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 검을 만들다(完) >
철을 불로 달구고, 때리고, 얇게 펴서 다시 찬물로 식히는 작업을 수없이 반복하는 게 검을 만드는 가장 기본이고 토대가 되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현철을 녹이는 건 지극한 정성과 끈기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수많은 명검의 토대가 된 현철. 거대규모의 공방과 강력한 화로가 없으면 녹이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데다 쉴 새 없이 몇날며칠을 내리쳐야 겨우 녹일 수 있는 탓이다.
검 한 자루를 온전히 만들기엔 부족한 양이지만 어차피 이 현철은 검의 안에 들어갈 내용물이었다. 애당초 100% 현철로 만들어진 검은 없다고 보면 된다.
과거에도 수많은 명검을 보았지만 현철이 10%나 함유되어 있으면 많은 편이었다. 보통 20%를 넘어가면 어지간한 영웅들조차 구하기 힘들었으며, 30%가 넘어가는건 말 그대로 하늘의 연이 닿아야만 가질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리고 지금 내 눈앞에 있는 현철의 양은 검 한 자루를 만들기엔 부족하지만 검의속, 30%는 족히 채울 양이 되었다.
나는 이 현철을 다지는 작업을 맡았다. 아무리 내가 재능이 좋다고 하더라도 고작10여일 정도로 대장장이 티를 내는 건 불가능하다. 다만, 현철을 얇게 저미듯 펴내어 몇 번이고 다시 식힌 뒤 나와 ‘암령’을 동화시키는 건 가능했다.
나머지, 검의 토대를 만들고 마지막 검수를 해주는 건 은후의 역할이었다. 그는 9Lv의 대장장이 스킬을 가진 세계에서 손에 꼽히는 장인이었으므로.
‘모든 정신을 모루에 쏟는다.’
까아앙-!
망치를 내리칠 때마다 전신이 뒤흔들리는 것만 같았다. 모든 힘과 마력을 오른손에 싣고 내리치면 그 순간 심장에 봉인 된 암령도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그러면서 나는 ‘태을무극심법’의 구결을 외우고 있었다.
나에게만 주어진 구결, 암령을 봉인할 때 내 머릿속에 울렸던 현장의 말씀이다.
‘바람은 모든 걸 깎으며 어두움 속에서도 길을 알려주니.’
바람을 모든 걸 깎는다. 그것이 설령 강철보다 단단한 현철이라 할지라도. 내 손에 바람이 깃들며 조금씩 현철의 모양을 바꾸기 시작했다.
‘작은 바람은 태풍이 되어 세상을 휩쓸도다.’
구결이란 결국 마음가짐이다. 언어의 힘으로 만들어진 주술과도 같았다. 태을무극심법의 힘을 일깨우는 일종의 ‘열쇠’인 셈이다.
나는 바람이었다.
바람은 결코 막지 못하고, 설령 막더라도 모든 걸 깎아내나, 결국 작은 바람은 태풍이 되기 마련이었다. 월천이 어째서 씨앗을 100개 심으면 100가지 다른 결과가 나온다고 한 것인지 이해가 되었다.
이 구결은 나의 인생을 말해주고 있었다. 내가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길 말이다. 꺾이지 않을 다짐. 그것을 심법이란 이름으로 표현한 것이다.
‘일망무제(一望無際)의 끝없는 사막조차도 나를 막진 못하였다.’
일망무제!
결국 암령조차 무릎 꿇었던 개념.
무한의 깨달음에 관한 이야기였다.
아직 내 이해는 얕으나, 나는 이 깨달음의 끝자락을 결코 놓을 생각이 없었다. 끝없이 되뇌고 또 되뇌며 쟁취하리라.
[‘태을무극심법’의 성취가 한 단계(1->2) 올랐습니다.]
심법과 망치질이 일체화되자 덩달아 나의 성취도 올라가고 있었다.
성취가 오르자 암령의 움직임도 조금은 더 얌전해졌다.
‘태을무극심법은 암령을 가두기 위해 만들어진 심법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암령을 가두고, 암령의 힘을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심법이었다.
이제 고작 2성일 따름이지만 나는 이 심법의 천재적 발상에 대해 굉장히 놀라고 있었다.
초기에 이 심법을 만든 자, 천마라고 하였던가?
‘그는 데몬로드조차 뛰어넘는 자였을 것이다.’
월천조차 암령을 온전히 가둬두는데 실패했다. 암령의 힘은 그만큼 강력한 독과 같았다. 그러나 이 심법을 만든 천마라는 자는 암령을 온전히 다룰 수 있었을 것이었다.
