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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신사냥꾼-106화 (107/251)

< 27. 마계옥션(6) >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계속 헛발질만 하는 이유다.

‘이게 염력이로군.’

대기의 마력을 자유자재로 조종하는 것. 마력에 힘을 부여하여 물리력을 행사하는 것. 그것이 바로 염력이었다.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른 존재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이그닐은 그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을 누구나 할 수 없을 정도의 레벨로 다루고 있었다. 마력의 움직임이 무척이나 부드럽고 섬세해서 신경 쓰지 않으면 눈치 채지 못할 정도다.

물론 이곳에 모인 게 데몬로드인만큼 어느 정도 눈치를 채지 못한 자는 없었다. 다만, 쉽게 믿기 어려워하는 부류가 있을 뿐이다.

‘암흑룡이 가지는 항마력은 뛰어난 편이지.’

모든 용이 그렇다. 그중에서도 암흑룡은 항마력이 뛰어난 편이었다. 비슷한 수준의 스킬에 직격을 당한다고 하더라도 그리 큰 타격은 입지 않는다.

고작 대기의 마력을 움직이는 수준으로 암흑룡의 자유를 빼앗는다는 걸 카르페디엠은 부정하고 있는 셈이었다.

“있는 힘을 모두 보여라. 더 이상의 추태는 용납하지 않을 것이니!”

카르페디엠이 마지막 경고를 날렸다.

놈은 필사적이었다. 그야 이기고 싶을 테다.

일단 저 제로라는 자. 파벌의 수장인 저 존재의 눈에 띄고 싶어 하는 열기가 나에게까지 닿았다. 아마도 카르페디엠은 같은 파벌의 데몬로드 중에서도 말석일 터였다.

그리고 라이라 디아블로.

놈은 아주 오랜 시간 라이라를 노려왔다. 내가 다른 내기물품을 걸었다면 놈은 응수하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에. 만약에 이그닐이 패배하여 라이라를 잃을 상황이 온다면······.

‘깽판이라도 쳤겠지.’

라이라는 중요한 재원이다. 그녀가 있어야만 승리를 해나갈 수 있다. 나 혼자서의한계는 뚜렷하다.

이곳 심연에서, 내 측근에서 가장 좋은 조언만을 해주며 헌신하는 건 그녀뿐이었기에.

아마도 곧장 멸제의 카르페디엠, 놈의 목을 치러 전군을 동원해 달려들지 않았을까?

쿠오오오오오!

어깨를 으쓱하자, 암흑룡의 몸집이 비대해지기 시작했다.

검은색의 연기가 주변을 휩쓸며 안광에서 광기가 튀었다.

광포화. 이성을 잃고 어둠의 정령의 광기에 취하는 것이다.

쉬익!

차악!

염력이 이전처럼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이그닐의 옆구리가 살짝 긁혀나간 것이다. 수많은 어둠의 정령들이 암흑룡의 주변에서 마력의 흐름을 지배하는 중이었다.

압도적인 신체의 차이. 살짝 긁힌 것임에도 이그닐은 크게 휘청거렸다.

샤! 샤아!

무척이나 화가 난 듯 이그닐이 노성을 내질렀다.

그러자 이그닐의 주변으로 황금빛의 기운들이 조금씩 퍼져나갔다.

굉장히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그리고 그 빛에 닿은 모든 것들이 ‘느려지기’ 시작했다.

‘허.’

작게 감탄했다. 마력을 지배하고, 공간마저 손에 넣어 그 흐름을 입맛에 맞게 새겨 넣는다. 완벽한 공간의 지배. 나도 말로만 들었지 실제로 본 건 처음이다.

그것도 아직 다 성장하지도 않은 용이!

광포화한 암흑룡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느려지자 카르페디엠도 살짝 놀란 기색을내비췄다. 이그닐이 지배한 공간은 반경 5m 남짓밖에 되지 않았지만 감히 ‘완벽하다’는 말이 절로 나올 수준급의 지배력이었다.

캬오오오오!

이어, 이그닐의 입에서 황금 입자들이 모여들었다.

용의 전매특허라 불리는 ‘숨결’이다. 특히 이그닐은 그 이름에 따라 성현의 가호를 부여받았다. 일반적인 숨결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어 자그마한 입에서 강렬한 황금빛 줄기가 바닥을 가르며 튀어나갔다.

콰아아아아아!

닿는 모든 게 파괴된다. 파괴된 잔재의 주변은 눈에 띄는 부식이 진행되어 있었다. 결코 회복할 수 없는 타격을 주는 것이다.

뒤늦게 암흑룡도 숨결을 내뱉었지만, 부족하다. 순식간에 암흑룡의 숨결이 반으로 쪼개지며 그대로 직격을 당했다.

