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신사냥꾼-65화 (66/251)

< 16. 월천(月天), 그리고 태을무극심법(太乙武極心法)(4) >

내가 머물렀던 장소의 모든 게 ‘허상’임을 깨달은 이후로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모르겠다. 열두 개의 하늘이 내리는 시련을 모두 완료하였을 때 나는 또 다른 각성을 이뤄낼 수 있었다. 육체적, 물리적이 아닌 정신적 고양감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상당히 긴, 어쩌면 짧은 시간이 흐르고 난 뒤, 나는 직접 철창을 깨부쉈다. 이 작고 가는 철창으로는 더 이상 내 비대해진 정신을 가둬둘 수 없었다.

흔히 말하는 득도의 경지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확실한 건, 더욱 견고해졌다는 것.또한 그곳에서 얻은 건 정신의 성장만이 아니었다.

[열두 개의 하늘이 내리는 시련을 모두 완료했습니다.]

[‘열두 시련의 파훼자’ 칭호를 획득했습니다.]

[‘백보신권’의 성취가 1->4성으로 상승했습니다.]

[‘금강불괴’의 성취가 3->5성으로 상승했습니다.]

[지능이 크게 상승했습니다.]

머리가 맑아졌다.

익숙한 공기. 눈을 뜨자 다시금 내 앞에 월천이 있었다.

그는 내 심장을 쥐고 있지도, 그렇다고 저승사자와 같은 눈을 하고 있지도 않았다.

다만, 담담히 기의 막을 펼친 채로 나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처음부터······ 모든 게 꿈이었군요.”

그제야 깨달았다.

처음, 심장을 잡혔을 때부터가 꿈의 시작이었다는 것을.

전이하고 있을 때도 이미 오한성인 나는 십이천나한진의 진법에 사로잡혀 실시간으로 그 안을 노니고 있었던 셈이다.

이는 그가 내게 내린 시련이고 확인이었다.

“이제 되었습니까?”

“되었다.”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저 한 마디면 족했다.

그의 확인이 끝나고, 내가 멀쩡하다는 건 ‘통과’의 의미였다.

하기야······ 시련을 이겨내지 못했다면 평생 그 허상의 공간을 떠돌며 생을 마감했을 것이다. 굳이 그가 손을 쓸 필요조차 없었다.

월천은 뒷짐을 진 채로 천천히 내게 다가왔다.

“너에겐 몇 가지 선택지가 있다. 십이천나한진을 파훼했으니 정식으로 ‘대주’의 이름을 얻어 소수의 야차들을 통솔하는 게 첫 번째.”

대주라.

십이천나한진의 파훼가 대주의 첫 조건인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구화랑은 ‘화련대주’의 자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하지만 알맹이가 없었다. 내가 대주가 된들 어느 야차가 나를 따르겠는가.

“나찰각을 나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게 두 번째. 이 경우 너는 나찰각에서 얻은모든 걸 버려야 한다.”

월천이 이어서 말했다.

모든 사건을 덮고 그냥 나가라는 것.

원래부터 인연이 없었던 것처럼 이 안에서 얻은 모든 걸 버리고 떠나라는 이야기다. 아마도 이번 진법처럼 또 다른 금제를 걸 수도 있었다.

그다지 달갑진 않은 선택지였다.

“마지막으로 셋째. 십이천의 제자가 되는 것이다.”

“이대로 지낸다는 선택지는 없습니까?”

“십이천나한진의 파훼를 통한 대주로의 승격 이상이 아니라면 나찰각의 어느 누구도 너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는 야차는 파문(破門)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지.”

“십이천의 제자가 되는 건 그 이상으로 인정을 받는 거고요?”

월천은 대답하지 않았다.

무언의 긍정.

하지만 가시가 있다. 휘하가 없는 대주는 결코 대주라고 할 수 없으며, 십이천 중 누구도 나를 선택하지 않는다면 결국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는 파문으로 이어질 것이다.