심장에 가둬졌을 뿐임에도 암령의 기운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놈이 가진 ‘격’은 상상을 초월했다. 이놈을 온전히 다룰 수만 있다면······.
‘미래를 바꿀 수 있을 터.’
능히 데몬로드와 동급의, 혹은 그 이상의 힘을 발휘할 수 있으리라.
그래서 천마에 대해 궁금증이 생겼다. 태을무극심법을 극성까지 익혀서 천마는 분명히 암령의 100%를 다뤘을 터였다.
책을 뒤져봤지만 어디에도 ‘천마’의 이름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아는 자도 없었다.
대체 누구일까?
확실한 건 천마 이후로 이 암령은 계속해서 전해져왔지만, 완벽하게 다룰 수 있었던 자는 없었으리라는 것이다.
‘지금은 다른데 정신을 쓸 때가 아니야.’
급히 잡념을 없애고 망치를 두드리는데 온정신을 쏟았다.
태을무극심법을 운용하며 암령을 자극하고 있었다. 놈은 조금씩 움직이며 현철에대한 관심을 나타냈다. 내가 할 건 현철과 암령 사이에 ‘길’을 놔주는 일이었다.
‘일망무제······.’
까앙-!
* * * * *
“대단하군요.”
“제대로 망치를 쥔 건 처음일 텐데 벌써 7일째······.”
“괜히 주령이신 게 아니로군.”
화로는 꺼지지 않았다. 망치질도 멈추지 않았다.
그를 바라보는 백원후들은 저마다 탄성을 내뱉었다.
물조차 마시지 않고 벌써 7일 째. 정신력의 한계를 뛰어넘는 지구력으로 그는 망치를 두드리고 있었다.
“은후님도 마찬가지지. 연로하신 분이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닌가?”
“검 한 자루 만들자고 저토록 열정을 쏟아 붓는 모습은 근 100년간 본 적이 없어.”
“대단한 명검이 탄생하겠군.”
“현철이 들어가니까. 저만한 현철을 대체 어디서 구한 걸까?”
은후 역시도 주령과 마찬가지로 7일 동안 쉬지 않았다. 물도 입에 안 대고 먹을 것도 입에 안 대고 있었다. 그가 보이는 최소한의 예의인 것도 같았지만, 그와는 별개로 검의 틀을 만드는데 사력을 기울이는 중이었다.
백원후들은 혀를 차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두 사람의 주변으로는 누구도 다가가지 못하도록 벽이 쳐진 것만 같았다.
“이번에는 진정한 우리의 주인이 나타나시길······.”
한 백원후가 작게 중얼거리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열망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그들의 주령을 바라보았다.
초대 천마를 제외하면 누구도 도달하지 못했던 곳. 월천조차도 스스로 포기선언을 했을 정도로 그 길은 험난하겠지만, 부디 이번에야말로 진정한 주인(主人)이 탄생하길, 그들은 빌고 또 빌었다.
문제는 외부에 있었다.
십일밤낮으로 공방의 불이 밝혀지자 하나, 둘, 야차들이 모여들기 시작한 것이다.
“은후가 월천님의 제자를 위해 검을 만들고 있다며?”
“어디 구경이나 해보자. 대체 얼마나 대단한 걸 만들기에 10일 내내 공방을 열어놔?”
하루만에 족히 수십이 모였다.
그들 대부분은 오한성에 대한 소문 등을 접한 상태였다.
검은 야차, 승천자의 의식을 깨트려 한 차례 나찰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지만 실상은 별 볼일이 없었다. 백보신권을 익히긴 했으나 그 성취도 미약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뒤로 무려 월천의 제자가 되었다. 다시금 화제의 중심으로 뛰어들며 이번에는 그 콧대 높은 은후가 모든 일을 제쳐둔 채 직접 검을 제작하고 있었다.
그것도 10일씩이나.
‘얼마나 대단한 검이기에?’
‘은후가 무기를 만드는 건 보통 하루를 넘기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부럽다.’
야차들 역시 검에 대한 욕심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전사인 그들의 당연한 생리였다.
하지만 공방의 입구를 백원후들이 막아서서 쉽게 들어가지 못했다.
끼익! 꺄아악!
끽! 끼기긱!
가까이 다가가려고하면 저항이 거셌다.
마치 공성을 하듯 백원후들은 한 발도 물러서지 않았다.
