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 형벌의 감옥(3) >
‘다크엘프 퀸.’
더욱 놀라운 건 다크엘프 중에서도 ‘퀸’의 존재가 있다는 것이었다.
엘프들은 그 구별이 세분화 되어있는 편인데, 엘더>퀸=하이엘프>엘프 순으로 계급이 나뉘어 있었다. 물론 대다수가 일반 엘프지만 아주 드물게 그 이상의 ‘피’를 타고난 존재가 태어나곤 했다.
물론 그 ‘피’라고 함은 일반적인 혈통이 아니다. 그야말로 타고나는 것이다. 대지의 축복을 받은 피가.
‘심연의 지평선’의 수장이자 다크엘프 엘더였던 ‘쟈낙’에 비하면 단순한 강함의 측면에서 한수 떨어진다고 칭해지는 하이엘프와 퀸이지만, 그럼에도 그 신성함과 고결함은 결코 엘더에 비해 수준이 떨어진다고 할 수 없다.
“나는 경고했다. 원래라면 경고조차 주어지지 않아야 정상이지만, 그대와 퀸을 존중하는 차원에서 하는 마지막 경고다.”
그래서인지 간수장도 엘프들을 함부로 못 대하고 있었다.
하이엘프와 다크엘프 퀸이 서로를 쳐다봤다.
하지만 다크엘프 퀸은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인상을 구겼다.
“이런 곳에서 시간을 지체할 순 없어. 오르모아,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을 잊은 건 아니겠지?
“엘라리뇨. 그러나 부족의 희생을 더는 강요할 수 없습니다. 대화로 풀어나갈 수 있을 거예요.”
“대화? 죽어서도 그 대화가 가능할지 궁금하군.”
서로 합이 안 맞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둘 다 다른 엘프에 비하여 나이가 어린 듯싶었다.
퀸과 하이엘프가 완전히 성장했다면 애당초 간수장은 문제가 되지 않는 탓이다.
‘숫자는 적지만, 힘은 우월하다.’
숫자는 인류가 훨씬 많지만, 정면으로 맞붙으면 결과를 알 수 없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라면 엘프들은 서로 화합이 되지 않았다.
‘일단 여기까지.’
엘프들 역시 은신의 귀재다. 언제까지 나의 은신이 통하리란 보장이 없었다. 그들의 일면을 살폈으니 일단 소기의 과제는 달성한 셈.
그림자 속으로 발걸음을 옮겨 자리를 벗어났다.
장장 3일에 걸쳐 엘프, 드워프, 오크와 수인족의 진영 모두를 탐색했다. 극도로 은밀하게 움직였기에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들어갔지만, 그만큼 이번 경합에서는 ‘정보’가 중요하다.
과거 인류는 이 경합에서도 졌다.
덕분에 규칙 정도의 지식기반은 있었지만 ‘어떻게 승리하느냐’에 대한 사전정보는 전무한 상황이었다. 그러니 더욱 신중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었다.
‘정리를 해보자면.’
나는 심안을 가지고 있으니, 단순한 무력의 비교는 누구보다 정확히 할 자신이 있었다. 그리하여 5개 진영에 대한 나름 객관적 정보를 정리해보았다.
1. 엘프.
병력 ? 1만.
평균 무력수위 ? 능력치총합 평균 280선.
수장 - 하이엘프 오르모아, 다크엘프 퀸 엘라리뇨.
2. 드워프
병력 ? 1만 8천
평균 무력수위 ? 능력치총합 평균 240선.
수장 ? 드워프 킹 골고르.
3. 오크
병력 ? 4만
평균 무력수위 ? 능력치총합 평균 200선.
수장 ? 오크로드 자이렐.
4. 수인족
병력 ? 2만 5천
평균 무력수위 ? 능력치총합 평균 230선.
수장 ? 늑대인간 가모즈.
5. 인간
병력 ? 5만
평균 무력수위 ? 능력치총합 평균 180선.
수장 ? 아포칼립스 길드마스터 김민식모든 병력이 단일 되어있고 단순 정면대결로 붙을 경우 어느 진영이 이길지, 나름고심하여 내린 결과는 이러했다.
엘프>오크=인간>드워프>수인족의 순위가 아닐는지.
전쟁이란 건 워낙에 변수가 많아서 이는 그저 단순한 순위놀음일 뿐이다. 하지만 귀중한 정보임은 부정할 수 없었다.
