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 너와 나의 연결고리(6) > 끝< 30. 너와 나의 연결고리(完) >
“정말······ 로드이십니까?”
라이라가 굳은 입을 떼었다.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목소리로.
동시에 나는 깨달았다. 그녀는 꿈을 꾸지 않았다.
단지.
“저는 알 수 없는 삶입니다. 감히 상상조차 안 해본······ 제가 태어나고 자란 곳은바로 이 심연이었기에.”
그녀와 나는 ‘연결’되어 있었다.
내가 꾸는 꿈을, 라이라 역시 보고 느끼며 동화되었던 것이다.
에기르의 권능은 그런 것이었다. 원하는 것을 보여주고, 원하는 이와 연결시켜주며, 감춰진 진실을 드러내는 아주 무서운 힘.
그제야 나 역시 알 것 같았다. 이 느낌은 이그닐과 이타콰가 태어났을 직후와 비슷하다. 녀석들이 내 영혼과 깊게 ‘연결’되며 나는 녀석들을, 녀석들은 나를 비로소 받아들이게 되었다.
“두려운가?”
하여 나도 무겁게 입을 열었다.
미지는 공포다. 알 수 없는 것만큼 두려운 게 없다. 지금 라이라가 그렇다. 내가 본 지구에서의 삶. 내가 원하는 그런 삶은 그녀가 여태껏 단 한 번도 접하지 못해본 것이었다.
“그 삶은 분명히 인간들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로드께선 이곳 심연의 왕이십니다. 오롯이 존재하며 모든 존재를 좌시할 수 있는 그런 자가 바로 우리엘 디아블로입니다.”
라이라는 두려움에 대한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지금 오한성과 우리엘을 전혀 다르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다르다’고 할 수 있는 정도를 벗어났다.
동화율이 올라갈수록 나는 우리엘 그 자체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의 기억, 그의 감정, 그의 모든 것을 파악하고 알게 되었다.
동시에 오한성의 자아 또한 지켜가는 중이었다.
이를 그저 다르다고만 할 수 있을까?
“나는 나다. 마족으로서의, 데몬로드로서의 나와 인간으로서의 나는 다르지 않다.”
“하지만, 지금 본 것은 단순한 아바타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내가 거짓을 말하는 것 같은가?”
라이라의 손을 붙잡고 내 가슴에 대었다.
지금 그녀는 나와 연결되어 있다. 이그닐과 이타콰와 마찬가지로.
내가 하는 말의 진위, 감정을 모두 느낄 수 있을 터였다.
지금의 나는 진실만을 말하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 비친 나는 오한성이 되었다가, 우리엘 디아블로가 되기를 반복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내 안에 잠든 ‘가시’가 발동되었다.
‘본래는 그녀의 것이었지.’
태을무극심법으로 인해 새로이 자라난 가시가 내 가슴을 비집고 튀어나왔다. 이윽고 그 가시가 다시 원래의 주인인 라이라에게 돌아갔다.
본래는 죽음뿐이 몰랐던 가시다. 하지만 지금은 꽃을 피우고 희망 그 자체가 되었다.
라이라의 몸에 흡수된 가시는 그 순간 ‘빛’을 일으켰다.
빛.
광명이라고 해야 할까.
“가시가······!”
그녀가 눈을 크게 떴다.
견고한 벽도 작은 구멍 하나로 무너지는 법이다.
그녀의 가시는 ‘죽음’이라는 절대명제 하나만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돌연변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전혀 다른 종류의 가시가 들어서자, 변화를일으키기 시작했다.
이그닐의 가호와 나의 힘, 더불어 내가 포식했던 것들의 모든 성분이 가시에도 함유되어 있었다. 내 생명 그 자체에 뿌리박힌 가시였던 탓이다.
쩌적. 쩌어억!
라이라의 날개가, 균열을 일으켰다.
용마족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두 개의 날개가 균열을 일으키며 갈라지더니, 그 사이에서 순백의 깃털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기적과 같은 광경이었다. 나도 내 눈을 믿을 수 없었다.
‘라이라에게 감춰졌던 힘!’
하지만 그 정체를 알게 된 순간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라이라는 단순한 마족이 아니다.
아홉 번째 발키리, 엘레나의 피를 이은 고귀한 존재였다.
그 피가 드디어 발현 된 것이다.
과거에도 나타난 적 없었던 피가, 나의 가시로 인해 반응하고 깨어나고 있었다.
‘발키리······.’
