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신사냥꾼-70화 (71/251)

< 18. 급진하는 현대사(1) >

연혼제의 눈이 빛났다. 검.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검. 투박하고 별 다른 특색도 느껴지지 않았다.

헌데 왠지 모를 무게감이 있었다.

애당초 은후가 만든 검이다. 더 이상의 설명이 불필요했다.

‘기도가 달라졌다.’

무엇보다 검을 쥔 사용자, 오한성의 기도가 분명히 전과는 달랐다. 연일 야차들을꺾으며 유명세를 이어가고 있었으나 연혼제가 신경 쓸 정도의 격은 아니었건만.

지금은 신경이 쓰인다.

전신에서 피어나는 기세가 연혼제의 피부를 따끔거리게 만들었다.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른 검사에게만 보이는 투기.

흥미가 생겼다. 연혼제는 검룡. 검에 미친 야차였으므로.

“예전의 풋내기가 아닌데?”

연혼제가 얇게 웃었다. 예전에 그를 자신의 조원으로 포섭하려던 이유는 그저 ‘재미있을 거 같아서’다. 실력적인 부분에서 크게 기대를 하지 않았다.

나중에 강해지면 그때 잡아먹으려고 했다.

농부가 농익은 과일을 수확하듯.

하지만 은후가 만든 검을 쥔 그는 달랐다. 이미 충분히 익은 상태였다.

“검은 야차는 시련의 상징이라고 들었는데······ 거짓이 아니었던 모양이군.”

검은 야차에 대한 전승이다.

검은 야차는 야차들이 감내해야할 시련적인 존재라고.

대신 그를 이겨내면 영웅이 탄생한다는 전승이 몇몇 가문에 남아있었던 것이다. 불길하다 여겨지지만 나찰각에 받아들여진 건 그런 이유에서였다.

연혼제의 눈에서 백원후들은 지워졌다.

대신 오로지 오한성, 그만이 담겼다.

툭. 툭.

연혼제가 검을 바닥에 두 차례 찍었다.

그리곤 다시 들어, 검을 겨눴다.

상대 쪽에서 말은 없었으나 더 이상은 필요 없을 것이다.

그는 등장한 직후부터 계속해서 투기를 보내고 있었다.

의미는 간단했다.

싸워보자는 것!

“삼초를 양보하마. 은후의 검을 들었다고 할지라도 결국은 검. 실력이 받쳐주지 않으면 무용지물에 지나지 않을 테니.”

동시에 한성. 그가 움직였다.

움직임은 지극히 느렸다. 너무 느려서 의아함마저 생길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가 지근거리까지 다가왔을 때 연혼제는 이상함을 느꼈다.

마치 천근추를 사용한 것 마냥 바닥에 발자국이 선명하게 찍혀있던 것이다.

그리고 근접하여 검을 휘두른 순간, 연혼제는 본능적으로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며 검을 맞댈 수밖에 없었다.

콰드드득!

“······!”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만약 발을 뒤로 물리지 않은 상태에서 그대로 검을 받았다면허리가 바스러졌을 것이다.

이어 거센 풍압이 불어와 연혼제의 몸을 결박하는 듯했다.

‘무겁다!’

무거워도 너무 무거웠다. 가장 무거운 철이라는 현철이 다수 섞여있음이 분명했으나 그를 감안해도 굉장한 괴력이었다.

반격을 해야 한다. 이대로 검을 받아내기만 해서는 안 된다고 연혼제의 본능이 계속해서 경고하고 있었다.

단 한 번 받아냈을 뿐인데 손목이 나가버릴 것 같았다. 뼈에 금이 간 건 확실했다.

동시에 오한성의 입이 작게 움직였다.

―삼초라고 했지?

녀석이 씨익 웃어보였다.

왜 말이 없었는지, 왜 그토록 느리게 다가왔는지, 그 이유를 알겠다.

녀석 역시 혼신의 힘을 다해 검을 들고 있었던 것이다. 단순히 물리적 무거움 뿐만이 아니었다. 저 검, 마력을 응축시켜 단번에 폭발시키는 그 폭발력이 더욱 무서웠다.

받아내는 것만으로 손목이 박살났으니 말이다.

연혼제는 다급해졌다.

삼초를 언급한 건 자신이었다.

하지만 후회는 언제해도 늦다.

“잠······!”

꽈아앙!

* * * * *

[검은 야차의 인(印)이 빛을 발합니다.]

[보다 강한 야차를 쓰러트리고 ‘힘’을 ‘1’ 빼앗아 옵니다.]

