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신사냥꾼-117화 (118/251)

< 29. 멸제의 카르페디엠(2) >

“명을 따르겠습니다.”

라이라의 표정은 한없이 무거웠다.

공과 사의 구분.

이곳은 전장이었고, 자신의 존재가 이 피의 향연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그녀는 알고 있었다.

나는 뒤섞인 공포를 적진의 한가운데 풀고자 움직이는 라이라 디아블로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제 곧 수많은 이동마법에 의하여 뒤섞인 공포가 적진에 떨어지거든, 라이라를 필두로 하는 진격전이 시작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망설이는 중이었다.

‘오한성이 나의 아바타임을 밝힌다면 라이라는 받아들일 수 있을까.’

아바타. 또 다른 비슷한 말로는 분신.

물론 어느 쪽도 분신은 아니다. 우리엘 디아블로도, 오한성도, 모두가 ‘나’였다.

하지만 그것을 말한다고 하더라도 라이라는 절대로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다. 확신할 수 있었다. 그나마 ‘아바타’라는 전제를 두는 게 마지노선일 터였다.

문제는 그마저도 받아들일 가능성이 있겠냐는 것.

‘쉽지 않겠지.’

나를 보자마자 라이라는 가시를 쏘아냈다.

애당초 마족들은 모든 생명체를 내려다본다. 그중에서도 인간은 ‘벌레’의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냥 보이면 아무런 생각도 없이 눌러서 죽이는 거다.

아무런 죄책감도, 의식도 없이.

그런데 ‘데몬로드’의 아바타가 인간이라고? 코웃음이나 치지 않으면 다행이다. 다른 마족라면 혐오의 감정까지 들어낼지도 모른다. 하지만 라이라라면 다르지 않을까하는, 그런 일말의 기대감이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날.

가시에 찔리고 ‘지혜의 물’을 받아들인 그 날부터.

라이라가 계속해서 눈에 밟혔다. 그것은 우리엘 디아블로의 몸으로 현현해도 마찬가지였다.

내 안의 무언가가 바뀌고 있었다.

아마도 그 시발점은 내 안에 박힌 ‘가시’가 분명했다.

반드시 죽이는 그 힘이, 다르게 변질되며 내게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빠아~”

이그닐이 끙끙대며 내 어깨위에 올라탔다.

그날 이후 이그닐은 라이라를 피했다. 라이라도 이그닐을 어려워했다.

내가 무사히 살아남았다는 것을 이그닐도 깨달았을 테지만 ‘그일’은 아직도 이그닐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제 그만 라이라를 용서하거라.”

“싫어!”

이그닐이 도리질을 쳤다.

나는 이그닐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또 다른 내가 무사하다는 것을 알지 않느냐?”

“엄마. 나빠. 이그닐 이야기, 안 들으려고 했어.”

이그닐이 팔짱을 끼곤 입을 쭉 내밀었다.

대화. 소통의 부재가 있긴 있었다.

라이라는 막무가내로 이그닐을 끌고 가 버렸다.

그것이 이그닐은 무척이나 마음에 들지 않았던 듯싶었다.

그러다가 이그닐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왜. 엄만, 몰라?”

“너와 이타콰처럼 깊숙하게 연결되지 않았기 때문이지.”

“어떻게 하면, 연결 돼?”

“그건 나도 모르겠구나.”

애당초 이그닐과 이타콰는 나와 영혼으로부터 이어져있었다. 둘의 심상과 감정까지도 나는 느낄 수가 있었고, 심지어는 작고 큰 ‘권한’마저 공유하는 게 가능했다.

그래서 내 다른 몸을 굳이 알려주지 않아도 알아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라이라는 그렇지 않다.

그토록 깊은 ‘유대’가 없었다.

콩. 콩.

이그닐이 가슴을 천천히 내리쳤다.

몇 차례나 보아온 광경이었다.

“이그닐. 여기. 답답해. 아파.”

“라이라를 용서하고 싶은 마음과 그러기 싫은 마음이 서로 공존해서 그런 거다.”

“······? 어려워.”

이그닐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그닐은 아직도 어리다. 이타콰도 미련하게 덩치만 컸지 녀석도 결국 본질은 애였다.

이 둘이 나조차도 어려운 감정이란 것을, 마음이란 것을 이해하려거든 멀었다.

“어떻게 하면, 안 아프게 돼?”

“이그닐이 라이라를 용서하고, 라이라가 나를 용서하면, 자연스럽게 나을 게다.”

이그닐은 고개만 갸웃할 따름이었다.

나는 비밀이 많다.

이 비밀 중 몇 가지는 어쩌면 무덤까지 가지고 가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든 걸 그저 덮어놓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적어도 이 전쟁이 끝나게 되거든.’

멸제의 카르페디엠.

놈 역시 데몬로드다.

내가 온 힘을 다해도 이길지, 어떨지 알 수가 없다.

허나 지게 되면 모든 걸 잃는다.

이런 상황에서 중요한 전력인 라이라에게 큰 혼란을 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 전쟁이 끝나게 되면.

그때에는.

