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신사냥꾼-89화 (90/251)

< 23. 경합의 장(4) >

도망자가 되면 아포칼립스 길드가 만든 성의 근처에서 수성을 하고, 술래가 되면 모두가 원정의 시간을 갖는다.

왕도다. 적어도 한, 두 번은 통할 법한 수였다.

하지만 이게 끝이라면 위험하다. 왕도가 왕도인 건 그 올곧음 때문이다. 변칙을 상정하지 않는 정공법은 옆에서 치고 들어오는 공격에 약하다.

‘고블린의 진화에 대해 이들은 모른다.’

지금 아포칼립스 길드가 간과하는 건 바로 이점이다.

고블린은 뿔이 많아질수록 강해졌다. 신체능력이 배가 되고, 큰 뿔이 세 개가 되자 인간 수준의 지능을 갖추게 되었다.

육체적 강함만을 생각하여 ‘어차피 고블린’이라는 인식 탓에 놈들의 지능이 높아지는 걸 경계하고 있지 않았다.

“고블린들이 보이지 않는군요.”

“우리가 무서워서 다 도망간 게 아닐까?”

108시간 째.

술래의 역할이 되어 대규모 군집을 이루고 이동을 시작했지만, 이전과는 다르게 눈에 들어오는 고블린의 숫자가 확연히 줄어들었다.

고블린도 학습한 것이다. 뭉쳐있는 인간은 그저 피하면 그만이라고. 그들만의 ‘의사소통’ 방법으로 인간들이 움직이는 경로를 파악하고 있었다.

결국 108~120시간 사이 술래의 시간은 고블린 오백여 마리를 잡은 정도로 종료되었다. 인간진영이 4만 명이상 모였다는 걸 생각하면 형편없는 수치다.

그리고 120시간이 넘자, 고블린들이 ‘벽’을 부쉈다.

쉬이이잉!

쿠아아앙!

돌무더기가 날아왔다.

“이, 이게 뭐야?”

“피해라!!”

콰아앙!

바위와 돌, 크고 작은 것들이 무차별하게 쏟아졌다.

고블린들은 아주 멀리에서 거대한 바위를 탑재해 공성병기로 벽을 부수는 중이었다.

“미친! 고블린 주제에 원거리 공격이라고?”

“아포칼립스 길드는 뭐하는 거야!”

“아아악!”

정예들이 발 빠르게 돌이 날아오는 방향을 향해 움직였다.

하지만 도착했을 땐 고블린들이 없었다.

공성병기만 남겨둔 채로, 증발한 듯이.

“공성병기를 발견했습니다만, 고블린들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정말 고블린의 소행일까요? 공성병기의 구조가 과거 인간이 만든 구조와 매우 유사합니다.”

“진화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육체만이 아니라 머리도······ 그렇다면 이곳에서 수성만 하는 건 좋지 않은 방법 같습니다.”

정예들이 순찰을 나갔다가 돌아와선 안건을 올렸다.

나는 ‘칠흑의 손길’을 사용해, 그림자 밑에 숨어서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다시 돌아왔다. 역시나, 이 이야기는 삽시간에 퍼져서 소문이 되었다.

“들었나? 고블린들이 도구도 이용할 줄 안다는군.”

“미친, 이대로면 확실하게 지겠는데?”

“무슨 수를 내야 하는 거 아닌가?”

불안감이 한층 더 커졌다.

안 그래도 이전 ‘술래’의 차례에서 고작 500마리밖에 잡지 못했다. 반대로 인간이사냥당하는 숫자는 그 몇 배가 되는 수준이었다.

나는 얇게 미소 지었다.

매너리즘의 타파. 저 얇은 벽 하나에 의지해 변화를 두려워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모두가 다른 사람이 모였다. 이러한 집단을 움직이려거든 ‘소문, 그리고 공포’를 자극해야 한다.

하나로 뭉칠 수 있는 구실이 주어져야 하는데, 저 ‘벽’이 모두 막아버렸다.‘내가 부쉈다.’