이는 많은 야차가 나의 파문을 바라고 있다는 뜻과 일맥상통했다.

내가 어느 정도의 ‘급’을 갖지 않으면 그 여론을 결코 이겨낼 수 없다는 뜻이었다.

위기다.

그리고

‘기회다.’

대주가 되는 건 진법을 파훼한 자에게 무조건적으로 주어지는 선택지였다. 하지만 십이천의 제자가 되어라? 이는 월천이 내게 던진 또 하나의 힌트였다.

십이천이 나를 바라고 있다는 말.

또한, 가장 높은 확률로 그중 하나는 내 눈앞에 있는 자.

‘월천.’

그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나는 그에게 얻어야할 것이 있었다.

탈혼무정검과 짝이 되는 심법!

그라면 분명히 그 심법을 알고 있을 것이었다.

심법을 찾을 수만, 얻을 수만 있다면, 탈혼무정검을 9성 이상의 성취로 끌어올릴 수 있을 터였다. 검에 마음을 싣고, 자연의 힘을 끌어내며, 마침내 입신의 경지에 오를 수도 있다는 뜻이다.

천천히 상체를 앞으로 숙였다.

제자가 스승과 연을 맺게 되거든 올려야하는 예절.

“제자 오한성, 스승님에게 절 올립니다.”

배움에는 끝이 없다고 했다. 누군가에게 성취를 얻을 수만 있다면 까짓 구배지례 정도는 허리가 닳도록 할 수 있었다.

나는 나아가길 바란다.

또한 기회는 주어질 때 잡아야하는 법이었다.

내가 정확히 아홉 번 절을 올리자 그가 말했다.

“따라오너라.”

뒷짐을 진 월천이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의 뒤를 따르며 나는 내 자신의 변화를 확인하는 중이었다.

몸이 가벼워졌고, 정신은 맑아졌으며, 허상 속에서의 성취가 현실에서도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십자 인을 내리긋자 허상공간 속에선 보지 못했던 글귀들이 떠올랐다.

[상태창이 갱신됩니다.]

이름: 오한성

직업: 천지인(天地人)

칭호:

● 오한성(無, 순수마력 10당 모든 능력치+1)● 열두 시련의 파훼자(6Lv, 지능+9)● 놀 궤멸자(5Lv, 체력+7)능력치:

힘 46(41+5) 민첩 47(37+10) 체력 49(37+12)지능 49(30+19) 마력 66(56+10)잠재력(201+56/461)스킬: 심안(9Lv), 지배자(9Lv), 전이(???), 냉혈(2Lv), 칠흑의 손길(2Lv), 요리(1Lv), 정령사(4Lv), 탈혼무정검(6성), 백보신권(4성), 금강불괴(5성)착용장비: 요르문간드(2Lv, 지능마력+5), 승천자의 망토(민첩+5)

[전후비교]

힘 42 민첩 43 체력 43 지능 33 마력 64 잠재력(181+42/461)힘 46 민첩 47 체력 49 지능 49 마력 66 잠재력(201+56/461)이정도면 놀라울 정도의 성장이었다. 특히 이번 시련에서 얻은 칭호와 지능의 성장은 ‘괄목상대’라고 해도 무방할 듯싶었다.

마법적인 저항능력과 스킬의 숙련도를 높이는데 지능은 가장 큰 영향을 끼친다. 지능이 높아졌으니 스킬들의 레벨 등이 더욱 빠르게 오를 것이었다.

신체능력치의 성장도 봐줄 만 하였다.

이 정도면 과거 인류의 평균잠재력 250을 웃도는 성장이었다. 그들이 강해질 수 있는 최대치를 나는 벌써 뛰어넘었다는 의미였다.

과거로 돌아온 지 고작 수개월.

내가 생각해도 믿기지 않는 성장속도였다.

“여기는 서고 아닙니까?”

