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신사냥꾼-64화 (65/251)

< 16. 월천(月天), 그리고 태을무극심법(太乙武極心法)(2) > 끝< 16. 월천(月天), 그리고 태을무극심법(太乙武極心法)(3) >

처음에는 큰 의미가 없었다. 그저 내게 도구와 씨앗이 주어졌고 그것을 이용해 이메마른 땅을 되살려보자는 마음뿐이었다.

하지만 농사란, 시간이 걸리는 일이다.

그리고 분명히 내게는 시간이 없었다.

‘이곳은 내 마음속의 세상이다.’

좌선을 한 순간부터 생겨난 현상. 죄인에게 내려지는 시련인 듯했으나 이곳은 내 마음속을 갈아 넣은 공간이었다.

나는 마음을 편하게 가졌다.

심연에서의 일, 전이한 직후 겪은 일들.

그것들을 생각하고 떠올리는 순간 나는 ‘집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집착은 이 세계를 더욱 메마르게 만든다. 그래선 이 공간을 푸름으로 바꿀 수 없고, 내게 주어진 시련을 해결할 수 없게 된다.

게다가 묘한 ‘촉’같은 게 있었다.

‘나는 시간의 흐름, 그 중간에 있다.’

과거로 돌아오며 나는 시간의 흐름에 한 번 역행한 적이 있었다. 현실에서의 하루가 심연에서의 이틀이 되기도 했다. 나처럼 시간의 순리 바로 옆에서 행동하는 존재는 없을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일까?

지금 내가 있는 이곳, 마음속의 세상과 철창 안의 ‘나’가 겪는 시간의 흐름 또한 분명히 역행적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농사를 지었다.

메마른 땅을 파고 정돈하여 씨앗을 심은 후 고르게 덮었다.

하지만 부족하다.

씨앗이 자라나 과실을 맺기에 반드시 필요한 게 없었다.

‘물.’

땅. 대지는 지천(地天)의 영역이다.

하지만 물이라면 수천(水天)의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내가 원하고 이미지를 그려봐도 물이 생기거나 하지는 않았다.

무엇이 필요한 걸까?

나는 주변을 돌아다녔다. 걷고, 걷고, 또 걸어서 물이 있을만한 장소를 찾았다. 비록 고독했지만 나는 조금씩 ‘적응’해나가는 중이었다.

그러나 천리 길을 걸어도 물 한 방울 찾을 수 없었다.

다시 돌아왔을 때, 씨앗은 아직도 땅을 뚫고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다.

단 하나를 제외하고.

그 모습에 나는 빙그레 웃고 말았다.

‘부족함 속에서도 생명을 발하는구나.’

생명의 힘이었다. 어쩌면 내가 그리는 생명의 찬란함일지도 모르겠다. 수많은 씨앗 중 저 하나만큼은 모든 게 부족한 상황에서도 노력하여 결국 벽을 뚫었다.

하지만······.

한계가 있었다.

생명의 찬란함만으로는, 역설적이게도 발하지 않느니만 못했다. 자신만이 남았음을 알고 결국 좌절하며 죽어갈 테니까.

한 마디로 이 발화한 씨앗은 ‘나’였다. 과거 으스러져가던 내 모습과 닮았다. 포기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나는 혼자 남았고, 절망하지 않았던가.

나는 이 씨앗을 살리고 싶었다.

그래서 뛰었다. 미친 듯이. 이곳이 내 마음속의 세상이라면 오로지 절망으로만 들어차 있지는 않을 것이었다. 내가 아는 ‘나’라는 존재는 절망의 끝에서도 분명히 웃을 수 있는 자였다.

천릿길로 안 된다면 만 리길로, 그로도 안 된다면 다시 그 열 배를.

‘찾았다.’

그 끝에 나는 찾을 수 있었다.

폭포가 있었다. 덩그러니 폭포 하나만 있는 풍경이었지만, 나는 조심스럽게 씨앗들을 옮겨와 이 주변에 다시 심었다.

그러자 가장 먼저 땅을 뚫었던 녀석이 빠르게 성장하여 꽃봉오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좋군.”

몇 개는 꽃이 되었고, 몇 개는 나무가 되었으며, 또 몇 개는 짐승이 되어 주변을 돌아다녔다. 씨앗은 ‘가능성’의 보고였던 셈이다. 무엇이든 될 수 있는 힘!

나는 나무를 베어 집을 지었다.

생명을 퍼트리고, 그 속에서 나는 나라는 존재가 채워지며 풍성해짐을 느끼게 되었다.

메말랐던 대지는 조금씩 풍요로움으로 넘치고 있었다.

화르르르륵!

거대한 불이 번지기 전에는 말이다.