[주변 모든 야차들이 정신적으로 굴복하였습니다. 미약한 수준의 능력치를 강탈합니다.]

[적용 된 능력치 현황 ? 힘(2), 민첩(2), 체력(1)]

연혼제가 쓰러졌다.

정확히 세 번의 공격을 받고 그대로 양 팔이 뒤틀린 채 바닥에 발을 파묻으며 기절한 것이다.

“연혼제가······.”

“검룡이 졌다고?”

“단 삼초 만에?”

야차들도, 백원후들도 웅성대기 시작했다.

믿기지 않는 일.

상상치도 못했던 초유의 일이 벌어졌다.

그들은 떨리는 눈초리로 나와 연혼제를 번갈아 바라봤다.

너무 놀란 나머지 입을 크게 벌리고서.

‘이게······ 암령의 힘.’

나 역시 놀라는 중이었다.

내게는 본래 이 정도의 괴력은 없다.

하지만 검에 깃든 암령은 단순히 쥔 것만으로도 태을무극심법이 발휘되게 만들었다. 그러곤 극성으로 날뛰기 시작했다.

동시에 탈혼무정검이 왜 공격일변도의 검법인지 알 것 같았다.

‘방어를 할 필요가 없다.’

현철에 깃든 암령은 사용자로 하여금 괴력을 발휘하게 만들어주었다. 태을무극심법은 고작 2성의 경지였지만 그것만으로도 이러한 결과를 만들어낸 것이다.

공격은 최상의 방어라는 걸 증명하는 듯싶었다.

하지만 나도 정상은 아니었다.

‘근육이 파열될 것만 같군.’

모든 힘을 쥐어짜낸 기분이었다. 전신의 근육들이 비명을 질러댔다. 마력은 텅 비었고 일순간이지만 세상이 샛노랗게 변했다.

나는 천천히 검을 내려다보았다.

묵색의 검은 여전히 날 하나 나가지 않은 채 묵직한 자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흑풍검(value-150,000)>

● ‘제천대성의 힘’이 적용 된 상태● 무겁고 굉장히 단단하다.(254kg)● ‘바람의 성흔’이 새겨졌다.

● ‘제천대성의 혼’을 지닌 자만이 검을 쥘 수 있다.

※제천대성의 힘: 태을무극심법의 경지에 따라 순간적으로 제천대성의 힘을 빌려온다. 무리하게 사용하면 신체가 버티지 못하고 터져나갈 수 있다.

※바람의 성흔: ‘바람의 결’을 깨달은 자가 검을 만들며 새겨진 표식. 맞서는 이로 하여금 강렬한 풍압(5Lv)을 느끼게 한다.

『대장장이 은후가 성심성의를 다해 만든 검. 현철로 만들어진 내부는 초보자의 손길이 닿았으나 정신과의 일체를 시도하여 걸작을 탄생시켰다.』

무게자체가 말이 안 됐다. 현철로 만들어진 검의 숙명과도 같았는데, 승천자의 망토가 허리를 지탱해주지 않았다면 휘두르는 것조차 힘에 버거웠을 것이다.

하지만 진정으로 내가 놀란 건 설명에 새겨진 이름이다.

제천대성!

‘백원후들이 따르는 이유라는 게 이것 때문이었군.’

필마온, 투전승불, 손오공 등으로 불리는 천계의 풍운아가 바로 제천대성이었다.천계에 대한 복수심을 나타내던 그 목소리가 불현 듯 떠올랐다.

모든 원숭이들의 왕, 어쩌면 신이라 불려도 이상하지 않은 존재였으니, 백원후들의 그 극진한 태도가 이해가 되었다.

‘암령이 제천대성이었을 줄이야.’

신화의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요르문간드와 비교해도 전혀 격이 부족하지 않을 것이었다.

월천이 지배하지 못한 게 이해가 되었다. 왜 암령을 지닌 자들이 죽거나 폐인이 되었는지도 알 것 같았다.

나 역시도 그 숙명으로부터 자유롭진 못하다는 것 역시.

‘하지만 이겨낼 것이다.’

암령. 놈을 지배하겠다. 정체를 알게 된 순간 나는 더욱 욕심을 가졌다. 온전히 지배하겠노라고. 놈이 말한 게 사실이라면 아직 몇 년의 유예는 남아있었으니!

허리에 가로로 찬 검집에 흑풍검을 집어넣었다. 흑풍검은 전신의 무게균형이 완벽하게 균등했기 때문에 한쪽으로 쏠리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나는 천천히 등을 돌렸다.

