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 형벌의 감옥(2) >
쿵! 쿠우웅!
콰아아앙!
첫 번째 경합이 치러졌던 장소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하늘이, 모든 대지가 갈라지며 균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패배자의 말로. 완전한 소멸이었다.
우주의 공간에서 나는 그 장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문이 열렸을 때.
할짝!
다시 눈을 감았다가 뜨자, 이타콰의 푸른 눈이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왔다.
녀석이 내 뺨을 핥으며 나를 걱정하듯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괜찮다.”
손을 뻗어 녀석의 턱을 쓰다듬었다.
그러자 이타콰가 골골대며 기분 좋은 소리를 냈다.
이어 상반신을 들어 올린 나는 주변을 둘러봤다.
‘호수.’
작은 호수 안에 눕혀져 있었다.
이윽고 눈앞으로 몇 줄의 글귀가 떠올랐다.
[탈주 고블린과의 경합에서 승리하였습니다.]
[경합에서의 영향력에 따라 일정한 보상이 주어집니다.]
[각성자 ‘오한성’의 영향력은 34.9%입니다.]
[34,900pt를 획득했습니다.]
[총 288,400pt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검은 파편 3개를 획득했습니다.]
[총 8개의 검은 파편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포인트는 원래부터 넘쳐나는 상황이었지만, 검은 파편 3개가 더 주어졌다. 도합 8개의 검은 파편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분명한 건 누구보다 많은 재화를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허공에 십자 인을 그었다.
그러자.
이름: 오한성
직업: 천지인(天地人)
칭호:
● 오한성(無, 순수마력 10당 모든 능력치+1)● 열두 시련의 파훼자(6Lv, 지능+9)● 놀 궤멸자(5Lv, 체력+7)힘 67(60+7) 민첩 62(50+12) 체력 66(52+14)지능 66(45+21) 마력 72(60+12)잠재력(267+66/475)
잠재능력치: 4
스킬: 심안(9Lv), 지배자(9Lv), 전이(???), 냉혈(5Lv), 칠흑의 손길(5Lv), 요리(3Lv), 정령사(4Lv), 진·탈혼무정검(6성), 백보신권(5성), 금강불괴(5성), 태을무극심법(3성), 대장장이(4Lv), 탐식(無)착용장비: 요르문간드(2Lv, 지능마력+5), 승천자의 망토(민첩+5), 흑풍검, 게 아살의 창 조각(모든능력치+1)
보유 포인트: 288,400pt
[전후비교]
힘 53 민첩 50 체력 52 지능 52 마력 67 잠재력(218+56/466)힘 67 민첩 62 체력 66 지능 66 마력 72 잠재력(267+66/475)그간의 변화가 일목요연하게 보였다.
준수하기 그지없는 능력치다. 아름다울 정도로 능력치의 배분이 잘 되어있었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한쪽으로 쏠려있는 것보다 이처럼 ‘균형 있는’ 능력치의 배분이, 특수한 상황을 제외하곤 더욱 강한 힘을 발휘하는 경우가 많았다.
한 달 반 동안의 성장, 그리고 새로운 스킬의 발견.
‘탐식.’
무엇보다 내가 주목하는 건 관리자의 권한이다. 죄악의 고블린 ‘비브르’로부터 나는 그의 권한인 ‘탐식’을 손에 넣은 것이다.
더욱 자세하게 들여다보자 관련 된 설명이 떠올랐다.
<탐식 ? 무(無)등급>
-상대의 ‘인자’를 포식하는 스킬입니다.
-도합 세 개의 ‘인자’를 체내에 보관할 수 있으며, 그중 하나의 인자만을 ‘발현’하여 대상의 특성을 가져오는 게 가능합니다.
-보관한 ‘인자’의 이해도, 혹은 더한 탐식의 결과로 ‘인자’를 진화시키는 것 또한 가능합니다.
인자?
‘DNA를 말하는 건가?’
설명만 봐도 대강의 이해는 되었다.
요컨대 내가 포식한 상대의 특성을 가져와 덧씌울 수 있다는 것. 고블린들이 뿔을얻고 신체의 변형을 가한 것과 약간은 비슷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욱 상위의 스킬이며 보다 안정감이 있었다. 아마도 이 스킬이 탈주 고블린들이 변형했던 원인의 ‘원류’이기 때문이리라.
‘관리자의 권한은 천차만별이군.’