현 시점에선 오로지 나만이 이러한 객관적 지표를 가지고 있을 것이었기에. 그렇다면 내가 공략해야할 대상도 단순해진다.
‘엘프를 어떻게든 해야겠군.’
엘프의 무력은 온갖 정령술과 마법에서 나온다.
오크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패기가, 드워프는 예상할 수 없는 발명품들이, 수인족은 특정 조건에서 강해지는 힘을 무시할 수 없다.
하지만 이중에 가장 강한 건 역시 엘프다.
어찌 해야 할까.
균형을 맞추려면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
그나마 희망이 있었다. 인류의 무력순위가 나쁘지 않다. 이 정도면 충분히 ‘강자’라 할 수 있다. 물론 1차 경합에서 인류가 선방하지 못했다면 순위는 꼴찌를 달리고있었을 것이다.
볼을 긁적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탐식.’
탐색이 끝났으니, 이제는 탐식의 차례였다.
* * * * *
스르르르.
기절한 엘프 하나의 다리를 끌고 작은 호수가 담긴 굴속으로 들어왔다.
‘이 장소가 있어서 다행이야.’
1차 경합이 끝나고 내가 눈을 뜬 이곳은, 그 위치가 절묘하기 짝이 없어서 좀처럼찾기 힘든 장소였다.
근처에 대충 남자 엘프를 쓰러트리곤 나도 주변에 자리를 잡았다.
‘우선은 실험이다.’
‘인자’의 획득을 위해 해야 하는 행동은 무엇인가?
대상을 죽여야만 하는가?
그에 대한 실험을 해볼 작정이었다.
품에서 작은 단검 하나를 꺼내, 엘프의 손목을 살짝 그었다. 인간과 다를 바 없는 붉은 피가 새하얀 피부에 맺혔고, 그것을 손가락으로 훔쳐 입에 머금어보았다.
꿀꺽!
[새로운 ‘인자’를 획득했습니다.]
[엘프의 인자입니다. 인자의 정보가 적어 ‘조금 나아진 청각’ 수준의 변형만이 가능합니다.]
오호라.
죽일 필요까진 없는 듯했다.
다행이었다. 갑자기 엘프들이 죽어나가면 그쪽에서도 엄하게 경계를 할 것이 분명했으니.
고블린들은 죽여서 생명을 탐했는데,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확실히 상위호환이었다.
엘프의 피 몇 방울을 터 입에 머금어 봤지만 이렇다 할 변화는 없었다.
그렇다면 남은 건 다음이다.
‘변형.’
[저장된 ‘엘프의 인자’를 사용합니다.]
[변형이 완료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갸웃했다.
호수에 얼굴을 비춰봤지만 크게 달라진 게 없었다.
귀 끝이 아주 약간 뾰족해진 정도?
‘너무 평범한 엘프라서 그런가? 아니면 여러 종류의 인자가 필요한 걸까?’
그다지 크게 들리는 것 같지도 않았다.
한 개의 표본만으로는 답을 내릴 수 없다.
나는 쓰러진 엘프를 다시 질질 끌고 나갔다.
* * * * *
갑자기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는 엘프가 은연중 늘어나고 있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정찰을 나가거나 보초를 서던 엘프들이었으며, 잠시 기절한 끝에 원래의 장소에서 다시 눈을 뜨곤 하였다.
처음에는 별반 의심을 하지 않았지만 그 숫자가 늘어나자 이상하게 여기는 엘프들이 늘어났다.
이에 대대적으로 보안의 강화에 들어갔다. 다섯 명이 한 조를 이뤄 돌아다니도록지침이 바뀐 것이다.
그러던 중. 조장의 역할을 맡고 복도를 지키던 한스가 건너편에서 한 인영을 발견하곤 즉시 경계에 들어갔다.
“멈춰라! 누구냐?”
한스 주변의 엘프들이 일제히 활을 겨눴다.
그러자 복도의 반대편에서 다가오던 이가 양 손을 머리 위로 들었다.
“적이 아닙니다! 길을 잃고 헤매고 있었습니다.”
이내 모습을 드러낸 검은 인영은 뾰족한 귀와 나름 날렵한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피부색이 하얗지도, 검지도 않았지만 정령의 향기도 났다.
“처음 보는 엘프로군. 다크엘프냐?”
“맞습니다.”
“어디서 온 거지? 저쪽 방향은 ‘중립구’일 텐데?”
“길을 잃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한스가 인영을 살피곤 턱을 쓸었다.
