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 형벌의 감옥(完) >
그러자 엘프검사의 시선이 나에게로 박혔다.
“자세는 잡혔으나······ 검을 배운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군.”
제법 놀랐다.
그는 상당히 뛰어난 심안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나의 자세와 근육의 모양새를살피며 내가 어느 정도의 검사인지 눈대중으로만 파악한 것이다.
돌아오고 고작해야 수개월. 흑풍검을 쥐며 제대로 검을 익힌 건 그조차도 되지 않았다. 아직 내 몸은 만들어져가는 중이었고, 워낙에 빠른 성장 탓에 몸이 제대로 적응할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본래 제대로 된 검사라는 건 몇 개월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나는 그 보충을 과거의 기억과 경험으로 메꾸고 있는 셈이었다.
“보는 것과 실전은 다를 겁니다.”
웃으며 말했다. 엘프검사는 수준급의 실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심안으로 살핀 결과 능력치도 나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역전의 검사. 하이엘프의 최측근임이 분명했다.
‘숨어서 깃발의 위치를 알아낼 수 없다면······.’
튀자.
엘프들의 반응으로 말미암아, 이곳에 모인 엘프들 역시 인간들과 마찬가지로 곳곳에서 소환 된 것이라는 확신을 얻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이들의 중심부로 침투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무엇보다.
‘다크엘프 퀸. 그녀가 지켜보고 있다.’
그림자와 비슷하나 희끄무레한 잔상 같은 것을 구석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다크엘프 퀸, 엘라리뇨가 은신을 한 채로 이곳을 지켜보는 중이었다.
심안이 아니었다면 그냥 지나쳤을 잔상.
엘라리뇨는 이곳에 모인 다크엘프들 중에서 최고 서열이었다. 그녀의 눈에 띄어 조금이라도 ‘깊숙이’ 들어갈 수 있다면 내게는 남는 장사였다.
이번 경합에서 인류의 승리를 위한 열쇠는 엘프들이 쥐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기에.
“패기는 좋군.”
엘프검사가 검을 들었다. 그의 주변으로 바람이 느껴졌다.
중급 바람의 정령이 그를 도와주고 있었다.
엘프들이 정령을 다루는 방식은 인간과는 차원이 다르다.
슈아아악!
거센 검격. 바람의 길을 따라 누구보다 빠르게 직진하며 내려치는 쾌검이었다. 몸을 살짝 젖혀 콧잔등을 스치고 지나가는 검의 차가운 감촉에 놀랐다.
빠르다. 보는 것보다 직접 경험하니 더욱 빠른 것 같았다.
직후에도 그는 주도권을 놓치지 않고자, 순식간에 검을 반대로 쥐어 아래에서 위로 검을 그었다.
차아앙!
퍼억!
아래로부터 날아드는 검을 쳐내곤 곧장 다리를 놀려 엘프검사의 복부를 걷어찼다. 복부를 걷어차인 엘프검사가 자세를 잡고자 주춤거렸고, 그 반응보다 빠르게 나는검을 그대로 찔러넣었다.
체엥!
검과 검이 부딪힌다. 중급 바람의 정령이 엘프검사의 등을 받쳐준 덕이다.
“발을 쓰다니, 치사하다!”
“역시 다크엘프는 이래서 안 된다니깐.”
엘프들의 야유가 시작됐다.
반대로 다크엘프 쪽에선, 의외의 선전에 다들 놀라는 기색이었다.
“뭐야. 제법 하잖아?”
“활은 못 다뤄도 검은 꽤 하는데?”
엘프검사가 빠르게 거리를 벌렸다. 나의 검격 안에 있다간 다시 주도권을 잡기 힘들 거란 판단에서였다.
훌륭한 판단이다. 나 역시 상당히 ‘재미’를 느끼고 있었다.