에인션트 원의 권한으로 말미암아 나는 사람들의 ‘기억’을 훔쳐볼 수 있게 되었다. 상시 발동하는 건 아니지만 감정이 과잉되면 원하지 않아도 기억이 보인다.
반면에 탐식은 내가 조절할 수 있는 권한이었다.
그래서인지 스킬란에 이름을 올리고 있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이 역시 굉장한 힘이라는 점. 이래서 알 아락사르가 ‘관리자의 힘을 모으라’고 했는지 모르겠다.
모든 관리자가 이와 같은 힘을 지니고 있다면, 그들의 힘을 총망라할 경우 어느 정도의 신위를 발휘하게 될지 나조차 상상이 안 갔다.
‘세 개의 인자를 보관할 수 있다. 인자는 종족별로 나뉘는 건가?’
자리에서 일어나 턱을 쓸었다.
이제 막 얻은 권한이지만 사용하기에 따라서 꽤 유용한 힘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강철 코끼리’의 피부나 상아 같은 특성을 가져올 수 있다면 굉장히 든든할 것이다.
‘주변부터 둘러봐야겠군.’
호수 주변엔 작은 구멍들이 나 있었다.
왜 이곳에 나 혼자 떨어진지는 모르겠지만, 일초라도 빨리 주변의 상황부터 살펴보는 게 타당한 순서일 듯싶었다.
* * * * *
길게 이어진 복도.
퀴퀴한 냄새와 공기. 광활한 지하였다.
나는 최대한 은신한 채로 주변을 둘러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형벌의 감옥. 제대로 왔군.’
다음 경합의 장이다.
이곳은 그나마 아는 게 많았다.
거미줄처럼 엉킨 감옥은 총 5개로 등분되어 있었다.
인간, 엘프, 드워프, 오크, 수인족의 감옥으로 말이다.
인간진영의 감옥을 돌보는 수장은 ‘헬라시아’다. 하지만 만약 헬라시아가 적으로 돌아섰다면 기존에 형벌의 감옥으로 들어갔던 만 명이 넘는 사람들을 데리고 감옥의 중심, ‘중립구’로 들어가 적대시했을 것이다.
‘과거에는 1차 경합에서 졌다고 했지.’
헬라시아가 중립구로 오천 명 가량을 데리고 돌아간 덕분에 경합을 하는 내내 몇 번이나 전멸할 위기를 겪었다고 했다.
그만큼 이번 경합의 내용은 쉽지 않았다.
‘깃발을 빼앗아 돌아와야 한다.’
각 진영마다 깃발이 다섯 개가 있다. 남의 것을 빼앗고, 자신의 진영에 속한 깃발을 지키며 제한시간을 넘겨야 비로소 결과를 알 수가 있다.
하지만 모든 ‘진영’으로 통하는 길은 오로지 ‘중립구’를 거쳐야 한다. 중립구엔 간수장들이 있다. 그리고 다른 이종족들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로 ‘1차 경합’을 뚫고 온 종족들이었다.
‘패배하면 수호자로서의 힘을 빼앗긴다.’
비브르의 말이 사실이라면, 나는 어떻게 해서든 인간진영이 승리하도록 만들어야 함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라면 압도적으로 승리하여 헬라시아가 인간의 편이라는 것이다. 지금쯤 헬라시아에게 민식이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설명을 듣고 있을 터였다.
나는?
굳이 들을 필요는 없다. 규칙은 이해하고 있었으니깐.
오히려 주변을 둘러볼 시간이 주어진 셈이니 내겐 ‘특혜’와 같았다.
‘간수장들을 어떻게 구워삶느냐에 따라 진행이 극과 극으로 나뉘지.’
가장 중요한 건 역시나 중립구다.
모든 감옥들을 이어주는 장소.
간수장들은 무척이나 강하다. 적대하여 죽이는 것보단 뇌물이라도 쥐어줘서 구워삶는 게 빠르다.
나는 중립구 쪽으로 발을 옮겼다.
중립구는 다섯 개의 철창으로 나뉘어져 있다.
각 구역의 감옥을 담당하는 간수장은 각각 한 명씩 있으며, 이들의 역할은 인류를비롯한 이종족들이 감옥에서 나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철창의 너머에, 거대한 배불뚝이 거인이 창을 든 채로 보초를 서고 있었다. 무시무시한 안광으로 주변을 훑으며 압도적인 존재감을 과시했다.
“음? 쥐새끼가 있나?”