그리고 손을 내리자, 주변 엘프들이 일제히 당겼던 활시위를 놓았다.
“혼자 돌아다니지 말라는 지침을 못 받은 건가?”
“처음 듣는 소립니다만.”
“연속해서 실종사건이 벌어지고 있다. 그래서 다섯 명씩 조를 이뤄 돌아다니도록지침이 내려왔지.”
“그렇군요. 알려줘서 고맙습니다.”
“흥, 빨리 돌아가라. 다크엘프치곤 예의가 조금 있는 것 같으나 그래도 그다지 말을 섞고 싶지 않으니.”
한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다크엘프라 칭해진 인영은 수고하라는 한 마디와 함께 어슬렁어슬렁 엘프의 진영으로 발을 옮기기 시작했다.
무사히 엘프의 진영으로 들어온 이후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서 부터가 중요하다.’
엘프들을 납치한 건 다름 아닌 나다. 더 많은 ‘인자’를 얻기 위해 그들을 납치하고피를 뽑아낸 것이다.
대략 50번 정도를 반복하자 거의 엘프에 가까운 변형이 가능하게 되었다. 완벽하진 않지만 어찌 ‘엘프’로 받아들여지는 수준은 되었다.
‘그런데 내 피부가 그렇게 까만가?’
다짜고짜 다크엘프 취급을 받을 줄은 몰랐다. 그야 하얗다고 할 수는 없지만 까만것보단 하얀 쪽에 가깝다고 생각했는데.
혀를 차곤 더 안으로 들어가자 엘프와 다크엘프들이 보였다.
“못생겼군.”
“다크엘프 치곤 꽤 개성이 있어.”
굉장히 직설적이었다.
하기야 우리나라 사람들이 흑인이나 백인의 얼굴을 잘 구분 못해도 아시아권 사람들은 구분해내는 것처럼, 저들도 나를 보며 이질적인 느낌은 받았을 것이었다.
그래도 엘프가 아니라는 의심은 받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가장 큰 관문 하나를 통과한 것과 같았다.
나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봤다.
‘확실히 사이가 안 좋아 보이는군.’
엘프는 엘프들끼리, 다크엘프는 다크엘프들끼리만 움직인다.
마치 구역을 나눠 싸우듯 서로 신경전을 펼치고 있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다크엘프의 구역으로 넘어갔다. 괜히 눈총을 받아 더 시선을 끌어 모을 순 없었으니.
“이봐! 어딜 가는 거야?”
곳곳에서 자랑을 하듯 얇은 검을 휘두르거나, 활시위를 당기며 표적을 맞추는 등 과격한 운동이 한창이었다.
‘깃발은 어디 있지?’
나는 그들을 살피며 발걸음을 옮겼다. 더 깊숙한 장소, 정확히 말하자면 깃발이 있는 장소를 알아내야만 했다.
“너! 못생긴 놈!”
아마 엘프와 다크엘프가 서로 깃발을 몇 개씩 나눠가졌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중 다크엘프들이 가진 깃발의 위치라도 알아낼 수 있다면 엄청난 정보가 될 것이다.
“자기는 아닐 거라고 생각하면서 다시 고개 돌린 너 말이야!”
“저 말하는 겁니까?”
“그래, 너!”
지척까지 다가온 남자 다크엘프 하나가 내 어깨를 붙잡았다.
“이 이상은 ‘친위대’만 들어갈 수 있는 장소라고. 혼쭐이 나고 싶은 거야?”
“살펴보는 것도 안 됩니까?”
“그래! 그나저나 너 같은 얼굴이면 잊을 리가 없는데 처음 보는군. 어벙한 걸 보니 ‘퀸 엘라리뇨’의 밑으로 들어온 지 얼마 안 됐지?”
“예.”
“그럴 줄 알았다. 따라와.”
남자 다크엘프가 앞장서서 걸었다.
나는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며 그 뒤를 따랐다.
‘기회가 이번만 있는 건 아니니까.’
이곳에선 은신도 힘들다. 최대한 의심받지 않게 행동하며 안으로 들어가는 게 최선이었다.
이어 그가 나를 안내한 곳은 엘프들이 모여서 활을 당기는 장소였다.
“자. 받아. 저 허멀건 엘프 놈들에게 우리의 실력을 보여주라고.”
활과 화살이 든 화살통을 넘기며 그가 씽긋 웃었다.
나는 내심 고개를 저었다.
