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신사냥꾼-59화 (60/251)

< 15. 꿰뚫어보는 자(3) >

[167,440포인트를 획득했습니다.]

포인트가 포인트를 부른다. 4만에서 시작한 포인트는 어느덧 4배가 넘게 오르고 있었다. 16만 7천이면 당장에 라이라에게 지어진 빚을 갚을 수 있는 액수였다.

‘생각보다 쉽군.’

도합 7번을 연속해서 맞췄다. 4번이 넘어간 순간부터 내가 건 쪽의 비율이 낮아져서 조금씩 벌었음에도 이만한 수치가 완성된 것이다.

“미치겠군요. 로드께선 혹시 미래라도 볼 수 있는 건가요?”

쟈낙이 당황하여 물었다.

처음 2만에서 시작한 포인트가 8만이 넘도록 불어있었다. 이 정도면 아무리 5만 다크엘프 전사들을 다스리는 영주라고 할지라도 큰 값이다.

7번의 싸움 모두 아슬아슬하기 그지없었다. 누가 이길지 예측자체가 불가능한 싸움이었다. 하지만 내 선택에 따라서 결과가 정해지는 것처럼 승패가 갈린 것이다.

라이라는 처음과 달리 한결 편해진 눈빛이었다.

내가 심안을 사용하고 있음을, 유일하게 그녀만이 알고 있었다.

“이건 사기다! 로드 우리엘 디아블로와 주최 측이 짜고 있는 건 아닌가!”

이쯤 되자 반발을 하는 자들도 있었다.

내가 데몬로드이기 때문에 쉽사리 말을 못했던 자들과 달리, 큰 규모의 도시를 지배하는 자들은 거침이 없었다.

“회색 물양의 도시를 다스리는 영주, 하호님. 저희는 이번 투기장에 아무런 조작도, 개입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호라고 불린 자는 전신이 뿔로 이루어진 괴물이었다. 수십, 수백 개의 뿔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다양한 길이와 두께를 가지고 솟아있었다.

하지만 암흑인들도 당황하긴 매한가지였다. 본래 투기장은 ‘여흥 돋우기’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설마 7번 연속해서, 하필이면 데몬로드인 내가 다 맞춰버릴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겠지. 16만 포인트 중 12만 포인트는 이곳 대부호들에게서 뜯어낸 것과 매한가지였다.

“아시지 않습니까? 푸른 산호섬의 연회는 ‘공정함’만을 최우선으로 삼습니다. 벌써 10여 회나 열린 연회인 만큼 신뢰도는 꽤 높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하지만 이상하지 않은가? 어떻게 일곱 번을 연달아 맞출 수가 있지?”

“혹시나 ‘심연의 지평선’의 영주이신 쟈낙님의 말마따나, 로드 우리엘 데몬로드께서 ‘미래예시’를 하기 때문이 아닐는지요?”

“미래예시······ 데몬로드의 권능이란 말인가!”

웅성임이 더욱 커졌다.

72명의 데몬로드들이 신의 이름에 따라 ‘권능’을 갖는다는 건 더 이상 비밀도 아니었다. 하지만 우리엘 디아블로의 권능을 두고서 굉장히 많은 이야기가 오가고 있었다.

그런데 미래예시라니!

감히 최상급의 권능이다. 미래를 확실하게 보고 행동할 수 있다는 건 그 하나만으로도 굉장한 특혜가 있었다. 어느 정도까지 볼 수 있는지는 모르지만, 7번의 싸움에서 연달아 승패를 확신했다면 적어도 몇 시간 앞의 일 정도는 꿰뚫어볼 수 있다는 뜻이다.

예언의 힘을 가진 존재도 있었고, 승패를 미리 점치는 자들도 많았지만, 아예 미래를 예시할 수 있는 힘을 지닌 존재가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권능이라면. 권능의 그 강력한 능력이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예상보다 재미있게 흘러가는군.’

나로선 좋았다. 내가 가진 권능은 심안, 그리고 지배자다. 미래예시라기 보다는 미래에서 돌아온 것이지만 크게 틀린 말도 아니었다.

게다가 이러한 소문들이 부풀려서 퍼지면, 나를 경계하는 자들이 늘어날 것이다. 특히 나를 적대하려고 했던 자들은 다시 한 번 생각해야 할 수도 있었다.

