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신사냥꾼-58화 (59/251)

< 15. 꿰뚫어보는 자(2) >

주변으로 살얼음이 둥둥 떠 있는 것만 같았다. 구르망디만 저 뒤에 남아서 발을 동동 굴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춤을 추는 도중에 찾아온 모양이었다.

하지만 쟈낙은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았다.

도리어 밝아진 얼굴로 라이라를 환대했다.

“라이라 디아블로. 직접 보는 건 오랜만이네요. 잘 지냈나요?”

“그 말투, 여전히 나를 어린아이처럼 보는군.”

“그대에게 검을 가르쳐 준 게 나니까요.”

그랬던가? 쟈낙이 스스럼없이 내게 다가온 이유 중에는 라이라가 엮여있는 것 같았다. 우리엘 디아블로의 기억을 내가 모두 가진 건 아니었으므로.

하긴, 우리엘은 검술을 다룰 줄 모른다. 칠흑의 손길과 용언만으로도 어지간한 적은 물리칠 수 있었다. 보다 강한 적은 ‘검은 별(10Lv)’로 처리를 하면 되었고.

검은 별은 단 하나의 대상을 지정하여 ‘수많은’ 저주를 거는 권능이다. 권능이라 이름 붙은 만큼 어지간한 지능이나 수호로는 막을 수 없다.

‘단 하나’만을 지정할 수 있기에 여럿이서 덤비면 이길 승산이 생길 수도 있지만 문제는 라이라다.

라이라는 적이 많을수록 힘을 발휘하니 상성이 좋았다. 라이라와 우리엘, 이 둘의조합이 데몬로드를 뽑는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다.

‘상당한 실력자.’

그렇다보니 라이라의 검술 실력은 다른 데에서 기반으로 하는 게 당연했다.

그리고 라이라에게 검술을 가르쳤다면 쟈낙 역시 상상이상의 실력자일 터였다.

특유의 자세나 기도가 확실히 날카로운 칼과 같았다.

“로드시여. 저와 함께 추시지요. 다크엘프와 손을 잡거든 로드의 품위가 떨어집니다.”

“듣던 대로 말투가 굉장히 공격적으로 변했군요. 과거엔 그토록 귀여웠는데······.”

“쟈낙, 네가 나를 가르쳤을지 몰라도, 또한 나를 팔려고 했다는 것도 기억하고 있다. 다크엘프라는 족속들은 모두 뒤가 구리지.”

이 부분에선 살짝 경악하고 말았다. 스승이라면서 팔려고 했다니!

쟈낙이 고개를 떨어트렸다.

“그땐 제가 뭘 몰랐죠. 설마 우리엘께서 데몬로드가 되시리라곤 상상도 못 했는걸요. 저도 그 당시엔 영주가 아니었고요.”

“그날 로드께서 너를 죽이지 않은 걸 감사히 여겨라.”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라이라, 그대가 말려준 덕에 안 죽은 걸요. 덕분에 무사히 지평선의 영주가 되었답니다. 그래서 용병도 싸게 빌려주고 있지 않던가요?”

구면이긴 했지만 꽤 악연인 것 같았다.

하지만 쟈낙은 라이라와 달리 분명히 ‘호의’를 비추고 있었다.

쟈낙이 숙였던 고개를 들고는 웃어보였다.

“과거의 일은 잊고, 새로운 관계를 쌓아가죠. 저도 얍삽한 카르페디엠보다 우직한 우리엘님이 승리하길 바란답니다.”

말에도 거침이 없었다. 카르페디엠의 눈치 따윈 전혀 안 본다는 게 느껴졌다. 그만큼 ‘심연의 지평선’이란 집단이 꽤 강력하다는 뜻인지.

라이라냐, 쟈낙이냐.

둘 다 나와 함께 춤을 추길 바랐다.

처음 함께 춤을 추는 상대라는 건 매우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냉정하게 생각하면, 라이라가 양보하는 게 맞다. 쟈낙과 관계를 형성하는 건 나에게 있어서 중대한 이득이기 때문이다.

다른 데몬로드를 신경 쓰지 않는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그럼······.”

내가 막 몸을 돌려 쟈낙에게 말을 걸려고 할 때였다.