‘활이라.’
돌팔매질은 잘해도 활은 잘 못 다룬다.
내가 거의 유일하게 못 다루는 무기가 활이었다.
차라리 검술을 시연하는 장소에 넣어줬으면 조금 나았을 텐데.
“뭐야, 다크엘프면서 활도 못 다루는 건 아니겠지?”
그의 눈이 샐쭉하게 변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화살통에서 화살 하나를 걸고 활시위를 당겼다.
‘모든 무기가 지향하는 점은 결국 하나지.’
최대한 마음을 가라앉혔다. 어차피 활도 살상을 위한 무기다. 다뤄보면 비슷할 거란 자심감으로 신중하게 활시위를 놓았다.
슈우우웅!
툭!
정확히 바닥에 박힌 활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주변 다크엘프들이 활을 다루는 솜씨는 프로라도 해도 명색이 없었다. 과연 자연에서 살아가는 종족다웠다.
하지만 내 주 무기는 검이다. 이상과 현실의 차이였다.
“다크엘프의 수치로군.”
“여태까지 어디 숨어 있다가 나온 건가?”
나를 안내해줬던 남자도 한숨을 내쉬었다.
“너 1차 경합에선 어떻게 살아남은 거야?”
“그냥······ 어찌저찌······.”
“에휴, 저기 구석에서 연습이나 더 해라.”
그가 억지로 나를 구석으로 밀어 넣곤, 자리를 떠났다.
‘잠입하는데 성공은 했는데 예상외의 난관이로군.’
들어오자마자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을 줄이야.
주변에서 나를 바라보는 다크엘프들의 입가에 비웃음이 맺혔다. 엘프와 달리 다크엘프들은 ‘무력’을 중요시한다. 괜히 ‘타락한 종족’이라 불리는 게 아니다.
어깨를 으쓱하며 활을 쥐었다.
내가 바라는 건 ‘깃발의 위치’를 알아내는 것이었으니 어떤 취급을 받던 상관은 없었다. 더 좋은 취급을 받아서 중심부에 다다를 수 있다면 더 좋기야 하겠지만 말이다.
“아악!”
“뭐하는 거야! 엘프 따위에게 지지 말라고!”
그리고 머지않아, 검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주변의 다크엘프들이 우르르 몰려가며 소리의 진원지로 모이기 시작했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궁금증에 다가가서 살피자, 검을 든 엘프검사 하나가 다크엘프를 압도하고 있었다.
차아앙!
이내 다크엘프의 검이 날아가 바닥에 박혔다.
그러자 엘프검사가 검을 번쩍 들곤 외쳤다.
“내게 더 도전해볼 자는 없는가!”
“이번엔 내가 하지.”
“좋다.”
꽤 중후한 느낌의 다크엘프가 검을 쥐곤 나섰다.
다크엘프들 중에서도 나름 검을 잘 다루는 검수인 듯 주변에서의 환호가 더욱 커졌다.
차아앙!
툭!
하지만 20합을 나누기도 전에 검이 날아갔다.
“······ 내가졌다.”
깔끔하게 패배를 인정한 다크엘프가 물러나자, 주변에서의 웅성거림이 더욱 커졌다.
“할번이 졌어?”
“고작 20합 만에?”
“아무리 역전의 검사라지만 실력차이가 심하군.”
“퀸의 친위대가 아니라면 상대를 못할 거 같은데.”
엘프검사가 다시금 검을 들고 외쳤다.
“나의 검을 받을 자, 더 없는가!”
다크엘프들이 주춤했다. 연속적인 패배에 굴욕감이 깃든 표정을 지었지만 기대주가 볼품없이 무너진 상황이다.
또한 엘프검사는 일반 검사가 아니었다. 하이엘프의 측근을 지키는 역전의 검사가 그였던 것이다.
또 지면 그런 망신이 없다.
이에 모두가 눈치만 보는 상황.
“이게 다인가! 다크엘프들이여! 너희가 말하는 힘의 논리대로 덤벼 보란 말이다!”
“제가 나서겠습니다.”
척!
한 발자국을 앞으로 내밀자, 모두의 시선이 내게로 쏠렸다.
“저 녀석은?”
“활도 제대로 못 다루던 다크엘프잖아?”
“낄 데 안 낄 데가 있지······.”
주로 안 좋은 여론이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스릉!
천천히, 흑풍검을 뽑았다.
< 24. 형벌의 감옥(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