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신사냥꾼-56화 (57/251)

< 14. 라이라 디아블로(4) > 끝< 14. 라이라 디아블로(完) >

저택을 벗어났다.

머릿속엔 크리퀴와 나눴던 대화들로 점철되어 있었다.

―제 충성의 증거로 카르페디엠의 주요 거래자 중 하나인, ‘카켈’이라는 암흑인을내일 바로 제거해드리겠습니다. 내일이 되면 로드께서도 그 결과를 자연스럽게 알게 될 겁니다. 아아, 3차원 말입니까? 그곳으로 향한 강등위기의 암흑인이라면 ‘우라시’겠군요. 알겠습니다. 함께 제거해드리지요.

―연회는 이틀 후. ‘푸른 산호의 섬’에서 치러집니다. 라이라께서는 부디 아름답게, 우리엘께서는 부디 늠름하게 꾸미고 오시길.

마지막으로 내게만 몰래 쥐어준 보석이 있었다.

―라이라 디아블로께서 몸이 매우 굳어있으시군요. 이 보석을 직접 선물해주십시오. 라이라께서 활기를 되찾으실 겁니다. 걱정마세요. 나쁜 거 아니니까.

영롱한 보랏빛의 보석이었다. 크기는 아기 손톱보다 조금 큰 정도. 겉은 투명하고안으로 갈수록 보랏빛을 띠었는데, 그 안에서 사슴 모습을 한 연기와 같은 게 뛰어놀고 있었다.

활기를 가져다주는 종류의 보석이라고 했다. ‘심안’으로 살핀 결과로도 그다지 해가 될 점은 없었다.

<영롱한 영혼의 보석(value-500)>

-영혼의 보석 중 아주 희귀하게 보랏빛을 띠는 보석-어린사슴의 영혼이 봉인되어 있다.

-지닌 자의 심신을 편안하게 만들어준다.

별 내용은 없었다. 심신을 편안하게 해준다면, 크리퀴의 말마따나 조금의 활력은 찾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확실히 굳었군.’

야차와의 대결 이후 라이라는 지극히 사무적으로 변했다. 나를 따르는 태도는 여전했지만 뭔가 알 수 없는 거리감이 느껴졌다. 적어도 내가 만든 거리감은 아니었다.

그녀가 능동적으로 활발하게 움직여주면 나는 편해진다. 지금처럼 굳어서 주어진일만을 한다면 나로선 유능한 인재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셈이다.

“라이라.”

돌아가는 길.

암흑상회의 게이트로 향하고 있는 와중, 약간 뒤에서 내 옆을 걷던 라이라가 답했다.

“말씀하십시오.”

“받아라.”

“······?”

보랏빛의 보석을 처음 본 라이라는 살짝 고개를 갸웃했다. 하기야 나도 여자에게 보석을 준다는 그 행위 자체에 대해선 약간의 부담감이 있었다.

그런데 라이라의 눈이 점점 커지기 시작한다.

하여, 먼저 선수를 쳤다.

“심신을 편안하게 해준다더군.”

“시, 심신, 심신······ 말입니까?”

라이라가 말을 버벅거렸다.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이토록 당황한 라이라는 여태껏 본 적이 없었다.

혹시나 저 보석에 이상한 뜻이라도 담겨있는 건가?

만약을 위해 첨언했다.

“요즘 들어 기운이 없어 보이더군. 나는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하니 평소대로 하라.”

“평소대로, 말이지요?”

“다른 의미는 없다.”

크리퀴가 아무래도 이상한 걸 준 것 같았다. 저 보석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눈치마저 없는 건 아니었으니.

그래서 못을 박았지만 라이라는 양 손으로 보석을 쥔 채 심장 가까이 손을 모으고있었다. 얼굴이 화끈거리고, 숨소리가 거칠어진 저 반응······ 저걸 보고도 눈치를 못 채면 바보다.

나는 애써 외면하며 앞으로 걸어 나갔다.

‘망할 놈.’

크리퀴. 생각대로 속이 시커먼 놈이었다.

* * * * *

우리엘 디아블로, 그리고 라이라 디아블로가 떠난 후.

크리퀴가 차의 맛을 음미하며 말했다.

“참 아름다운 한 쌍이란 말이야.”

우리엘 디아블로와 라이라 디아블로에 대한 이야기는 많았다.

100년 만에 깨어난 데몬로드. 100년간 로드를 대신하여 로드대행을 한 라이라 디아블로.

특히 가장 많은 구설수에 오르는 건 라이라 디아블로였다.

그 아름다운 무력. 결코 물러서지 않는 투지는 그녀를 ‘여왕’으로 불리게 만들었다. 그녀는 모르겠지만, 수많은 이들이 은근히 그녀를 사모하고 있었다.

헌데 카르페디엠과 맞설 정도라니!

데몬로드와 전쟁 중인지라, 그 외에도 여러 가지 관계가 얽혀서 누구도 쉽게 손을내밀지 못했다.

