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 빠른 전개(3) >
“하지만 달라지는 건 없다! 이 세계에서 나의 영향력은 절대적인 바!!”
몽마가 몸을 키웠다. 순식간에 세계를 뒤덮을 정도로 커다랗게 변했다.
몽마는 오랜 시간 유서희의 정신에 침투해 있었다. 아직 성숙하지 못한 소녀의 정신을 헤집으며 나약하게 만들고 대신 그 힘을 자신이 취했던 것이다.
이제 막 입구에 들어온 나와는 분명히 체격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결국 몽마는 몽마다. 꿈속에 기생하는 기생충과 같은 놈.
나는 말했다.
“꿈은 깨어지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인간은 수많은 꿈을 끌어안고 살아간다. 그리고 하나씩 깨닫고 깨어질 때마다 성장하며 더 앞으로 나아가게 된다.
하지만 하나가 깨어지면 두 개가 나타나는 게 또 꿈이란 존재였다. 우리는 평생 꿈을 안고 살아가고, 덕분에 안주하지 않으며 강해질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오로지 인간에게 주어진 ‘변화의 자유’였다. 가능성의 총아. 우리엘 디아블로조차도 할 수 없었던 진정한 변화의 방아쇠를, 인간은 살아가며 수없이 당긴다.
유서희에게도 이 역시 하나의 꿈에 불과했다.
‘틈이 있다면 채우면 그만.’
내 주변으로 바람이 불었다.
선선한 바람은 순식간에 이 어두운 공간을 흐르며 모든 ‘틈’을 연결하는 촉매가 되었다.
흐르고, 나가며 그저 벌어졌던 틈이 ‘입구와 출구’로 나뉘었다.
그러자 어둡기 그지없는 공간의 중심에서 무릎을 부둥켜안고 울고 있던 유서희의정신이, 산들한 바람이 불어오자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내 바람이 길을 안내해줄 것이다. 틈의 너머를 두려워마라. 바람을 따라 그 건너편에 도달하게 되거든 너를 억누르던 고통과 공포가 사실은 별 게 아니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만! 그마아아안!!”
몽마가 괴로워했다.
바람은 결코 강하게 불어오지 않았다.
선선하게. 천천히.
그저 유서희의 뺨을 간질이는 정도였다.
하지만 바람은 위치를 알려주었다. 아무 것도 없고 그저 어두웠던 이 장소에 사실은 출구가 있었음을, 문이 있었음을 알려주는 촉매였다.
유서희는 천천히 무릎을 펴고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러자 몽마의 크기가 급속도로 작아졌다.
나는 놈을 보며 작게 웃었다.
“아이는 어른보다 더욱 쉽게 변화한다. 궁금증이 많고, 문을 여는 데에도 주저함이 없지.”
유서희가 틈으로 발을 디뎠다.
이어 틈을 넘어가자, 세상이 반전되었다.
순식간에 빛이 떠오르고 주변의 환경이 변화했다.
놀이공원, 동물원의 사자들, 그 외의 ‘밝은 기억’들이 주변을 수놓았다.
유서희의 기억이자 상상력이다.
틈이자 문.
그 건너편에 무엇이 있을지 상상하며 발을 디뎌 어둠을 몰아낼 수 있었다.
아이의 상상력이란 이렇게나 강력하고 무섭다.
“아르켄. 너는 과거의 망령이다.”
손을 저었다.
후우우우우우웅!
“어찌 한낱 인간 따위가! 어찌이이이이!!”
그러자 거친 바람이 불어와 몽마를 세상 바깥으로 추방시켰다.
이어 나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이곳엔 수많은 유서희가 있었고, 그중 하나가 내 바짓단을 붙들며 멍하니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소녀는 내가 만들어준 사자모양의 장신구를 꼭 쥐고 있었다.
아마도 이 유서희는 가장 최근의 기억인 듯싶었다.
나는 그런 유서희를 양손으로 번쩍 들어올렸다.
그러곤 주변을 둘러봤다.
