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신사냥꾼-136화 (137/251)

< 33. 재앙(災殃), 강림(4) >

시리아는 철저한 방관자였다.

‘공간의 보석’에 갇힌 채 그녀는 모든 과정을 실시간으로 두 눈에 담았다. ‘그’, 아르켄은 보란 듯이 군부를 농락하며 러시아의 자존심이라 불리던 남자마저 죽여보인것이다.

그녀가 아무리 소리쳐도 아르켄에게 닿지 않았다. ‘공간의 보석’에 갇힌 뒤로 그녀는 초조해하며 입술을 지그시 깨무는 것 외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무력했다. 이토록 자신이 무력해질 줄은 몰랐다.

‘군부가······.’

러시아의 군력은 세계정상급이다. 내전의 여파로 많은 힘을 쏟아 부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한들, 아르켄 하나를 막지 못했다.

그리고 설령 다 쏟아 부어도 아르켄을 죽일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그는 무적이다. 불사신(不死身)이 있다면 그를 뜻하는 것이리라.

또한 그는 괴물이다. 이형의 신체, 불타는 날개는 ‘마왕’이라 칭해도 부족함이 없을 수준이었다. 그가 닿는 모든 곳엔 불길이 일었다. 꺼지지 않는 불길은 모든 걸 집어삼키고 멸했다.

죽지 않는 자를 상대로 어찌 싸움을 건단 말인가. 어찌 이길 수 있단 말인가!

‘이렇게도 부질없는 거였나?’

아르켄의 앞에선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 듯했다.

벌레처럼 밟으면 터진다. 죽는다. 거부할 권한조차 없다.

전투기가, 전차가, 수많은 저격수가. 인간의 지혜의 정수라고 칭해지는 모든 것들이 단번에 부정당했다.

그녀는 군부의 사람이었다. 군부명가에서 태어나 자라며 각인 된 자부심이 와르르 무너지고 있었다. 이는 분명 그녀의 가치관 바깥의 일이었다.

아무리 초인시대가 열렸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한계라는 게 분명히 존재할 줄 알았다. 하지만 그에겐 한계가 없었다. 생각하고 상상했던 모든 한계를 비웃듯 깨버렸다.

특히······.

‘일리야 블라디미르!’

아아. 그를 본 그녀는 공포심에 잠겼다. 일리야 블라디미르는 러시아를 휘어잡은 ‘독’이다. 그에게 걸린 자들 중 처참하게 죽지 않은 이가 없다.

늙어도 죽지 않는 노괴물.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며, ‘세 가문’ 중에서도 블라디미르가가 가장 악랄하기로 소문이 난 건 모두 일리야 블라디미르 때문이었다.

그에 의해 죽은 사람의 숫자만 추정치가 백만을 넘긴다. 이는 전쟁을 제외한 숫자다.

‘악의 온상.’

그 악의 온상이 또 다른 괴물들과 함께 아르켄을 기다리고 있었다.

천이 넘는 괴물들은 자아를 강탈당한 초인이었다. 약물에 절고, 전신을 개조당하고, 끝내 정신의 주도권마저 빼앗겨서 인형이 된 불쌍한 인간들.

그들은 척 보기에도 정상적이지 않았다. 초록색 팔을 가졌거나 신체 한 부분이 많거나 적거나, 작거나 크거나 하며 강화가 되어있었다.

일리야가 비밀리에 만든 비밀병기다.

그의 잔혹함을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런데······ 그럴진대.

툭.

툭. 툭.

꿇는다. 하나, 둘, 이어 자신을 잃어버린 모든 자들이.

왕을 맞이하듯 무릎을 꿇고 경배한다.

잊고, 잃을 수밖에 없었던 그 영혼들은 드디어 길을 찾았다. 자신을 이끌어줄 존재가 나타났음에 모든 영혼이 환호하고 있었다.

기적이었다. 기적이 일어났다.

‘그는 정말 마왕일까?’

