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 월천(月天), 그리고 태을무극심법(太乙武極心法)(5) >
느림의 묘(妙). 천천히 검을 내리그으며 나 자신의 관조 역시 함께하는 행위다. 더 나아가 주변 모든 만물을 느끼며 오로지 일도(一道)를 행하는 게 삼재검법의 기본이고 중심이 되는 내용이었다.
천천히, 더욱 천천히, 이내 무아지경에 빠져 머릿속을 비워간다. 숨소리가 작아지고 전신의 미세한 떨림마저 줄어들며 공기를, 바람을, 더 나아가 배경 자체와 동화되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검을 반복적으로 내지르며 완벽한 무아지경에 빠지는 건 아주 조그마한 변화만으로도 집중을 깨트린다. 바람의 세기, 새가 멀리서 지저귀는 소리에도 나는 다시 현실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내 집중력이 이것밖에 안 됐나?’
다시 한 번 깨진 집중에 검을 멀뚱히 내려다봤다.
이른 아침. 새벽공기가 무던히 찬 날. 가벼운 도복으로 갈아입고 서고 옆의 빈 공터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삼재심법과 함께 응용하며 검을 휘두르려 했지만 도무지가 쉽지 않았다. 아직은 의념호흡의 단계에 머물고 있었는데, 그 다음 단계인 의수호흡으로 넘어가면 잠을 자면서도 자연스럽게 흡기가 된다고 한다.
마지막 의전호흡의 단계에 다가서면 머리가 아닌 몸으로, 숨 쉬는 것처럼 삼재심법을 응용할 수 있었다. 하여 어떻게든 심법과 검법을 동시에 운용하려 해보고 있었지만 의념호흡 이상의 경지에는 다다르기가 쉽지 않았다.
왜일까. 집중력이라면 나름 자신이 있는 분야였건만.
‘생각이 많다.’
고개를 끄덕였다. 집중력이 깨지는 원인은 간단했다.
잡생각이 많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걱정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라이라 디아블로······.’
작게 한숨을 내쉬자 입김이 허공을 노닐었다.
라이라 디아블로의 경악어린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를 맴돌고 있었다. 급히 전이할 수밖에 없었지만, 돌아가는 것도 용의치가 않았다.
이미 나찰각에선 나를 용의 주시하는 중이었다. 월천만이 움직였다지만, 월천만 나를 보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닐 터였다. 만약에, 아주 만약에 털끝만큼의 의심이라도 사게 된다면, 어떠한 양상으로 일이 흘러갈지 전혀 예상할 수 없다.
감시가 있을 수도 있었다. 아직 나는 모든 용의를 벗어던진 게 아니므로.
게다가.
‘잠시 돌아가는 건 의미가 없다.’
돌아가도 문제였다. 아마도 우리엘 디아블로의 몸은 내가 전이한 순간 거짓말처럼 쓰러졌을 것이다. 라이라가 성으로 옮겼겠지만 내가 전이하기 전에는 우리엘 디아블로도 깨어나지 않는다. 설혹 깨어나더라도 나는 장시간 체류할 수 없고, 다시금나찰각으로 돌아와야만 하는 신세였다.
탈혼무정검, 그리고 태을무극심법은 결코 놓쳐선 안 되는 비급이었으니.
‘안전한 장소에 다다를 때까진.’
적어도 나찰각은 벗어나고 전이를 할 생각이었다. 이곳에서는 변수가 너무 많다. 심지어 그 변수들을 내가 마음껏 주무를 수도 없다.
하지만 지구에서라면 다르다. 이타콰 혼자서도 충분히 내 곁을 지킬 수 있으리라.
‘잡생각을 지우자. 삼재심법과 삼재검법을 동시에 운용하는 건 만만한 일이 아니야.’
겸손해지기로 했다. 고작 삼재검법이라는 생각자체를 버렸다. 나는 기초부터 다지는 중이었다. 초심으로 돌아가야만 더 깊게 파고들 수 있는 법이다.
후우우-!
숨을 크게 들이쉬고 천천히 검을 내뻗었다.
눈을 감고 그대로 심법을 운용했다. 다른 심법은 해당하는 구절을 외우며 기를 돌려야하지만 삼재심법은 그저 숨을 몰아쉬어 혼탁한 기운과 정한 기운을 구분하기만해도 되었다.
베기와 찌르기. 검술은 이 두 가지로만 이뤄진다. 단순하면서도 단순하지 않은 그러한 미학이 담겨있는 셈이다.
한참을 검과 호흡에 빠져 그대로 배경에 녹아들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아직 부족하다.’
다시 집중이 깼다. 고개를 내저으며 혀를 차자, 조금 먼 공간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산만하네. 급하기도 하고.”
시선을 옮기자 멀리서 구화린이 다가오고 있었다.
구화린. 구화랑의 여동생이며 오룡 중 하나인 적룡(赤龍)에 위치한 야차. 그녀를본 순간 구화랑이 내게 부탁했던 것들이 떠올랐다.
‘천년독각사의 내단과 현철.’