멸제의 카르페디엠······ 녀석도 마찬가지다.

마지막으로 녀석을 만났을 때, 나는 선전포고를 했다. 싸움이 기다려진다고. 만약 내가 미래예시의 권능을 가졌다는 이야기가 퍼지면 카르페디엠은 바짝 얼어버릴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투기장은 여기서 막을 내리겠습니다. 그럼 바로 다음 단계로 나아가지요.”

짝짝!

암흑인이 두 차례 손뼉을 쳤다.

그러자 거대한 철창이 천천히 올라가더니 천장 위로 들어가 모습을 감췄다.

“그럼 투자회를 시작하겠습니다. 오늘 투자회에 참여할 신상 상회는 스물 한곳! 모두 앞으로의 성장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특별한 것’들을 들고 나왔습니다. 그럼 보실까요?”

두 번째는 투자회였다.

새로운 아이템으로 무장한 신상 상회가, 투자자의 모집을 위해 이곳에 자리를 한 것이다.

투자자들을 모집하고 규모를 불려서 시장을 넓히는 게 그들의 목적이다. 투자하고 싶은 상회가 보이면 주주가 될 수도 있고, 서로의 합이 맞을 경우 아예 상회 자체를 넘기거나 합병시킬 수도 있었다.

‘구르망디가 나설 차례.’

그리고 이곳에서 구르망디가 나선다. 절대지배 상회의 대표로서.

첫 번째로 모습을 보인 건 붉은색 피부를 가진 오크였다. 붉은 오크는 거대한 함을 하나 가져왔다. 온갖 쓰다 버려진 무기들이 즐비했다.

“우리는, 찾는다. 전쟁, 쫓는다. 그리고 모은다. 이것들을 여러 곳에, 판다.”

짧은 언어로 열심히 설명하고 있었다. 한 마디로 전쟁이 있는 곳마다 출몰하여 그곳에 버려진 장비들을 줍는 사업을 벌이고 싶다는 이야기다.

“거래할, 상회, 찾는다. 투자해줄, 자도 찾는다. 우리는 ‘스케빈져’다.”

나쁘지 않은 아이디어였다. 열심히만 하면 짭짤한 소득을 기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르크락의 뒤로 수십의 붉은 오크들이 도열했다. 뜻을 함께 할 동지들인 듯싶었다.

소개가 끝나자 암흑인이 다시 앞으로 나섰다.

“이상, 스케빈져 상회의 대표 ‘우르크락’의 설명이었습니다. 투자하실 분이 계시다면 손을 들거나, 주어진 종이에 적어주십시오. 자동으로 계약이 발동될 것입니다.”

나는 굳이 손을 들지 않았다.

대신 투박한 종이를 들었다. 종이엔 손동작을 인식하여 글이 적히는 마법이 걸려 있었다.

또한 ‘스케빈져’에 대한 설명들도 적혀있었다.

10년 내에 원금 회수 보장. 붉은 오크족들의 눈을 통해 심연에서 일어나는 모든 전장의 뒤를 쫓겠다는 등의 이야기가.

‘내 눈치를 보는군.’

미래예시라는 이야기가 퍼졌다. 내가 투자하는 건, 아주 높은 확률로 ‘값비싼 원석’임을 시사한 것이다. 물론 진짜 미래예시가 가능할 때의 이야기지만.

전쟁이 끝나고 장비를 모으는 게 괜찮은 작업이긴 했으나 투자대비 환수율은 별로였다. 5%의 수익금을 보장한다고 하는데, 규모가 커질수록 한계가 있는 사업이었다. 특히 투자자의 권리에 대한 설명이 애매했다.

‘사는 곳은 비슷하다는 건가?’

문득 웃음이 나오려고 했다. 괴물을 인간으로 치환하면 이곳이나 지구나 사는 건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았다. 이곳에서도 나름의 ‘사회’가 형성되어 있었고, 틀과 규칙이 있었다. 지독한 약육강식의 세계이나 지구라고 다르겠는가.

상회가 존재하며 이런 식으로 투자를 받기도 하다니.

과거에는 꿈도 못 꿨을 일이다. 심연의 괴물들은 그저 괴물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략 스무 명 정도의 이들이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모두 어느 영지, 도시의 지배자들이거나 커다란 상회를 조종하는 자들이었다.