투욱.

연회장이 어두워졌다. 이윽고 전신이 타오르는 말, ‘화염마’에 올라탄 암흑인 몇 명이 튀어나왔다. 그들 중에는 크리퀴도 있었다.

크리퀴가 이번 연회를 여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고 들었다. 암흑상회가 허락하지 않고 암흑상인이 개인적으로 주도하는 연회는 모두 불법이지만, 크리퀴는 이익을 위해선 물불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장소이다 보니 데몬로드들이 직접 오길 꺼려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체면이 안서는 것이다. 그래서 대리인만을 보내는 것이다.

“연회는 즐거우십니까?”

덜커겅!

화염마에 탄 암흑인 한 명이 말하자, 그 순간 천장에서 거대한 철창이 내려왔다.

철창의 바닥은 딱딱한 돌로 이루어져있었고 그 안에는 한 괴물이 있었다.

크아아아아아앙!

쿵! 쿠아앙!

네 발 달린, 사자와 비슷하게 생긴 짐승이었다.

하지만 그 크기는 사자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족히 다섯 배는 컸다.

전신이 근육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털들은 강철처럼 단단하며 뾰족했다.

“흥을 더 돋우고자 작은 이벤트를 준비해봤습니다. 한때는 ‘판넬 숲’의 주인, ‘위대한 호르모마스’라 불렸던 짐승입니다. 저 거대하고 육중한 근육을 보십시오!”

호응도 만만치 않았다.

“호르모마스! 유명한 짐승 아닌가.”

“용케도 잡아들였군. 판넬 숲은 ‘마해’의 근처라 괴물들이 모두 강하지.”

“그곳의 주인이라면······.”

모두가 작게 감탄했다. 그 반응을 보곤 암흑인이 미소를 지었다.

“자, 저 판넬 숲의 주인을 상대할 또 다른 괴물이 있습니다. 쌍두룡! 순혈종의 용은 아니지만 그 힘은 히드라와 맞먹는다고 전해지지요!”

쿵!

천장에서 떨어지듯 내려왔다.

머리가 두 개 달린 용. 10m는 되어 보일 법한 몸집. 쌍두룡이다.

마법은 사용할 줄 모르지만 육체능력은 상상을 초월하는 괴물이었다.

“호르모마스와 쌍두룡이 싸웁니다. 누가 이길까요? 원하신다면 포인트를 걸고 승패의 결과예측에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맞출 경우 맞추지 못한 쪽의 포인트 비율만큼 획득할 기회를 드립니다!”

공식적으로 치러질 수 없는 도박!

그 생생한 현장이었다.

하물며 이처럼 우수한 투기장을 누가 만들겠는가.

쌍두룡과 판넬 숲의 주인이라니······.

“아무리 그래도 용족을 당할 수는 없지.”

“호르모마스를 모르니 그런 소리를 하는 거다.”

“제법 흥미진진하군.”

의견이 첨예하게 갈렸다. 그만큼 두 괴물은 강력하기 짝이 없었다.

하나, 둘 도박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누가 이길 것 같으냐?”

내가 묻자 라이라가 먼저 답했다.

“호르모마스. 쌍두룡을 보고도 기세를 잃지 않았어요.”

“저는 쌍두룡이라고 생각해요. 쌍두룡은 신체능력도 능력이지만 치명적인 독을 품고 있으니까요.”

쟈낙은 라이라의 말과 반대되는 의견을 냈다.

나는 턱을 쓸며 심안을 열었다. 능력치를 보면 보다 확실한 판단이 가능할 것이었다.

이름: 호르모마스(value-47,000)

종족: 강철사자족

능력치:

힘 74 민첩 91 체력 69

지능 55 마력 66

잠재력(355/360)

이름: 쌍두룡(value-53,000)

종족: 용족

힘 88 민첩 75 체력 82

지능 60 마력 70

잠재력 (375/375)

능력치는 근소하게 쌍두룡이 앞선다. 단순한 신체능력치의 합도 쌍두룡이 좋은 편이었다. 단 하나, 민첩을 제외하곤 말이다.

민첩 하나가 힘과 체력을 커버할 수 있느냐가 문제였다. 하지만 호르모마스의 민첩은 90을 넘었다.