화마(火魔)였다. 내 심상 속으로 불의 마인이 찾아온 것이다.

놈은 나타난 즉시 세상을 불태웠다.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피어나던 생명들이 불타올랐다.

“어차피 네놈은 나에게 무릎을 꿇게 되어있다. 이 부질없는 짓을 왜 계속 해나가는 거지?”

화마가 말했다.

굉장히 묘한 얼굴이었다.

민식이 같기도 하고, 우리엘 디아블로 같기도 하고, 라이라나 시리아 등의 내가 아는 인물의 얼굴 같기도 했다.

아니, 그 거대함은 ‘위대한 별’이라고 봐도 무방할 듯싶었다.

평범한 이라면 놈을 보는 순간 오줌을 지렸을 것이다. 내 안에 잠재되어있던 공포그 자체를 자극하고 있었다.

화마. 놈은 공포였다. 하여 나는 백보신권을 날렸다. 순환과 무한의 묘리.

쿠르르르릉!

곧 내 손에서 모인 거대한 진동이 세상을 뒤흔들었다.

이곳은 나의 심상이다. 결국 내가 원하고, 또 원한다면 그 원하는 크기의 따라서 힘의 크기도 달라지는 법이었다.

그리고 고통을, 시련을 꺾고자 하는 나의 의지는 이 세상을 크게 뒤흔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이것이 바람이다.

곧 화마와 함께 세상의 장막이 뜯겨져나가며, 나는 다시 원래의 장소로 돌아올 수있었다.

지천, 수천, 화천, 풍천.

네 개의 석상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것들의 빛은 하나로 모아지며 내 이마로 쏘아지고 있었는데, 굉장히 몸이 가볍고 머리가 말끔했다. 여태껏 겪었던 불안한 감정들 따위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한꺼번에 네 개의 시련을 돌파하고 나는 스스로의 평안함을 얻은 것이다.

다시 좌선을 해보았다.

‘백보신권의 성취가 높아졌다.’

뿐만이 아니라 마력의 그릇도 넓어진 것 같았다.

하지만 이상한 일이었다.

모든 불안함을 잠식시킨 다음에야 드는 의문.

머릿속이 맑아지자 당연히 했어야할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수치로의 확인이 불가하다.’

십자 인을 그려도 요지부동이었다. 상태창을 비롯한 글귀들이 허공에 떠오르지 않는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푸른 이끼와 물. 그것들은 처음 들어왔을 때와 마찬가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줄어들지도, 늘어나지도 않았다.

이상하지 않은가?

꽤 오랫동안 나는 이 안에 머물렀음이 분명했다.

하지만 신체적 변화도 없고, 주변 사물도 그대로였다.

‘이 역시 만들어진 세계란 말인가?’

그렇다면 이 좁은 공간 역시 가상의 세계일 가능성이 높았다.

방금 전 나는 내 심상 속을 오갔지만, 꿈속의 꿈과 같았다.

이런 게 가능하다는 말은 들어본 적도 없었다.

어디서부터일까.

어디서부터가 가짜고, 현실이란 말인가.

쿵! 쿵!

철창은 여전히 단단했다. 나는 마음을 먹고 세상의 변화를 꾀해봤으나 요지부동이었다. 적어도 지금 내가 서있는 이 철창 안은, 나의 세계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누군가가 이곳에 나를 가둔 거다.

시간이 멈춘, 굉장히 정밀하게 만들어진 정신 속의 방.

끝없는 세월 동안 그저 절망하길 바라며 만들어진 작위적인 곳.

요르문간드도, 이타콰도, 놀들도 없었다. 심지어 전이조차 되지 않았다.

무한한 고독과 무한한 무력감이 들어야 정상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생긋 미소 지었다.

‘내 성취는 분명하게 올라갔다.’

모든 게 멈췄으나 유일하게 움직이는 건 나의 마음이었다. 강렬한 마음은 때론 현실에 영향을 끼치기도 한다.

절망하길 바랐다면, 포기하길 바랐다면, 아쉽지만 나는 그 정도로 유약한 자가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다. 나는 한계에 부딪히고, 그것을 깨며, 앞으로 나아가길 바라는, 인류 역사상 전무후무라고 해도 좋을 의지의 사나이니까.

하여······.

나는 다시 몸을 움직였다. 이전보다 더욱 격렬하게!

* * * * *

십이천나한진(十二天羅漢陣)의 열 두 기둥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 가운데에 한 남자가 눕혀져 있었다.

오한성.

검은 야차의 인을 지닌, 외부자.

그의 심장을 필두로 새겨진 진법은 어두운 방의 전체에 수놓아져 빛을 발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진법을 유지하는 열 두 개의 기둥이 시시각각 파훼되고 있었다. 누구도 파훼할 수 없는 이 진법의 유일한 파훼법은 안에 갇힌 이가 스스로 이겨나가는 것이었다.