이윽고 나타난 한 쌍의 날개는 눈이 부실만큼 아름다웠다.
전보다 더욱 커진 날개가 양쪽으로 솟구쳤다.
진정으로 신성한 게 있다면 바로 그녀일 것이다.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천족이 지금 내 눈앞에 있었다.
[‘라이라 디아블로’의 피에 잠재되어있던 반신 발키리의 힘이 각성합니다.]
[제한된 힘이 풀리고 아홉 번째 발키리의 권능이었던 ‘믿음’이 부여됩니다.]
[믿음의 권능은, 연결된 대상과의 신뢰에 따라 더욱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권능입니다.]
[본연의 힘이 각성하며 모든 스킬에 변화가 생깁니다.]
격변이었다.
라이라는 껍질을 벗고 나비가 되었다.
침을 꿀꺽, 삼켰다.
이어 심안을 열자 더욱 상세한 정보가 내 눈앞에 펼쳐졌다.
[정보가 갱신됩니다.]
이름: 라이라 디아블로(value-630,000)
직업: 가시의 여왕
칭호:
● 발키리어(10Lv, 마력+20)
● 학살자(8Lv, 힘+10)
● 전장의 지배자(7Lv, 모든 능력치+4)
능력치
힘 110(96+14) 민첩 95(91+4) 체력 95(91+4)지능 94(90+4) 마력 114(90+24)잠재력 (458+50/510)스킬: 믿음(無), 천상의 날개(10Lv), 광명의 깃털(9Lv), 정절(8Lv), 싸우는 처녀(8Lv)
[전후비교]
힘 104 민첩 87 체력 88 지능 90 마력 105 잠재력(431+43/495)힘 110 민첩 95 체력 95 지능 94 마력 114 잠재력(458+50/510)한계돌파.
잠재력 한계치의 최대치인 500을 넘어서는 걸 우리는 ‘한계돌파’라고 말했다. 하지만 인류역사상 그런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고, 이곳 심연에서도 데몬로드 외엔 있을 수 없었던 일이었다.
뿐만 인가.
모든 능력치가 고르게 상승했다. 보조능력치까지 합치면 단순 능력치의 총합도 500을 넘어서버린 것이다.
스킬 역시 변화하고, 더욱 강력해졌다.
단순히 나비가 된 줄 알았으나, 이제 보니 나비도 아니었다.
‘천공의 지배자.’
그 자체가 되어버린 것이다.
“아!”
그녀가 탄성을 내질렀다.
갑작스러운 변화. 하지만 그 힘이 본래 자신의 것이었다는 걸 깨달은 듯했다.
하지만 그 변화는 나에게서 시작됐다. 내가 건넨 ‘가시’가 변화의 촉매가 되었다는 것 또한 라이라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 어지러웠다.
“이게 대체······!”
“너의 모친, 엘레나의 선물이다.”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지금이야말로 감춰두었던 ‘진실’을 말해야할 때임을.
우리엘 디아블로는 끝까지 감췄다. 결코 라이라가 그녀의 모친인 엘레나에 대해 알기를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않을 것이다.
지금 말하지 않으면, 다시 이런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
“엘레나······ 라니요?”
“듣고 싶느냐?”
무거운 분위기. 하지만 라이라는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 예.”
나는 천천히, 우리엘이 나에게 보여줬던 기억들을 끄집어내었다.
“그녀는 심연에 붙잡힌 발키리였다. 내가 그녀를 보았을 때, 이미 그녀는 임신을 한 상태였지.”
본래 우리엘은 엘레나의 수발을 맡았다. 그런 그를 엘레나는 믿어주었고, 자신의 아이였던 라이라를 우리엘에게 맡긴 뒤 숨을 거뒀다.
그 뒤로 우리엘은 도망쳤다. 태양왕이 발키리의 자식인 라이라를 원했으므로. 오로지 라이라를 지키기 위함이었다.
이후 자신과 피가 이어지지 않았음에도 진짜 자식처럼 키웠다.
그가 100년간 잠든 채로 수많은 미래를 보고, 나를 선택한 것 역시 ‘라이라’를 지키기 위해서다. 그 맹목적인 헌신에 나는 혀를 내둘렀다.
하지만 라이라는 모른다. 어쩌면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을 지도 모르지만, 진실에는 근접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
내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라이라의 표정은 시시각각 변해갔다.
이 세상에서 오직 우리엘만 알았던 이야기.
그저 오한성이었다면 몰랐을 그런 이야기들.
