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신사냥꾼-132화 (133/251)

< 32. 시리아 데미도프(3) >

좀이 쑤셨다.

힘이 넘쳤다.

멸제의 마력, 내 심장에 자리 잡은 용의 마력, 더불어 암령의 힘까지.

해소하지 않으면 부딪혀 공멸할 뿐이다. 태을무극심법으로 아무리 다스려도 한계가 있었다.

그러니 쏟아내야 한다. 넘치면 비워지고 비워지면 다시 채워지는 게 세상의 이치.내 안에서 삼파전을 벌이는 마력들도 마찬가지였다.

한계를, 해제한다.

마음껏 미쳐 날뛰는 거다.

주먹을 쥐자 오른손에 멸제의 패악스러운 마력이 요동쳤다. 암령은 폭풍과 같은 태세로 왼손에 머금어졌다.

그 상태에서 검을 쥐었다. 흑풍검이 전율하듯 파르르 떨렸고 세 개의 힘이 부딪히지 않도록 균형을 조절하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아찔했다.

쿠와아아아아앙!

그대로 검을 내지르자 멸제와 암령이 폭발할 듯 위태롭게 쏘아지며 공간을 박살내고 없애버렸다. 변종 크라켄 한 마리가 촉수만 남긴 채 증발해버렸으며 시체조차 온전히 남기지 못했다.

“후우우우웁-!”

단지 검을 질렀을 뿐임에도 반동력으로 몸이 떠밀려갔다. 나무의 뿌리처럼 다리를 굳게 바닥에 밀착시켜보았지만 멸제와 암령의 미쳐 날뛰는 마력의 여파를 감당할 수 없었다.

두 힘이 빠져나간 양 손이 사시나무처럼 떨려댔지만 나는 조금 전의 파괴력을 보곤 할 말을 잃었다. 뭉쳐있던 것을 풀어내었을 뿐인데 건물 몇 개가 증발하듯 사라져 있었다. 땅이 깊게 파이고 변종 크라켄 한 마리는 아예 모습조차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가공할 파괴력이었다.

후폭풍을 견디고자 주변의 돌무더기 따위를 잡으며 버티던 군인들도 저마다 입을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뿐만 인가.

하늘이 괴롭다는 듯 비명을 질러댔다. 폭발의 여파가 하늘의 절반은 검게 물들인 것이다. 서로 다른 마력이 돌고 순환하며 만들어낸 참극이었다.

“인간이······.”

“아니야······.”

상상을 초월하는 상황에 마주했을 때 사람이 보이는 반응은 대체로 넋을 놓는 것이었다. 지금의 군인들이 그러했다.

초인시대로 접어들고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초인들이 대거 출현했지만 소수 몇몇을 제외하고 아직은 ‘현대과학’을 강력함을 뛰어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럴진대.

“······ 걸어 다니는 핵탄두가 따로 없군요.”

시리아도 군인들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핵탄두가 정말로 걸어 다닌다면 그 활용가치는 상상을 초월한다. 시리아 역시 군부에 몸을 담고 있었기에 그 가치를 모르진 않았다.

그녀가 긴장하며 나를 쳐다봤다.

허나 나는 그러한 주변의 소리를 제대로 귀담아 듣지 않고 있었다.

양 손을 내려다보고, 암령과 멸제의 마력을 살폈다.

‘다시 채워진다.’

놀랍게도 두 힘은 비워낸 즉시 채워지는 중이었다. 비록 그 속도가 느릿하다곤 하지만 다시 채워지거든 미친 듯이 서로의 영역싸움을 시작할 터였다.

꿀꺽!

침을 삼켰다. 이질적인 힘들이 순환하여 만들어낸 장면은 과거 내 전성기 시절에 버금가고 있었다. 이조차도 완벽하지 않으니 더욱 놀라운 것이었다.

‘섞을 수 있다면······.’

암령과 멸제, 그리고 나의 힘을 온전히 섞을 수만 있다면 감히 전무후무한 세상이펼쳐질 것이다. 닿지 못했던 ‘격’을 깨고 오롯이 설 수 있을 것이었다.

