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신사냥꾼-119화 (120/251)

< 29. 멸제의 카르페디엠(3) > 끝< 29. 멸제의 카르페디엠(完) >

‘혼자선 아무 것도 못하는 저런 녀석에게!’

우리엘 디아블로. 그는 라이라에게 백번, 천 번을 고마워해도 부족함이 없다. 그의 영지가 100년간 무사히 지켜지고 지금의 상황에 이르를 수 있었던 건 모두 그녀 덕분이었다.

그것을 녀석은 알까?

멸제의 카르페디엠. 그만이 아니다. 그보다 더 대단한 존재들이 라이라 디아블로를 데려가기 위해 ‘온갖 수’를 다 사용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 모든 제안을 거절했고, 더욱 고립되었으며, 그럼에도 혼자 모든 역경을 뚫고 나갔다.

그 과정은······ 카르페디엠조차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전장의 표범. 고독한 가시의 여왕.

그래서 더욱 가지고 싶었다.

허나 가질 수 없었다.

라이라는 오로지 우리엘만 바라봤다. 그만한 신념을 카르페디엠은 태어나면서 한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만한 애정을, 사랑을, 이 심연에선 결코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을.

라이라를 갖고자 했던 모든 이들이 그런 ‘헌신’을 목격하며 더욱 욕망을 불태웠지만 모두 실패했다.

만약 그에게 라이라 디아블로만한 부하가 있었다면, 우리엘은 자신에게 감히 전쟁을 선포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멸제의 힘이 이미 그년을 잠식한 뒤다. 너는 내게서 이길 수 있을지 몰라도 라이라 디아블로를 살릴 순 없으리라!”

멸제의 모습을 봉인 당했다.

아마도 라이라는 처음부터 이길 생각 따윈 없었을 것이다.

오로지 ‘멸제’의 힘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술책이었다.

허나 그 과정에서 라이라는 ‘독’을 먹었다.

멸제의 마력은, 모든 것을 지우는 힘이다.

수많은 손들이 우리엘의 앞으로 라이라를 데려왔다.

우리엘은 손을 뻗어 라이라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확실히 이번 일은 내 예상을 빗나갔군. 아마도 내가 믿음을 못 줬기 때문이겠지.”

우리엘의 목소리는 암울했다.

카르페디엠이 웃었다.

“너는 알아야 한다. 라이라 디아블로가 너에게 한 모든 헌신을. 끝내는 목숨을 바쳐 보잘 것 없는 너를 구했으니, 이 얼마나 가련한가!”

그러니 절망해라.

절망하고, 또 절망하여 떨어져라!

“잠시 쉬고 있어라. 너를 결코 잃지 않을 테니.”

허나 우리엘의 표정엔 절망이 없었다.

다만, 안타깝고, 또 안타까워할 뿐이었다.

이윽고 우리엘 주변의 모든 ‘손’들이 라이라를 감쌌다. ‘손’은 오로지 생자의 죽음을 갈구하지만, 반대로 죽음을 잠시 지연시키는 기능도 있었다.

“피가 멈췄다고 살릴 수 있을 것 같으냐? 멸제가 가진 ‘저주’는 무엇으로도 풀 수 없다. 그 저주는 그년이 가진 ‘가시’의 절대명제보다 더욱 강력한 것이니라. 오로지 죽이는 것밖에 할 수 없는 네가 과연 그 저주를 해방시킬 수 있을까?”

카르페디엠조차 공간결계 안에서만 멸제로 변할 수 있는 이유.

그 잔악무도한 마력의 성질 때문이다.

안에서부터 모든 걸 좀먹어버리는 저주의 마력은 라이라의 ‘가시’보다 한 수 위였다.

우리엘이 고개를 저었다.

“나로선 힘들겠지.”

우리엘은 순순하게 인정했다.

뭐지, 미친 건가?

아니면 라이라와 달리 우리엘에겐 그녀에 대한 애정이 없는 것일까.

“하지만······ 지금의 내가 아닌 또 다른 나라면 가능할 수도 있겠지.”

“헛소리를 하는 걸 보니 꿈이라도 꾸는 모양이구나.”

“······ 말을 너무 많이 했군.”

그러나 확실히 정상은 아니었다.

라이라의 모습을 보고 어느 정도 타격을 받은 게 분명했다.

‘내게도 한수는 남았다. 결코 나 혼자 죽지는 않을 것이다.’

마력이 거의 남지 않았지만, 적어도 우리엘 디아블로를 죽일 수 있는 히든카드 한장은 남겨둔 상태였다.