그를 바라보며 월천은 침음을 흘렸다.

“······ 이 정도였단 말인가?”

“거짓 꿈을 꾸게 하고 있는 것이냐? 흥, 부질없는 짓을.”

월천의 옆에 한 여인이 자리하고 있었다.

보는 순간 눈이 멀게끔 할 정도로 폭발적인 미(美)를 가진 존재.

요르문간드.

그녀는 샐쭉한 눈빛으로 눕혀진 오한성과 월천을 번갈아 바라봤다.

돌연히 찾아온 월천은 대뜸 이타콰와 놀들을 제압하곤 잠들어있는 오한성을 상대로 진법을 그리기 시작했다.

요르문간드는 막지 않았다. 막을 수 없기도 했지만, 월천도 그녀를 건드리지 않았다.

보는 순간 월천 역시 그녀가 결코 평범한 존재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십이천나한진은 부정한 자는 결코 깨트릴 수 없는 진. 용맹한 야차도, 심지어 나찰들 중에서도 이 진을 깨지 못하는 자가 부지기수였건만······.”

“헌데?”

“······ 그는 잘 깨고 있군요.”

믿기지 않는다는 말투였다.

있을 수 없는 일을 목도한 자와 같았다.

“고작 이 정도 시련으로 무너질 자였다면 내 부마가 될 자격이 없다.”

요르문간드가 콧대를 높였다.

월천은 고개를 돌려 요르문간드에게 시선을 줬다.

“어째서 그대와 같은 존재가 이 자에게 숨어들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대라선께선 그대의 존재 역시 깨달으셨습니다. 제게 시험을 해보라고 한 건 그대 때문이기도 합니다. 어딘가의 신이시여.”

말투에 가시가 있긴 했지만 제법 공손했다.

그녀의 정체를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기 때문이다. 월천은 수천 년 이상을 살아왔지만 요르문간드는 족히 그에 수십 배 이상을 살아온 존재라는 걸.

일전 암흑인들이 출현했을 때 요르문간드는 오한성에게 충고를 건넸고, 그때 대라선이 그녀의 존재를 알아차린 것이었다.

그녀 역시도 대라선과 같은 이의 눈을 속이고자 일부러 나찰산에 들어온 이후부터 목소리를 내지 않고 있었지만 이미 걸렸으니 거칠 게 없었다.

요르문간드가 코웃음을 쳤다.

“이런 작은 곳은 신경도 안 쓰니 괜한 걱정은 말거라.”

그녀는 세상, 미드가르드를 집어삼킨 뱀이다. 나찰계는 강력한 차원이지만 그녀가 욕심을 내기엔 한없이 작았다.

비록 지금은 힘이 없어도 그 자부심만은 남아있었으니.

“그가 십이천나한진을 깨트린다면······.”

“깨트린다면?”

“그를 제자로 삼고 싶군요.”

사뭇 진지한 어조였다.

검은 야차의 인. 승천자의 의식. 그리고 십이천나한진마저 깨트린다면 이는 야차와 나찰들의 역사 속에서도 없었던 개벽과 같은 존재의 출현을 뜻한다.

“반발이 심할 터인데? 네가 그에게 보여준 심상은 마냥 거짓이 아니지 않더냐?”

요르문간드도 어렴풋이 월천이 ‘십이천나한진’으로 오한성에게 내보인 심상 같은걸 읽고 있었다. 그중에는 야차들의 반발과 심판에 대한 것도 있었다.

비록 그 일은 현실이 아니지만, 현실과 비슷한 상황에 놓일 가능성도 분명히 있었던 것이다.

월천은 고개를 내저었다.

“십이천나한진을 파훼한 전사를 인정하지 않을 야차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납득하지 못한다면 대련으로 납득시키면 됩니다.”

“나는 그저 지켜볼 것이다. 허나.”

요르문간드가 월천을 향해 강렬한 눈빛을 던졌다.

“내가 먹을 과실을 함부로 건드린다면 그 끝이 좋지 않을 것만은 알아두어라.”

스르르륵.

그녀가 다시 은색의 뱀으로 화했다. 그녀는 변덕이 매우 심했다. 어쩔 때는 그가 죽는 걸 가만히 방관하다가도, 간혹 한 번씩은 챙겨주기도 했던 것이다. 감히 변덕의 화신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었다.

이윽고.

쿵! 찌르르륵!

집 전체가 흔들렸다.

열 두 개의 기둥이 무너지고, 천장이 떨어졌다.

그 사이에서 월천은 기의 막을 넓게 펼쳤다.

동시에.

오한성, 그가 눈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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