연혼제는 여전히 기절해 있었으며, 어떠한 야차도 나를 막지 못했다.

처음 들어올 때와는 분명히 다른 인식.

그들의 뇌리 속에 확실하게 ‘나’라는 존재가 새겨진 순간이었다.

검을 만들고 나는 월천을 찾았다.

그는 전보다 더욱 심하게 야위어있었다.

쏙 들어간 볼, 퀭한 눈, 마치 폐인과 같았다.

하지만 유일하게 눈빛만은 살아있었다.

“스승님, 괜찮으십니까?”

스승이라는 단어가 입에 잘 달라붙진 않았지만, 확실한 건 월천이 암령을 넘기고자 엄청난 무리를 부담했다는 것이다.

이대로 월천이 죽기라도 한다면 꿈자리가 뒤숭숭할 터였고, 그걸 나도 바라지 않았다. 적어도 그는 나를 인정해줬으며 과거와도 인연이 있는 자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익숙하지 않은 단어일지라도 억지로라도 적응하려고 노력하는 중이었다.

월천은 건강에 대한 답을 하지 않았다. 대신.

“검을 보여 다오.”

바로 본론으로 넘어갔다.

나는 흑풍검을 꺼냈다. 이어 월천이 흑풍검에 손을 대자, 치지직! 하고 전기가 오르듯 잠시 월천의 손길을 거부했다.

“나를 거부하는 걸 보니 검과 완전한 물아일체를 이뤘구나. 은후만의 실력으로는불가능한 일일진대.”

월천의 입가에 얕은 미소가 어렸다. 은후가 만든 건 검의 외부다. 내부의 현철은 내가 달구고 때리며 더없는 정성을 쏟았다.

이어 월천이 흑풍검을 다시 내게 넘기며 말했다.

“오늘 연혼제와 대련을 했다고 들었다.”

“사소한 다툼이었습니다.”

“‘마후가’에선 그리 생각하지 않을 게다. 나찰각을 떠받드는 세 가문 중 하나이니 말이다.”

마후가. 백원후들이 연혼제와 대치하며 했던 말들 중에 그런 단어가 있었다. 다른야차들과 달리 연혼제만은 백원후들도 어찌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너는 나 월천의 제자다. 또한 전사는 자신의 무력으로 모든 걸 입증하는 법.”

스으으으.

월천의 손에서 푸른색의 검이 생겨났다.

검기가 아니다. 검강!

진정한 강(强)의 기운이 2m 높이로 치솟았다.

저만치 선명한 검강은 나도 생전에 본 적이 없었다.

검의 천재라는 자들도 검강을 재현할 순 있었으나 기껏해야 검에 덧씌우는 정도였다. 하지만 월천은 무에서 유를, 2m 길이로 창조해낸 것이다.

검강은 세상에서 잘라내지 못하는 게 없다. 용의 비늘도, 데몬로드의 살결조차도 베어낼 수 있는 게 검강이었다.

“연혼제와 대련하며 깨달았을 것이다. 암령의 힘을. 그 무한한 가능성을. 그 정제되지 않은 힘을 다루려면 필히 ‘탈혼무정검’의 정수를 익혀야 한다.”

“탈혼무정검을 익히면 암령을 지배할 수 있습니까?”

나는 이미 탈혼무정검을 익혔다.

과거 9성까지 깨달았고, 현재는 6성의 성취를 이룬 상태였다.

하지만 제천대성의 힘, 흑풍검의 무게에 못이겨 연계가 불가능했다.

하여 나는 그 답을 듣고 싶었다.

“과거 암령을 온전히 지배했던 자는 천마뿐이었다. 그는 검은 야차의 인을 지니고 있었으며, 야차일 시절 승천자의 의식을 깨트렸다고 전해진다. 뿐만 아니라 그를억압하고자 행한 십이천나한진마저 스스로 파훼하였지.”

왠지 모를 동질감을 느꼈다.

천마가 걸어온 길은 나와 너무나도 유사했기 때문이다.

월천. 그가 내게 기대를 거는 이유도 같은 맥락에서일는지.

곧 그의 눈이 더욱 무겁게 가라앉았다.

“암령을 지배할 수 있느냐고 물었느냐? 할 수 있다. 너라면. 그러기 위해 나는 너에게 탈혼무정검의 정수를 넘길 셈이다.”

“진수를······.”

“탈혼무정검의 정수는 자연의 힘을 스스로에게 강신시키는 방법이다. 그리하여 암령의 모든 힘을 끌어내는 게 탈혼무정검의 의미니라. 그리고 너는 이미 바람을 다룰 줄 안다. 단지, 그 힘을 제대로 다루지 못할 뿐.”