절대로 ‘흉내’ 낼 수 없는 마지막 하나.

푸욱!

카르페디엠이 손을 검게 물들이며 자신의 심장을 꿰뚫었다.

이어 펄떡이는 심장을 몸 안에서 꺼냈다.

“이 심장 자체가 나의 진짜 권능이며, 너를 파멸시킬 진정한 도구니라.”

그는 태어나서부터 심장에 마력을 담아두는 특이체질이었다.

그리고 데몬로드가 되었을 때 그의 심장에 권능이 새겨졌다.

아주 잠시 마신을 강림시킬 수 있는 권능이.

촤아악!

말을 끝마침과 동시에 카르페디엠이 손에 힘을 주어 자신의 심장을 터트렸다.

주변으로 피가 난무하며 거대한 마력이 솟아올라 악마의 형상을 만들었다.

아홉 개의 뿔을 단 악마는 점점 커다래지며, 이내 산 하나를 아득히 뛰어넘는 크기를 갖추게 되었다.

“말살의 포효. 마신의 힘을 직접 느껴보아라. 우리엘 디아블로여.”

쿠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마신이 울부짖었다.

동시에 마신의 입에서 쏘아진 입자가 주변의 모든 걸 파멸로 이끌었다.

적어도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게 폭발했다. 마치 세상에 종말이 찾아온 것 같았다.

닿는 모든 게 증발하였으며 그것을 우리엘 디아블로라고 하여도 피할 수 없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콰아아아앙!

마신과 비슷한 크기의 살점이 마신을 덮쳤다.

산 위의 모든 적을 제거하고 잠들어있던 ‘뒤섞인 공포’였다.

뒤섞인 공포는 모든 것의 파멸을 위해 만들어졌다. 강력한 마력에 반응하여 잠들어 있다가 깨어난 것이다.

방어종양이 솟아나고, 공격종양이 마신을 공격한다.

하지만 마신에겐 통하지 않았다. 마신의 입을 타고 멸망이 흘러나오자 두 종양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하지만 뒤섞인 공포는 마신을 뒤에서부터 집어삼키는 중이었다.

이내 본체가 거대한 분열을 일으키며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러곤 조금씩 그 크기를 팽창시키더니 이내 하늘까지 닿았다.

치이이이이익.

마신을 소환시킬 수 있는 시간은 무한하지 않다.

심장을 바쳤다고 하더라도 기껏해야 60초 전후.

그 시간이 지나자 팽창하며 새빨갛게 달아오르던 뒤섞인 공포의 움직임이 멎었다.

동시에 겉에서부터 빠르게 굳기 시작했다.

마치 돌덩이처럼 말이다.

“마신의 공격을 흡수했다고······?”

카르페디엠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카르페디엠은 모른다. 뒤섞인 공포가 어째서 공포인지. 그 무한하게 늘어나는 포식자가 어떻게 한국을 멸망시켰는지.

우리엘 디아블로는 수많은 ‘손’들로 장벽을 쌓고, 뒤섞인 공포의 살점을 방패삼아마신의 공격을 막아냈다.

“저 살점은 뒤섞인 공포라고 불리기도 했지만, 우리는 또한 ‘마왕의 살점’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우리엘 디아블로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슬픔과 분노, 굉장한 회한이 담겨있었다.

마왕의 살점. 평범하게 붙을 이름은 결코 아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괴물이 존재했지만 마왕의 이름이 붙은 괴물은 손에 꼽았다.

그중 하나가 바로 이 빌어먹게 커다란 살점이었다.

이윽고 그가 말했다.

“4천만에 달하는 사람을 먹어치웠다. 그제야 비로소 녀석에게 ‘약점’이 생겼다. 그래, 약점이라고 생각했다. 바로······ 저 모습이 되었기 때문에.”

감히 마신의 공격조차 먹어치울 수 있었던 이유.

그만한 숫자의 생명마저 먹어치운 살점이다.

사람만이 아니었다. 땅의 모든 정기와 풀벌레 한 마리까지 싹 다 먹어치웠다.

그런 먹성인데 마신의 공격이라 한들 먹지 못하겠는가?

우리엘이 돌덩이처럼 굳어버린 뒤섞인 공포를 바라봤다.

“한순간이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지금 녀석을 없애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가진 모든 힘, 세계 각국의 지원을 받아, 일제히 녀석을 없애기로 했지.”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냐······?”