그래서 부쉈다.

내가 지배한 고블린들은 상당히 진화한 상태다. 다른 뿔이 달린 고블린을 습격하여 죽이면 그 숫자 그대로 뿔이 돋아난 덕분이다.

약간의 지식만 주면 그걸 응용할 줄도 알았다.

아직은 아니지만 다른 고블린들이 더 진화하면 확실하게 ‘도구’를 사용할 게 뻔했다.

자, 나는 기회를 주었다.

계속해서 이대로 주저한다면, 나는 더욱 극단적인 방법을 쓸 수밖에 없다.

‘이제 어찌할 테냐?’

사람들의, 아포칼립스 길드의, 민식이의 결단을 기대했다.

나는 기회를 주었고 그것을 활용하는 건 그들의 몫이었다.

* * * * *

촤아악!

발목을 자른다.

이동이 불가능하게 된 고블린을 다른 사람이 죽인다.

태을무극심법이 3성에 오르며 흑풍검을 쥔 것만으로 ‘암령’이 날뛰는 현상이 사라졌다.

콰득!

키에엑!

그대로 달려드는 고블린의 어깻죽지를 좌악 그어버렸다.

“정말 사람 맞아?”

“사람이 아니라는 소문이 있던데.”

“무식하게도 싸우는군. 매일 봐도 질리지 않는다니까.”

“저 갑옷도 그렇고, 뼈를 자르는 힘도 장난이 아니야.”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하지만 개의치 않았다.

다만, 주변 고블린 모두를 구제하고 천천히 주변을 둘러봤다.

군집을 나눴다.

4만의 인간을 1만씩 나눠, 마치 학익진의 형태로 샅샅이 쓸어버리는 방법을 택했다.

결국 수비를 버리고 공격에 올인 한 셈이다.

다행히 사태를 심각하게 받아들여서 다행이었다.

갑작스러운 태도의 변화에 당황한 건 고블린들도 마찬가지였다.

이전과 달리 꽤 많은 고블린을 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아아악!”

“함정! 함정이다!”

교묘하게 바닥을 파고 숨겨서, 그 안에 죽창을 꽂아 넣는 기본적인 함정이나 ‘줄’을 밟는 순간 나무에서 가시가 잔뜩 박힌 돌이 떨어지도록 만드는 제법 제대로 된 함정까지.

‘지형에 대한 이해’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고블린들은 이 경합의 장이라 불리는 장소에서 꽤 오랜 시간 생존해 있었음이 분명했다.

물론 함정들은 사람을 죽이기엔 2% 부족했다.

하지만 고블린들은 ‘도망자’의 역이었고 결코 사냥을 위한 함정이 아니라는 걸 깨닫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부상자! 부상자를 놓고 갈 겁니까?”

“제기랄, 상처가 지랄 맞아서 치유마법도 제대로 안 들어!”

움직임의 지연.

벽이 무너진 걸 고블린들도 파악했으며, 인간군집이 ‘공격’을 선택했다는 것 역시도 파악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놈들이 노리는 건 우리가 ‘술래의 시간’일 때 최대한 움직임을 늦춰서 시간을 허투루 보내게 하려는 속셈이었다.

하지만, 하지만, 너무 이상하다.

너무 빨리 알아차렸다.

“추적과 탐색에 능한 사람들을 따로 모으겠다. 어디선가 우리를 지켜보는 ‘눈’이 있음이 분명하다.”

아포칼립스의 수뇌부들도 이상함을 느꼈는지 정식으로 공표했다.

탐색과 추적에 능한 사람들을 따로 모집해 조를 구성하고, 더욱 철저하게 주변을 탐색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허탕이었다.

‘지켜보는 눈’은 없었다.

그럴 수밖에.

‘표식.’

나무나 땅, 바위 등에 새겨진 아주 작은 표식들.

신경 써서 보지 않으면 그냥 지나칠 정도로 미세하게 새겨져 있었다.

하지만 이 표식은 같은 고블린에게 보내는 메시지가 아니다.