“같이 놀고 싶다고? 그래, 놀아보자. 네가 만든 세상은 나도 꽤 흥미가 있으니.”
아이의 상상력은 무한하다.
유서희가 새롭게 만든 마음 속 세상은 판타지가 따로 없었다.
공룡과 로봇, 거대한 인형들, 하늘 위의 땅, 세 개의 태양!
꿈은 깨지고, 그 자리를 새로운 꿈이 채운다.
달이 지면 태양이 뜨는 것처럼.
나는 소녀와 함께 소녀의 꿈을 노닐었다.
* * * * *
시간이 되는 족족 나는 유서희의 꿈속에 들어갔다. 오랫동안 변화가 없었던 세계였기 때문에 나라는 존재 자체가 자극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럴수록 현실에서의 유서희 역시 조금씩 치유가 되어갔다.
비록 큰 변화는 보이지 않았지만, 작은 반응 하나하나에 약간의 ‘감정’이 묻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시, 신령님. 모, 모셔왔습니다.”
그리고 일주일가량이 지나자 김씨네 삼형제가 병원에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그들만 온 건 아니다.
“당신이야?”
40대 초반쯤 되었을까.
정장을 입은 여자가 대뜸 나를 향해 삿대질을 했다.
그 옆에는 앞머리를 모두 올린, 흰 머리카락이 드문드문 난 남자가 한숨을 내쉬며여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당신이 이 사람들을 나한테 보냈어? 내가 그렇게 한가한 사람으로 보여?”
“여보. 그만하시오. 서희 때문에 먼 타국까지 온 사람들인데.”
“당신은 조용해요. 병원에 그렇게 신신당부를 해놨는데 아직까지도 우리 서희 주변을 서성거렸다는 말이잖아요? 아이한테 안 좋은 영향을 끼칠 게 분명해요!”
이 사람들이 유서희의 부모였다.
나는 김씨 삼형제를 사업차 미국에 있는 그들에게로 보냈고, 한국에 귀환시키는데 성공한 것이다.
그들은 잘 나가는 대기업의 CEO들이었으니 어지간한 메일 하나로는 움직이지 않을 거라 판단해서 나름 수를 낸 것이었다.
“서희 어머님. 진정하십시오.”
“당신이라면 진정하게 생겼어?”
“환자 병실 앞입니다.”
무엇보다 이곳은 유서희가 머무는 병실의 바로 앞이었다.
이로 인해 남자는 모르겠지만, 여자의 성격이 꽤 드세다는 것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김선생은 어디가고 웬 처음 보는 의사가 있는 것도 이상해. 내가 안 본다고, 서희가 말도 못 한다고 이따위로 나온다 이거지?”
“여보. 사정이 있으니 사람을 보내서까지 우리를 찾아온 것 아니겠소? 일단 이야기를 들어봅시다.”
“당신이란 사람은 항상! 왜 그렇게 우유부단한 거예요?”
“우유부단이 아니라 합리적으로 판단한 것이오. 우리보다 서희의 상태를 더 잘 알고 있는 게 병원일 테니.”
언성이 높아졌다.
둘의 사이가 그다지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예상대로군.’
유서희의 기억 속은 항상 오래 된 과거뿐이었다.
그 속에서조차 부모의 사이는 매우 좋지 않았다. 싸우거나 이처럼 언성을 높이기 일쑤. 이처럼 함께 모이는 일은 거의 없어졌고, 유서희는 어중간한 위치에서 병원에남겨졌다.
마음의 병이 더 쉽게 곪기 좋은 환경이 된 것이다.
만약 이 둘이 조금만 더 유서희의 곁에 있으며 이해하려고 했다면 몽마가 그처럼 싹을 피우진 못했으리라.
“서희가 병을 얻은 것도 당신이 제대로 돌보지 못해서 아니요?”
“그게 왜 저만의 탓인가요? 당신은 전혀 잘못이 없다고 말하는군요!”
“매번 그렇게 언성을 높이니까······.”
끼이이익.
