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 7대 죄악(2) >
둘은 엘프치곤 어렸다. 제아무리 퀸과 하이엘프의 특성을 이었다고 하더라도 경험이란, 연륜이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구석이 있었다.
가장 먼저 ‘배신’이란 단어를 함부로 꺼낸 것 자체가 그렇다. 현명한 엘프였다면 일단은 의심이 드는 것부터 풀어내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배신의 단어를 먼저 입에 담음으로써 의혹을 거대한 폭탄처럼 증대시켜버렸다.
물론 엘프들 중에서도 의아함을 제시하는 이들도 있었다.
“혹시 인간들이 오르모아님을 납치한 거 아닐까?”
“다크엘프가 오크와 손을 잡았다는 건 말도 안 돼! 우리가 앞장서서 오크들의 목을 베었다고!”
합리적 의심이다. 나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현 상황을 뒤집을 정도의 파급력은 없었다.
의심이 싹을 텄다. 자극적인 조미료 앞에서 자극이 적은 천연의 재료는 본래의 맛을 잃기 마련이었다.
나는 유서희를 바라봤다. 만 이천의 수감자들을 이끌고, 민식이보다 먼저 오르모아를 찾아내 지금의 상황을 만든 건 유서희의 공이 컸다.
‘용케 그 꽃을 찾았나보군.’
감옥의 주인, 헬라시아를 유혹하느냐 마느냐가 유서희가 아포칼립스 길드로부터해방되고 힘을 가질 수 있는 열쇠였다.
나는 그 방법으로 이곳 감옥에서 아주 드물게 피어나는 ‘지옥꽃’을 추천했다. 수천, 수만의 피를 먹으며 자라난다고 전해지는 그 특수한 꽃은 분명히 감옥 어딘가에피어있었다.
헬라시아가 그 꽃을 원한다는 정보는 과거의 기억을 통해 가지고 있었지만, 지옥꽃이 자라나는 위치를 알 수가 없어서 ‘찾아보라’고 넌지시 건넨 건데 정말로 찾아낸 모양이었다.
게다가······.
‘오르모아에게 입김을 불어넣었다.’
시작은 나였다.
까마귀의 옷을 입고, 오크들을 조종하며 오르모아에게 경각심을 갖게 만들었다. 오크들에 의해 벌벌 떨던 오르모아가 ‘우연히’ 유서희에게 구출되고, 전쟁과 관련 된 이야기를 들음으로 인해 의혹이 일파만파 퍼져나간 상태였을 것이다.
그러니 대뜸 ‘배신’을 입에 담은 거겠지.
이성이 아닌 감정싸움으로 돌입한 거다.
유서희를 바라보자, 유서희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 잘했죠?’라고 말하는 듯한 입모양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분명히 김씨 삼형제는 유서희를 보고 ‘천사’라고 표현했는데, 천사라기 보단 작은악마에 가깝지 않은가. 악마치곤 귀엽긴 했지만.
“오르모아, 무슨 근거로 나보고 배신을 논하는 거지? 나는 선두에서 까마귀들과 함께 오크의 목을 베었다. 배신했다면 오크들과 손을 잡았겠지.”
“까마귀! 오크와 함께 나를 납치한 까마귀가 있어요. 퀸 엘라리뇨, 그대의 친위대가 말이죠.”
“내 친위대가······? 나는 그런 명령을 결단코 내린 적이 없다. 그 시간에 친위대는 대부분 내 곁을 지키고 있었을 터인데?”
하지만 이야기의 흐름은 어느 정도 사실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이 대화가 계속되면, ‘나’라는 존재가 부각되는 건 순식간일 것이다.
그다지 좋은 흐름은 아니었다.
“그 시간에 따로 움직인 까마귀가 있느냐?”
퀸 엘라리뇨가 분노한 음성으로 까마귀들을 향해 말했다. 그러자 가장 선두에 선 까마귀 하나가 답했다.
“상황을 살피러 간 세 명과 비번이었던 두 명, 그리고 새롭게 들어온 ‘그’가 있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 그 여섯 명이 전부 있느냐?”
“오크와의 전쟁 도중 죽은 까마귀들을 제외하면, 두 명이 없습니다.”
“누구지?”
“비번이었던 까마귀 하나와 ‘그’입니다.”
엘라리뇨가 쌍심지를 치켜든 채 까마귀들을 살폈다. 까마귀의 외형을 한 투구를 쓰고 있는 탓에 구분이 쉽지는 않았으나 엘라리뇨는 곧잘 구분을 해내었다.