‘90이 넘는 단일능력치는 나머지 능력치 이상의 효율을 보이지.’

한 방 대결이었다. 쌍두룡의 공격이 한 번만 성공해도 호르모마스는 뼈도 못 추린다. 반대로 호르모마스는 쌍두룡의 공격을 피할 만큼 민첩했고, 지속적인 공격으로 쌍두룡의 피부를 너덜너덜하게 만들 수 있었다.

누가 이길지는 제대로 판단이 서지 않았다.

투기장이 열릴 거라는 사실은 사전에 알았지만, 크리퀴는 참여하지 않기를 권했다.

―가장 첫 싸움은 ‘호르모마스’와 ‘쌍두룡’이 치르게 될 겁니다. 다만, 투기장에서만큼은 조작이 없습니다. 한 마디로 밑밥이지요. 저희도 누가 이길지 모릅니다. 특히 투기장은 아예 제 소관이 아닌지라.

하지만 그간의 경험과 심안으로 살핀 결과로는······.

“호르모마스에게 4만 포인트.”

말을 꺼낸 순간이었다.

[호르모마스에게 40,000pt를 겁니다.]

[호르모마스가 승리할 경우 1.27비율만큼의 포인트를 획득할 수 있습니다.]

공중에 걸린 전광판의 숫자가 한 번에 올라갔다.

4만 포인트. 대부호들이 모였다곤 하지만 한 번에 걸기는 분명히 많은 액수였다.

“허어.”

“아무리 데몬로드라도 4만 포인트는 부담이 될 터인데?”

“어디서 아르만티움 광맥이라도 구했나?”

라이라도 내 눈치를 살폈다.

“로드시여······.”

불안하게 떨리는 눈빛. 설마 자신의 말이 내게 영향을 끼친 것인지 하는 마음인 듯싶었다. 반대로 쟈낙이 아닌 자신의 말을 들었다는, 약간의 희열도 섞여있는 것 같긴 했다.

어디까지나 내 결정이었지만.

쟈낙은 신기하다는 듯이 말했다.

“도박에 꽤 취향이 있으신 모양이군요?”

“호르모마스란 녀석의 눈빛이 마음에 들었다.”

“그럼 저도 호르모마스에게 2만 포인트를.”

“쌍두룡이 이길 거라고 하지 않았나?”

“이겨도, 져도, 저는 손해가 없답니다.”

쟈낙이 한쪽 눈을 찡긋했다.

내게 부담을 씌우겠다는 거다. 과연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용병다웠다. 이기면 이기는 대로 좋고, 져도 ‘내게 보인 호의의 값’으로 넘길 수 있었다.

그걸 직설적으로 말하는 것까지. 머리가 좋았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판넬 숲의 주인, 호르모마스! 그리고 용족 쌍두룡의 싸움! 누가 이길 것인가!”

암흑인의 외침이 끝나자 철창의 중앙을 박았던 벽이 아래로 내려갔다.

호르모마스와 쌍두룡은 지극히 흥분한 상태였다.

벽이 내려감과 동시에 부딪혔고, 크아아아앙!

콰르르르르!

철창이 쉴 새 없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공격을 가한 건 호르모마스다. 그 날렵함 탓에 쌍두룡이 쉬이 호르모마스에게 공격권을 넘겨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쿠루루루!

쌍두룡이 입에서 독안개를 내뿜었다.

철창에는 마법적인 조치가 취해져 있어서 독안개가 바깥으로 나오진 않았지만, 순식간에 철창 안을 물들였다.

독안개를 마신 호르모마스의 행동력이 느려졌다.

머리를 휘젓고는 다시 움직이려 했지만, 쌍두룡이 조금 더 빨랐다.

“그대로 물어 죽여라!”

“뭉개버려!”

주변의 이들이 소리를 내질렀다.

호르모마스의 몸이 쌍두룡의 꼬리에 붙잡힌 것이다.

그러자 호르모마스가 갈기를 쭈뼛하게 세웠다.

동시에 털들이 철처럼 바짝 굳어서 사방으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바늘처럼 날카로운 털은, 곧 쌍두룡의 오른쪽 눈을 맞췄다.