야차들로서도 이런 적이 처음이라 난감해할 수밖에 없었다.
기본적으로 야차와 백원후는 공생의 관계다. 백원후가 궂은일을 도맡아주긴 하지만 대라선의 의지로 그들은 야차와 같은 권리를 갖게 되었다.
“허, 참. 백원후들이 이렇게 저항하는 건 처음 보는군.”
“대체 뭘 그리 꽁꽁 감추는 거지?”
검을 보고 싶으나 볼 수 없음에 야차들도 불만을 토했다.
결국 두 집단의 대치는 계속될 수밖에 없었다. 긴장감은 날로 높아졌다.
그때, 한 야차가 대검을 든 채로 자리에 나타났다.
“비켜. 어딜 백원후 따위가 길을 막아?”
주황색 머리칼을 가진 장난기 가득한 얼굴의 소유자.
하지만 그 안에 감춰진 광기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검룡 연혼제······.”
“깨달음을 얻었다고 두문불출하더니 실마리를 잡은 건가?”
“이제 백원후들도 꼼짝 못하겠군.”
야차들이 길을 트며 연혼제를 흥미진진하게 쳐다봤다.
검룡 연혼제. 그는 일반적인 야차와는 다르다. 검룡이기도 하지만, 그의 배경 자체가 백원후 따위는 어쩌지 못하는 곳이었다.
“은후가 10일이나 오한성의 검을 만들고 있다지?”
평소에는 장난기가 넘쳤으나 지금의 연혼제는 무척이나 표정이 굳어있었다. 일전오한성에게 같은 조에 들어오라고 회유할 정도의 여유도 지금은 보이지 않았다.
백원후들이 서로 눈치를 봤다. 야차들을 막을 때처럼 격렬하지 못했다.
그러자 연혼제가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마후가(魔后家)의 패를 보여줘야 길을 열 것이냐?”
마후가!
연혼제의 배경이며, 나찰각의 기둥이라 불리는 가문 중 하나였다.
그곳의 가장 촉망받는 존재가 연혼제였다. 검의 천재이자 차기 나찰로도 지목되고 있는 연혼제는 백원후 정도는 어쩌지 못할 힘이 있었다.
그럼에도 백원후들이 쉽사리 자리를 뜨지 않았다.
이에 연혼제가 이를 박박 갈았다.
“빌어먹을. 내 검에도 그만한 정성은 들이지 않았다. 대체 얼마나 대단한 검을 만들려고 십일이나 공을 들이고 있는 거지?”
은후는 장인이고, 그에게 검을 부탁하려면 못해도 20년을 기다려야 했다. 연혼제는 검룡이라 불리는 만큼 검에 조예가 깊고, 애착이 있었다. 하여 마후가의 힘을 이용해 은후에게 직접 검을 만드는 걸 부탁한 바가 있었다.
하지만 이조차도 하루 만에 완성됐다. 그래도 장인의 실력이 어딜 가는 건 아니라서 매우 만족하고 있었지만, 십일이나 은후가 검을 만들고 있다는데 관심이 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 마디로 배가 아팠던 것이다.
연혼제는 다른 야차와 달리 장난기가 많고, 고집이 드세며, 세상만사 자기 마음대로 사는 걸로 유명했다.
또한 욕심이 많았다.
자기가 얻지 못한 걸 남이 얻게 된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방해를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마지막으로 말하마. 비켜라. 놈이 만들고 있는 그 검, 이 두 눈으로 꼭 봐야겠다.방해하겠다면······ 베어버릴 것이다.”
횡포였지만 백원후들은 꼼짝도 못했다.
얼어버린 듯이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마지막 경고를 행한 연혼제가 이어 대검을 들었다.
대검 주변으로 날카로운 예기가 피어났고, 투명한 기운이 덮어지며 사나운 기세를 사방에 떨쳤다.
“말려야하는 거 아니야?”
“백원후 몇 마리 죽인다고 검룡을 누가 어떻게 해?”
“마후가가 힘을 쓰면 조용히 무마되겠지.”
무소불위의 권력체가 마후가였다. 그런 마후가를 등에 업은 연혼제는 당연히 철이 없을 수밖에 없었다.
일촉즉발의 상황.
연혼제가 스산한 눈빛으로 천천히 발을 옮겼다.
그리고 검을 내리치려는 찰나.
“그럴 필요 없다.”
뚜벅!
무거운 발소리와 함께 화제의 장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묵색의 검 한 자루를 쥐고서.
< 17. 검을 만들다(完)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