요는 영역을 나누고 다투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섞는데 있다. 어떻게 섞어야 할지는여전히 감이 안 잡히지만, 분명한 건 ‘태을무극심법’은 조화의 극의에 다다르는 공부라는 점이었다.

그래. 답은 태을무극심법이다. 더 높은 경지가 필요하다. 보다 간절해졌다.

세 개의 힘을 섞인다는 건, 더 나아가 다른 데몬로드의 ‘본질’마저도 가져올 수 있다는 뜻이었으므로!

‘문제는 단발성이라는 것.’

나눠서 쏟아내는 방법을 연구해야겠다.

고개를 들었다. 유일하게 이타콰만이 놀라지 않고 변종 크라켄을 상대하는 중이었다.

남은 변종 크라켄은 세 마리.

스릉!

흑풍검을 치켜들고 매와 같이 비상했다.

* * * * *

변종 크라켄의 사냥소식이 곧 러시아 전역에 퍼졌다.

군인들의 호위를 받으며 검신 아르켄과 성녀 시리아는 곧장 수도로 향했다.

둘은 좋은 선전도구였다.

작금의 내전을 부드럽게 만들 수 있는 아주 좋은 카드 말이다.

대통령은 그 속내를 감추지 않고 대화를 진행했다.

“반갑습니다. 귀인이 오셨군요!”

세르게이 대통령.

현 러시아를 주무르고 무늬만 민주주의 국가로 만들어버린 주범 중 하나였다. 하지만 나는 그가 ‘꼭두각시’임을 안다.

‘진짜 거인은 그의 뒤에 있는 군부명가들이지.’

시리아의 가문을 비롯한 세 개의 가문.

데미도프, 부쉬코브, 블라디미르.

돌아가며 대통령을 선출한다 해도 과언이 아닌 이 세 가문이 러시아의 숨겨진 진짜 권력자다. 대통령은 그들의 의지를 표현할 뿐인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았다.

세르게이 대통령은 ‘블라디미르’ 가문이 선출한 대통령이었고, 선한 마스크와 달리 사냥을 좋아하는 잔인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도시에 출현한 괴물을 처치해주셨다고 들었습니다. 중간에 군인들과 마찰이 있었던 부분은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한국의 길드로부터 연락이 닿긴 했는데 전달이 안 된 모양이더군요.”

귀빈실에서 홍차를 대접받으며 나와 시리아는 가만히 그가 하는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거대한 궁전과 같은 곳. 창문 바깥으로 이타콰의 커다란 눈이 보였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군인들이 주변을 점거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용을 처음 접하는 인간은 위축되기 마련이었고 세르게이 대통령도 별반 다르진 않았다.

그가 침을 꿀꺽 삼키며 애써 웃어보였다.

“담당자는 확실하게 처벌했습니다. 하마터면 큰 충돌이 날 뻔하지 않았습니까?”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처벌. 처벌이라. 그런 단어를 가볍게 사용하는 걸 보면 확실히 선한 사람은 아니다.

‘세 가문의 눈이 이곳에 모여 있지.’

지금 내가 이곳에 있는 이유는 그가 나를 초대해서이기도 하지만, 정확히는 러시아의 숨은 권력자들을 파악하기 위함이었다.

데미도프, 부쉬코브, 블라디미르.

작금의 내전을 일으키고 데미도프 가문을 축출하려는 움직임이 벌어지는 와중이었다. 나는 지긋이 세르게이 대통령을 바라봤다.

‘내전 끝에 그가 죽고 새로운 대통령이 선출된다.’

내전을 종료시킬 가장 간단한 방법은 뭘까?

왕을 죽이는 것이다. 그리하여 새로운 왕을 세우는 것이었다.

과거의 나는 이 내전에 아예 관여하지 못했다. 하지만 들은 이야기는 있다.

데미도프 가문이 몰락하고 세르게이 대통령이 죽으며 사람들의 손으로 새로운 대통령을 선출했다는 이야기를.

