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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신사냥꾼-121화 (122/251)

< 30. 너와 나의 연결고리(1) > 끝< 30. 너와 나의 연결고리(2) >

나는 우리엘 디아블로에게 다가갔다.

그 강렬한 존재 앞에서 나는 한없이 작아졌다.

제 3자의 눈으로 바라본 우리엘은 그야말로 악의 화신 다웠다.

검은색 피부와 우람한 몸, 뿔과 날개를 지닌 마족 그 자체였다.

나는 천천히 손을 뻗어, 우리엘과의 접촉을 시도했다.

[동화율이 크게 올랐습니다. 83% -> 88%]

[잠재력 한계치가 증가합니다.]

그저 피부와 피부를 접한 것뿐임에도 동화율이 올라갔다.

또 다른 나와의 경계가 허물어지기 시작했다는 방증이었다.

나는 심호흡과 함께 천천히 흑풍검을 꺼내들었다.

쩌엉-!

우리엘 디아블로의 피부는 단단했다. 어지간한 검으로는 흠집도 안 난다. 심지어 흑풍검조차도 튕겨질 수준이었다.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자연스럽게 피부가 강화된 것일 터였다. 평소에도 저처럼 단단하지는 않았으므로.

쩌적!

암령의 힘까지 동원하여 우리엘의 종아리 쪽을 베었다.

그러자 소량의 피가 떨어졌고 그것을 바라보는 나는 묘한 갈증을 느꼈다.

손가락으로 훑어 혓바닥에 대자, 순간 현기증이 일었다.

‘으음······!’

강렬하다. 맛에 대한 품평이 아니다.

라이라의 피를 머금었을 때보다 10배는 더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몸이, 본능이, 반발하며 거부반응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초월적인 인자를 획득했습니다.]

[왕의 인자입니다. 기존 용마족의 인자와 일부분 중첩됩니다. 인자의 정보가 크게 확대되며 부가적인 효과를 추가로 획득합니다.]

[만약 용마족으로 ‘변형’할 경우, 변형할 때마다 악 성향이 5씩 증가합니다. 이는 변형이 풀려도 적용되는 사항입니다. 또한 모든 ‘빛’과 관련 된 스킬이 사용불가능하게 됩니다. 반대로 ‘어둠’성향의 스킬의 경우 효과가 크게 증가합니다.]

[신체가 격변적으로 변형됩니다. 주의하십시오. 잘못 된 변형은 인간으로서의 자아와 모습을 잃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동화율이 크게 올랐습니다. 88% -> 93%]

[잠재력 한계치가 크게 상승했습니다.]

[특수한 피의 섭취로 마력이 증가합니다.]

어지러울 정도의 문장들이었다.

하지만 내가 유심히 바라보는 건 재차 거듭 된 주의하라는 문장이었다.

자아와 모습을 잃는다. 말하자면 괴물 그 자체가 될 수도 있다는 것.

라이라를 구하려거든, 인간의 모습을 버릴 각오를 하라고 말해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분명한 건 변형했을 때 멸제의 마력을 더욱 확실하게 흡수할 수 있을 거라는 점이었다. 라이라와 우리엘의 인자라면 충분히 견뎌내리라.

이윽고 나는 결단을 내렸다.

‘변형.’

감수한다.

그 정도의 가치가 있는 일이니까.

그리고 나 자신을 믿었다.

고작 그 정도에 지지 않을 것이라고. 질 생각이 없다고 내리 다짐을 했다.

그러자.

쩌어어어억!

뼈가, 근육이, 비명을 치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 *

힘들었다.

지난 100년.

숱하게 전쟁을 치루고 괴롭혔던 멸제의 카르페디엠에게 큰 타격을 주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멸제의 마력을 주입받고 전신이 차게 식어가는 걸 느꼈다.

‘지치면 쉬어도 돼. 너는 할 만큼 했잖아?’

누군가가 말을 거는 것 같았다.

이제 그만해도 좋다고. 강렬한 유혹에 라이라는 점점 마음을 빼앗겼다.

홀로 싸운 100년은 참으로 길었다. 정신을 몇 겹으로 무장해도 버티기 힘든 시간이었다. 몇 번이나 무너질 뻔했으며 그럴 때마다 애써 자신을 다독여보았지만 그뿐이었다.

우리엘 디아블로는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누군가는 말했다.

-디아블로의 권능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영원한 잠에 빠진 게 아닌가?

애써 부정했다.

1년, 2년, 마침내 10년.