쿠우우우웅!

광음이 들렸다.

나는 시선을 돌렸다.

산의 중심부.

그곳에 거대한 살덩이 하나가 떨어져 내렸다.

온갖 이동마법진으로 이동시킨 마왕의 살점, 뒤섞인 공포!

그 살덩이는 경매장에서 보았을 때보다 훨씬 비대해진 상태였다.

‘3개월 동안 영지 근처에 풀어놓은 덕분에 주변의 괴물이 씨가 말랐지.’

뒤섞인 공포가 먹는 것은 ‘생기’다. 모든 생기를 빨아들이고 남은 찌꺼기는 언데드가 된다. 언데드는 또 다른 ‘생기’를 흡수하여 뒤섞인 공포에게 전해주고, 계속해서 전염시킨다.

그리하여 성장한 뒤섞인 공포는 한계에 달했을 때 ‘촉수’를 낳는다.

공격종양과 방어종양.

쾅! 콰아아앙!

산이 울린다. 뒤섞인 공포가 낳은 탑과 같이 거대한 살덩이가 따로 분리되어 살상포를 마구잡이로 쏘아대고 있었다.

저게 바로 공격종양이다.

‘한국은 공격종양 세 개 때문에 멸망했다.’

계속해서 불어났다간 전 세계가 위험했을 것이다.

지금 있는 건 고작 하나지만, 산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데에는 충분하다.

나는 작게 미소 지었다.

멸제의 카르페디엠. 놈의 휘하 병력 중 가장 강한 ‘용아병’이 뒤섞인 공포를 향해 뛰어드는 게 보였다.

쉬이익! 콰득!

그 순간 바닥을 뚫고 문어 다리처럼 생긴 살점이 튀어나와 용아병을 감쌌다. 이후강한 압력으로 용의 이빨로 만들어졌다던 용아병마저 으스러트렸다.

방어종양. 저게 있는 한 ‘본체’에는 다가갈 수 없다.

‘공략법을 모른다면 지옥 같은 괴물이지.’

그 ‘공략법’을 아는데 4천만 명이 넘게 죽었다.

과연 멸제의 카르페디엠은 뒤섞인 공포의 공략법을 알아낼 수 있을까?

쾅! 쾅! 콰아앙!

공격종양이 미친 듯이 살상포를 쏘아댔다. 닿는 모든 걸 파괴시키는 그 힘에 대기하던 괴물들이 우후죽순 죽어나갔다.

“불꽃놀이다!”

그 광경을 바라보며, 이그닐이 눈을 빛냈다.

* * * * *

산을 깊게 파고 만든 굴.

그 안에 거대한 수정으로 이루어진 벽이 있었다.

그리고 그 수정안에 있는 것을 멸제의 카르페디엠이 가만히 바라보았다.

“예술이로군.”

절로 감탄이 나왔다.

수정의 주변엔 백에 달하는, 후드를 뒤집어쓴 흑마법사들이 육망성의 마법진 위에 올라, 알 수 없는 단어로 노래를 부르는 중이었다.

“신화시대 때 신과의 전쟁에서 모든 거인이 죽었다고 알려졌다만······.”

아주 먼 옛날.

심연은 천계와도 연결되어 있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신화전쟁을 필두로 분리되어 독립된 공간이 되었다.

그리고 그 전쟁을 일으킨 게 바로 ‘진정한 거인, 요트나르’들이었다.

요트나르.

감히 그 능력이 신과 필적하다고 전해진 거인들.

수많은 신을 죽이고 그들 역시도 멸절되었다고 알려졌지만, 아니었다.

“그저 봉인되어 있었을 뿐.”

수정의 안에는 그 크기만 족히 10m는 되어 보이는 거인이 잠들어 있었다.

진정한 거인이라고 하기엔 그다지 크다고 할 수는 없지만, 애당초 요트나르들은 소수의 몇몇을 제외하곤 그 크기가 여타 신들과 비슷했다고 한다.

멸제의 카르페디엠은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요트나르를 손에 넣는다면 제로님께서도 나를 달리 보실 것이다.’

수많은 어둠의 정령들이 수정 속에 함께 잠들어 있었다.

이 공간을 찾으려고 암흑룡을 구매했다.

하지만 엄청난 봉인의 수준 덕택에 아직도 해제를 하지 못했다.

‘이곳에 모든 걸 쏟아 부었건만······.’

빠드득!

카르페디엠이 이를 갈았다.

우리엘 디아블로.

조금씩 카르페디엠의 수족을 갉아먹으며 마침내 전쟁을 선포했다.

놈의 권능이 무엇인지 아직도 감이 잡히지 않았지만, ‘망령대왕의 묘’가 있는 이곳까지 들이닥친 이상 마냥 무시를 할 수는 없다.

쿠르르르릉.

동굴이 흔들린다.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빌어먹을 우리엘놈!”

여태껏 우리엘이 건드려도 무시했던 이유가 바로 요트나르 때문이다. 모든 걸 쏟아 부어 이제 80%이상 봉인을 해제했는데, 하필이면 이때 우리엘 디아블로가 쳐들어온 것이다.