‘고블린이 인간에게. 인간이 고블린에게······.’

과연. 그제야 나도 전체적인 맥락이 보이기 시작했다.

‘인간 첩자가 있다.’

놀라운 일이었다.

고블린이 인간진영에 첩자를 심는다?

마치 내가 한 전술과 비슷하지 않은가. 나 역시도 몇 마리는 고블린 진영에 섞어놓아서 놈들의 정보를 나만의 방식으로 빼오는 중이었다.

헌데 그 방식을 고블린들이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나 역시도 벌써 이 정도로 놈들의 지능이 성장했을 줄은 몰랐다.

외통수.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렇다면 첩자는 누구일까?

* * * * *

늦은 저녁.

‘도망자’의 차례가 되었을 때, 남자는 조용히 진영을 벗어났다.

아직 사람들끼리 의심하는 관계로 가진 않았기 때문에, 감시는 거의 없는 편이었다.

이어 숲의 중심부로 들어가 나뭇가지 몇 개를 십(十)자 모양으로, 일정한 간격을 두고 늘어놓았다.

스릉.그때, 수풀이 흔들렸다.

“······!”

남자는 기겁하며 뒤를 돌아봤다.

하지만 아무 것도 없었다.

‘잘못 들은 건가?’

워낙 예민해진 상태라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 남자가, 다시 고개를 돌려 마저일을 끝내려고 하려는 순간.

바로 앞에, 은빛의 갑주를 입은 기사가 있었다.

“허억······!”

남자가 숨넘어갈 듯 놀라며 뒤로 넘어지려고 했다. 하지만 기사가 남자의 어깨를 붙잡곤, 남은 한 손으로는 자신의 투구에 손을 가져갔다.

그러자 눈을 가렸던 부분이 올라가며, 남자는 기사의 눈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었다.

“십자문양. 무슨 뜻이지?”

“아, 아무런 뜻도······.”

남자는 부정했다.

하지만 이상한 일이었다.

기사의 눈을 보고 있노라면 왜인지 기분이 나른해졌다.

그러자 조금씩 기사의 모습이 달라졌다. 주변의 환경도 달라졌다.

직장. 그리고 직장상사.

노예와 같이 일을 했던 남자는 상사의 말이라면 그게 무엇이라도 따랐다.

“가장 감시가 없는 방향이 이 쪽이라고 알려주는 표식입니다······ 3시간 후에 ‘술래’들이 공격을 해 올 것입니다······.”

초점을 잃은 남자가 답했다.

은빛의 기사가 남자의 턱을 쥐었다.

“첩자가 된 이유는?”

“제 아내가 잡혔습니다. 따르지 않겠다면 능욕하고 죽이겠다고 ‘그’가 으름장을 놨습니다.”

“그는 누구냐.”

“날개를 지닌 고블린, 사람의 말을 이해하는 고블린이었습니다.”

기사가 눈살을 찌푸리며 남자를 내동댕이쳤다.

“지금부터 내가 알리는 곳으로 표식을 옮겨라. 그것이 네가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니.”

“예······ 예에!”

남자가 허겁지겁 고개를 끄덕였다.

* * * * *

날개를 지닌 고블린?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으면 뿔이 아니라 날개가 돋은 걸까?

아니면 원래부터 ‘이종’이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내가 여태껏 파악하지 못했다는 건 놈은 자신의 모습을 전혀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사냥을 계속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주도면밀한 놈이다.

하여간 배후를 알았다. 나는 첩자를 죽이는 대신 ‘이중스파이’로 사용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시간이 없었다.

‘3시간.’

경계가 삼엄한 곳에 표식을 옮겨놨기에 망정이지 그대로 기습공격을 당할 뻔했다.

그런데 약간의 의구심이 들었다.

과연 첩자가 하나일까?

그런 것치곤 표식 하나만 달랑 세워놓는 게 너무 작위적이다.

‘첩자는 하나가 아니다.’

확신을 가졌다.