물론 새로운 대통령 역시 남은 두 가문에서 선출한 것이지만, 나는 이 모든 게 ‘데미도프’ 가문을 축출하기 위한 움직임이라고 보았다.

‘시리아를 위해 러시아로 방문했지만 의미는 없었어.’

과거 나는 러시아를 딱 한 번 찾아온 적이 있었다.

시리아와의 결혼을 위해, 거기까지 생각하고 러시아를 찾아 왔다.

하지만 데미도프 가문의 웃어른들은 식물인간 상태였으며 새로이 선출된 대통령은 나를 이 넓은 나라에 묶어두려고만 했다.

데미도프 가문의 부활을 약속했으나 거하게 뒤통수를 맞은 것이다. 이놈의 홍차를 잘못 마셔서 그대로 기절하여 세뇌실에 갇혔다.

‘이제 그럴 일은 없겠지만······.’

“홍차가 입에 안 맞으십니까? 한 모금도 안 드시는군요.”

너 같으면 마시겠냐고 쏘아주고 싶었지만 참았다.

하여간 러시아를 온 김에 알고 싶었다. 현재의 시리아는 내 연인이 아니지만, 과거의 인연이라는 것도 있으니까.

더불어 러시아의 정세가 과거와 똑같이 흘러간다면 결국 멸망뿐이다. 남은 두 권력자가 권력을 나눠먹을 수는 있겠지만 앞으로 펼쳐질 세상이 그리 호락호락하진 않다.

그것을 깨닫게 해줘야 한다.

그러니 이곳에 온 것이다.

숨은 권력자들의 ‘눈’이 있는 이곳에.

내 한 마디, 몸짓 하나하나, 모든 게 그들의 귀로 흘러들어갈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허허. 과묵한 것도 좋습니다. 능력 있는 사람은 과묵해야하는 법이지요. 그래야 아랫사람들이 잘 따르니까요.”

“저희를 부른 목적이 뭐죠?”

보다 못한 시리아가 말했다.

그러자 세르게이 대통령이 작게 혀를 찼다.

“정확히는 ‘용기사 아르켄’만 초청했습니다만, 그가 저희의 골칫덩어리를 제거해준 데에 대한 감사의 표시를 하고 싶어서 이렇게 모셨습니다.”

“각성하지 않은 민간군인들 뿐이더군요.”

“초인시대가 열리고 저희 러시아는 조금 늦게 출범했습니다. 이제 막 초인부대를편성한 시점이니 운용단계로 접어들기 전까진 어쩔 수 없지요.”

운용단계로 접어들기 전까진 어쩔 수 없다?

그런 것치곤 주변에 있는 자들 모두가 각성자였다.

이곳 ‘궁’을 지키는 엘리트들. 모두 실력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게다가······.

‘섞였다.’

‘금단’에 손을 댄 듯싶었다.

아무래도 이 주변에 실험실 같은 곳이 있는 게 분명했다.

저 각성자들, 겉은 멀쩡해 보여도 풍기는 냄새는 인간의 것과 거리가 멀었다.

괴물의 근육이나 장기를 섞어 ‘키메라화’한 게 틀림없었다.

금단. 금기 중의 금기. 인상을 찌푸렸다.

“궁을 지킬 각성자들은 있고, 사람들을 지킬 각성자는 없다는 건가요?”

“시리아양. 암적 세력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제가 죽으면 러시아는 혼돈에 잠깁니다. 이 궁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러시아를 수호하는 것입니다.”

확신하는 듯한 목소리.

세르게이 대통령은 태평했다.

하지만 그도 결국은 사냥개일 뿐이다.

사냥개는 사냥을 끝마치면 잡아먹힌다. 토사구팽당할 거라는 걸 그는 전혀 모르고 있는 듯싶었다.

시리아가 고개를 저었다.

“저질이로군요. 당신의 발언에 동의할 수 없어요.”

“시리아양. 그대가 한국에서 성녀라고 불린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데미도프 가문의 이름은 왜 사칭한 겁니까?”