‘여기서 투자 받는 금액에 따라 상회나 사업장의 가치가 정해지지.’

암흑인이 나눠준 종이에는 각종 상회나 사업장의 정보와 기대수익 등이 적혀있었다. 나름대로 엄선하고 엄별하여 추려냈다는 느낌은 받았다.

나는 심드렁하게 손을 놀렸다. 1,000pt. 곧이어 내가 투자한 금액과 이름이 종이위에 떠올랐다. 내가 투자하자, 다른 이들도 적당히 투자하며 지분을 챙겼다.

곧 스케빈져는 8만 포인트의 투자를 받고 막을 내렸다. 내가 참여하지 않았다면 그 반 정도로 종결이 났을 것이었다.

‘투자자들을 유치해서 규모를 키우는 게 나쁜 일은 아니다.’

내가 기다리는 건 구르망디였다.

지역의 유지들에게만 판매하여 인지도를 올리려고 했지만, 이곳에서라면 그 시간을 대폭으로 단축시킬 수 있었다.

내가 가져가는 비율이 줄어들지는 몰라도, 규모를 키워서 다방면으로 판매를 시작한다면 전체적인 수익은 늘어날 것이다.

투자회는 계속됐고 나도 소소하게 투자를 계속했다.

크게 구미를 당기는 아이템이 없지만 내 움직임에 따라 투자를 하는 자들이 있었다. 내 권능의 힘을 빌려 이득을 보려는 자들.

이윽고 17번 째. 슬슬 하품이 나오려는 시기에 구르망디가 모습을 드러냈다.

“다음은······ 절대지배 상회의 대표, 구르망디를 소개합니다.”

구르망디가 나오자 암흑인들이 짐들을 옮겼다.

화려한 보석들. 창과 칼이 X자로 각인 된 각종 장신구가 가장 먼저 보였다.

그리고 그것들 중 몇 개는 라이라 디아블로가 착용하고 있는 것이었다.

“절대지배 상회? 괴상한 이름이로군.”

“절대지배라. 이름처럼 대단하면 좋겠는데.”

눈길은 확실히 끌었다. 심연 속 강자들은 귀담아 들을 수밖에 없는 이름. 이걸 보고 어그로라고 하던가? 어중간한 것보다는 확실히 나았다. 자기어필의 시대. 지구나 심연이나 어중간해선 살아남을 수 없다.

구르망디가 헛기침을 내뱉었다.

“저희 상회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주로 보석과 장신구와 같은 사치품을 다룹니다. 혹시 심연 아주 깊은 곳에 있는 ‘라이라 광산’을 아십니까? 그곳에서 채광한 보석은 다른 보석과 달리 순도가 매운 높습니다. 아름답고, 광택이 나죠. 그곳에서 난 보석을 드워프 장인이 직접 세공하고, 창과 칼의 문양을 음각해 세상에 내놓습니다.”

청산유수가 따로 없었다.

게다가 ‘라이라 광산’이라니. 피식 웃고 말았다.

목에 걸면 목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그런 광산이 있을 리 없으나 저 대본은 크리퀴가 준비한 게 분명했다.

일종의 마케팅이다. 모두의 시선이 라이라에게 쏠렸다.

“라이라 광산? 그런 이름의 광산이 있던가?”

“새로 발견한 곳인가 보군. 그런데 라이라라면······.”

구르망디고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그녀처럼 용맹하며 아름다운 분에게만 어울리는 보석이죠. 저희는 세세한 공정을 거치기에 많은 양을 생산하진 않습니다. 오로지 자격이 있는 분에게만 판매합니다. 창과 검은 절대적인 지배를 뜻하고, 라이라 디아블로께선 마땅히 ‘전장의 지배자’라 불릴 자격이 있지 않습니까? 또한, 이러한 지배의 의미는 남녀 사이에서도 발생합니다. 마음에 드는 수컷을, 암컷을 가지고 싶으십니까? 저희 상회의 보석으로, 장신구로 속박하십시오!”

괜찮은 카피문구였다. 설마 상회의 이름을 이런 방식으로 활용할 줄이야. 상회의 이미지를 이러한 방식으로 굳히고, 선전하다니.

‘제법이야.’