쿵!

황금기류가 사라지자 공간의 시간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이어, 암흑룡이 바닥에 쓰러졌다.

죽지는 않았다. 하지만 암흑룡의 오른쪽 어깨와 날개 한쪽이 완전히 찢겨버렸다.

겨우 이그닐의 숨결의 궤도를 수정한 것인데, 생명은 지켰으나 회복이 쉽지 않을 부상을 입은 것이다.

용에게 날개란 품격과도 같은 것.

하물며 이그닐의 숨결은 ‘부식의 힘’을 담고 있었다. 한 번 닿으면 되돌리기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엘릭서라도 쓰지 않는 이상.

시이이이.

의기양양하게 콧김을 한 방 뿜어낸 이그닐이, 다시금 내 어깨 위로 올라와 볼에 자신의 뺨을 비볐다. 나는 톡톡 이그닐의 머리를 건드려주었다.

그러자 갸르르르 소리를 내며 이그닐이 몸을 떨었다.

“이······ 버러지 같은 놈! 일어나라! 일어나!”

카르페디엠은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욕을 하고 발로 차며 암흑룡을 깨우려 했지만 암흑룡은 일어나지 않았다.

제로. 그는 아예 몸을 돌렸다. 진즉에 흥미가 식어버린 듯.

“재밌는 걸 보긴 했군.”

“형편없기는.”

“그라디아의 자식이 맞기는 한 건가?”

“쯧쯧, 왜 제로님께선 저런 녀석을 휘하에 두고 있는 건지.”

“오히려 저 황금 용 쪽에 더 흥미가 생기는군.”

데몬로드들도 제로를 따라 등을 보였다. 한 마디씩을 남기고서.

홀로 남은 카르페디엠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나는 천천히 다가갔다.

“카르페디엠. 약속을 어기진 않겠지?”

“······ 후회하게 될 거다. 마계옥션이 끝나는 즉시, 네놈의 목을······.”

“환영하마. 언제든지.”

여유를 보이며 놈의 어깨에 달린 휘장을 가볍게 떼어냈다.

피식 웃고는 고개를 돌려, 첨탑의 입구를 바라보았다.

충돌을 우려해 꽤 많은 숫자의 암흑인들이 자리를 잡은 채 지켜보는 중이었다. 나는 그들을 향해 말했다.

“정당한 내기를 통해 획득한 물건이다. 팔아도 문제는 없겠지?”

“상회에 파는 거라면 문제가 될 건 없습니다.”

공증을 받은 셈이다. 결코 부당한 수법으로 취한 물건이 아니라는 공증.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우리엘 디아블로와의 동화율이 1% 상승했습니다.]

[우리엘 디아블로와의 동화율이 76% 입니다.]

뜬금없이 동화율이 올랐다.

우리엘 디아블로. 그도 통쾌했다는 뜻일까?

‘앞으로 더 통쾌할 일이 많을 거다. 지켜보도록.’

고작 이런 일로 통쾌해해서야. 얼마나 형편없이 당했으면 이 정도 일에 동화율이 올라간단 말인가.

내심 혀를 차곤, 다시 정면을 마주봤다.

그러곤 죽일 듯 나를 노려보는 카르페디엠을 향해 씽긋 웃어준 뒤 나도 발을 움직였다.

천천히 걸어 나가자 내 옆에서 라이라가 말했다.

“지지 않으실 거라고 믿었습니다.”

“져도 상관없었다.”

“예······?”

라이라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는다.

이제는 이런 표정도 지을 수 있을 정도로 둘 사이의 격이 많이 없어진 상태였다.

멋쩍었지만 최대한 티를 안 내며 입을 열었다.

“어차피 놈의 것은 나의 것이나 마찬가지 아니겠느냐?”

카르페디엠의 목을 취한다. 이 마계옥션이 끝나면, 모든 게 계획대로 진행된다면, 카르페디엠과의 전면전이 남았을 뿐이다.

거기서 승리하면 어차피 놈의 것이 나의 것이 된다는 이야기다. 설령 져도 다시금반드시 찾아올 거라는 이야기를 나름 돌려서 말 한 것이었다.

“아······.”

이내 내 말의 저의를 깨달은 라이라가 작게 놀라곤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럼 저는 탑에 갇힌 공주님처럼 얌전히 기다리고 있으면 되겠군요.”

얌전히 갇혀있을 것 같진 않다만.

나는 말을 아꼈다. 굳이 한 마디 더해서 태클을 걸 필요는 없었다.

그래도 이 삭막하기 그지없는 공간에서 삭막하지 않게 있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라이라는 충분히 능력을 발휘하고 있는 셈이다.

움직이는 발걸음이 무척이나 가벼웠다.