키아아아아악!

쌍두룡이 비명에 몸부림을 쳤다.

그 사이 호르모마스가 꼬리로부터 벗어나 쌍두룡의 몸을 타고 빠르게 올라가, 재빨리 목을 깨물었다.

히야아아아!

쌍두룡의 움직임이 조금씩 과격해졌다. 호르모마스는 이빨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

이후는 무느냐, 피하느냐의 싸움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호르모마스가 불리할 건 자명했다. 독안개는 시시각각 진해지고 있었다. 마침내 철창 안을 완전히 물들였을 땐, 안의 상황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역시 쌍두룡의 독은 당할 수 없는 건가?”

“판넬 숲의 주인이라는 것도 별 거 아니군.”

“5천 포인트만 날렸네.”

호르모마스에게 포인트를 건 이들은 한숨을 내쉬었다.

독안개 안에서도 싸움은 계속됐다.

그리고 독안개가 걷혔을 때······.

키에에에엑!

단말마와 함께 쿵! 소리를 내며 쌍두룡이 쓰러졌다.

놀랍게도 승자는 호르모마스였다. 쌍두룡이 한쪽 눈을 잃은 걸 알고 똑똑하게도 오른쪽에서만 공격을 가한 끝에 이긴 것이다.

“제법인데?”

“싸울 줄 아는군.”

“쌍두룡은 용족이라 치기에도 사실 애매하지.”

모두가 짧게 감상을 남겼다.

[1.27의 비율, 50,800포인트를 획득했습니다.

[56,440포인트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나는 작게 미소 지었다.

단숨에 만 포인트를 벌었다.

이런 투기장이라면 백 번을 해도 좋을 것 같았다.

“정말 이겼군요.”

쟈낙이 신기하다는 듯 말했다.

나는 계속해서 앞을 주시하고 있었다.

곧 암흑인이 과장스럽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호르모마스가 이겼습니다! 역시 역전의 용사! 그럼 바로 다음 싸움으로 가보실까요?”

철창의 중심에 벽이 올라오고, 이번엔 돌로 만든 골렘이 나타났다.

“중급의 골렘입니다. 과연 지친 호르모마스가 이 녀석도 이길 수 있을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중급의 골렘.

호르모마스의 이빨이 잘 박히지도 않을 외피를 가지고 있었다.

“뻔한 싸움이로군.”

“골렘에게 3천 포인트!”

“하지만 중급은 조금 약하지 않나? 아무리 호르모마스가 지쳤대도 중급 골렘으로는 싸움이 안 되지.”

“자고로 다친 야수가 더욱 강한 법.”

이번에도 갈렸다. 애매한 상대들로만 싸움을 붙이고 있었다. 이래서 예측이 불가능하다고 한 것이다.

“호르모마스에게 5만 포인트.”

[호르모마스에게 50,000포인트를 겁니다.]

[호르모마스가 승리할 경우 1.36비율만큼의 포인트를 획득할 수 있습니다.]

“5만? 번 걸 다 건 건가?”

“버릴 생각으로 걸고 있는 모양이군.”

하지만 나는 거침이 없었다.

계속해서 맞추고, 승리할 것이다.

몇 번 반복되면 나를 의심하거나 따라오려는 자들이 생길 터.

하지만 이는 내가 의도하고 있는 것이었다.

요컨대 내가 ‘무조건 옳다’는 인상을 주는 게 계획의 골자였다.

더욱 큰 것을 얻기 위해, 나를 중심으로 바람이 불게끔······.

어차피 투기장은 전초전에 지나지 않는다.

투기장에서 적당히 잃는 척을 하면 더욱 많은 포인트를 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진정한 싸움은 ‘이 다음’에 있었다.

크리퀴는 말했다. 암흑상회에선 판매가 불법인, 진짜 ‘진주’가 상당수 나온다고.

나를 따르던 자들이 경매에 참여하게 된 순간.

‘너희들은 얻은 모든 걸 토해내야 할 거다.’

나를 의심하거나, 믿거나, 어느 쪽에 가담해도 그들은 이길 수 없을 것이었다.

이 판은 조금씩 내 지배하에 놓이고 있었다.

< 15. 꿰뚫어보는 자(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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