그처럼 주도면밀한 놈이 고작 하나만 심어놨겠는가.

남은 시간 동안 그들을 모두 찾고, 놈이 노리는 게 무엇인지 파악해야 했다.

그러기에 3시간은 너무 적었다.

그렇다고 안할 수도 없는 노릇.

나는 모든 감각을 총동원했다. 그러자 ‘관리자의 힘’이 깨어났다.

-아~ 졸려 죽겠네.

-언제까지 이 짓을 해야 하는 거야?

-집에 가고 싶다.

-보급고에 불을 질러야 하는데. 몇 시간 안 남았는데. 할 수 있을까?

‘찾았다.’

순간 머리가 어지러웠다.

토악질이 나올 것만 같았다.

애써 고개를 내저으며 움직였다.

보급고에 불을 지르려는 사람, 모두가 먹는 물에 식중독을 일으키는 독을 섞으려는 사람, 아포칼립스 길드의 수뇌부를 ‘기습’하려는 사람까지.

‘어느 사이에 이렇게 심어둔 거지?’

그들 모두를 잡아들인 나조차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여태껏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은 건 대부분의 첩자들이 조용히, 아무런 문제도 일으키지 않으며 생활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아포칼립스 길드와 합류하기 전부터 이미 약점을 잡힌 상태였다. 그래서 계속해서 알게 모르게 고블린들을 향해 도움을 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 모두가 오늘 동시다발적으로 움직이려고 했다.

이게 뜻하는 바는 하나였다.

‘총공격!’

적어도 날개 달린 고블린을 따르는 놈들이 대거 공격할 건 확실했다.

그나마 첩자를 모두 잡아들여서 더 큰 문제가 생기진 않겠지만, 아직까지도 사람들은 별 다른 경계심을 갖지 않았다.

‘남은 시간은 10분.’

척.

검을 뽑고 앞으로 나아간다.“이 이상 나가면 안 됩니다. 돌아가세요.”

나를 본 아포칼립스 길드의 길드원 하나가 다가오며 손짓을 했지만, 나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땅의 소리가 달라졌다.’

지축이 흔들린다.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느끼지 못할 정도로 작은 소리이나, 내겐 바로 옆에 있듯이 시끄럽게 울려 퍼졌다.

“저기요. 여기 계시면 안 된다니······.”

삐이이이이익!

삐이이이이익!

그 순간 사방에서 호루라기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적이다!”

“적이 몰려온다!”

“끄아악!”

이맛살을 구겼다.

생각보다 많다.

풀잎정령을 내보내 탐색한 숫자보다 훨씬 많았다.

대체 어디서 솟아난 걸까?

쿠아아아앙!

그렇다. 정말 솟아났다.

땅이 파이고, 거대한 지렁이와 같은 괴물이 인간의 진영 바로 앞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윽고 지렁이가 입을 벌리자, 그 안에서 수많은 고블린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저건 또 뭐야?”

“괴물은 고블린만 있는 게 아니었어?”

그렇다. 과거의 이야기에 따르면 분명히 고블린만 있다고 했다.

헌데 저 괴물 지렁이는 대관절 뭐란 말인가.

이변이 생겼다.

갑작스러운 대규모의 공격에 사람들은 정신을 못 차렸다.

‘하는 수 없군.’

이대로 있다간 수많은 인명의 피해가 생길 것이다.

특정 비율 이상이 죽으면 설령 이번 기습을 막아낸대도, 이겨도 이긴 게 아니다.

다음 경합까지 생각을 하려면 최대한 많은 사람을 살리는 게 맞다.

하지만 어떻게?

한 명당 죽일 수 있는 숫자라고 해봐야 5마리가 끝 아닌가.

‘변화구가 필요하다.’

아포칼립스 길드가 대처하려면 못해도 10분은 필요하다.

그 10분간 이 형세를 잠시 역전시킬 수만 있으면 되었다.

하는 수 없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단번에 이 상황을 역전시킬 수가 없는 건 아니었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타콰.”

< 23. 경합의 장(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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