화련대의 지하에 숨겨진 그것들을 구화린에게 전해달라고 구화랑이 부탁한 바가 있었다. 야차들이 거의 다 나찰각을 떠난 뒤에나 도전을 해보려고 했는데, 구화린은아직 나찰각을 떠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삼재검법과 삼재심법 같은데 그 두 개는 열심히 해봤자 한계가 있어. 둘 다 실전용이 아니니까. 차라리 익혔던 백보신권이나 더 열심히 하지 그래?”
“신경 쓰지 마라.”
매몰차게 말하며 다시 검을 들었다.
그녀가 구화랑의 동생이긴 하지만, 구화랑과 성격은 정반대였다.
신경을 끄고 이내 열중하려 했지만 집중이 쉽지가 않았다.
그것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구화린이 자리를 옮겼고, 머지않아 약재 하나를 가져오더니 내게 건넸다.
“받아.”
“받으라고?”
고구마나 마처럼 생겼지만 그 두 개는 아니었다.
붉은 기운을 띄는 적하수오였다.
내가 의아해하자 구하린이 이어서 말했다.
“정신 산만한 아이들한테 쥐어주는 약재야. 씹어서 넘겨.”
그러더니 시범을 보이듯 와그작대며 구화린이 그것을 삼켰다.
나쁜 의도로 보이진 않았다. 적하수오는 집중력을 올려주는데 효과가 있긴 하였다.
경계의 의도를 담아 입을 열었다.
“갑자기 이러는 이유가 뭐지?”
“월천님의 제자가 되었다고 들었어.”
“맞다.”
감출 것도 없었다. 이미 정식으로 공표가 된 내용이었으니.
그러자 구화린이 표정을 굳혔다.
“분명히 이유가 있어서 월천님의 제자가 되었겠지. 나는 그 이유를 확인하고 싶어. 그러면 내가 너보다 부족한 게 무엇인지 알 수 있을 테니까.”
제법 건실한 이유였다.
하지만 여전히 의아함은 가시질 않았다.
그를 알고 있다는 듯 구화린이 이어서 말했다.
“그러니까 도와줄게.”
“무엇을?”
“삼재검법을 대성하려면 두 명이서 하는 게 훨씬 빨라.”
구화린이 허리춤에 찬 검을 꺼내 쥐었다.
“대련을 하자는 건가?”
처음부터 대련의 의도로 다가왔다면 이해가 되었다. 월천의 제자가 된 순간부터 야차들이 나를 노릴 수도 있음은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구화린을 고개를 저었다.
“검법을 익히는데 있어서 가장 좋은 방법은 같은 검법을 수련한 자들이 서로 마주하며 펼치는 거야.”
의표를 찌르는 방법이었다.
생각을 해보면 타당하긴 했다. 서로에게 가르치듯 검술을 펼치면 더욱 쉽게 빠져들 수 있을 것이었다.
무엇보다 상대가 있어서 나쁠 건 없었다.
백원후는 검술을 모른다. 나와 주기적으로 대련을 해줄 야차도 없을 것이었다. 그녀가 자처하여 나서준다면 나로선 고마운 일.
하지만 ‘도와준다.’는 어조는 확실히 이상하긴 했다.
“내가 그의 제자가 된 데에 불만을 가진 거 아니었나?”
“불만이 있다고 때려눕히는 야만적인 일은 안 해.”
굉장히 진취적인 자세라 나조차도 조금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꼼수를 부리는 타입은 아닌 것 같았다.
이어 구화린이 검을 들었다.
“그럼 시작해볼까?”
구화린은 검술에 굉장히 조예가 있었다. 월천보다는 못했지만 그것은 그가 넘을 수 없는 벽과 같은 장소에 있어서 그런 거고, 굉장히 현실적으로 구화린은 ‘천재’의 자리에 위치하고 있을 것이었다.
천재.
나보다 뛰어났던 사람들.
단순한 스킬로서의 사용이 아닌 검 그 자체에 통달한 자들!
구화린이 펼치는 삼재검법은 고요했다. 절제되어 있었으며 왠지 모를 꽃 향이 느껴졌다.
검에 자신의 향기를, 기운을 자연스럽게 갈무리시키는 경지에 다다라 있는 게 분명했다.
‘제법 자극이 되는군.’
눈앞에서 펼쳐지는 아름다운 검술에 잠시 넋이 나갔다. 하지만 자극이 되는 건 분명했다. 구화린이 넘겨준 적수오의 효과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잡생각’은 사라졌다.
나 역시도 삼재검법을 펼쳤다.
둔하게. 묵직하게.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휘둘렀다.
검은 조금씩 느려졌다. 베는 동작 하나만으로 1분이, 10분이 소요되기도 하였다.
‘느림의 묘.’
빠르게 휘두르는 것보다 느리게 휘두르는 게 더 힘들다. 나는 그 차이를 절실히 깨닫는 중이었다. 하지만 덕분에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했던 것들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예컨대 근육의 정밀한 움직임, 바람의 저항, 마력의 변화 등을.
구화린의 삼재검법은 구화린만의 색깔을 담고 있었다. 나 역시도 삼재검법에, 검술 자체에 나만의 색깔을 부여해야 한다.