모든 데몬로드가 깨어났으나 정작 우리엘 디아블로는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 그를 지키기 위해, 라이라는 자신의 모든 것들을 버렸다.

다시 20년. 큰 전쟁을 몇 번이나 치루며 모아두었던 모든 재산이 탕진되었다. 우리엘과 라이라를 따르던, 그 철혈의 기사들도 영지를 떠났다.

-우리는 깨어나지 않는 자를 위해 싸우기 싫소.

영원한 맹세를 약속했던 그들조차 결국 떠나갔다.

깨어나지 않는 주군, 그리고 멸제의 카르페디엠으로부터의 위협.

하루하루 줄어가는 전사들. 모든 걸 고려해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여 발길을 돌린 것이다. 개죽음 당하긴 싫다는 거겠지.

이해한다. 이해하려 했다.

그리하여 30년 째.

모두가 떠났다. 오로지 라이라와 500기의 창기병만을 남기고서.

하지만 라이라는 모든 전장에서 승리를 거듭했다. 그녀의 이름이 심연에 떨쳐지기 시작했고, 그러자 접근하는 자들이 많아졌다.

-내 첩이 되어라. 영지를 포기한다면 카르페디엠으로부터 보호해주지.

-영지를 포기하고 내 밑으로 들어오지 않겠나?

거대도시의 지배자, 군단을 이끄는 군단장들.

그들은 라이라 디아블로를 원했다.

다만, 한 가지 조건이 붙어있었다.

반드시 영지를 포기할 것.

라이라는 거절했다. 눈이 휘둥그레지는 조건과 유혹이 있었지만 그 모든 걸 이겨냈다. 영주대리인인 자신이 영지를 포기하면, 누가 우리엘 디아블로를 지킨단 말인가.

모든 제안을 단칼에 거절하자 다시금 거센 공격이 시작됐다.

그들은 라이라를 지켜주지 않았고, 카르페디엠과 맞서 싸울 용기도 없었다.

만약. 만에 하나.

그들이 우리엘을 지켜준다고 확언했다면 라이라는 넘어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 명도 없었지.’

모두가 겁쟁이였다.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약한 전형적인 기회주의자들.

그런 자들에게 자신을 팔수는 없었다.

그렇게 50년.

온갖 더러운 술수와 계략에 라이라는 면역이 됐다. 자신의 감정을 완전하게 감추는 법을 알았고, 기대하지 않으면 후회도 없다는 그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

‘어쩌면 그분은 깨어나시지 않을 지도 모른다.’

라이라의 가시는 오로지 독만을 품게 되었다.

아름다운 장미는 시들었으며, 가시만 남은 그것은 오로지 죽음만을 갈구했다.

가시의 여왕. 전장의 표범.

몇 번이나 배신당했고 믿을 건 오로지 그녀 자신밖에 없었다.

‘아무도 믿지 말자.’

마음의 문을 닫았다.

그러는 와중에도 라이라의 마음은 점차 고립된 채 죽어가고 있었다.

손에 묻은 피의 냄새가 지워지지 않았다.

언제 무너져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

그리고 100년.

‘아······.’

그분이 깨어나셨다.

결코 깨어나지 않을 것 같았던 그분이.

하지만, 라이라는 당황했다.

기쁘다. 분명히 기쁘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가 마주한 세상은 100년 만일 텐데. 100년 전의 자신의 모습이 그녀는 떠오르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그대로인 것처럼 보일까. 어색하진 않을까.

그래서 가면을 써보았다.

지쳐가는 마음은 그대로인 상태로.

조금씩 시간이 지나자 과거의 마음이 되살아나고는 있었지만, 역시나 아직도 100년 전의 자신이 떠오르지 않는다.

어쩌면 그때의 마음조차 변질되었을지도.

‘두려워.’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서로를 대하자고 했다.

하지만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어떤 모습이지?

라이라는 가면을 벗기가 두려웠다. 이미 그녀는 100년 전의 그 철없던 마족이 아니었다. 다 성장했으며 너무 많은 ‘악’들을 접해 그녀 역시도 그와 비슷하게 변해버린 것이다.

무섭다. 혹여나 그가 다시 멀어질까봐.

자신의 본래 모습을 보고 필요 없다고 말할까봐.

그래서 욕심을 부렸다.

‘내가 필요하게끔 느끼도록. 그러려면 멸제의 카르페디엠을······.’

죽여야 한다.

죽이지 못하더라도 싸움자체가 쉬워지게끔 만들어야 한다.

