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신사냥꾼-120화 (121/251)

< 29. 멸제의 카르페디엠(完) > 끝< 30. 너와 나의 연결고리(1) >

우리의 계획은 간단했다.

뒤섞인 공포가 산 위를 정리하거든, 라이라가 빠르게 내부를 소탕하고 멸제의 카르페디엠을 뒤섞인 공포에게 유인하는 것이었다.

뒤섞인 공포는 멸제의 마력마저 흡수할 수 있으리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녀는 나보다 더욱 오랜 시간 카르페디엠과 전쟁을 해왔다.

단순한 기동성이나 상황의 유연한 대처는 나보다 나을 거라고 계산했다.

내가 직접 모습을 보인다면 놈은 도망을 치거나, 혹은 극도의 경계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내가 도착했을 땐 이미 공간결계가 생성된 후였다.

‘일이 틀어졌다.’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그리고 라이라가 직접 이러한 선택을 내렸다는 것 역시 알게 되었다.

‘제기랄!’

마음이 다급해졌다.

결계를 깨보고자 몇 번이나 내리쳤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권능이란 적어도 동급의 존재에겐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법이었다. 멸제의 카르페디엠. 놈과 나의 ‘격’의 차이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

물론 라이라 디아블로의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멸제의 카르페디엠. 놈과 나의 상성은 그다지 좋은 편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놈은 ‘공간결계’안에서 멸제가 되고 어느 정도의 불멸성을 얻는다. 무한한 마력과 절대적인 힘 앞에 ‘검은 별’이 통할지 통하지 않을지는 미지수였다.

‘설령 그렇다고 할지라도!’

결계 안에서 검은 별의 효력이 반감된다 할지라도, 라이라의 선택을 칭찬할 순 없었다.

라이라는 그 결계를 봉인하고, 스스로 결계 안으로 들어감으로써 나의 확고한 승리를 다지고자 한 것이겠지만······.

아마도 놈의 무한한 마력을 탐해, 처음부터 검은 태양을 발동시키려고 했겠지.

검은 태양은 적군과 아군을 가리지 않고 혹여나 내게 피해를 끼칠 수도 있다는 복잡한 생각 역시 가지고 있었을 것이었다.

‘네가 죽으면 무슨 소용이란 말이냐.’

안에서 일어나는 과정과 결과에 나는 개입할 수 없다.

이런 게 싫었다. 회귀한 직후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모든 영향력을 끼치겠다고 다짐했다. 그런데 나의 바로 앞에서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스아아아아아악!

카르페디엠의 육체가 소멸한다.

검은 먼지가 되어간다.

이것이 데몬로드의 죽음이다. 무엇 하나 남기지 못하는 철저한 파멸.

하지만 본래는 바람에 흩날려 사라져야할 검은 먼지가, 나를 향해 흘러오며 흡수되고 있었다.

[멸제의 카르페디엠을 소멸시켰습니다!]

[동화율이 83%까지 상승합니다.]

[최초로 데몬로드를 소멸시키는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72개의 별 중 하나가 떨어지며, 심연의 모든 존재들이 그 죽음을 알아차릴 것입니다.]

[‘우리엘 디아블로’의 위명이 심연 전역에 퍼져나가며 수많은 주인 없는 자들이 우리엘 디아블로에게 귀속되길 바랄 것입니다.]

[‘멸제의 카르페디엠’의 힘이 흡수되기 시작합니다.]

[한계돌파! 모든 순수능력치가 5씩 증가하고 잠재력이 그에 맞춰집니다(500->525).]

[최초로 데몬로드를 살해한 존재에게 암흑상회가 선물을 건넵니다. 1,000,000pt가 추가되었습니다.]

[‘지배자’의 권능이 크게 발현됩니다. ‘멸제의 카르페디엠’이 소유하던 모든 것들을 지배하기 시작합니다. 그가 보유한 포인트(167,778) 역시 귀속됩니다.]

[‘위대한 별로 가는 길’ 칭호가 추가되었습니다.]

장문의 글자들.

멸제의 카르페디엠을 죽임으로서 나는 더욱 강해졌다. 하물며 녀석이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약탈했다.

지금 이 시간부로 ‘우리엘 디아블로’의 이름이 땅에 퍼져나가기 시작할 것이다. 심연에 떠오른 72개의 별 중 하나가 지고, ‘위대한 별’로 한발자국 더 가까이 가는 계기가 되겠지.

하지만 그런 것들도 지금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천천히 라이라의 신체를 양 손으로 들어올렸다.

‘무모했다.’

무모했다.

만약 결계 안에서 라이라를 잃었다면 나는 크게 후회했을 것이다.