늦은 저녁. 나찰각은 벌써 상당히 비워진 상태였다. 암흑인들의 침략이 있은 뒤 5일 내로 나찰각을 비우라는 대라선의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다른 야차를 만나진 않았지만, 월천이 나를 인도한 곳이 서고라는 게 못내 걸렸다.

이윽고 서재 안으로 들어간 월천은 내게 두 권의 책을 넘겼다.

“지금부터 이것을 가르칠 것이다.”

“삼재심법, 삼재검법······.”

다른 화려한 책들에 비하면 초라하기까지 한 이름.

그야말로 기초 중의 기초가 담긴 책이 삼재심법과 삼재검법이었다.

누구도 거들떠 안 본다. 나조차도 굳이 익히려는 생각은 하지 않았었다.

왜냐하면······.

‘너무 느려.’

검법과 심법 모두가 심각하게 느리다. 다른 심법으로 내공······ 그러니까 마력을 1쌓아갈 때 삼재심법으로는 고작 0.3정도나 챙기면 다행이었다.

삼재검법은 또 어떤가.

저런 검법에 맞으면 팔푼이 소리를 듣기에 딱 좋다. 그냥 단순하게 베고, 찌르는 게 전부인 흔히 말하는 삼류무공.

물론 내가 가진 ‘천지인’과 꽤 뜻이 상통하는 부분도 있긴 있었다. 삼재역시 천, 지, 인을 뜻했으므로. 그러나 뜻만 같을 뿐이지 솔선수범해서 익히고픈 마음이 전혀들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그 두 개를 한 번에 익히라고?

“이 두 가지는 모든 것의 기초가 된다. 내가 앞으로 가르칠 무공을 익히려거든 반드시 이 두 개를 대성해야 하느니라.”

“제가 앞으로 익혀야할 무공이 무엇인지 알려주실 수 있습니까?”

“탈혼무정검과 태을무극심법이다.”

아아.

익숙한 이름이 귓가를 강타했다.

게다가 탈혼무정검과 짝이 되는 심법이 ‘태을무극심법’임을 알 수가 있었다.

나는 기쁜 마음에 물었다.

“그것들도 이미 서고에 있지 않습니까?”

“원본이 아니다. 반쪽이지.”

“반쪽만 남겨둘 이유가 있습니까?”

“그 이상은 익히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불가능하다?

내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월천이 이어서 말했다.

“탈혼무정검과 태을무극심법은 과거 천마라고 불렸던 자가 창시한 무공이다. 너무나도 강한 나머지 배척받았고, 누구도 이해하지 못했으며, 그래서 사장된 무공이지. 그 이상으로 위험하기 때문에 안전한 앞부분만을 서고에 둔 것이다.”

하늘의 마귀, 천마!

야차와 나찰들조차도 이해하지 못할 수준의 천재였다니, 상상이 되지 않았다. 얼마나 대단했으면 십이천 중 하나인 월천조차 그리 말하겠는가.

기대가 되었다. 과거 내가 익힌 부분은 ‘겉핥기’에 불과했다. 얼마나 위험하고 위협적인지 직접 경험해보고 싶었다.

“탈혼무정검과 태을무극심법을 대성한 자는 천마 이외엔 없다. 도전했던 자들은 모두 미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었지. 나 역시 강제로 단전을 뜯어낸 다음에야 겨우 ‘암령’의 지배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그런 위험한 걸 제자에게 가르치려 하다니, 정상적인 스승이라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도전을 하고픈 욕심이 들었다. 모험, 도전은 그만한 대가를 치루기 마련이었으므로!

하지만 한 가지 의문점이 있었다.

단전을 뜯어내고도 나찰이 된 월천이 새삼 엄청나 보이긴 했지만······.

“암령이 무엇입니까?”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것이다.”

감히 나찰인 월천조차도 단전을 한 차례 뜯어내게 했던 것.

그게 무엇인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두루뭉술한 대답이었으나 더 묻지는 못했다.

“받아라.”

월천이 발로 바닥을 한 차례 두드리자 공간이 일그러지며 검 한 자루가 튀어나왔다.