끝나지 않는 논쟁.
그 사이에서 조용히 문이 열렸다.
동시에 여자와 남자 모두 고개를 돌렸다.
문이 열리고, 그 건너편엔 유서희가 있었다.
중학생의 여린 아이는 두 부부에게 다가갔다.
그 모습을 본 순간, 부부는 말을 잊고 그저 눈을 더없이 크게 뜰뿐이었다.
유서희가 자의로 일어선 것이다.
누군가의 보조 없이는 밥조차 못 먹던 아이가!
하물며······.
“싸우지······ 마세요.”
청량한 목소리가 복도에 퍼졌다.
그 이상으로 두 부부에게 이 상황은 충격 그 자체였다.
“어, 어떻게?”
“말을······ 말을 할 수 있게 된 거니?”
유서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천천히 나를 돌아봤다.
어제까지만 해도 이만한 변화를 보이진 않았다.
역시, 부모의 목소리와 기척이 또 다른 ‘열쇠’로 작용한 것일 테다.
나는 작게 웃었다. 그러자 유서희도 웃어보였다.
소녀에게 깃들었던 자그마한 어둠도 걷혔다.
동시에.
[‘관리자’의 권한으로 ‘균열의 조각’을 회수했습니다.]
[잠재능력치 ‘3’을 획득했습니다.]
잠재능력치!
내 마음대로 원하는 능력치를 올릴 수 있게 해주는 권한이다.
예전 김혜윤을 치료하며 하나를 얻었지만, 그보다 훨씬 큰 어둠을 지녔던 유서희를 치료하자 그 세 배에 달하는 양을 얻을 수 있었다.
도합 4.
착실하게, 우리엘 디아블로가 절망한 미래와는 다른 미래가 준비되어가고 있었다.
한동안 두 부부는 한국에 체류하며 유서희와 함께하는 시간을 가졌다. 유서희 역시 적극적으로 나서며 이전과 달리 서로의 관계를 회복하고자 노력했다.
단번에 파탄 직전까지 몰렸던 관계가 바로 회복되진 않았지만, 약간의 진척은 있었다. 유서희는 과거의 웃음을 되찾았다.
그리고.
“저를 가르쳐주세요.”
가운을 벗고, 떠나갈 준비를 하던 내게 유서희가 찾아왔다.
소녀는 이제 아르켄이 아니다. 유서희 본인으로써 스스로의 삶을 살 준비가 되어있었다. 그래서 나도 미련 없이 떠나려고 했건만, 갑작스럽게 나를 찾아와 이처럼 말한 것이다.
“가르쳐달라니?”
“다 기억나요. 선생님이 평범한 의사선생님이 아닌 것도 알아요.”
다 기억난다는 것의 범위가 정말로 ‘모두’인 건지.
유서희는 내가 만들어준 사자 장신구를 목걸이로 만들어 착용하고 있었다. 그것을 만지작거리며, 결심했다는 듯이 나를 바라봤다.
“하지만 저는 저를 잘 몰라요. 단지, 어둠 속에서 많은 것을 봤어요. 모두 끔찍한 것들이었죠. 세상이, 수많은 사람들이 비명을 내지르는 장면을.”
“꿈이니 무시하면 될 텐데?”
“꿈이 아니에요. 그곳은 더없이 어둡고, 음습한 장소였어요. 악마들이 문을 열고 세상을 공격했죠. 물론 믿어주시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지만요.”
나도 조금은 놀랐다.
유서희가 본 건 ‘심연’이다.
본능적으로 악마의 존재들을 깨닫고 각성한 건가?
자연각성이 없는 건 아니었다. 몇 천만, 몇 억 분의 일로 분명히 존재하긴 했다. 그리고 자연각성한 영웅들은 누구보다 강한 힘을 선보이며 선두주자의 자리에 앉았다.
유서희는 살짝 의기소침한 모습이었다.
하여, 나도 입을 열었다.
“믿는다.”
“믿어주시는 거예요?”