스아아아아아아!

거센 바람이 월천의 주변으로 불어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의 검강이 바람에 동화된 듯 더욱 짙은 푸른색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의 움직임이, 검 자체가 가벼워진 듯 착각이 일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화르르륵!

검강이 붉은 색으로 발화되었다. 피처럼 붉은 저런 검강이라니!

이어 검강은 물을 담고, 대지를 담았다.

수풍지화(水風地火)의 네 가지 속성을 온전하게 담아낸 것이다.

아아. 그제야 알 것 같았다.

내가 익힌 탈혼무정검은 9성이었지만, 그 이상으로 올라갈 수 없었던 이유를.

‘나는 그저 스킬을 덧씌울 뿐이었구나.’

나 역시도 네 가지 원소를 다룰 줄 알았다.

마검사. 마법이란 이름의 스킬을 사용해 빠르게 성취를 이뤄낼 수 있었다.

하지만 진정으로 자연을, 네 가지 속성을 깨달은 건 아니었다.

편법으로 이뤄낸 성취이기에 9성이 한계였다. 만약 정말로 내가 자연을 깨닫고 활용할 수 있었다면 과거의 나는 훨씬 강해질 수 있었을 것이었다.

“내 검을 보아라. 그리하여 두 눈에 담아라. 내가 너에게 보여주는 처음이자 마지막 수업일 것이니.”

그는 자신의 모든 힘을 담아 사력을 다해 검무(劍舞)를 추었다. 모든 속성의 기운들이 마치 벚꽃처럼 만개하여 내 눈을 어지럽히기 시작했다.

나는 그 광경에 매료되었다. 압도되었다.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단지 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깨닫고 있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말한 건 그가 수천 년간 쌓아온 정수들을 한꺼번에 내 앞에서 터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탈혼무정검’의 성취가 6성에 다다랐습니다.]

[자연에 대한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이제부터 바람속성을 자유로이 다룰 수 있게 됩니다.]

내 머릿속에서 작은 빅뱅이 일어났다.

* * * * *

다음날.

나는 나찰각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떠나라. 탈혼무정검과 태을무극심법은 비좁은 나찰각에서 익힐 수 있는 게 아니다. 너는 또 다른 세계와의 접촉이 가능하니 보다 많은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인즉.

―또한 마후가가 방해하면 여러모로 귀찮아질 것이다. 허나 내년 성흔쟁탈전에서우승하거든 그들조차 함부로 너를 어찌하진 못할 터.

월천은 그리 말하며 등을 돌렸다.

모든 정수를 때려박았기 때문인지 월천의 전신은 더욱 초췌해져 있었다.

나는 한 차례 절을 올리고, 내년을 기약하며 짐을 챙길 수밖에 없었다.

‘내년에 다시.’

무엇보다 나도 바라고 있었다.

탈혼무정검의 정수를 보게 된 순간, 온 몸이 근질거렸다.

이 깨달음을 온전히 나의 것으로 만들려면 더 많은 것을 보고 익혀야 한다. 과거의 경험들조차도 성에 미치지 못했다.

나는 모든 준비를 끝마친 뒤, 조용히 나찰각을 나섰다.

귀에 새겨진 인(印)을 매만지자 관련 된 권한들이 떠올랐고.

[검은 야차의 권한으로 1~50계층 간의 이동이 자유롭습니다.]

[1층으로 설정되었습니다. 이동하시겠습니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내 앞으로 작은 일렁임이 나타나며 둥그런 모양의 공간이 생성되었다.

나는 천천히 그 안으로 발을 옮겼다.

공간을 넘어서고 주변을 둘러봤다.

나찰산의 1층. 현대와의 ‘문’이 연결 된 장소.

푸르른 초야가 즐비한 장소. 기껏해야 ‘괴물토끼’와 같은 약한 괴물뿐이 없는 곳이고 초보자들에게 있어선 젖과 꿀이 흐르는 곳이기도 했지만, 이 공간이 드러나는 건 앞으로 반년은 더 있어야 했다.

“사, 살려주세요!”

“으아아아악! 미친 멧돼지 새끼!!”

그런데······.

나는 이맛살을 구겼다.

‘지금 시기엔 사람이 없어야 하는데?’

그러나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저 목소리는 분명히 나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었다.

고개를 돌리자, 다섯 명 정도로 이뤄진 남녀집단이 거대한 멧돼지에게 쫓기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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