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 7대 죄악(1) >
감옥의 주인이 말했다.
“비켜라.”
그러자 간수장이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단 한 마디로 간수장이 자리를 비웠다.
정면으로 부딪혔다면 적어도 수천 명은 죽어나갔을 정도의 존재가 간수장이었건만, 감옥의 주인 헬라시아가 단 한 마디로 그를 물러나게 만든 것이다.
그리고 그 헬라시아를 움직이게 만든 건 다름 아닌 유서희였다.
“작은 여자아이야. 내 마음에 들었으니 특별히 나는 너에게 ‘협조’할 것이다. 다음으로 원하는 게 있느냐?”
그 모습을 바라보던 사람들의 눈이 화등잔 만하게 커졌다.
오만하고, 괴랄 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헬라시아는 푸근한 눈빛으로 유일하게 유서희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대체 무슨 마법을 부린 거야?”
“헬라시아가 저 작은 꼬맹이를 따르네?”
헬라시아가 협조한다는 건, 그녀가 가지고 있던 만 이천 명도 함께 딸려온다는 소리다.
더불어 골칫거리였던 간수장까지 제거해주었다.
유서희는 일약 스타의 자리에 올랐다.
“구해야 될 사람이 있어요. 정확히 말하자면 사람은 아닐 수도 있지만요.”
“수감자들은 너를 따를 것이다.”
공식적으로 만 이천 명의 수감자를 넘겨준다는 발언이었다.유서희는 미소를 지었다. 결국 모든 열쇠는 감옥의 주인이 쥐고 있었다. ‘그’의 말대로 그녀의 환심을 산 게 주효했다.
동시에 흔히 ‘아포칼립스 라인’, ‘김민식 라인’이라 불리던 사람들이 하나, 둘 떨어져나가며 유서희에게 붙기 시작했다.
새로운 강자의 출현은 아포칼립스 길드마스터의 입장에서도 썩 달가운 게 아니었다.
“마스터. 유서희라는 꼬맹이가 수감자들을 데리고 이동하고 있다고 합니다.”
“마음대로 하게 놔두실 겁니까?”
김민식은 고개를 끄덕이지도, 젖지도 않았다.
애당초 유서희를 제지할 명분이 없다. 명분 없이 억지로 제지를 가하게 되면, 그 순간 여태껏 쌓았던 이미지가 무너질 것이다.
‘차라리 잘 됐다.’
감옥의 주인이 데리고 있는 만 이천 명의 수감자들은 항상 걸림돌이 됐다. 그들을데리고 어디로 가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짐을 제거해준 셈이다.
지금이 가장 중요했다.
유서희가 간수장을 치우며 성과를 내 조명을 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한국 최고 길드를 이끄는 수장이 그 작은 여자애보다 못한 모습을 보일 순 없는 노릇.
“오크와 드워프가 손을 잡고 엘프와 전쟁을 치르고 있다. 엘프들이 패배한다면 그 다음은 확실하게 우리다.”
“그럼 놈들의 뒤를 치실 것인지요?”
“그러다간 세 종족의 공격을 동시에 받을 수도 있다. 우리는 나머지 하나. 수인족을 공략해야 한다.”
어차피 셋 중 하나는 확실하게 패배한다.
김민식은 엘프가 패배할 것으로 내다봤다.
두 종족의 연합은 그만큼 강력하다. 하지만 분명히 그들도 엄청난 타격을 받을 건자명했다.
결국 그가 내린 수는 ‘수인족의 공략’이다.
마침 수인족이 분열되어 있다는 정보도 접했다.
그렇다면 다른 종족들과 달리 손을 써볼 구석이 많을 터였다.
‘이 전쟁의 승패는 내 손에 달렸다.’
준비는 끝났다. 이제는 크게 일보를 내딛을 때였다.
* * * * *
훅! 훅! 후우욱!
전신에서 땀이 증발하며 모락모락 김이 피어나고 있었다.
날카로운 송곳니가 아랫입술을 계속해서 찔렀다.
두 안광이 파랗게 빛났고, 양 손의 손등 위로 하얀색의 마법진이 새겨지고 이어지며 전신을 수놓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내 앞에, 오크로드 자이렐이 피 떡이 되어 쓰러져있었다.
[강력한 오크인자를 획득했습니다.]
자이렐. 마침내 녀석을 죽였지만 쉽지 않은 싸움이었다.
용의 인자, 그것도 이타콰의 피로 인해 변형을 했음에도 그 무식한 힘 앞에 질려버릴 뻔했다.
평범한 상태였다면 이기지 못했을 것이다.
‘검은 파편.’
게다가 그에게도 검은 파편이 있었다. 무려 여덟 개!
내가 가진 숫자와 같았다.
나는 총 16개의 파편을 획득하게 된 셈이다.