과거에도 그런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상승의 경지에 닿기 위해선 필요한 작업이었다.
‘나만의 검.’
무아지경.
내 시야에 들어있던 구화린이 또 다른 ‘나’로 대체되었다.
‘나’는 삼재검법을 아주 느릿하게 펼쳤다. 나 역시도 그와 똑같은 몸동작으로 검을 마주했다. 그러자 ‘나’와 나 사이에 미묘한 미풍(微風)이 불기 시작했다.
‘바람······.’
저 바람을 잡고 싶었다.
하지만 잡을 수 없었다.
바람은 검 사이를 허무하게 빠져나갈 뿐이었으므로.
하지만 바람은 계속해서 불어온다. 나는 저 바람을 잡아둘 생각으로 아주 느리게 검을 휘둘렀다.
몇 분이고, 몇 시간이고, 계속해서.
같은 일과가 며칠째 반복되고 있었다.
처음에는 약골이라고 무시했던 구화린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럴 수가 없게 되었다.
‘삼재검법 따위에 공을 들이는 이유가 뭘까?’
오한성. 녀석은 서재의 공터에서 삼재검법을 죽어라 내리치고 있었다. 하마터면 웃음이 나올 뻔했다. 고작 삼재검법이라니. 요즘의 야차들은 느려 터졌다고 익히지도 않는 검법 아닌가.
게다가 잡생각이 많은지 집중도 오래하지 못했다.
구화린은 그때 결정했다. 대련은 격이 맞는 자들 끼리나 하는 것이고, 약자를 괴롭히는 취미 따윈 없으니 한 번 옆에서 지켜나 보자고.
자신의 오빠, 구화랑과 어렸을 적 삼재검법을 같이 익혔기 때문인지 묘한 동질감도 있었다.
그리하여 함께 삼재검법을 펼치는 상대가 되었지만······.
‘이건 삼재검법이 아니야!’
하루가 다르게 오한성은 달라졌다. 그의 검은 무척이나 둔했다. 둔해빠졌다. 보는 입장에서 답답할 정도로. 아무리 삼재검법이 느림의 묘를 살리는 것이라지만 그것도 ‘적당히’다. 그런데 오한성의 삼재검법은 거북이보다도, 달팽이보다도 느렸다.
저건 삼재검법이 아니다.
게다가 그 사이에서 바람을 느꼈다.
아주 작은 바람이었지만 분명히 검에 스며들고 있었다.
검에 의념을 싣는 건 적어도 초절정은 되어야 한다.
구화란 그녀 역시도 검에 자신의 향을 심은 건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럴진대.
‘절대로 초절정의 경지는 아닌데.’
백보신권을 익혔으나 오한성은 검술도 꽤 교양이 있었다. 그러나 초절정이라 하기엔 많이 부족한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는 분명히 검에 의념을, 바람을 싣고 있는 중이었다.
이게 얼마나 말이 안 되는 일이냐 하면, 이제 막 태어난 아이가 달리기를 시작하는 것과 같은 수준이었다.
‘마치 검에게 선택을 받은 것처럼······.’
구화린은 천재다.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구화랑조차 뛰어넘는 검의 자질을 지녔다.
하지만 다른 오룡들보단 약했다. 그들과 같은 배경조차 없었다. 자력으로 일어나 구화랑은 화련대주가 되었고 자신은 적룡이라 불렸지만, 태어날 때부터 세력을 등에 업은 야차들과의 싸움에선 한 수 밀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자부심이 있었다.
순수한 검술로선 그들 모두를 이길 수 있으리라고.
누구보다 더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노라고.
그런 구화린조차 눈앞에서 일어나는 기현상에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하물며 그는 쉬는 방법을 모르는 것 같았다.
며칠간 함께 했으나 구화린이 자리를 비울 때도, 새벽녘에 찾아올 때도, 그는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내가 마지막으로 밤낮을 새어가며 검을 휘두른 게 언제였더라?’
처음에 검을 잡았던 그 때의 자신을 보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초절정의 벽을 넘어선 이후 나찰각에 들어와선 조금 나태해졌다. 다른 오룡들의 차이를 줄이고자 인재영입에 온 힘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구화린은 입술을 깨물었다.
오한성은 굴러들어온 돌이다. 분명히 자신과는 한참이나 차이가 나지만, 머지않아 따라잡힐 것만 같은 불안감이 기습했다.
‘월천님께서 그를 선택한 이유가 이런 거였을까?’
무한한 노력. 분명히 오한성은 재능을 가졌다. 하지만 그를 뒷받침할 쉬지 않는 원동력도 있었다.
질 수 없었다.
그녀는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었다.
구화린은 오한성을 인정했다.
더 이상 그는 약골이 아니었다. 검은 느렸지만, 그 속에 백 가지의 바람이 담겨 있으니 감히 누가 그를 약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적어도 검술을 누구보다 진지하게 접하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구화린은 노력하는 자를 좋아한다. 노력도 안 하고 약한 자는 혐오하지만, 오한성은 그 반대였다.
그리고 마침내 7일이 흘렀을 때.
오한성, 그가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