“사칭이······!”

“안 그래도 그 문제와 관련하여 데미도프 가문에서 신고가 들어왔습니다. 러시아에 다시는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해달라고 하더군요.”

“······.”

시리아가 말을 잃었다.

그럴 수밖에. 설마 ‘강제퇴국 조치’를 받으리라곤 생각도 못한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과민반응이 아닌가?

‘뭔가가 있는 모양이군.’

단순히 내가 본 기억이 전부는 아닌 모양이었다. 약해서 쫓겨난 것 외에도 시리아를 부정하려는 이유가 있는 것 같았다.

과거에도 그런 낌새가 있긴 했지만 러시아에서의 일이 있은 이후 알 방도가 없었는데, 이번에는 잘하면 진실에 접근할 수 있을 듯싶었다.

시리아의 얼굴이 하얗게 떴다. 설마 거기까지 부정당할 줄은 몰랐겠지.

세르게이 대통령이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봤다.

“아르켄님. 시리아양과는 별다른 사이가 아닌 걸로 알고 있습니다. 길드에서의 요청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같이 다니는 거라고요.”

관심 없는 척 하더니, 알 건 다 안다.

이미 모든 조사를 끝내놓은 듯싶었다. 내가 앞으로 벌어질 일에 관여하지 않으리라고 말이다.

곧이어 호위들이 시리아의 주변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시리아양. 얌전히 계시면 나쁜 일은 생기지 않을 겁니다. 저는 어디까지나 법을 준수해야하는 입장이기에······ 앞으로 다시 러시아 땅을 밟지는 못하겠지만, 몸 성히 돌아갈 수 있게는 해드리죠.”

시리아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파리한 안색엔 짙은 모멸감과 자조가 섞여있었다.

공식적으로 러시아를 올 수 없다면 그녀가 강해지려는 이유자체가 필요 없어진 것이었다. 강해져서, 보다 용감해져서 당당히 돌아오려고 했는데. 그 자체가 불가능해졌다는 말이었다.

“아버지를, 봬야겠어요.”

“설마 데미도프 가의 큰 어른을 말하는 건 아니겠지요? 망상이 너무 지나치군요.당신은 데미도프 가문의 사람이 아닙니다. 시리아라는 이름의 어떠한 기록도 남아있지 않은 걸요.”

“그럴 리가 없어요!”

“허, 이거 참······ 연행해!”

시리아가 품에서 작은 지팡이를 꺼냈다.

열 명 남짓의 호위들이 다가왔다. 괴물의 신체가 섞였기에 어지간한 각성자보다 강한 자들이었다. 전투인원이 아닌 시리아 혼자선 감당할 수 없다.

세르게이 대통령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건 우리의 일이다’라는 무언의 압박.

더불어 내가 길드의 입장에 따라 움직인다면, 허튼 수는 부리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하는 듯했다.

하기야 이미 나는 ‘바람의 노래’길드를 천명했다. 여기서의 내 움직임은 국제적으로도, 길드적으로도 강한 영향을 끼친다.

그녀 역시 이딴 나라는 버리는 게 맞다.

어차피 멸망할 곳이고, 어차피 죽을 놈이다. 자신을 버린 곳에 굳이 집착할 필요가 있겠는가.

시리아가 입술을 깨물었다.

호위들이 무기를 꺼내들고, 사방을 좁혀가며 시리아를 압박했다.

뻔한 결말이 예측되는 상황.

“재미없군.”

입을 열었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촤아악!

베었다. 무기를 든 놈들 모두. 손목을 잘랐다.

모두가 경악했다. 세르게이 대통령은 특히 더했다.

내 움직임이 모든 것에 영향을 끼친다고, 그러니 얌전히 있으라고 말하는데.

그래서 뭐 어쩌라고?

과거에서 돌아온 이후 나는 한 가지는 확실하게 버렸다.

영웅.

그 두 글자를.

< 32. 시리아 데미도프(3) > 끝

ⓒ 온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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