제천대성의 힘을 발휘하면 더욱 쉽겠지만 굳이 보여줄 필요는 없는 비장의 한 수다. 게다가 서로 ‘바람’을 다룬다는 입장에서 나는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내가 다가가자 바람의 정령이 나의 움직임에 족쇄를 걸었다. 역으로 바람을 불게 만들어 움직임을 느리게 하려는 속셈.
‘태을무극심법.’
그중 바람의 속성을 이용한다.
정령이 내보내는 바람과 융화되어 내 움직임은 역으로 빨라졌다.
몸을 살짝 낮춰 더욱 빠르게 전진한다. 그것을 본 엘프검사는 눈을 크게 떴으나, 이내 침착하게 맞수를 두었다. 그 역시 나를 향해 달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공격은 공격으로. 엘프답지 않게 다분히 전사적인 측면이 있었다.
이윽고 서로의 바람과 바람이 부딪쳤다.
서로가 서로에게 도약하며, 마침내 마지막 일수(一手)를 뻗었다.
“한 치도 밀리지를 않네.”
“그래서 누가 이긴 거지?”
“엘프쪽이 조금 더 빨랐던 거 같은데······.”
그 결과를 지켜보던 이들이 한 마디씩 말을 꺼냈다. 막상막하. 하지만 분명한 건 마지막 일수에서 결판이 났다는 것이다.
서로 등을 보이며 서 있었으나,쿨럭!
엘프검사가 피를 토하곤 반쯤 쓰러졌다.
애써 검으로 바닥을 짚은 채 겨우 자세만 유지하고 있었다.
잠시 후 복부가 피로 물들었다.
“좋은······ 싸움이었다.”
흑풍검을 집어넣은 뒤, 나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엘프의 특질을 가져왔기 때문일까? 태을무극심법을 다루는 것이나, 반응속도 같은 게 조금 더 빨라진 기분이었다.
정령들도 나를 두려워하는 기색이 많이 옅어졌다.
“역전의 검사를 정말로 이겨버릴 줄이야······.”
“저런 놈이 갑자기 어디서 튀어나온 거지?”
짝짝!
짝짝짝짝!
다크엘프들이 하나, 둘 박수를 쳤다.
반대로 엘프들은 분에 넘치는 눈빛으로 나를 노려봤다.
반을 잃고, 나머지 반을 얻은 셈이다.
이어 어깨를 으쓱하고 다크엘프 퀸, 엘라리뇨가 있는 방향을 바라봤다.
그녀는 아예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하지만 곧 다른 이에게서 그녀의 전언을 들을 수 있었다.
“퀸 엘라리뇨께서 너를 보고자 하신다. 따라오너라.”
모든 이들이 해산하자, 곧 검은색 까마귀 옷을 입은 다크엘프가 다가와선 내게 말했다. 까마귀의 깃털로 만든 저 옷은 ‘친위대’의 상징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올 게 왔군.’
일단은, 계획대로였다.
나는 최후의 영웅이었고 수많은 사람들과 만났다.
수많은 죽음을 겪었으며 그들이 죽기 직전 남긴 말들은 아주 주효한 정보일 경우가 많았다.
예컨대 경합의 장에서의 이야기들. 누군지 모를 존재로부터 ‘주박’에 의해 입이 막혔다곤 하지만 이미 죽어가는 자에게 그런 금제는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경합에 대해서 다른 이들보단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었으나, 퀸 엘라리뇨에 대해선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처음 보는 녀석이로구나. 이름이 무엇이냐?”
“테오라고 합니다.”
퀸 엘라리뇨의 첫인상을 말하자면 그야말로 도발적이었다.
생각해두었던 이름을 입에 담자, 퀸 엘라리뇨가 작게 웃었다.
“흔해빠진 이름인데. 어디 출신이지?”
“‘지평선’ 출신입니다.”
심연의 지평선!
거대한 용병도시이자 용병단의 이름이고, 그곳을 이끄는 건 다크엘프 엘더 쟈낙이었다. 라이라나 우리엘 디아블로와도 인연이 있는 존재가 쟈낙이었으니, 과연 퀸 엘라리뇨가 이 이름을 알지 살짝 떠본 것이다.