그녀는 내가 말하는 모든 것들이 거짓이 아님을 안다. 적어도 이곳에서 우리는 누구보다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으니!
“그녀는 너를 지키길 원했다. 나 역시 그럴 생각이다.”
진실을 들은 라이라의 표정은 침체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침착했다. 이윽고 라이라가 내게 눈을 돌렸다.
“저는 그저 지켜지고 싶지 않습니다.”
새로이 각성한 라이라는 발키리어가 되었다.
싸우는 처녀. 그녀는 결코 약하지 않았다.
침체된 표정마저 이내 벗어던진 라이라가 나를 똑바로 주시했다.
“이게 진정한 저라면, 방금 제가 보았던 로드의 꿈 역시 진정한 모습이겠지요. ······ 그렇게 믿도록 하겠습니다.”
[‘믿음’이 발현되었습니다.]
[그녀의 강한 ‘믿음’은 힘 그 자체입니다. 선성향이 영구적으로 5상승하고, 마력의 안정화가 시작됩니다.]
[‘멸제’의 마력 9.8%를 녹여내는데 성공했습니다.]
[순수마력이 3 상승합니다.]
[가장 낮은 순수능력치(지능)가 3상승합니다.]
그녀의 믿음은 곧 힘으로 발현되었다.
가장 낮은 것을 끌어올리고, 내 존재 자체를 확립하는 힘.
그것이 발키리어의 권능인 ‘믿음’이었다.
‘우리엘이 아닌 내 능력치가 올랐다는 건······ 이 몸 역시 우리엘과 다르지 않다고 조금은 인정해준 것인가?’
변화와 믿음. 그 사이에서 그녀가 나를 인정했고, 인정한 순간 우리는 진정한 유대를 이뤄 ‘연결’될 수 있었다.
그렇게 연회는 종료되었다.
* * * * *
에기르, 요르문간드, 그리고 각성한 라이라.
이 셋은 내 비장의 무기가 되었다. 어려운 상황을 단번에 뒤집을 일발역전의 카드.
변화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멸제의 카르페디엠이 죽었다는 소문이 심연 전역에 퍼져나갔고, 우리엘 디아블로의 이름도 모두에게 각인되었다.
그러자 내 영지를 찾는 괴수들이 하루가 다르게 많아졌다.
“우리엘 디아블로시여! 저희 부족을 받아주시옵소서.”
“진정한 왕을 따르고 싶습니다.”
“별의 인도자시여!”
나는 우리엘의 몸으로 그들을 맞이했다.
부족을 이끌고 온 붉은 오크의 로드, 서리산의 자이언트 트롤, 그리고 흑마법사 등이 합류하기 시작했다.
나는 심안을 열고 까다롭게 심사하여 그들을 골라냈다.
하루가 다르게 영지의 군세는 불어갔고, 보름 정도가 지났을 때 한 검은 기사의 무리가 영지를 찾아왔다.
“아아, 깨어나셨군요!!”
50기의 다크 나이트였다. 데스나이트보단 급이 한 단계 낮지만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괴수. 게다가 데스나이트와 다르게 다크 나이트는 성장이 가능했다.
그리고 지금 나를 찾아온 다크나이트들은 어지간한 데스나이트 급으로 성장을 끝마친 상태였다. 감히 누구라도 탐을 낼만 한 재목인 것이다.
하지만······.
‘배신자들.’
나는 안다.
라이라의 기억을 통해, 우리엘의 기억을 통해 이들을 보았다.
우리엘에게 영원한 충성을 맹세했으나 그들은 영지를 떠났다. 깨어나지 않는 왕을 수호할 순 없다는 이유였다.
그리고 아마도, 왕을 배신한 이들을 받아줄 곳은 여태껏 없었을 것이다. 용병으로서 전전하다가 승리의 소식을 듣고 찾아온 것이겠지.
승냥이들과 다를 게 없다.
“로드시여. 기다리고 또 기다렸습니다. 오로지 이날만을! 저희를 사용해 주십시오. 가장 앞에서 적들을 베겠습니다.”
다크나이트들이 무릎을 꿇었다.
기가 찼다.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하지만 그저 돌려보내기에 아쉽긴 하였다.
‘교육을 시켜야겠군.’
하지만 말 안 듣는 개도 강도 높은 철저한 교육을 통해 새로 태어날 수 있었다.
정 안 되면 던전으로 보내 경험치로 만들면 그만이었고.
나는 스산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 30. 너와 나의 연결고리(完)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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