그리고 라이라의 그러한 선택은 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없기 때문이었다. 카르페디엠과의 결전에서 100% 승리할 거라는 확신이.

애당초 내 권능들은 ‘보는 것’에 특화되어 있었다. 직접적인 전투와는 크게 연관이 없었다. 그녀는 100년간 홀로 전투를 치러왔으니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쉽고 화가 난다.

결과적으로 승리를 일궈냈다고는 하나 결국 라이라는 중태에 빠졌다.

이 상황에 놓인 나와 라이라 모두에게 화가 났다고 하는 게 정확할 것이다.

‘일어나거든······ 크게 혼쭐을 내주마.’

즉시 발걸음을 옮겼다.

라이라의 치료를 위해.

구화랑과 야차들에게 카르페디엠의 모든 것을 영지로 가져오라 지시한 후 나는 부단히 발을 움직였다.

‘모든 물약이 듣지 않는다.’

그러나 인상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멸제의 마력을 너무 많이 받아들인 탓일까?

라이라의 상태는 점점 나빠졌다.

세계수의 잎, 유니콘의 뿔을 갈아 넣은 물약, 심지어 신들의 음료라는 엘릭서마저 동원해봤지만 상황이 호전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엄마아!”

이그닐이 고사리 같은 손으로 라이라의 손을 맞잡았다.

이미 이그닐은 나에게 ‘유일 축복’을 내렸다. 오로지 한 사람에게만 가능한 현안의 축복을, 다시 라이라에게 내리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그닐의 입맞춤이 라이라의 죽음을 조금 더 지연시키는 효과 정도는 가져왔다.

“이그닐이. 잘못, 했어요.”

이그닐은 그간 라이라를 멀리했던 걸 후회하고 있었다. 여기서 라이라가 죽어버리면 다시 화해할 기회도 사라진다. 그러길 나도, 이그닐도, 심지어 라이라도 바라지 않을 것이다.

“히끅! 죽으면, 시러요.”

누가 그랬던가?

용은 결코 눈물을 보이지 않는다고.

하지만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이 작은 용은 울고 있었다.

비록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기는 했지만, 라이라의 죽음을 앞에 두고 초연해지지 못한 채 흔들리고 있었다.

이그닐의 감정을 나 역시 느끼는 중이었다.

처음 느껴보는 강렬한 슬픔과 혼란.

내가 ‘가시’에 찔렸을 때와 비교해도 부족함이 없을 수준이었다.

‘지금으로선 라이라를 치료시킬 수 없다.’

나는 인정했다.

지금 이 몸으로는 어찌할 수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데몬로드. 악의 종주가 누군가를 살린다는 건 상상조차 어렵다.

그래서······ 나는 특단의 결정을 내렸다.

나는 한 번 라이라의 ‘가시’를 씻어낸 적이 있었다. 죽음이라는 절대명제에서 벗어나 도리어 좋은 효과가 생기게끔 만들어냈다.

태을무극심법. 그중 ‘물’의 속성으로 이뤄낸 결과다.

그렇다면 멸제의 마력 역시 씻어내는 게 가능하지 않을까?

고개를 끄덕이며 결심했다.

‘심연으로 들어와야겠군.’

우리엘 디아블로가 아닌 오한성으로서 심연에 발을 내딛어야겠다고!

* * * * *

던전을 오른다.

4층을 넘어 5층으로, 5층을 넘어 6층으로······ 그렇게 10층까지.

나는 모든 길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여태껏 단 한 번도 10층까지 발길을 들인 적은 없었다.

그날. 라이라의 가시에 찔린 이후, 감히 엄두도 내지 못했다.

하지만 그런 걸 따질 여유가 지금은 없었다.

그저 달렸다.

달리고 또 달려서, 마침내 10층의 ‘문’ 앞까지 도달했다.

‘진정한 심연으로 가는 길.’

이 ‘문’을 넘어가면 그곳엔 진짜 심연이 있다.

우리엘이, 라이라가, 구화랑이, 이그닐이······ 모두 저곳에 있다.

적어도 5년에서 10년은 있어야 도달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장소.

나는 심호흡과 함께 발을 디뎠다.

[‘심연(10lv~???)’에 입장했습니다.]

[주의! 이곳은 발을 들이면 빠져나갈 수 없는 무저갱입니다.]

[빠져나가길 권합니다.]

[‘심연’의 여파로 모든 능력치가 30% 하락합니다.]

심연 역시 마찬가지다. 심연의 괴물들이 지구에 직접 도달하면 일정량의 능력치가 줄어들었다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회복되는 경우도 있었다.

아마도 서로가 서로 ‘다른 세계’에 존재하기 때문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한 것이리라.

어깨가 무거워지고, 숨 쉬는 것조차 버겁다.