잠시 미소지었으나, 동시에 현기증이 몰려들었다.
‘부작용도 만만치 않군.’
무려 용의 인자다. 나는 다시금 인자가 발현될 때의 문구를 떠올렸다.
[특수한 용의 인자가 발현됩니다.]
-육감의 개통. 1초 이내의 일을 높은 확률로 예견 가능.
-용의 포효. 격이 낮은 모든 존재들이 자연스럽게 위축된다.
-힘, 체력, 민첩이 5씩 상승한다.
-단단해진 피부.
-변형 완료시 강렬한 정신력과 체력소모.
정신력과 체력을 무한정 소모하는 걸 제외하면, 엘프와 달리 아무런 패널티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만큼 용이란 종족의 위대함을 여실히 깨달을 수 있었지만, 문제는 그 소모의 정도가 장난이 아니라는 것.
고작 5분 정도를 싸웠는데도 엄청난 피로가 단번에 몰려왔다.
‘육감······ 놀랍군.’
오크로드와의 싸움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게 바로 ‘육감’이었다. 1초 앞의 상황이 자동적으로 머릿속에 그려졌다. 틀릴 때도 있지만, 대부분 개선 가능한 여지에서의 오차였으며 어지간한 건 들어맞았다.
그래서인지 정신력의 소모 역시 상상을 초월했다.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변형을 풀고 엘프로 되돌아갔다.
엘프와 오크는 전투의 와중이었다.
하지만, 오크로드 자이렐이 쓰러지는 걸 모두가 보았다.
오크들의 사기가 순식간에 바닥을 쳤고, 반대로 엘프들은 기세를 타서 학살에 가까운 살육을 자행하는 중이었다.
나는 고개를 내저으며 흑풍검을 다시금 들었다.
‘이런 곳에서 쓰러질 순 없다.’
모든 경합이 끝날 때까지, 쓰러질 생각은 없었다.
* * * * *
엘프들은 승리했다.
노예의 개념이 희박한 엘프들은 오크들의 씨를 말렸다.
그러자 드워프들이 나타나 모두가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남은 엘프의 숫자는 도합 오천. 전쟁이 끝난 직후라 모두가 지쳐있는 상황이었다.여기서 드워프들과 싸우면 서로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을 게 자명했다.
“우리는 그대들과 싸울 생각이 없다.”
그런데 드워프 킹 골고르가 선두로 나서며 화해의 손길을 내밀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우리와 손을 잡을 생각이 없나? 서로의 나쁜 감정은 뒤로 집어넣고 오로지 승리만을 위하여.”
“이미 오크와 손을 잡았던 너희들을 어떻게 믿지?”
퀸 엘라리뇨가 표독스럽게 말하자 골고르가 미소를 지었다.
“우리는 그들에게 약탈당한 것이다. 오로지 장비만을 제공했을 뿐, 그 외의 것은 아무 것도 준 게 없으니.”
“그래서 또 같은 수순을 밟으려고 그러는 건가?”
“아니, 이제는 우리도 싸워야지. 눈엣가시 같은 오크들이 사라졌으니 우리 둘이 힘을 합친다면 나머지 수인족이나 인간쯤이야 간단할 것이야.”
엘라리뇨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골고르는 이번엔 그녀의 근처에 있던 나를 지목했다.
“까마귀 군주! 오크로드마저 쓰러트린 그가 있는 곳에 싸움을 걸 생각은 없다. 정못 믿겠다면 우리의 깃발을 몇 개 넘기지. 그러면 거의 ‘완료’에 가까운 숫자를 모으게 되지 않겠나?”
현재 엘프들이 지닌 깃발은 두 개다.
오크들이 가졌던 다섯 개와 드워프들의 깃발 몇 개를 더하면 거의 열 개, 혹은 그 이상이 될 수도 있을 것이었다.
“깃발을 모두 넘겨라.”
“그 순간 ‘종료’되어버리면 우리로서도 방법이 없다. 엘프들이 가진 5개와 오크들의 깃발 5개, 우리의 것까지 합치면 15개로 경합이 종료되겠지.”
엘라리뇨가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엘프 진영의 깃발 3개가 털렸다는 걸 그들은 모르고 있는 듯했다.
“하이엘프 오르모아는 어디 있지?”
“오크들도, 우리 드워프들도 그녀를 납치한 적이 없네.”
“웃기는 소리! 오크들이 침략해와 오르모아를 납치한 걸 많은 이들이 봤다.”
“정말로 직접 본 게 맞나?”
엘라리뇨가 멈칫했다.
직접 본 건 한 명뿐이다. 그 한 명의 말로 여기까지 온 것이고.
하지만 주변을 둘러봐도, 그 엘프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이미 죽어 시체가 되어버린 걸까?
“하지만 오크들이 침략을 한 건 사실이다.”
