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 몬스터 콜(1) >
‘무엇보다.’
저들이 정말로 나를 따르기로 했다면, 그럴 마음이 있었다면 ‘지배자’가 발동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런 문구조차 떠오르지 않는 걸 보면 역시나 진정으로 나를 따를 마음은 없다는 뜻. 한 마디로 가식이고, 빈대를 붙겠다는 의미다.
또는, 누군가에게 첩자로 고용이 되었을 수도 있었다.
‘모든 가능성을 열어둔다.’
생각을 정리하고 다크나이트들을 바라봤다. 겉으로 보기에 그들은 정말 감탄이 나올 정도로 충직했다. 절도 있는 동작으로 자신들을 받아주라는 적극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으니.
“한 번 떠난 자들을 다시 받아 달라?”
“로드께서 이곳에 잠들어 계시는 동안, 저희는 외부를 전전하며 위험의 싹들을 잘라냈나이다. 로드의 이름에 먹칠을 했던 과거 동료의 목을 쳐내고, 성내의 물건들을 훔쳐 판 도둑을 철저하게 응징했습니다. 바로 이게 그 증거입니다.”
뎅구르르르.
리치의 머리 하나가 굴러왔다.
리치는 상위의 괴물이지만 다크나이트 수십을 감당할 순 없다. 얼마나 처참하게 당했는지 입가가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다.
또한 커다란 주머니도 내어왔다.
안에는 반짝이는 보석들이 잠들어 있었다.
“부디 저희의 검을 받아주시길 간곡히 청합니다. 저희는 로드를 위해 이 몸을 던질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말은 잘한다.
얼핏 들으면 헌신을 위해 성을 떠났다고 해도 믿겠다.
하지만, 아니라는 걸 안다.
이제 막 이름을 떨치기 시작한 나에게 빈대를 붙어서 이득을 보겠다는 것이다.
‘라이라······ 얼굴조차 보기 싫다는 거겠지.’
다크나이트들의 출현에 라이라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본래 그녀의 성격이었다면 저들을 몇 번은 도륙해도 이상할 게 없다.
하지만 내게 선택권을 넘겼다. 저들을 내가 다시 기용하겠다면, 힘들겠지만 인정하겠다는 의미였다. 물론 그 내면에는 다크나이트들을 꼴도 보기 싫다는 마음이 잠재되어 있기는 하겠지만.
나는 깍지를 꼈다.
그리고 오연히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좋다. 하지만 바로 받아들이진 않겠다. 너희의 충성심을 시험해보마.”
“아······! 물론입니다. 저희는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그거 잘 됐군.”
손가락을 뻗었다.
영지 외곽에 존재하는 숲.
그곳을 보며 말했다.
“슬라임을 산 채로 잡아오라.”
* * * * *
야차들은 신이 났다.
“들었어? 드디어 이 지긋지긋한 짓을 안 해도 된다는군.”
“휴! 난 꿈에서도 슬라임을 볼 지경이었는데.”
“이게 진짜 잡일이지. 우리가 잡부도 아니고 말이야.”
드디어 이 지긋지긋한 채집을 그만둘 수 있게 되었다.
하기야 슬라임 채집 외에도 꽤 많은 공을 올린 야차였다. 언제까지 잡부로 남을 수는 없는 노릇.
대신 야차들은 ‘던전의 관리’라는 제법 있어 보이는 직책을 맡게 됐다.
“구화랑 대주님. 이제 제1 수호자님이라고 불러야 하는 겁니까?”
“축하드립니다! 크흐흐, 살다보니 이런 날도 다 오는군요.”
“성 같은 큰 집도 지어준다면서요?”
야차들이 구화랑을 중심에 두고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제1 수호자!
이름만 들어도 있어 보이는 직책이다. 실제로 던전과 심연이 이어지는 10층을 관리하는 매우 중요한 이름이었다.
하지만 정작 구화랑은 쉽게 웃질 못했다.
“녀석들아. 지위만큼 책임도 덩달아 올라간 거 아니냐. 잘못하면 이제 목을 자르겠다는 뜻이잖아······.”
