다.’
뭔가가 있다. 자신이 모르는 무언가가.
그렇다면 놀고 있을 틈은 없었다.
김민식은 아르켄을 알레테이아의 인물이며, 아주 높은 확률로 제사장일 것이라고 거의 확정지었다.
알레테이아는 인류의 해악이다. 그 교리와 가르침은 인간의 도덕성과는 굉장히 거리가 있었으니까.
만약 아르켄의 거죽을 뒤집어쓴 그가 그 교리대로 행동한다면 러시아의 대통령이죽은 것과는 비교가 안 되는 재앙이 들이닥칠 것이다.
다소 의아한 점은 꽤 있지만······.
‘놈은 나의 적이다.’
아르켄은 적이다. 분명하게 규정지었다.
김민식은 아르켄을 포섭하거나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했던 생각 자체를 접었다.
그가 정말로 알레테이아의 제사장이라면.
김민식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죽거나, 죽이거나.’
둘 중 하나만 남을 것이었다.
* * * * *
아르켄의 그림자는 확실히 대단했다.
그만한 존재가 암살을 행한다면 세계의 권력자들은 씨가 마를 것이다.
러시아의 일, ‘재앙의 강림’이라 불리던 그 사건 이후 각국의 수뇌들은 알아서 몸을 사렸다. 안가를 주기적으로 옮기거나 겉으로 들어나지 않으며 최대한 노출이 되는 것을 피했다.
한국만이 아닌 세계 전역에서 첩보전이 일어났고, 등장하지도 않은 아르켄의 그림자를 두려워한 자들이 깊숙한 곳으로 숨어버렸다.
세계가 ‘아르켄’의 이름 세 글자를 그만큼 위협적으로 받아들였다는 뜻.
대규모의 인체실험은 거의 사라졌다.
대신 ‘아르켄 찾기’에 혈안이 된 국가가 넘쳐났다.
“아르켄을 찾아라. 그 힘을 우리 것으로 만들면 두려울 게 없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우리가 가장먼저 아르켄과 접선해야 한다!”
“한국에 없으면 북한, 북한에 없으면 중국, 중국에 없으면 일본 쪽을 뒤져라! 아시아 전체를 이 잡듯 뒤져서 찾으란 말이다!”
그 힘은 굉장히 매력적인 것이었다.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만 있다면, 그야말로 핵보다 값어치 있는 무기가 된다.
더불어 더 이상 ‘암살당할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
단지 아르켄을 보유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위협과 안심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세계적인 현상이었다.
보이지 않는 숨바꼭질. 모두가 ‘아르켄 찾기’에 눈을 부릅뜬 가운데, 정작 아르켄은 모습을 감췄다.
그 시각.
나는 갑옷을 입은 채 짐을 메고 산을 오르는 중이었다.
모든 준비를 끝마쳤고, 만약을 대비해 아르켄의 갑옷도 만들어 놓았으니 이제 균열석의 행방을 찾을 차례였다.
나찰산에서 균열석의 반응을 느꼈으니 분명히 이 안에 있을 터.
‘검은야차의 인(印)’을 사용해 단번에 나찰각의 바로 아랫부분까지 올라왔다. 대략 1년 전 ‘암흑인’들의 침공 이후 나찰각은 봉인되었고 그 뒤로 처음 발을 들이는 것이었다.
‘균열석은 분명히 지구로 떨어졌을 텐데. 왜 나찰각에 있는 거지?’
계속해서 풀리지 않는 의문이었다.
아무리 지구와 ‘문’이 연결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지구와 나찰산은 엄연히 다른 세계다. 지구에 떨어진 게 갑자기 나찰산에 있을 리는 없었다.
아마도 다른 작용이 일어난 게 분명하다.
그러나 균열석은 마치 숨바꼭질을 하듯 갑자기 반응을 멈춰버렸다.
‘지금쯤이면 성흔쟁탈전이 진행되고 있겠군.’
문득 떠올렸다.
워낙 바빠 찾아오지 못했지만, 봉인이 풀리는 1년 뒤 나찰각에서 성흔쟁탈전이 벌어진다고 했다.
후기지수라고 불리는 야차들이 서로의 실력을 뽐내는 장인 것이다.
어차피 나와는 그다지 상관없는 시합이었다. 그보단 다른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아예 참여할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곳에서 얻은 게 많지.’
흑풍검, 암령, 태을무극심법, 진짜 탈혼무정검까지.
무공의 기초를 다지고 새롭게 깨달음을 얻은 곳이다.
그래서인지 마치 운명과 같이 다가왔다. 균열석에 대한 단초를 찾고 겸사겸사 십이나찰 중 하나이며 나의 스승인 월천(月天)을 찾아 깨달음에 대해 토론해봐야겠다.
하지만, 나찰각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왜 닫혀 있는 거지?’
1년 전, 봉인을 할 때를 제외하면 나찰각의 문은 항시 열려있었다. 그런데 닫혀있다. 아직도 결계를 만드는 절차가 끝나지 않은 걸까?
문 앞까지 다가가고 나서야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피 냄새.’
그것도 엄청나게 짙은 피 냄새가 났다.
이맛살을 구겼다. 암흑인들이 벌인 일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크리퀴에게서 전해들은 이야기는 없었다. 비밀리에 일이 진행되지 않았다면 아직은 침략할 일이 없을진대.
어쩌면 균열석 때문이 수도 있었다.
급히 거대하기 짝이 없는 문에 양손을 가져다가 대었다.
82에 달하는 힘은 강철도 맨손으로 구부릴 수 있게 만든다. 거대한 통짜 나무로 만들어진 문이라도 충분히 열 수 있었다.
끼이이이이익.
힘줄이 도드라지며, 장장 20m 크기에 달하는 문이 열렸다.
이윽고 문 건너편에 펼쳐진 상황에 나는 할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 모든 야차가 죽었다.’
눈에 보이는 모든 야차들이 죽어있었다.
배가 잘렸는데, 내장이 없었다.
누군가가 게걸스럽게 먹어치운 듯이.
그 숫자만 200에 달했다.
백색의 원숭이, 백원후들의 시체도 넘쳐났다.
휘이이잉-!
촤륵!
화살이 날아왔다. 가볍게 낚아챘다.
그러자 땅 속에서 손이 솟아올라 내 다리를 잡았다.
그 사이 멀리서 검과 창을 든 야차가 양쪽에서 나타나 나를 노리고 달려들었다.
“네놈,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
그리고 나타난 건 내 눈에도 익은 자였다.
무룡 무백.
내 양옆에서 무기를 들이민 건 적룡 구화린과 검룡 연혼제였다.
땅에서 내 발을 잡은 건 잠룡 주가람이었으며, 화살을 날린 것은 암룡 유설이었다.
오룡!
야차들 중에서도 가장 미래가 촉망받는 강자들.
나는 과거 그들과 경쟁을 했다.
그들이 다가오는 걸 느끼고 있었으나, 일부러 공격하지 않았다.
대신 천천히 투구를 벗었다.
“······ 검은야차 오한성?”
가장 먼저 반응한 건 구화린이었다.
붉고 풍성한 머리칼은 여전했다.
구화랑의 여동생. 흑풍검을 만든 재료도 본래는 구화린의 것이었다.
하여간에······.
무수한 시체들. 치울 생각조차 못하고 오룡 모두가 두려움에 빠져있었다. 나는 알수 있다. 그들이 느끼는 공포를.
이런 일이 벌어졌는데 십이나찰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을 다스리는 대라선 역시 마찬가지.
그러니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얼굴을 굳힌 채 물었다.
“지금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 34. 균열석(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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