“자이렐도 그 부분은 의아해하더군. 하지만, 맹세하건대 우리는 하이엘프의 납치에 관여한 바가 없다.”
“그럼 누가 오르모아를 납치했단 말이지?”
“그건 납치한 사람에게 물어보면 좋겠군.”
골고르는 명백하게 불쾌한 기색을 표출했다.
여기까지 와서 그가 굳이 숨길 이유가 없었다.
주변을 다 뒤져봤지만 오르모아의 흔적은 전혀 찾을 수도 없었던 것이다.
무언가가 이상하다.
그때, 드워프 킹 골고르가 충고했다.
“인간들이 움직이고 있다. 오크와 싸우는 사이에 수인족을 통합하고 있는 모양이더군. 이대로 시간이 지나면······.”
“4개.”
“흠, 대신 승리기준에 부합하는 15개의 깃발 외의 나머지 깃발은 우리에게 주어라. 그러면 우리 드워프는 다시금 용맹한 모습으로 너희를 도울 것이다.”
엘라리뇨가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거래가 성사됐다.
* * * * *
엘프가 승리했다!
척후병을 통해 정보가 들어왔다.
그것뿐이었다면 김민식이 이처럼 초조해하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드워프와 손을 잡았다고?’
꽈득!
쥐고 있던 유리잔을 그대로 부숴버렸다.
엘프가 이길 줄은 몰랐다. 그런데 그걸로도 모자라 드워프가 오크를 버리고 엘프와 합류했다고 한다.
그 소식을 듣자마자 오한이 들었다.
불길한 예감.
아직 수인족에 손을 뻗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들을 강제로 통합하려고했지만, 이 미친 수인족 놈들은 서로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모두가 힘을 합쳐도 될까 말까 한 이때에!
‘어떻게 해야 되지?’
온전한 상태로 수인족을 흡수해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건만. 하물며 드워프들의 피해는 전무하다고 한다.
이대로 수인족을 끌어들인다 하더라도 고작 1만 안팎일 것이다. 이놈들은 절대로하나로 힘을 모을 수가 없다. 수인족으로 묶였지만 여러 종으로 세분화 되어있는 탓이다.
‘그대로 맞붙으면 진다. 방법이 필요하다. 방법이······.’
초조감이 극에 달했다.
그러던 때에.
유서희가 귀환했다.
“오르모아. 자기 집이다 생각하고 편하게 있으세요!”
“······ 고마워요.”
“그런데 정말 너무 예뻐요. 저 남자들 음흉한 눈빛 보이죠? 무슨 비결이라도 있나요? 저도 한 명 사로잡고 싶은데.”
“비결은 딱히······.”
“그렇군요. 타고난 건 못 이긴다는 소리군요. 역시 세상은 불공평해.”
“충분히 아름다우세요.”
하이엘프 오르모아!
유서희는 몇 마리 오크의 시체도 함께 가져왔다.
그러곤 대뜸 김민식에게 찾아와 말했다.
“엘프들과 이야기를 해야겠어요. 좀 도와주시죠?”
이 땅딸만한 꼬맹이가 지금 한국 최강 길드인 아포칼립스의 마스터인 자신을 압박하는 건가?
김민식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 * * * *
나는 가만히 전방을 주시했다.
이미 유서희를 통해 모든 지시를 내려놓은 터라, 지금의 상황은 이미 정해져 있는것과 같았다.
5만에 달하는 사람들이 모였다.
무기를 들고, 적의를 가지고.
그 중심에 오르모아가 있었다.
“퀸 엘라리뇨. 그대가 나의 납치를 지시했나요?”
“그게 무슨 소리지? 오르모아, 나는 네가 인간진영에 있는 지금의 상황조차 이해가 되지 않는데. 너야말로 우리를 배신한 건가?”
“배신은 엘라리뇨, 그대가 했겠죠. 그렇게도 전쟁을 치루고 싶었던 건가요?”
둘의 의견이 맞지 않았다.
서로가 서로에게 배신이란 단어를 사용하며 헐뜯고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오르모아께서 살아계시잖아?”
엘프들의 혼란은 더욱 가중됐다.
오크에게 납치되었던 하이엘프 오르모아가 왜 인간진영에 있단 말인가?
엘프들이 하나, 둘, 다크엘프들과 멀어지며 그들을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정말 전쟁을 위해서 오르모아님을 납치한 건가?”
“오크랑 협력을 했단 말이야?”
의심.
그 두 단어가 뿌리를 내렸다.
이미 무슨 말을 해도 변명밖에 안 될 것이다. 한 번 의심이 싹트면 같은 단어도 해석이 달라지게 되는 법이었다.
오르모아의 바로 옆에서 유서희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고 서있었다.
나는 가만히 그 장면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파국이로군.’
< 26. 7대 죄악(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