그리고 내 말이 끝남과 동시에 퀸 엘라리뇨의 눈이 잠시 흔들렸다.
“지평선? 심연의 지평선에서 왔단 말이냐?”
알고 있다!
그러면 퀸 엘라리뇨도 심연에서 왔다는 뜻일까?
나는 애매하게 웃어보였다. 그러자 퀸 엘라리뇨가 한참이나 나를 바라보더니 이어서 말했다.
“지평선 출신이라면 그 실력이 이해는 되는구나. 쟈낙님은 안녕하신가?”
“영주님을 아십니까?”
“알다마다. 50년 전에 그분이 잠시 나를 가르치신 적이 있지.”
“그럼 퀸 엘라리뇨께서도 심연에서 오신 모양이군요.”
“······? 이상한 소리를 하는구나. 쟈낙님은 ‘세계수’를 다룰 수 있는 몇 안 되는 엘더 중 하나. 그분은 ‘지혜의 나무’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갈 수 있다.”
말하자면 퀸 엘라리뇨는 심연 출신은 아니지만, 쟈낙이 세계수를 통해 넘어와선 직접 가르침을 주었다는 뜻이다.
이에 퀸 엘라리뇨가 의미심장하게 나를 쳐다봤고, 나는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쟈낙님이 직접 가르침을 내리다니, 좀처럼 없는 일인지라. 그분이 가지신 마안에 마음에 들 정도의 재능은 좀처럼 없지 않습니까?”
“그렇지. 그분이 가지신 붉은 마안은 아주 까다롭지.”
퀸 엘라리뇨가 기분 좋게 미소 지었다.
자신의 재능을 인정하는 나의 말에 의기양양해진 것이다.
다시금 나를 쳐다보는 퀸 엘라리뇨의 눈빛에서 조금의 호감이 더해졌다.
“지평선 소속이라면 나의 친위대가 되는데 문제가 없지. 그곳의 용병들은 모두 일당백의 전사라고 들었다.”
“저보고 친위대가 되라는 겁니까?”
“그래. 나는 너에게 직접 권유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제안을 거절하면 기껏 얻은 호감이 도로 날아가 버릴 공산이 컸다. 나는 그녀와, 그녀의 건너편에 있는 두 개의 깃발을 바라봤다.
‘퀸 엘라리뇨를 움직일 수 있다면······.’
우리엘 디아블로로서 만난 인연이 이렇게 부메랑이 되어 도움을 줄 줄이야.
퀸 엘라리뇨를 움직이면 사천이 넘는 다크엘프를 얻는 것이다. 앞으로의 일정에 상당한 도움이 될 것은 자명했다.
게다가 좋은 정보도 들었다.
‘그리고 쟈낙이 세계수를 다룰 수 있다고 했지.’
지혜의 나무라는 게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쟈낙이 세계수를 통해 세계를 이동할수 있다면, 미래에 예상외의 복병이 될 수도 있을 듯싶었다.
그녀와의 관계를 조금 더 진전시켜야겠노라고 마음먹으며 나는 퀸 엘라리뇨를 바라봤다.
“알겠습니다.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 흠, 말해보아라. 내가 들어줄 수 있는 것이라면 들어주겠으니.”
“용병은 본래 얽매이는 걸 싫어합니다.”
“그건 나도 알고 있다.”
“그러니 제 판단에 따라 따로 움직이는 일이 있더라도 양해를.”
“오냐, 대신 친위대의 옷만큼은 입어줘야겠다.”
굉장히 시원한 결론이었다.
까마귀 깃털로 만들고, 투구는 까마귀 부리처럼 튀어나온 그 옷을 입으라는 것이다. 들어주기 힘든 조건은 아니었다.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의 감옥에 온 것을 환영하마.”
그러자 지금 상황을 빗댄 재치 있는 농담과 함께 퀸 엘라리뇨가 다시금 미소를 지었다.
* * * * *
크아아아악!