눈앞에 떠오른 글자는 계속해서 내게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도망가라.’고.

절대로 이곳에 있어선 안 된다고.

하지만······.

‘이곳은 나의 땅이다.’

애당초 이곳은 나의 영지.

그러니 가는 길도 어렵진 않았다.

이미 내가 가야할 모든 길을 비워놓은 덕이다.

‘성.’

던전에서 30분가량을 걷자 거대하기 짝이 없는 성이 보였다.

아수라 백작이 머물 것만 같이 을씨년스러운 분위기.

문은 열려있었고, 지키는 자도 없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거대한 석상이 보였다.

우리엘 디아블로.

이제 곧, 그를 직접 내 눈에 담게 된다.

또한 라이라를 가까이서 마주할 수 있을 터였다.

“아빠!!”

터억!

이그닐이 날갯짓하며 하늘에서 내려와 나를 덮쳤다.

가슴에 얼굴을 비비곤.

“훌쩍! 보고, 시퍼써요.”

반가움과 슬픔의 표현을 내비췄다.

나는 이그닐의 등을 토닥이며 걸어 나갔다.

성으로 들어가자,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도착했을 때.

“우리엘 디아블로.”

그가 앉아있었다.

거대한 동체. 왕의 좌에 앉아 그저 눈을 감고 있었다.

과거 모든 영웅을 학살한 존재가 그곳에 있었다.

지금의 또 다른 ‘나’이기도 한 그가.

하지만 동시에 엄청난 압박감이 느껴졌다. 멸제의 카르페디엠을 잡고 더욱 강해져서일까? 전신에서 소름이 돋으며 몸이 덜덜 떨려왔다.

아직은 직접 만나는 때가 아니었다는 걸지.

나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그보다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

“······ 라이라 디아블로.”

그의 앞. 세계수의 잎으로 감싼 침대 위에 그녀가 누워있었다.

라이라. 그 아름다움은 여전했지만 창백해진 얼굴은 이미 시체라 해도 믿을 수 있을 듯싶었다.

나는 가만히 그녀에게 다가가, 손을 마주잡았다.

두근!

손에 번개가 친 것 같았다. 강렬한 통증과 함께 세상이 확대되는 느낌.

하지만 이는 ‘연결’을 뜻했다. 내 안에 박힌 ‘가시’가 반응하고 있는 것이다.

‘태을무극심법.’

바람이 불었다.

나는 라이라의 심장 위에 손을 얹었다.

그러자 마력의 공유가 시작됐다.

쿵! 쿵! 쿠아앙!

이윽고 이질적인 마력이 내 전신으로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

천둥이 치듯 뼈가, 근육이 뒤틀렸다. 식은땀이 줄줄 흐르고 자연스럽게 이를 악물게 되었다.

라이라의 안에 박힌 멸제의 마력은 너무나도 강력했다. 인간인 내가 그것을 받아냈다간 3초도 버티지 못하고 전신이 터져버릴 것이다.

‘나 혼자만의 힘으로는 역부족이다.’

고개를 내저으며 손을 뗐다.

라이라의 가슴 쪽에 대었던 손이 어깨까지 이미 까맣게 물들어 있었다.

순식간에 팔 위로 커다란 점이 생기며 썩어간다.

이게 바로 멸제의 마력이다. 밤의 저주로부터 면역을 시켜주는 요르문간드의 힘도 통하지 않는 듯싶었다.

그렇다면······.

‘탐식의 힘.’

라이라 디아블로의 손가락에서 피 한 방울을 내었다.

그것을 입에 삼키자 또 다른 글자들이 떠올랐다.

[새로운 인자를 획득했습니다.]

[용마족의 피와 발현되지 않은 강력한 천족의 피가 섞여있습니다. 변형할 경우 ‘악 성향’이 가파르게 증가하고 마력의 성질이 변질됩니다. 심연에서의 ‘능력치하락’이 사라지며 강인한 육체를 손에 넣게 됩니다.]

[하지만 주의하십시오. 너무 강력하기 짝이 없는 인자로 변형할 경우, 신체가 버티지 못해 무너질 가능성도 존재합니다.]

끝이 아니다.

멸제의 마력을 다루려면, 이 정도 성질로는 부족했다.

멸제의 카르페디엠이 소멸한 건 아쉽지만 아직 카드가 하나 더 남아있었다.

나는 뒤에 자리 잡은 우리엘 디아블로를 바라봤다.

데몬로드. 악의 중추, 마족의 왕이라 할 수 있는 위대한 존재!

또 다른 나이지만 그의 피를 탐식할 경우 나 역시 엄청난 영향을 받을 건 자명했다.

‘끝까지 간다.’

침을 꿀꺽 삼켰다.

여기서 물러날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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