내가 검을 쥔 순간, 그가 검기를 방출하며 말했다.

“우선 삼재검법이다.”

“그쪽은 괜찮습니다.”

“······ 삼재검법이 쉬워 보이더냐?”

처음으로 월천의 표정이 굳었다.

하긴, 이곳에서 나는 검을 휘두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기초’라면 학을 뗄 정도로 수없이 연습했다. 삼재검법은 그 기초를 다룬 책이라 굳이 안 익힌 이유도 있었다.

슈슈슉!

세로로, 가로로 베고, 정확히 중심을 찔렀다.

그 일련의 동작을 몇 번이나 더 반복했다.

이 이상으로 깔끔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어 조금씩 느리게 세 동작은 전개하자 월천의 눈빛이 달라졌다.

‘철부지 녀석’에서 ‘이 녀석 조금 하는군.’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월천은 끝내 고개를 저었다.

“느림의 묘(妙)를 살릴 줄 아는구나. 하지만 아직 멀었다. 그보다 더욱 느리고 정확하게 펼쳐야 한다.”

그가 시범을 보였다.

천천히 뻗은 검기를 베고, 찌르고, 다시 베었다.

한 세월인 듯 느렸으나 나는 항거할 수 없는 ‘벽’을 보았다.

‘틈이 없다.’

나를 향해 검기가 뻗음에도, 내가 들어갈 틈이 보이지 않았다. 섣불리 들어갈 수가 없었다.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빌어먹을. 아직 멀었군.’

순간 양 볼이 화끈거렸다.

자신 있게 나섰지만 번데기 앞에서 주름을 잡은 꼴이었다.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존재는 내가 마주봤던 ‘천재들’보다도 더욱 상위에 있는 자였다. 고작 저런 단순한 동작에서부터 자신의 ‘격’을 실을 수 있다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조차도 탈혼무정검과 태을무극심법을 대성하지 못한 채 단전을 뜯어냈다고 했다. 지금의 상태로 내가 익혀봤자 다시 겉만 핥고 끝날 가능성이 농후했다.

‘기본부터. 다시.’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다짐했다.

자만하지 말고 다시 시작하기로.

* * * * *

월천은 내가 공식적으로 제자가 되었음을 선포했다.

“검은 야차가 월천님의 제자가 되었다는데?”

“월천님께서 제자를 둔 건 처음이 아닌가?”

“도무지 그분의 속을 모르겠군.”

대다수의 야차들이 이미 나찰각을 떠났지만, 주요 야차들은 아직도 나찰각에 남아있었다.

오룡이나 각 대의 대주들. 혹은 그와 관련 된 야차들 말이다.

그들은 하나 같이 믿을 수 없다며 입을 모았다.

특히 그중에서도 구화린의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 약골이 월천님의 제자가 됐다고?’

백보신권을 익혔으나 구화린의 머릿속에서 오한성은 여전히 약골이었다. 다만, 그 특이성과 잠재성을 높이 사서 자신의 조에 넣어주려고 했던 것뿐이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까다롭기로 소문난 월천의 제자가 되었다니!

근본 없는 야차에서 순식간에 최고배분이 되었다. 십이천의 제자라면 대주들보다도 급이 높았다. 당연히 오룡들과는 차원이 달랐다.애당초 오룡들도 십이천의 제자가 되기 위해 ‘성흔 쟁탈전’에 참여하려던 것이었다. 검은 야차 오한성은 그 과실만을 쏙 빼먹은 것이다.

하지만 쉽게 인정하기가 어려웠다.

월천의 제자가 되는 건 구화린, 그녀가 바라고 또 바라던 일이었으므로.

가뜩이나 마음이 심란한 지금과 같은 시기엔 더더욱 그랬다.

‘직접 확인해봐야겠어.’

구화린은 움직였다.

정말로 그가 월천의 제자가 될 자격이 있는지, 확인을 해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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