“그런데도 가르쳐달라? 무섭지 않은 건가?”
의사의 가면을 벗었다. 원래의 모습으로 말했음에도 유서희는 전혀 두려워하거나어색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내 본래의 모습 역시도 유서희는 본 게 아니었을까?
유서희는 고개를 내저었다.
“무섭지 않아요. 하지만 지켜만 봐서도 안 될 것 같아요. 제겐 분명히 사람들을 구할 수 있는 힘이 있어요. 그것을 가르쳐줄 수 있는 건 선생님뿐이에요.”
내 힘을 본능적으로 깨닫고 자신에게 가능성이 있는 것조차도 알고 있었다.
하물며 그 가능성을 사람을 구하는데 사용하겠다니.
‘천생 영웅이로군.’
하늘로부터 받고 태어난 게 분명했다.
이만한 빛이 있었기에 고작 몽마 따위가 반쪽의 천사 흉내를 낼 수 있었던 것이겠지. 나 역시도 눈이 부실 정도의 강렬한 빛이 소녀, 유서희에겐 있었다.
하지만 약간 주저가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내가 검신을 가르친다?
인류최강, 검 한 자루로 정상에 우뚝 섰던 자를?
“끝까지 책임져 주실 거죠?”
그러더니 새침한 표정을 짓는다.
원래의 성격은 굉장히 밝았던 게 분명하다.
누가 이 아이를 검신 아르켄이라고 생각하겠는가.
나는 피식 웃으며 이마를 짚었다.
* * * * *
나찰산 33계층.
무한한 계단으로 이어진 허공의 공간에 그가 있었다.
김민식. 아포칼립스 길드의 마스터이자 세계의 변화의 중심에 선 그가!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무작정 계단을 오른다. 벌써 몇 개를 올랐는지 모르겠다.
자신의 한계는 진즉에 넘어섰다. 정신이 아득하고 입에선 단내가 줄줄 흘렀다.
가장 최근까지 시리아가 맹추격을 했지만, 지금은 그녀도 보이지 않았다.
민식은 계단을 올랐다.
꾸역꾸역.
이 시련을 이겨내고 반드시 얻어야할 게 있었다.
‘머지않아 세계 곳곳에 싱크홀이 열린다. 세계가 경합하는 장. 그곳에서 승리하려면 길드의 힘만으로는 안 된다.’
자신 스스로가 강해야 한다. 길드의 도움만으로는 그곳에서 온전한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번 시련이 중요했다.
한계를 넘어 원하는 보상을 얻으면 그 ‘경합의 장’에서도 여유있게 승리를 점칠 수 있을 것이다.
몇날며칠, 얼마나 오래 걸었을까.
다리가 퉁퉁 불고 피멍이 가득 차도 민식은 멈추지 않았다.
[350,000개의 계단을 올랐습니다.]
[3배의 한계를 돌파한 보상으로 ‘팔라딘의 망토’를 획득할 수 있습니다.]
아아!
민식은 힘겹게 미소 지으며 자리에 쓰러졌다.
목표를 이루자 전신에 힘이 쭉 빠져나갔다.
한계의 3배. 이 이상을 과거에도 올라가본 자가 없었다.
솔직히 더는 걷는 게 불가능했다. 전신이 말을 듣지 않았다.
여기가 한계다. 이 이상으로 올라가는 사람이 있을 리 만무했다.
‘오롯이 나만이, 나만의 기록을 세운다.’
부르르 몸이 떨렸다.
이 기록을 깨트릴 자는 이제 나오지 않을 것이다. 스스로의 한계보다 3배 이상을 꿰뚫는 사람이 또 존재할 리 없으므로.
설혹 깨더라도, 팔라딘의 망토를 이미 자신이 얻었다. 보상은 중복되지 않으니 나찰산 33층에서 얻을 수 있는 최상의 보상은 자신의 것이 된 것이다.
민식은 눈을 감았다.
원하는 보상을 쟁취했으니.
‘승리는 나의 것이다.’
< 22. 빠른 전개(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