‘그래도 바깥엔 용아병과 골렘들이 있다. 놈의 병력 정도로는 쉽게 뚫을 수 없을 것이다.’

카르페디엠이 파악하기로 우리엘 디아블로의 병력은 고작해야 천 안팎이었다.

반면에 자신이 이끄는 군단은 오천을 넘겼다.

게다가 특수한 골렘과 용아병들은 감히 최정예라 할 수 있었다.

“······ 로드시여. ‘구슬’을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위에서 급히 내려온 듀라한 한 기가 카르페디엠을 향해 말했다.

카르페디엠은 눈살을 찌푸리며 바로 옆에 비치 된 커다란 구슬을 주시했다.

그러자 산 위의 상황이 모습을 드러냈다.

“저건······ 뒤섞인 공포로군.”

미친 듯이 골렘들을 박살내는 탑과 같이 생긴 살덩이가 있었다.

광선을 동시에 수십 방향으로 쏘아내는데 골렘들은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하는 중이었다.

분명히 경매에선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뒤섞인 공포의 크기도 저렇게 크지 않았다.

“뿐만이 아닙니다. 라이라 디아블로가 이미 ‘묘’의 중추로 들어왔습니다.”

카르페디엠의 인상이 더없이 굳었다.

“뭐라고? 대체 어느 사이에? 내가 걸어놓은 저주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건만!”

“라이라가 이끄는 정체가 불분명한 천여 명의 ‘망령기사’들입니다. 놈들에겐 저주가 잘 통하지 않습니다.”

“그럼 막지 않고 뭐하는 것이냐! 이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놈 같으니!”

퍼어억!

주먹에 맞은 듀라한의 몸체가 허공에 떠오르더니 바닥에 처박혔다.

그 즉시 카르페디엠의 머릿속에 물음표가 그려졌다.

‘망령기사?’

그에 대한 정보는 없었다.

샅샅이 우리엘 디아블로의 진영에 대해 파악하고 있다고 자부했지만, 천여 명이나 되는 망령기사를 대체 어디서 구한 걸까?

카르페디엠이 주먹을 으스러지도록 쥐었다.

하나라도 잘못되면 봉인을 해제하려는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간다.

“봉인해제의 의식을 서둘러라!”

흑마법사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카르페디엠은 움직였다.

‘어째서 내가 멸제라고 불리는지 알게 해주마.’

멸제.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이름이자, 그 자체의 의미.

그는 지금 매우 화가 나 있었다.

* * * * *

쿠르르르르릉!

산이 거세게 흔들린다.

‘놈’이 출현했다.

“멸제의 카르페디엠.”

놈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쉐도우 나이트 천여기로는 역부족일 것이다. 라이라가 있다손 치더라도 정면에서의 1:1은 무리가 있다.

나는 눈을 감고 잠시 심호흡을 했다.

여기까지 오는데 상당히 무리를 하였다. 진정한 ‘별들의 전쟁’이 시작되고 가장 먼저 데몬로드를 죽이는 업적을 남기고 싶어서 쉴 새 없이 달려온 것이다.

멸제의 카르페디엠. 놈을 죽이면 그의 파벌도 적으로 돌리는 셈이 된다. 적어도 우호적인 관계로 남아있긴 힘들겠지.

그래도 해야 한다.

나 같이 뭣도 없는 데몬로드가 ‘이름’을 떨치려거든.

‘이름값이 생기면 그 자체만으로도 힘을 얻는다.’

내겐 데몬로드로서의 이름값이 없다.

그러나 모든 데몬로드들을 통틀어 가장 먼저 멸제의 카르페디엠을 죽이고, 명예를 드높이면, 심연 곳곳에서 내 휘하가 되고자 자처하는 무리들이 생겨날 것이었다.

“아빠······ 힘, 내, 세, 요.”

쪽!

이그닐이 또박또박 응원을 전하며 내 목에 입술을 비볐다.

이곳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힘이 됐다.

나는 이그닐을 조심히 바닥에 내려놓고, 몸을 풀었다.

‘이 싸움은 시작이다.’

반드시 이겨야 한다.

이겨야만, 모든 것이 가능해진다.

어느 정도 자신도 있었다.

‘검은별.’

우리엘 디아블로가 가진 최강의 마법.

10Lv의 초토화마법이었다.

유일하게, 다른 것들은 내 본체인 ‘오한성’에게 동화되며 전해졌지만, 오로지 이 ‘검은별’만은 우리엘 디아블로에게 귀속되어 있었다.

스으으으으!

스아아아아아아!

한 발자국, 앞으로 나갔다.

동시에 내 주변의 모든 공간이 더없이 검게 물들며 죽음의 대지로 변했다.

셀 수 없이 많은 ‘죽음의 손’들이 그 공간에서 튀어나와 거대한 파도처럼 울렁이며 나를 옮겨갔다.

목표는 멸제의 카르페디엠.

질긴 악연의 고리를 끊고, 더 높게 비상하기 위한 시작의 전쟁이 막을 올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