얼마 전 라이라 앞에서 기절한 오한성을 바라보며 욕을 내뱉은 바가 있었다. 후에사과하긴 했지만 계속해서 마음이 걸렸다.
설마 이런 식으로 복수하겠다는 뜻일까?
구화랑이 울상을 지었다.
그때, 다크나이트들이 다가왔다.
50기의 다크나이트는 전신에 검은 갑주를 착용한 상태여서 표정 따위를 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엄청난 아우라를 뿜어내고 주변을 압도했다.
하지만 야차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들이다.
자신을 대신해 슬라임을 채집해줄 은혜로운 자들이!
툭툭!
다크나이트의 어깨를 두드리며, 등에 지고 있던 거대한 바구니를 넘겼다.
“거, 고생 좀 하라구.”
“슬라임이 예민해서 잘못 잡으면 그대로 죽어. 내 새끼 다루듯 살살, 알았지?”
“우리처럼 열심히 하면 너희도 금방 중요한 자리에 기용될 거야. 진짜 죽도록 열심히 해야겠지만 말이야. 하하하!”
떠나는 김에 덕담도 한 마디씩 남겨주는 걸 잊지 않았다.
야차들은 다크나이트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애당초 그들은 두려움이란 단어를 잘모른다. 전사들. 지배자의 힘마저 통하지 않는 불굴의 전사가 바로 야차였으니.
쿵-!
빠직!
야차들이 자리를 벗어나자, 가장 앞에 선 나크나이트가 옆에 있는 커다란 나무를 주먹으로 때렸다. 그러자 나무가 크게 흔들리며 옆으로 쓰러졌다.
“보잘 것 없는 놈들이 입은 잘 터는군.”
“예프롬 대장님. 참으셔야 합니다. 이제 더 이상 용병이 아니지 않습니까?”
“이제 품위를 알고 명예를 아는 기사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오랜 시간 용병 일을 하느라 다소 편협해지고 거칠어진 면이 있었다.
주변의 다크나이트들이 그, 예프롬을 말렸다.
이내 손을 턴 예프롬 화를 참고 고개를 끄덕였다.
“안다. 그러니 더욱 모욕을 참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도 지금은 해야 할 일이 있으니······ 저놈들은 나중에 손을 봐주기로 하지.”
예프롬은 건네받은 망을 바라봤다.
망 안에는 이미 잡은 슬라임이 꾸물대며 바닥을 기는 중이었다.
천하의 다크나이트가 슬라임이나 잡고 있다니.
기가 찰 노릇이지만······.
“로드께서도 언제까지 이런 잡일이나 시키진 않을 것이다. 아마도 인내심을 시험하려는 거겠지.”
“맞습니다.”
“우리를 탐내던 모든 이들을 떨쳐내고 이곳으로 찾아오지 않았습니까? 로드께서도 저희의 마음을 알아줄 겁니다.”
그들은 머릿속으로 행복회로를 그렸다.
그러곤 이내 망을 들쳐 멘 뒤 숲 속에서 슬라임 잡기를 시작했다.
십일이 지났다.
하지만 그들을 찾는, 기다리던 소식은 없었다.
“참자. 참는 자에게 달콤한 보상이 내려지는 법.”
아직은 인내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슬라임을 잡는 것도 조금씩 익숙해져가고 있었다.
그리고 이십일.
“적어도 30일은 채워야 우리의 인내를 보였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지만 30일 째에도 감감무소식이었다.
그제야 예프롬을 비롯한 다크나이트들도 뭔가가 이상함을 느꼈다.
“······ 왜 우리를 찾지 않는 거지?”
“설마 까먹은 거 아닙니까?”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우리의 전력이면 능히 작은 도시 하나쯤은 쓸어버릴 수 있건만.”
그들은 나름의 자부심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
소규모 도시 하나를 단번에 쓸어버릴 수 있는 전력을 그저 슬라임만 잡도록 두는 건 크나큰 낭비다. 우리엘 디아블로가 그렇게까지 멍청하진 않으리라 보았다.
하지만 그들은 몰랐다.
설마가 다크나이트를 잡는다는 걸.
* * * * *
전령이 찾아왔다.