* * * * *

둘째 날.

경매가 열렸고, 어제보다 더한 중압감 속에서 경매는 진행되었다.

‘휘장을 팔고 얻은 22만 포인트. 도합 37만.’

나는 암흑상인들에게 카르페디엠에게서 얻은 휘장을 즉시 팔았고, 생각보다 많은 포인트를 챙길 수 있었다. 아마도 데몬로드의 아주 특징적인 물건이라 가격을 높게 쳐준 듯싶었다.

그 휘장은, 카르페디엠을 대표하는 것 중 하나였으니까.

그렇게 도합 37만 포인트. 내가 이번 경매에서 사용할 수 있는 금액이다.

‘본격적인 전쟁.’

주변의 분위기가 더욱 낮게 내려앉아있었다.

어제와 달리 오늘이 ‘진짜’라는 듯이.

오늘은 주로 ‘노예’들이 나온다고 했다. 강력한 괴물들, 쉬이 접할 수 없는 종류의종족이라는 건 대강 예상이 갔지만 얼마나 특색이 있기에 이만한 긴장감이 감돈단 말인가.

“오늘도 반갑습니다! 심연의 별들이시여!”

예의를 차리며 공작이 나타났다.

크리스탈 왕관이 어제보다 더욱 풍성해보였다.

“마계옥션의 둘째 날입니다. 오늘은 정말, 정말, 정말로 중요한 날이지요. 저희도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것들이 많습니다. 특히 들으시면 깜짝 놀랄 수준급의 노예도 마련이 되어있습니다. 후후후, 빨리 소개해드리고 싶군요.”

공작이 능청스럽게 이야기를 진행했다.

“구구절절 시간을 끌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만큼 물건에 대한 자신감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바로, 경매로 들어가겠습니다.”

손에 든 지팡이를 빙그르르 돌리며 공작이 한쪽 손을 내밀고 반쯤 몸을 돌린 채 말했다.

“무슨 일이던 ‘처음’이 가장 중요합니다. 아주 우연치 않은 기회에, 저희는 아주 좋은 괴물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아마도 로드분들 모두가 생소하실 겁니다.”

쿠르르릉!

바퀴소리가 요란하게 퍼지며 곧 암흑상인들이 거대하기 짝이 없는 철창을 운반했다.

철창 안에 든 건 뭐라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물체였다.

살점과 살점으로만 이루어진 저것을 생명체라 부를 수 있는 걸까?

“소개합니다. ‘뒤섞인 공포’라 불리던 괴물입니다.”

공작은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하지만, 그와 달리 나는 웃을 수 없었다.

웃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저 거대한, 그저 피륙으로 뒤덮인 괴물.

나는 저 녀석을 본 적이 있다.

‘뒤섞인 공포······! 마왕의 살점!’

두근!

심장이 뛰는 게 아팠다.

세상이 잠시 샛노랗게 변하는 것만 같았다.

제기랄. 그날의 공포가, 순식간에 나를 잠식했다.

한국이 사라진 날.

우리엘 디아블로의 강림이 결정타였지만 녀석은 죽었다. 나는 녀석을 죽였고 한국을 지켜냈다.

하지만, 끝내 지키지 못했다.

지킬 수 없었다.

어느 날 갑자기 떨어진 거대한 살점 하나가 한국을 멸망시켰다.

순식간에. 내가 어찌할 도리도 없이.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고작 그 며칠 만에 모든 게 바뀌었다.

모든 이들이 언데드로 변했다.

나는 친구를, 누군가의 가족을, 내손으로 죽일 수밖에 없었다.

칼날로 신체를 도륙할 때마다 나는 떨었다. 울었다. 어제까지 웃으며 나를 반겨주던 사람들이, 적이 되어 나를 공격하고 있었기 때문에.

모든 원흉은 바로 저 녀석이다.

뒤섞인 공포. 마왕의 살점이라고도 불린 저 괴물!

애써 떠올리지 않고 있었던 그날. 그 빌어먹을 날.

나는 그 이후로 웃을 수 없었다. 웃지 않게 되었다.

‘왜 저 괴물이 이곳에······.’

애써 정색을 했다.

마계옥션. 오로지 데몬로드들에게만 물건을 파는 곳.

그렇다면 또 다른 데몬로드가 한국의 멸망에 기여를 했다는 뜻일까?

꽈아아악.

주먹을 쥐었다.

녀석을 본 순간 나는 겁을 먹었다.

그리고 그만큼의 분노도 생겼다.

결국, 과거는 잊고 싶다고 잊혀지는 게 아닌 모양이었다.

잊을만 하면 다시 이렇게 내 눈앞으로 나타나는 걸 보니.

< 27. 마계옥션(6)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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