카르페디엠은 죽어가는 와중에도 인상을 찌푸렸다.

알 수 없는 말들.

심장이 없어도 카르페디엠은 바로 죽지 않는다. 하지만 최후의 수가 막혔으니 죽은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카르페디엠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죽어가고 있었다.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인정할 수 없다는 듯 이를 갈며 우리엘 디아블로를 올려다보았다.

우리엘, 그가 계속해서 말했다.

“하지만 굳어버린 살점은 어찌하기도 전에 천천히 땅에 스며들었다. 한국의 땅 전체가 무르게 변하고, 다시금 살점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진정한 ‘마왕의 살점’이 드러난 것이다.”

그 광경은 그야말로 전율 그 자체였다.

한국의 땅 전체가 괴물로 변하고 있었다.

그만한 크기로 존재한다면 세계 전체를 위협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지금도 그러했다.

굳어버린 살점의 밑 부분이 조금씩 융해되더니 땅과 동화되어가는 중이었다.

“방법이 없었다. 없는 줄 알았다. 한국의 땅이 괴물 그 자체가 되었다. 나는······ 우리는······ 한국을 지도상에서 지울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뒤섞인 공포를, 마왕의살점을 죽였다.”

우리엘은 강렬한 눈빛으로 카르페디엠을 쳐다봤다.

이 모든 원흉이 바로 카르페디엠이라는 듯.

“나라는 존재 자체가 사라진 것만 같았다. 그곳에 있던 한 명도 나는 살리지 못했다. 그 뒤로 나는 웃을 수 없었다. 웃을 수 있을 리가.”

모든 영웅이 죽었다.

그리고 마침내 최후의 영웅이라 불리던 그는 조국마저 잃었다.

진정한 모습의 그를 기억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존재 자체가 부정된 느낌. 갈 곳 잃은 영혼은 떠돌이가 되었다.

카르페디엠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미쳐버린······ 것이냐?”

“차라리 미치고 싶더군. 잠깐, 미친 척을 해본 적이 있지.”

미치고 싶은데 미칠 수가 없었다.

정신이 너무 또렷했다. 눈을 감으면 무한하게 비명소리가 반복되며 그를 괴롭혔지만, 그럼에도 그는 미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미친 척을 했다. 그냥 그러고 싶었다.

그리고 어느 날······ 최후의 영웅은 듣게 되었다.

생존자가 있다고.

뒤섞인 공포의 공격으로부터 살아남은 자가 있었다고.

그자의 이름이······ 김민식이라고.

“그러나 한 명이라도 세상 어딘가에서 나를 알아봐주는 사람이 있다면, 미쳐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마지막 한 사람으로서 더한 자부심을 주고 싶었다. 주눅 들지 말라고, 여기 내가 있다고.”

그 말을 듣고 즉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비록 그 생존자가 악의 종교, 일레테이아에 귀의했다 한들.

생존자는 그의 마지막 줄이었다. 그는 그 ‘줄’을 놓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가면을 쓴 채 진짜 영웅이 되려고 했다. 적어도, 생존자이자 친구인 그에게 창피를 주고 싶진 않았으니까.

누군가가 자신을 기억한다면······ 끝까지 좋은 모습만을 남겨주고 싶었으니까.

촤악!

검은 별.

그 아래에서 생겨난 우리엘 디아블로의 분신 중 하나가 카르페디엠의 목을 잘랐다.

이윽고 검은 별이 사라지며 분신들도 증발했다.

카르페디엠은 단말마조차 지르지 못하고, 죽었다.

눈앞으로 긴 문장들이 떠올랐지만, 우리엘은 무시했다.

대신 그는 손 위에 조심스럽게 눕혀져 있는 라이라를 양 손으로 들었다.

소중한 보석을 다루듯 섬세하게.

‘나를 알아봐주는 사람이 세상에 한 명이라도 있다면.’

그 힘은 상상을 초월한다.

모든 역경과 고난조차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주는 것이 바로 그 한 명의 존재였다.

가는 길이 달라도, 의견이 부딪혀 대립하더라도, 그들은 분명하게 서로를 인식하고 기억했다. 그리고 기적같이 둘 모두가 돌아와 서로를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또 다시 서로가 가면을 쓴 채 다른 기억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이제는 서로가 서로의 진정한 모습을 인식하기가 어려워졌다.

그래서일까.

“네가······ 나를 알아봐주었으면, 그랬으면 좋겠다.”

세상 유일한 존재가 지금은 너이길 바란다고.

그는 작게 소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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