제로. 네 개의 파벌 중 하나를 다스리는 존재. 본래 멸제의 카르페디엠을 휘하에 두고 있던 그 막강한 존재가 내게 전령을 보낸 것이다.
나는 긴장했다. 그가 만약 나를 적으로 규정하고 몰아친다면 버텨낼 재간이 없었다. 설마 이렇게 빠른 시기에 전령을 보낼 줄이야.
하지만 전령이 내게 전한 내용은 완전 의외의 것이었다.
-우리엘 디아블로는 내 휘하에 들어오라.
최초의 데몬로드 살해자.
부하를 죽인 나를 반대로 영입할 생각을 한 것이다.
나는 작게 감탄했다.
나를 적대하여 쓸어버리는 것보다 영입하여 얻는 이득이 더 크다고 판단한 것이겠지만, 데몬로드란 존재는 매우 이기적이고 자존심이 강한 생물이다.
자신의 부하를 죽였다면 당연히 갚아줘야 한다. 자존심에 살고 자존심에 죽는 게 데몬로드라는 인식을 제로가 깨버린 셈이다.
‘하지만 그럴 순 없다.’
제로의 휘하에 들어간다는 건 나머지 세 파벌과 적대하겠다는 뜻이다. 물론 제로의 파벌이 가장 크니 그의 밑에 들어가도 당장 공격을 받진 않겠지만, 크게 보아야 한다.
일단 휘하로 들어가거든 내 능력과 내 모든 것에 대한 검증이 시작될 게 자명하다. 나로선 그다지 반갑지 않은 일이다.
‘드러나면 안 될 힘들이 너무 많다.’
내 능력은 당연하고 에기르, 요르문간드는 특히 숨겨야 한다. 아직은 그들이 등장할 때가 아니었다.
라이라도 최대한 모습을 감추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녀가 반신 발키리의 힘을 각성했다는 이야기가 퍼지는 걸 지연시키기 위해서다.
‘문제는 내가 반대했을 경우.’
제로가 가만히 있을까?
나는 그의 성격을 모른다. 경매장에서 잠시 본 바, 나로선 도저히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그러니 일단 판단을 보류했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가며 최대한 시간을 끌어봐야겠다.
지금은 외실을 다지기보단 내실을 다질 때였으므로.
“로드시여. 오랜만입니다.”
“크리퀴.”
암흑인 크리퀴. 내가 지배하여 상회의 이면에서 나를 돕도록 배치해둔 바가 있었다. 절대지배 상회가 만들어지고 한동안 모습이 뜸하더니, 갑작스럽게 찾아온 것이다.
은색의 투구 위에 두 개의 보석이 박혀있었다.
“남작으로 승진했군.”
“예. 덕분입니다.”
크리퀴가 웃었다.
준남작에서 남작이 되었다는 건 그 권한도 늘었다는 뜻이다. 크리퀴가 승급하여 암흑상회에서 힘을 거머쥘수록 나는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예상대로, 크리퀴가 이윽고 진중하게 말했다.
“찾아온 이유는 앞으로 있을 ‘침략’ 때문입니다.”
“직접 언질을 해야 할 만큼 중요한 일인가?”
“예.”
“말해보라.”
크리퀴는 장난을 치는 법이 없다.
경매에 대한 정보, 암흑상회를 만들고 투자를 받아내는 솜씨도 일품이었다.
기대하여 바라보자 크리퀴가 말했다.
“‘별들의 전쟁’에서 로드께서 멸제의 카르페디엠을 죽이자, 암흑상회에서도 큰 파장이 생겼습니다. 예상보다 빠르게 전쟁이 진행되어 상회 역시 다급해진 것이지요.”
이곳의 모든 건 유기적이다.
내가 하나를 하면, 그 여파가 둘이 아닌 십, 백이 되어 찾아온다.
그나저나 나로 인해 암흑상회가 움직이고 있다?
크리퀴가 이어서 말했다.
“저희 암흑인은 ‘별들의 전쟁’ 속도에 맞춰 균열을 넓히는 역할 또한 맡고 있습니다. ‘위대한 별’이 마지막 장소로 시기에 맞게 이동할 수 있게끔.”