그리고 둘이 없는 걸 확인했을 것이다.
그중 하나는 나였다.
나는 이미 인간진영 속에 섞여있었다.
대충 투구 하나만 착용한 채로.
“어디로 간 건지 아느냐?”
“엘프는 오크와의 전쟁 중 큰 부상을 입어 치료를 받고 있으며······ ‘그’는 사라졌습니다.”
“사라졌다?”
엘라리뇨의 표정이 모호하게 변했다. 사라진 자를 의심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표정에서 보아하니 믿고 싶어 하지 않는 듯했다.
그를 지켜보던 하이엘프 오르모아가 입을 열었다.
“무엇을 하고 있는 거죠? 또 어떤 변명거릴 만들고 있는 건가요?”
“네가 보았다던 게 정말 까마귀가 맞나?”
“예. 제가 그 정도도 구분하지 못할 것 같나요? 그는 오크들을 대동하고, 엘프들을 세뇌했죠. 그리고 어두운 굴속에 오크들과 함께 저를 가둬놨어요. 인간 유서희가아니었다면 아마도 그곳에서 죽었겠죠.”
그제야 엘라리뇨도 ‘이상’을 느꼈지만, 이미 늦었다.
“무언가 오해가 있는 것 같군. 우리가 오크들을 공격한 건 네가 오크에 의해 납치당했다는 게 밝혀진 직후다.”
“그대는 항상 피를 보길 바랐으니까요. 우리에게 우호적이었던 거인족을 죽이면서까지.”
간수장을 말하는 것이다.
엘프와 다크엘프들은 오크의 침략에 이성을 잃었고, 피해를 감수하면서까지 간수장을 처리했다. 분명히 말로 풀어갈 구석이 있었음에도.
오르모아가 잔뜩 표정을 굳힌 채로 말했다.
“동족들이여, 더 이상 피를 보는 걸 금합니다. 그럼에도 싸우겠다면 저 오르모아의 이름으로 막아서겠습니다.”
오르모아가 앞으로 나섰다.
그러자 웅성대던 엘프들이 하나, 둘 진영을 이탈하며 오르모아 근처로 모이기 시작했다.
이어 모든 엘프가 이탈했다.
오천에 달하던 엘프진영의 숫자가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우리 엘프들은 인간진영에 합류하도록 하죠. 퀸 엘라리뇨, 그대가 인간진영과 전쟁을 벌이겠다면 저와도 싸워야 할 거예요.”
“지금······ 뭘 하자는 거지?”
“더 이상 무의미한 싸움을 멈추자는 겁니다. 그러고 보니······ 오크와 손을 잡았던 드워프가 이번엔 그대에게 붙었나 보군요?”
의심을 키운 데에는 드워프들도 한몫했다.
분명히 오크들과 드워프가 연합을 했는데, 지금은 왜인지 다크엘프들과 함께하고 있는 것이다. 전후사정을 제대로 모르는 오르모아가 착각하기 딱 좋은 환경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드워프들도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이가 빠지고 약해진 사자는 더 이상 눈치를 봐야할 대상이 아니었으므로.
“이 이상은 나와 이야기하도록 하지.”
그때, 한 남자가 나섰다.
아포칼립스 길드의 길드마스터.
파란색 팔라딘의 망토를 휘날리며 앞으로 나선 것이다.
적절한 타이밍이었다.
“인간진영의 대표 김민식이라고 한다. 우리 역시도 쓸데없는 피를 보긴 원하지 않는다. 물론 싸우겠다면 무기를 드는 걸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민식이가 좌중을 훑었다.
이미 계산이 끝난 것이다.
엘프가 합류한 이상, 다크엘프와 드워프들은 충분히 상대가 가능하다고. 만 이천의 수감자들도 되찾았으니 꿀릴 게 없었다.
“하지만 우리는 또한 인도적이다. 그대들이 들어오겠다면 마땅한 대우를 약속하지. 우리가 바라는 건 오로지 깃발뿐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결국 승리를 위한 수작이란 말이렷다!”
엘라리뇨가 아니다. 드워프 쪽에서 소리가 나왔다.
드워프 킹 골고르. 그가 허겁지겁 나선 것이다.
4개의 깃발을 다크엘프에게 맡긴 상황이니, 여기서 그들마저 숙였다간 그대로 ‘경합종료’가 되어도 이상할 게 없었다.