그들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린 순간 아르켄의 전신에서 환한 빛이 새어나오는 것만 같았다. 그 빛은 무척이나 선하고 신성해서, 성녀라 불리는 시리아조차 눈을 감고 경건함을 가질 정도였다.

더욱 놀라운 건 그뿐만이 아니다.

그의 등 뒤에 하얀색의 날개 하나가 더 돋아났다.

천사의 날개다. 누가 뭐라고 해도 시리아는 알 수 있다. 빛의 정령들이 그 주변으로 모여들기 시작한 것이다.

‘말도 안 돼.’

어둠과 빛이 공존하고 있었다.

그 결과는 혼돈뿐이다. 하지만 혼돈은 없었다.

아르켄. 그는 결코 혼돈에 빠지지 않았다.

한 번 빠질 뻔하긴 했다. 그의 심장이 얼어붙고 다시 타오를 때, 그는 악의 손을 들어 거대한 혼란의 존재가 될 뻔했다.

하지만 되지 않았다.

그 눈은, 학살자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올곧았으니까. 익숙하고 그리움마저 느껴지는 그런 눈이었으니까.

그래서 고개를 저었다.

저 자에게서 친근한 감정을 느낀다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다.

“아아아!”

“왕! 우리의 왕이시여!”

기적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신체의 자유를 박탈당하고, 기억을 잊고, 이지를 잃은 자들이 일리야 블라디미르의 살점을 뜯어먹은 뒤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마치 병아리가 새로이 태어나 어미를 볼 때의 각인효과처럼, 그들은 아르켄은 보고 헌신하고 모시며 적극적으로 따랐다.

그들이 등을 돌린 아르켄을 향해 다시금 읊조렸다.

“우리의 육체를 바치나이다.”

“우리의 왕이 되어주시옵소서.”

“우리는 모두이며 하나이니.”

“잃어버렸던 우리의 왕만을 따르겠나이다.”

그들은 천이 넘었지만 하나이기도 했다.

모든 이들의 정신이 이어지며 뜻 또한 통일된 것이다.

‘로스트 킹······.’

잃어버린 왕.

그가 다시금 현세에 강림했다.

누군가에게는 재앙이 되고, 누군가에게는 신앙이 되는······.

빛도 어둠도 아닌 존재가!

하지만 결코 혼돈은 아니니, 그를 무어라 불러야 할까.

“세상 위에 군림하는 절대지배자시여!”

모두가 목을 놓아 외쳤다. 그 광기마저 느껴지는 광경에 시리아는 몸을 부들부들 떨어댔다.

펄럭!

그가 세 장의 날개를 끝까지 펼쳤다.

이어 하늘로 떠오르자, 광신도들이 그 뒤를 무아지경으로 따랐다.

로스트 킹, 아르켄.

어쩌면 신화의 시작을 목도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시리아는 생각하고 말았다.

진격은 끝나지 않았다.

그는 모든 이형(異形)의 제왕이었다.

대규모로 건설된 인체연구실을 습격하고, 내전의 주동자들을 처벌했으며, 힘 있는 권력자들을 무참하게 베었다.

이형의 개조당한 인간의 숫자는 불어만 갔다.

이지를 잃은 그들은 아르켄을 보면 ‘왕’이라 울부짖으며 따랐다.

또한 블라디미르 가문을 멸망직전까지 내몬 것만으로도 모자라 ‘3대 가문’이라 알려진 부쉬코브 가문의 가주마저 베었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 하나가 남았을 뿐이었다.

데미도프.

시리아의 피에도 데미도프 가문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 나의 병사들도 그대를 막지 못한 모양이군.”

검은 수염을 길게 기른 남자였다. 3대 가문 중 가장 젊은 가주이며, 철저한 원리주의자라 불리는 이반 데미도프.

그가 허탈하게 웃으며 아르켄을 마주하고 있었다.

주변엔 시체뿐이었다. 아르켄은 피로 이루어진 길을 걸었다. 그의 걸음 하나마다 한 명이 죽었다. 그리고 이제 그와 그의 성만이 남았을 뿐이다.