들은 바가 있었다.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면 데몬로드들은 지구로 장소를 옮기고, 그곳에 위대한 별을 강림시켜 마지막 전투를 치른다.
“허나 그 속도를 맞추고자 무리하게 침략을 이어간 결과 ‘균열’을 크게 깨버리고 말았습니다. ‘균열석’ 중 하나가 하필이면 지구로 떨어진 겁니다.”
“······ 무슨 일이 생기는 거지?”
“심연과 지구가 동기화됩니다. ‘문’이 더욱 빠르게 열리고 ‘위대한 별’의 나머지를채워 넣을 지구의 ‘각성자’가 무던히 죽어나가겠지요.”
이맛살을 구겼다.
심연에서의 2분은 지구에서의 1분이다.
그 시간이 맞춰진다면, 모든 ‘문’들이 두 배 더 빠르게 열린다는 뜻일까?
허. 복병이었다.
전혀 상상도 못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게 전부는 아닐 듯한데.”
“맞습니다. 균열석은 힘 그 자체입니다. 균열석을 갖게 된 괴물, 혹은 무언가는 엄청난 괴물로 거듭나갈 것입니다. 허나······ 저희 암흑인은 아직 지구에 손을 댈 권한이 없습니다. 그 균열석을 로드께서 몰래 취하실 수만 있다면, 날개를 단 격이 될 것입니다.”
“이 정보를 누가 알지?”
“머지않아 정보가 있는 데몬로드들도 알아차리고 ‘암흑문’을 통해 괴물들을 보낼 가능성이 높습니다.”
타악!
의자를 내리쳤다.
제로의 의사를 어떻게 거절할 지도 고민인데, 또 다른 중요한 문제가 생겼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라면 암흑문을 통해 내보낼 수 있는 괴물에 제한이 있다는 것.’
5레벨. 균열석이 떨어진 지금이라면 그 제한이 조금 더 풀렸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한계가 있을 것이었다.
허나 나는 세계수의 문을 통해, 이그닐을 통해 더 강력한 것들을 옮길 수가 있었다.
단순한 비교우위에선 내가 앞서고 있는 것이다.
‘내가 해결해야한다.’
내심 혀를 차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균열석을 회수하고 문을 닫는 게 나의 역할인 듯싶었다.
* * * * *
쿠르르릉!
지면이 솟아났다.
검은색 ‘문’이 열리며 수많은 괴물들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뿐만이 아니다.
각종 보라색의 ‘문’들도 함께 열렸다. 정해진 시간에 열리는 문들이 어떤 이유에선지 하나, 둘 열려나고 있는 것이다.
세계 전역에서 비상이 걸렸다.
범접불가의 괴물은 없었으나 그 숫자가 여태껏 등장한 괴물들에 비해 말이 안 될 정도였다. 동시다발적으로 수천, 수만에 달하는 괴물들이 유입된 것이다.
“아아악!”
“사, 살려줘!!”
한국도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다른 점은 ‘아포칼립스’길드가 있다는 것.
“안심하십시오! 아포칼립스 길드입니다!”
“저희를 따라오세요!”
“괴물들과 멀어져야 합니다!”
아포칼립스 길드의 모든 인원이 동원되어 한국에 출현한 괴물들을 구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포칼립스를 지휘하는 김민식은 도저히 얼굴을 펼 수가 없었다.
‘미래가 바뀌었다.’
하물며 이런 미래는 본 적도 없다.
과거에도 경험하지 못한 일이었다.
왜 바뀐 거지? 어째서 문이 열리고 괴물들이 출현했단 말인가.
혹시 지혜의 나무를 심고 엘프들과 교류하기 시작한 게 원인일까?
‘아니.’
아니다. 그런 것치곤 너무 광범위하다.
당황했다. 이유를 모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손이 떨렸다. 식은땀이 나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범위를 벗어난 일이다.
모든 걸 조종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번 일은 논외였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세계적인 현상을 앞에 두고, 그는 어느 때보다 크게 긴장하고있었다.
< 31. 몬스터 콜(1) > 끝
ⓒ 온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