다크엘프는 내가 가져간 3개를 제외하면 이미 11개의 깃발을 보유하고 있다. 인간진영과 합쳐지는 순간 수인족이 뭘 하던 상관없이 경합이 끝나버린다.
드워프 킹 골고르가 퀸 엘라리뇨를 노려봤다. 순수히 깃발을 내어주면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는 듯.
그러자, 민식이는 쐐기를 박았다.
“물론 승리자의 보상을 독식하겠다는 뜻은 아니다. ‘지혜의 나무’를 대신 선물하지. 애당초 지혜의 나무를 얻고자 경합에 참여한 거 아니었나?”
퀸 엘라리뇨의 눈에 경련이 일었다.
반쯤은 피곤하다는 기색도 있었다. 내가 없어지고, 오르모아의 의심에 따라 엘프진영의 절반이 사라진 것이다. 피곤할 만도 했다.
“너를······ 어떻게 믿지?”
“우리는 진정한 ‘결합’을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혜의 나무’가 정말로 세계를잇는 통로 역할을 한다면, 우리의 땅에도 나무를 심어 서로가 ‘교류’하길 바란다.”
이 대목에선 나도 조금 놀랐다.
오르모아에게서 정보를 빼오고, 유서희가 그 정보로 말미암아 이번 계획의 토대를 세우긴 했지만, 그것을 듣고 녀석이 거기까지 생각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몇 번 녀석의 선택이 답답한 적도 있었지만 아주 생각이 없는 건 아닌 듯했다.
“지혜의 나무로 세계를 오갈 수 있는 건 세계수의 선택을 받은 몇몇 뿐이다. 교류는······.”
“할 수 있다. 우리 인간들이 있는 세계는 이미 여러 세계와 연결이 되어있으니.”
그럴싸한 추론이었다.
나도 그 경우를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다. 그러나 확신이 없었다.
이미 지구는 여러 세계의 각축장이 되기 직전이었고, 균열이 벌어진 상태였다. 약간의 자극만 더해주면 충분히 서로를 잇는 게 불가능하진 않다고 보긴 했다.
그런데 민식이는 나름의 확신을 가지고 말하고 있었다.
“오르모아. 네가 바란 게 이런 건가?”
엘라리뇨가 묻자 오르모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피를 보지 않고도 서로가 서로의 공통된 목적을 달성할 수 있어요. 우리는 잃어버린 지혜의 나무를 얻고, 거기에 공존의 길까지 열렸죠. 우리의 힘만으로는 ‘침략자’들을 어찌할 수 없다는 걸 그대도 알고 있지 않나요?”
“개소리다! 간사한 인간들을 어떻게 믿을 수 있단 말이냐!”
드워프 킹 골고르가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며 열변을 토했다.
그러나 엘라리뇨가 그를 바라보는 눈빛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 간사한 드워프들보단 낫겠지.”
사실상의 합류선언이었다.
그녀 역시도 오르모아가 인간들이 힘을 합치면 자신들이 이길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는 듯했다.
이윽고 다크엘프들이 물러나며 드워프들과 간격을 벌렸다.
엘프와 인간들이 힘을 합치면, 드워프들은 그야말로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신세가 된다.
‘최상의 결과로군.’
이로써 인간진영은 15개가 넘는 깃발을 소유하게 되었다.
드워프들은 엘프진영에 4개의 깃발을 헌납해선 안 됐다.
박쥐 짓을 하다가 제대로 삽질을 한 셈이다.
나는 그들의 뒤에서, 슬쩍 미소를 지어보였다.
* * * * *
[인간진영이 16개의 깃발을 보유했습니다.]
[모든 경합이 종료되었습니다.]
[인간진영에 속한 모든 인간에게 ‘10,000pt’가 주어집니다.]
[경합내용에 따라 추가보상이 주어집니다.]
[87,000pt를 추가로 획득했습니다.]
[깃발이 ‘검은 파편’으로 변환됩니다.]
[‘만물상점’으로 이동합니다.]
경합이 종료되자, 다시금 전이가 시작됐다.
세상이 무너지고 그 대신 거대한 도서관이 나타났다.
[397,432p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19개의 검은 파편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주변을 둘러봤지만 나 외엔 아무도 없었다.
또 다른 관리자가 있을 줄 알았건만.
다만, 수많은 ‘잔상’들이 보였다.