500m 남짓의 거리에서 지켜보던 나는 재빨리 몸을 숨겼다.
엄폐물을 쌓고 몰래 지켜봤는데, 그것을 눈치 챈 것이다.
‘역시 쉽지 않겠군.’
심안으로 살핀 결과는 더욱 놀라웠다.
이름: 간수장(value-지배불가)
종족: 거인
능력치:
힘 85 민첩 85 체력 85
지능 75 마력 75
잠재력(405/405)
스킬: 창 회오리(7lv), 압도적인 힘(7lv), 왕의 손바닥(7lv)나조차도 상대가 버겁다. 싸우면 백이면 백 질 것이다. 이타콰가 합류해도 마찬가지다.
저런 간수장을 적으로 돌린다?
지금 상황에선 몇 천, 어쩌면 만 단위로 죽어나갈 수도 있었다. 단순한 능력치만으로도 놀랍지만 스킬들의 구성이 심상치 않았다. ‘대량학살’을 하기에 더없이 어울리는 이름들 아닌가.
‘간수장을 피해가는 방법은 몇 가지 있지.’
간수장도 잠은 잔다. 소수의 인원으로 구성하여 다른 진영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
전체 지하감옥의 구조는 일단 자신의 진영을 막고 있는 간수장 하나만 어찌하면 ‘다섯 통로’에 다다를 수 있도록 설계가 되어있었으므로.
그렇게 넘어가면 오로지 반대쪽에서만 열 수 있는 문이 있었다. 그래서 후에는 그문에도 인원을 배치하여 감시해야 하지만······.
혹은 용감하게 거래를 하거나, 유인을 할 수도 있었다. 구체적인 내용까진 알지 못했지만 그러한 방법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간수장을 피해간대도 끝이 아니다.
‘이곳에선 진정한 적도, 아군도 없다.’
다섯 이종족들은 모두가 적이 아니다.
반대로 모두가 아군도 아니다.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거나, 연합을 하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배신 역시 마찬가지.
거기서 주도권을 어찌 쥘는지. 일단은 지켜보기로 했다.
‘유서희를 움직여야겠군.’
나 혼자 상대진영으로 넘어가는 건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우선 유서희를 정보통으로 삼아, 반대진영을 살펴보는 게 내가 해야할 일일 터였다.
그들의 움직임과 동향을 알 수 있다면 유서희에게 힘을 실어주는 것도 가능할 테니.
고개를 끄덕이곤 발걸음을 돌렸다.
* * * * *
5만 명이 넘는 인원이 문을 넘었다.
헬라시아.
거대한 덩치. 뱀의 머리를 가진 여자가 인류를 환영했다.
“반갑구나. 나는 이 감옥의 주인인 헬라시아라고 한다.”
채찍을 들고 무서운 미소를 지으며 헬라시아가 말을 끝마치자, 그녀의 뒤로 ‘형벌의 감옥’에 갔었던 사람들이 줄지어 쇠고랑을 찬 채 나타났다.
“1차 경합에서 규칙을 어기고 이곳으로 강제이동 된 인간들이다. 만약 1차 경합에서 너희들이 패배했다면 나는 이 인간들과 함께 너희를 ‘공격’할 예정이었다만, 운이 좋구나.”
하지만 사람들의 상태가 이상했다.
도합 1만 2천명. 그들은 침을 흘리거나 눈에 초점이 없었다.
헬라시아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이번 경합이 끝날 때까지 이들은 나의 소유니라. 하지만 너희들과 ‘협조’하여 이길 수 있도록 도와는 줄 것이다. 그래, 너희들이 내 마음에 드는 행위를 한다면 나는더욱 쉽게 너희들에게 ‘협조’할 수 있겠지.”
“저들이 원래대로 돌아올 수 있는 것이오?”
아포칼립스 길드의 수장인 김민식이 나섰다.
곧 헬라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경합에서 승리하거든, 내 주박은 풀린다. 이들도 원래의 정신으로 돌아올 것이다. 하지만 그 전까진 내 감옥의 수감자에 불과해.”
“이번 경합의 내용을 알려주시겠소?”
“이곳엔 너희 인간만 있는 게 아니다. 엘프, 드워프, 오크와 수인족이 더 있지. 그들은 각각 다섯 개의 깃발을 가지고 있으며, 그들로부터 깃발을 빼앗아오고 너희들의 깃발을 지키는 게 이번 경합의 내용이다.”
이종족!
그들이 존재한다는 말에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엘프가 있다고?”