“자네가 사람의 말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아네. 그러니 하나만 부탁하지.”

아르켄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검을 쥔 채 무저갱과 같은 눈빛으로 이반 데미도프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를 죽이고 끝내주시게. 내 가족들만은 건들지 말아주게.”

“자기 것은 소중하고 남의 것은 소중하지 않은 모양이군.”

“데미도프 가문은 인체개조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네.”

“허나 너는 알고 있었다.”

“방관 역시 죄라 이건가? 그래,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군.”

블라디미르 가문과 부쉬코브 가문은 인체개조 실험에 손을 댔다. 초인시대로 접어들며 생긴 부작용. 내전을 일으킨 것 역시 그들 가문이었으니 그저 방관했다 하더라도 죄가 감면되진 않는다.

“러시아는 썩었지. 군부는 더욱 강한 힘만을 갈구했고, 내정엔 관심이 없어. 결국군부는 부패했고 변질되었네. 초인시대로 접어들며 그 현상은 더욱 가속화됐지.”

이반은 침통하기 그지없단 표정을 지어보였다.

연기일까? 하지만 이반은 연기를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는 오만하고 독선적이며 자기 할 말을 무조건 꺼내는 사람이었으므로.

“물러서면 잡아먹힌다. 데미도프 가문이 그들을 말리면, 그들은 손을 잡고 우리를 파멸시키려 하겠지. 실제로 내전 등으로 그런 정황들이 포착되었으니까. 내가 할수 있는 일은 나의 사람들을 지키는 것 외엔 아무 것도 없었다네. 바로 지금처럼.”

이반 데미도프가 무릎을 꿇었다.

죽음을 받아들이겠다는 태도. 다른 가주들과는 전혀 달랐다.

“데미도프 가문은 무조건적으로 항복하겠네. 자네의 의사를 존중하고 따르도록 하지.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것이야.”

무력했다.

군부의 거인이라 불리던 사람치곤 너무나도 무력한 모습이었다.

“재미없군.”

아르켄은 실망한 듯싶었다.

조건 없는 항복에. 그 무력한 모습에.

허나 그에게 있어서 죽음은 평등한 것이었다.

이윽고 아르켄의 검이 하늘 높이 치솟았다. 이반 데미도프. 한 시대를 풍미한 명장도 결국 잃어버린 왕 앞에 색을 바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검이 휘둘러지려는 찰나.

“멈추세요!”

나는 내심 미소 지었다.

‘공간의 보석’안에 가두어져있던 시리아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강렬한 의지가 있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지만, 여태껏 갇혀 있던 그녀가 그녀를 쳐낸 이반 데미도프의 죽음 앞에서 의지를 초월해 공간의 보석을 빠져나온 것이다.

그녀는 빛으로 화하며 이내 형상을 갖추더니 그 즉시 이반 데미도프의 앞을 막아섰다.

“너, 너는······!”

돌연히 자신의 앞을 막아선 여인을 보고, 이반 데미도프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시리아. 시리아 데미도프!

그녀 역시도 데미도프의 이름을 가졌었기에.

“왜 네가 여기에 있는 것이냐! 분명히 러시아에서 추방시키라고 그랬거늘!”

버럭 소리를 질렀다.

진짜로 화가 난 음성이었다.

시리아의 표정이 슬픔으로 물들었다.

“저를 싫어하셔도, 부정하셔도, 저 역시 데미도프 가문의 사람입니다. 아버지를 베려면 저부터 베어야 할 겁니다, 아르켄.”

그렇지만 그녀는 강단이 있었다. 금세 슬픔을 떨쳐내고 강인하기 그지없는 표정으로 나를 노려봤다.

“비켜라! 데미도프 가문의 사람이 아닌 네가 나설 자리가 아니다!”

“싫습니다!”

시리아는 못을 박았다.

그녀의 감정이 격해졌다.

또한 그녀의 뒤에 있던 이반 데미도프의 감정 역시 격해졌다.