그것만으로도 자신의 존재가치를 입증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진짜 자신을 내보이지 않더라도, 애써 강한척하고 있지만······ 결국 그녀는 너무나도 두려웠던 것이다.

분명히 기뻤지만, 기뻐서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반대로 있는 그대로를 보이자는 그 말이 결정적인 족쇄가 되었던 것이었다.

-멍청한 녀석!

누군가 호통을 쳤다.

감히 가시의 여왕에게 호통을 치다니. 죽고 싶은 걸까?

예전이었다면 단칼에 목을 베어버렸을 것이다. 가시의 고통에 허우적거리도록 만들었을 터였다.

그런데······ 화가 나지 않는다.

오히려 따듯하다. 이러한 따스함은 오랜만이었다.

차가워지던 몸의 내부에서부터 조금씩 열기가 차올랐다.

라이라 디아블로.

누군가가 그녀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아둔함에도 정도가 있지. 나는 그런 것을 바라지 않았다. 너의 존재 자체가 내겐기쁨이었음에!

누굴까?

익숙하지 않은 목소리였다.

하지만 매우 익숙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라이라의 ‘문’ 앞에 서있었다.

쾅! 쾅!

문이 떨어져나갈 기세로 그가 주먹을 쥔 채 문을 두드렸다.

-언제까지 그 좁은 곳에 갇혀있을 셈이냐? 나오지 않는다면 나는 실망할 것이다.결국 라이라 디아블로, 너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욱 겁쟁이였노라고.

가시의 여왕을 겁쟁이라고 욕한다.

심연의 누가 들어도 크게 웃을 일이었다.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헤아릴 수 없는 괴물들을 도륙한 그녀를 겁쟁이라니.

-바래져도 빛을 잃지 않았지. 결코 가면을 써도 가려지지 않는 고귀함이었다. 그런 자신을 부정하지 마라. 정 너 자신을 못 믿겠다면······ 너를 믿는 나를 믿어라.

빛?

그런 게 있을 리 없다.

이곳 심연은 오로지 어둠뿐이다.

그녀는 심연 외의 세상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

약하면 죽고, 느슨해도 죽고, 착해도 죽는 것이 심연이었다.

약육강식. 오로지 강자만이 정의인 이 심연에서 빛이란 게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그녀는 믿지 못했다. 그런데······ 그녀를 믿는 그를 믿으라 한다. 정말 말도 안 되는 말이지만 묘하게 설득력이 느껴지는 건 또 왜인지.

끼이이익!

문이 열렸다.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강제로 문을 열고 온 그가, 손을 내밀었다.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굉장히 믿음직한 손이었다.

따듯하고, 그의 뒤로 후광이 비치는 것만 같았다.

혹시 저게 그가 말하는 ‘빛’이라는 걸까.

-가자. 네가 있을 곳은 이런 비좁은 장소가 아니니.

억지로 그가 자신을 이끌었다.

멈춰있는 자신을 채찍질하며 끌고나갔다.

강제적이고 배려 따위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이번에야말로 진정한 자신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이 사람이라면 그녀가 어디에 있던 찾아주지 않을까싶은 기대감이 생겼다.

그런 일말의 기대감을 품은 채, 그녀가 문 바깥으로 발길을 옮겼다.

* * * * *

몸이 가벼웠다.

마치 다시 태어난 그런 기분이었다.

라이라 디아블로가 눈을 떴다.

세계수의 잎 위에 눕혀져 활력이 돋아났다.

‘전쟁에서 이긴 건가?’

하기야 패배했다면 눈을 뜨지도 못했을 것이다.

멸제의 카르페디엠은 무척 다혈질적이고 성격이 고약하다. 자신을 살려둘 리 만무했다.

그렇다면 이겼다는 뜻이겠지.

다행이다.

입가에 미소를 머금으려는 찰나, 그녀는 다시금 표정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가 옆에 있다.

이질적인 기운. 하물며······.

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와 눈이 마주쳤다.

“너는······?”

천하의 라이라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보는 종류의 괴물이 있었다.

몇 개의 크기가 다른, 날개인지 손인지 모를 것이 몇 군데나 나 있었고 얼굴의 절반은 화상에 입은 것처럼 울긋불긋했다.

하지만 남은 얼굴의 반은 하얀 새의 깃털이 마구 솟아있었다.

그야말로 기괴하기 짝이 없는 괴물이다.

괴물은 무척이나 피곤해 보였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만은 따듯했다.

라이라가 급히 가시를 꺼내려는 찰나.

“드디어 일어났구나.”

괴물이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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