크리퀴. 그리고 구르망디. 모두 인재였다. 그들은 라이라 디아블로, 그녀가 내게 소개해준 자들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그녀의 눈은 믿어도 될 것 같았다.

어쩌면 심안을 가진 나보다도 더 잘 꿰뚫어보는 듯싶었다.

“라이라.”

내가 느지막하게 말하자, 라이라가 중심부로 도도하게 나아갔다. 그녀를 장식한 보석들은 아름다웠지만, 솔직히 말해서 라이라가 보석을 장식했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로 그녀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TV에서 나오는 쇼핑 광고에서 외국모델을 쓰는 것과 비슷했다. 라이라는 그보다 한참이나 급이 높았으니 모든 시선의 집중을 받는 게 당연했고.

“아름답군.”

“확실히······ 그녀라면 자격이 있지.”

라이라는 분위기를 압도하고 있었다.

잔잔한, 자신감이 어려 있는 미소. 오묘한 조명이 그녀를 더욱 뛰어나게 만들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쟈낙도 감탄했다.

“라이라에게 저런 모습이 있을 줄은 몰랐네요. 언제나 얼음처럼 차가운 표정밖에지울 줄 몰랐는데. 특히 최근 100년간 그녀는 ‘사막의 여왕’으로 불리기도 했죠. 모두 로드 덕분일까요?”

“원래 성격이다.”

“후후, 그런가요?”

쟈낙은 더 말을 이어가지 않았다.

이윽고 구르망디가 한 발자국 앞으로 나아갔다.

“이걸로도 부족하십니까? 그렇다면 아예 속박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다마고치’라 불리는 보석입니다. 이 보석은 상대를 완전히 포박하여 저장할 수 있게 만들어줍니다. 그야말로 절대적인 지배 아니겠습니까?”

공간의 보석. 2천 포인트에 암흑상점에 올려놨지만 오랜 시간 팔리지 않았던 물건. 그게 다른 컨셉으로 나타났다.

곧 구르망디의 옆으로 포박 된 엘프 여인 하나가 바닥에 무릎을 꿇려졌다.

“가지고 싶었지만 계속해서 도망을 가더군요. 그래서 묶어놨습니다만, 또 언제 도망칠지 모르지요. 그래서······ 아예 가둬버리려고 합니다. 이렇게요.”

구르망디가 공간의 보석을 엘프여인의 이마에 댔다. 본래라면 약간의 조건과 상호간의 동의가 있어야 하지만, 이미 사전에 이야기가 되었는지 곧 공간의 보석 안으로 엘프여인이 흡수되듯 들어갔다.

“이제 그녀는 온전히 저의 것이 되었습니다. 물론 다시 꺼낼 수도 있죠.”

공간의 보석을 흔들고, 이름을 부르자 이번엔 포박이 풀린 상태로 엘프여인이 나타났다. 그녀는 구르망디를 껴안으며 뺨에 입술을 비볐다.

“이 외에도 저희는 다마고치와 함께 ‘진화하는 슬라임’을 판매하기도 합니다. 무엇으로 진화할 지는 아무도 모릅니다만, 간혹 ‘크리스탈 슬라임’이 되기도 합니다. 크리스탈 슬라임은 예로부터 복을 불러오는 존재로 불렸지요. 다만, 거의 멸종직전까지 몰려서 지금은 구하려고 해도 구할 수가 없습니다. 그에게, 그녀에게 저희 상회의 보석과 함께 선물한다면 얼마나 환상적일까요?”

크리스탈 슬라임의 크기는 고작 주먹 하나만했다.

그것을 엘프에게 선물하자, 엘프가 보다 환하게 웃으며 구르망디를 끌어안았다.

한 편의 연극과도 같았다.

“저희 절대지배 상회와 함께하실 분을 구하고 있습니다. 절대로 후회하지 않으실겁니다.”

크리퀴와 구르망디의 합작에 나는 내심 환호했다.

이제 내가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나 없이도 팔릴 만한 연극이었지만, 내가 움직임으로 인해 더욱 가속이 붙을 것이었다.

나는 종이에 적힌 설명 등을 보지도 않았다.

말이 끝나자마자 손을 움직였다.

조용히.

하지만 어느 때보다 격렬하게!

< 15. 꿰뚫어보는 자(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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