감정의 소용돌이는 기억을 낳는다.

‘관리자의 권한.’

나는 그들의 숨겨진 기억을 엿볼 수 있었다.

-그 아이는 귀신이 쓰인 게 아니에요! 왜 그런 식으로 말을 하는 건가요?

-안다. 하지만 그 아이의 힘은 위험해! 러시아에 그 아이와 같은 힘을 지닌 사람들은 모두 납치당하고, 실험당하며 죽었지.

-데미도프 가문의 힘이라면 시리아를 지킬 수 있어요!

-아니, 안 돼! 그 아이는 태어나서부터 그러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오랜 시간 외부에 노출시키지 않았지만 블라디미르 가문에서 냄새를 맡았어. 자연적으로 발생한이능력자······ 나는 가주로서 데미도프 가문을 지켜야한다.

-시리아는 당신의 딸이라고요!

-동시에 가주이기도 하지. 집사 로이스를 함께 보낼 테니, 마음을 놓아라. 그 아이는 우리와 상관없는 곳에서 잘 자랄 게야.

가문에서 제명당하고 가문의 이름을 쓰는 것조차 금지됐다. 그녀는 시리아 데미도프가 아닌 그냥 시리아로서 오랜 시간을 살아왔다.

쓸모가 있어지면 다시금 돌아갈 수 있으리라고 믿고서, 한국의 땅을 밟았다.

난생 처음 밟는 이국의 땅. 그녀는 그럼에도 약해지지 않았다.

하지만 처음부터 빗나가 있었던 것이다.

빗나간 애정의 결과가 지금의 모습이었다.

“아르켄. 두 눈 똑바로 뜨고 나를 베어야 할 겁니다. 내가 베이기 전에는 결코 아버지에게 손끝 하나 댈 수 없을 테니까요!”

이런 모습도 있었던가?

처음 봤다.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맺혔고, 몸은 슬픔과 공포로 바들바들 떨리는 중이었다.

하지만 한 발자국도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내 눈을 바로 바라보며, 죽음을 받아들이려고 하고 있었다.

‘아름답다.’

숭고한 헌신. 라이라 디아블로가 우리엘 디아블로에게 보였던 그것을 나는 지금 두 눈에 담고 있었다.

그 모습 자체만으로도 아름다웠으나, 동시에 슬프기도 했다.

이 어그러진 애정을 어찌해야할까.

검을 뻗었다.

스악!

그리고 잘라냈다.

시리아가 이를 악물고 눈도 감지 않았다.

죽기 직전 내 모습을 담아두겠다는 듯. 결코 잊지 않겠다는 듯.

하지만 잘려나간 건 그녀의 머리가 아니었다.

“왜······?”

머리카락. 성녀 시리아의 상징이었던 긴 머리카락이 잘리고 단발이 되었다. 단발이 되었음에도 그 아름다움을 숨길 순 없었다.

“지금부터 데미도프 가문의 가주는 시리아 데미도프다.”

나는 선언했다.

이반 데미도프는 모든 권한을 내게 넘긴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오늘부터 시리아 데미도프가 데미도프 가문의 새얼굴이다.

동시에.

“모든 게 끝나면 오로지 진실만을 밝혀라. 나는 어디에도 있고 어디에도 없으니. 또 다른 죄가 발견되면 너희는 다시 나를 만나게 될 것이다.”

나는 등을 돌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말했다.

“너희를 살려두는 이유는 하나다. 어차피 악은 사라지지 않을 것을 알기에.”

최악은 죽이고 차악만을 남긴다.

악은 무한하게 창궐한다. 큰 악을 죽여도 작은 악이 다시금 그 자리를 차지할 뿐이다. 그러니 살려두고 악 자체가 또 다른 악을 감시하게 만든다.

시리아라면, 잘 해낼 것이다.

적어도 새로운 데미도프 가문을 만들 수도 있으리라.

‘이제 마지막 하나가 남았군.’

세르게이 대통령.

그는 과연 최선을 다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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