“드워프면······ 세상에.”
여태껏 인류는 이종족을 만나지 못했다. 그나마 밝혀진 거라곤 나찰산의 괴물들뿐이었으니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물론 이종족 또한 존재할 것이란 추측이 나돌긴 했지만, 만나자마자 서로 경합을 하는 위치에 서게 될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이어 모두가 감옥의 벽 쪽을 바라봤다.
거대한 감옥의 벽에 다섯 개의 커다란 깃발이 걸려있었다.
청색의 별 특징이 없는 깃발이었다.
“경합의 종료시점은 한 진영이 ‘15개’의 깃발을 모았을 때다.”
헬라시아는 이후 몇 가지 설명을 더해주곤,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1만 2천명의 의식 없는 사람들이 좀비처럼 그녀를 따라갔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그러니까 깃발 쟁탈전이라는 거 같은데.”
“다섯 종족이 서로 싸우는 거야?”
모두들 얼이 나갔다. 하지만 이곳엔 김민식이 있었다.
과거의 기억을 가진 남자.
이번 경합에 관해서도 어느 정도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과거의 인류가 얼마나 멍청한 선택들을 했는지도.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주변에 있던 기사 한 명이 크게 외쳤다.
“조용! 지금부터 긴급회의를 할 것이다. 각 길드의 대표들, 혹은 이름이 불린 사람은 모두 지정된 장소로······.”
자신들이 있는 감옥의 지도를 그렸다.
그리고 사람을 나눠 ‘중립구’까지 나아갔다가, 간수장에 의해 50명이 죽고는 빠르게 돌아왔다.
깃발을 다섯 장소에 나눠놓고 아포칼립스 길드의 길드원이 나뉘어 지키도록 한 건 거의 강제였다. 일반 각성자들이나 다른 길드원들은 약간의 불만은 토로했지만 그들이 1차 경합에서 보여준 모습을 기억하기에 어쩔 수 없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마스터. 어디 갔다 오셨어요?”
“좋은데요.”
그리고 유서희가 잠시 사라졌다가 돌아왔다.
유서희의 입가엔 미소가 가득했다. 싱글벙글. 김혜윤은 고개를 갸웃했다.
“좋은데요? 그런 곳이 이 감옥에 있나요?”
“나만 좋으면 좋은 곳이죠, 뭘. 으히히.”
유서희의 웃음은 끊이질 않았다. 실없어 보일 정도의 환한 웃음이라 김혜윤은 계속 의아해 하였지만 정작 유서희는 이유를 알려주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후 웃음을 멈춘 유서희가 주변을 둘러보곤, 조용히 김혜윤의 귓가에 속삭였다.
“헬라시아가 좋아할만한 걸 알아냈어요.”
“정말요?”
김혜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안 그래도 헬라시아가 말만 ‘협조’라 해놓고 방관하고 있었기에 말이 많았다.
이번 경합에서 그녀를 움직이는 게 키포인트라는 건 모두가 짐작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움직이지 않았고, 결국 주먹구구식으로 아포칼립스 길드가 모든 걸 관장하여 움직이고 있었다.
모든 의식주와 배치를 그들이 담당하니 약소길드는 아무런 발언권도 없는 상태.
그들의 강제적인 명령에 슬슬 불만이 터져 나오는 상황이었다.
그러니 ‘헬라시아’를 움직이면, 아포칼립스 길드의 독주를 막고 발언권을 얻을 수있을 거란 이야기가 있었지만 정작 그녀를 움직일 방법이 없었다.
유서희가 음흉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계획대로만 진행되면 저희가 주도권을 잡을 수 있을 거예요.”
* * * * *
간수장이 잠시 조는 사이 나는 그곳을 지나가 엘프들의 영역으로 향했다.
대략 일만여의 엘프들이 철창을 앞에 두고 간수장과 대치하는 중이었다.
“길을 여세요. 그대가 우리를 막을 권한은 없습니다.”
“억지로 나가겠다면 죽음뿐. 돌아가라.”
엘프의 중심부에 있는, 관을 쓴 여자엘프를 어둠속에서 살피곤 작게 감탄했다.
‘하이엘프······!’
순혈 중의 순혈이라는 하이엘프가 이런 장소에 있을 줄이야.
하물며 주변엔 엘프만이 아니라, 다크엘프도 섞여있었다.
그야말로 흑과 백의 조합이었다.
< 24. 형벌의 감옥(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