투명한 형체의 온갖 종족들이 도서관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아카식 레코드의 영향인가?’
이곳은 분리된 장소다. 수많은 도서관이 존재하고, 한 도서관 당 하나의 생명체만입장하는 게 허락된 것이다.
본래라면 서로가 서로를 인지조차 할 수 없어야 한다.
그러나 내게는 아주 희미한 잔상이 보였다.
아마도 아카식 레코드의 영향이겠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거대한 도서관엔 온갖 책들이 있었는데, 하얀색과 파란색, 그리고 황금색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하얀색의 책을 펼치자 단 세 줄만이 적혀있었다.
<황야의 검>
<수량: 499개>
<10,000pt 필요>
<집사 소악마>
<수량: 99개>
<10,000pt 필요>
혹시 몰라 다른 책도 펼쳐봤지만 마찬가지였다.
아무런 정보도 주지 않고 이 세 줄이 전부였다.
누군가가 벌써 한 개씩을 구매한 걸까?
이번엔 파란색 책을 살펴보았다.
<무작위 마검>
<수량: 50개>
<50,000pt 필요>
<무작위 성갑>
<수량: 50개>
<50,000pt 필요>
무작위?
이름일 리는 없고, 정말로 ‘무작위’로 마검이나 성갑 등이 선택된다는 뜻인 것 같았다. 꽝일 수도 있고 성공일 수도 있다는 뜻인데······.
파란색 책은 거의 다 도박이었다.
턱을 쓸며 이번엔 황금색 책이 비치 된 장소로 이동했다.
<파편의 소유자만이 책을 펼칠 수 있습니다>
<19개의 파편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권한이 충분합니다.>
<수라의 잔>
<수량: 3개>
<검은 파편 2개 필요>
가장 먼저 펼친 책에 적힌 내용이 이것이었다.
수라의 잔!
‘허.’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게, 수라의 잔은 과거 거대한 재앙을 불러왔던 보구다.
엘더 리치가 현자의 돌을 만들고자 중국 전역에 마법진을 설치했고, 그 ‘매체’로 쓴 것이 바로 이 수라의 잔이었다.
무한한 생명력을 담을 수 있는 잔!
끔찍하기 짝이 없는 이 물건이 여기 있을 줄이야.
‘여기서 구한 건 아니겠지만, 놀랍군.’
급히 다른 황금색의 책들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감탄했다.
하나 같이 입이 안 벌어지는 것들이 없었다.
또한 파란색 책 까지는 포인트로 살 수 있었지만, 소수의 황금색 책은 오로지 ‘검은 파편’으로만 구매할 수 있었다.
<지혜의 나무>
<수량: 5개>
<검은 파편 3개 필요>
엘프들이 구하려고 했던 지혜의 나무다.
나는 턱을 쓸다가 갑자기 느껴지는 기척에 고개를 돌렸다.희미한 잔상이 나를 지나쳐 한 책을 열심히 살펴보고 있었다.
‘민식이로구나.’
녀석은 나를 인지하지 못하고 있지만, 나는 미약하게나마 인지할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나도 같은 책을 펼쳐보았다.
<7대 주선, 인내>
<수량: 1개>
<검은 파편 12개 필요>
그리고 눈을 크게 떴다.
7대 주선, 인내!
싱크홀에 입장한 것 자체가 이것을 구하기 위함이 아니었던가.
아마도 민식이도 구매할지 말지 고민하고 있는 것일 터였다.
모든 깃발이 검은 파편으로 변환되었다면, 아마도 유서희와 녀석이 나눠가졌을 가능성이 높았다.
어떠한 형식으로 분배가 되었을 진 모르겠지만 인간대표라는 입장과 마지막의 통합을 이끄는 역할을 했으니 상당수는 민식이 녀석에게 할당이 되었을 것이다.
어찌됐건 행동으로 보이는 것이 제일 중요했으므로.
또한 1차 경합에서도 검은 파편 몇 개를 구했을 터.
12개는 충분히 있을 수도 있었다.
쿵!
그때, 책 한 권이 내 옆으로 떨어졌다.
의아함에 고개를 돌리자, 내가 손을 대지 않아도 책이 펼쳐져 있었다.
자연스럽게 책의 내용을 읽었고.
<7대 죄악, 폭식>
<수량: 1개>
<검은 파편 12개 필요>
“······!!”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 책에 적힌 내용만을 바라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