잘리고, 물리며, 찢긴다.
거인이 비명을 내질렀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괴물들이 물 밀 듯이 밀려오고 있었다.
감옥을 지키던 간수장조차도 그들의 움직임을 막지 못했다.
“아무도······ 우리를 막을 순 없다! 썰어라! 죽여라!”
간수장의 머리를 거대한 도끼로 토막 낸 오크가 괴성을 내질렀다.
수천의 시체가 깔렸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 주변으로 3만이 훌쩍 넘는 오크들이 무기를 들며 승리를 자축했다.
“자이렐! 자이렐!”
“자이렐! 자이렐!!”
오크로드 자이렐!
간수장을 죽이고 그가 다섯 종족 중 가장 먼저 선봉장에 섰다.
* * * * *
그 변화를 가장 먼저 읽은 건 인간의 진영이었다.
몇몇 경로를 통해 사람을 잠복시켜둔 아포칼립스 길드가 그 정보를 가장 먼저 접했고, 그 즉시 다음 방안에 대한 토의가 이뤄졌다.
“오크들도 멍청하군. 그 많은 희생을 내면서 간수장을 죽이다니.”
“그래도 놈들이 어디로 공격해올지 모르지 않습니까?”
“일단 모든 출입구에 척후병을 보내서 대기토록 해야 합니다.”
그 중심에서 아포칼립스 길드의 길드마스터인 김민식은 눈을 감은 채 고뇌를 하는 중이었다.
‘오크가 가장 먼저 움직였다. 놈들은 엘프를 우선적으로 공격할 것이다.’
오크는 ‘아름다운’ 것을 증오하는 경향이 있었다. 특히 자연계에서 엘프는 오크의천적과 같았다. 오크는 침략으로 세를 유지하는데, 그 침략에 따라 자연이나 생태계의 훼손이 자연적으로 따라오기 때문이다.
엘프들은 오크들을 증오하고, 오크들도 엘프들을 증오한다.
‘간수장을 쓰러트리지 않으면 오로지 수성만이 가능하다. 반대편에서만 열리는 문······ 드워프들과 손을 잡아야 하나?’
또한 엘프는 드워프와도 사이가 나쁘다.
오크와 엘프가 전쟁을 벌이면 드워프들 쪽에선 손뼉을 치며 좋아할 것이다.
어부지리를 취할 기회.
그들과 손을 잡고, 수인족을 친다.
그림은 아름다웠다.
“발이 빠르고 은신에 능한 사람으로 드워프들에게 사람을 보내지.”
그가 결정하자, 회의는 종료되었다.
그리고 발이 빠른 사람 몇 명을 고르고 골라 드워프들에게 사자로 보냈다.
하지만 반나절이 지나고 돌아온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팔 하나도 잘려 있었다.
“그, 그들은 저희와 동맹을 할 생각이 없다고 합니다. 그, 그리고 이상한 것을 보았습니다.”
어떻게든 살아 돌아온 사자가 필사적으로 김민식에게 말을 전했다.
“이상한 것?”
“부, 분명히 오크들이 있었습니다. 오크로드 자이렐이라고 한 것 같습니다. 오, 오크와 드워프들이 손을 잡은 것 같습니다. 저희는 그들에게 쫓겼습니다.”
······ 뭐라고?
그게 어떻게 가능한 일이지?
망치로 후두부를 강하게 내리 맞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어찌하여 오크와 드워프가 손을 잡는단 말인가.
‘형벌의 감옥······.’
김민식은 심호흡을 했다.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분명히 정보가 없지 않았음에도 한 발 늦었다. 그것도 오크에게 선수를 빼앗겼다.
녀석들은 엘프를 공격하지 않았다. 대신 우회하여 동맹을 만들었다. 무식함의 대명사 오크의 머리에서 나온 수라고는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형벌의 감옥에서의 경합이, 결코 쉬울 것 같지 않다는 느낌이 강하게 드는 순간이었다.
< 24. 형벌의 감옥(完)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