물론 카르페디엠과 전쟁이 치러지기 전에는 수많은 이들이 라이라 디아블로에게 ‘도움’을 주려고 하였다. 하지만 그 조건이 혼약, 결혼이었으니 라이라가 받아들일 리 없었다. 도리어 청혼을 하러 간 자들 중 몇몇은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고 한다.

오죽하면 적으로 나선 카르페디엠조차 ‘라이라 디아블로를 맞아들이려고 전쟁을 벌였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으니.

이번에 그녀가 공식적으로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면······ 파장이 클 것이다.

“아름답다고 생각하지 않느냐, 샤샤?”

“주인님 말씀대로입니다.”

“그 혈족은 반드시 보존되어야 한다. 그처럼 희귀한 핏줄은 매우 드물거든. 다른 차원이라면 모를까, 심연에서는 힘의 계승이 이상한 일은 아니지.”

혈족의 보존. 순수혈통을 뜻함이다.

우리엘과 라이라가 이어지면, 그 얼마나 우아한 후계가 태어나겠는가.

이곳 심연에선 그러한 일들도 잦았다. 혈통을 유지하고자, 힘을 계승하고자, 같은 핏줄이 결합하는 경우가 말이다.

‘보랏빛 영혼의 보석. 영원한 결합을 의미하지.’

심연의 수컷들은 잘 모른다. 하지만 암컷이라면 보석에 담긴 의미를 잘 알 것이다. 영원한 결합. 동시에 너를 결코 버리지 않겠다는 강한 수컷의 맹약과도 같았다.

라이라 디아블로가 우리엘 디아블로를 사무치게 그리워했다는 이야기는 그다지 비밀스러운 소문조차 아니었다. 크리퀴는 거기서 더 나아가, 라이라가 우리엘을 사랑한다고 믿었다.

지금쯤이면······.

그 모습을 상상하자 크리퀴의 입가가 씰룩였다.

‘그나저나 뭔가가 이상한 거 같은데.’

그러다가 크리퀴는 고민했다.

오늘 처음 만난 데몬로드를 왜 자기가 따르고 있는 걸까?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어쨌건 우리엘 디아블로가 자신을 밀어주겠다면, 계급을 올려 ‘공작’에 다가가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위로 올라가기 위해서 온갖 짓을 다해오지 않았던가.

이 기회를 놓칠 순 없었다. 서로가 이득을 취할 수 있도록, 그러기 위해선 자신이 먼저 자신이 ‘증거’를 보여야 했다.

“샤샤. 황혼의 늑대들을 소집해라. 침략자 사냥을 가야겠다.”

* * * * *

다음날.

암흑상점을 통해 공문이 내려왔다.

「‘갈할 광산’을 담당하던 암흑상인이 실종됨에 따라 당분간 ‘갈할 광석’의 공급이 일시적으로 중단됩니다.」

크리퀴는 말했다. 오늘이 되면 자연스럽게 알 수 있게 될 거라고.

변화라면 이것뿐이었다.

“갈할 광석이 뭐지?”

평소의 달라붙는 갈색 가죽 옷이 아닌, 화사한 느낌의 치마와 블라우스 비슷한 걸입은 라이라가 말했다.

“골렘이나 복잡한 마도구를 유지하는데 필수적인 광석이에요. 매우 희귀하고 비싸죠.”

“공급이 중단됐다는군.”

“그건 굉장히 희소식이군요. 갈할 광석 사업은 카르페디엠의 입김이 닿아있을 텐데, 지금쯤이면 발을 동동 굴리고 있겠네요. 크리퀴, 그 자가 약속을 지킨 게 분명해요.”

딱딱한 말투가 제법 물렁해졌다.

어제 보석을 준 뒤로 라이라는 다시금 밝아졌다.

뿐 만인가.

아예 목걸이로 만들어서 차고 다녔다.

‘생각보다 유능해.’

어쨌거나 라이라의 눈썰미는 정확했다. 설마 하루 만에 행동으로 옮길 줄이야. 데몬로드와 선이 닿은 암흑인을 건드리는 건 꽤 위험한 행동이었을 텐데 말이다.

‘실종’으로 처리됐다는 건 범인을 찾지 못했다는 뜻이다. 크리퀴. 용의주도했다.

다음은 내 차례였다.

“연회에 입고 갈 옷은 아직 준비 중인가?”

“예. 내일, 출발하기 전에 완성될 거예요.”

아무거나 입고 가려 했지만 라이라가 기어코 말렸다. 중요한 자리이니만큼 위용을 드러내야 된다나.

이후 나는 성 바깥을 거닐었다. 이그닐의 산책을 위해서다.

그 뒤를 라이라가 조신하게 따라왔고, 성 바깥에서 슬라임을 채집하고 돌아온 야차들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경악하며 입을 열었다.

“세상에.”

“내가 뭘 잘못 본 건가.”

“저 악귀 같은 여자가······ 허!”

라이라가 한 차례 야차들에게 시선을 주자, 야차들이 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강자였고 그들은 약자였다. 그들을 향해, 라이라가 표독스럽게 말했다.

“잡담할 시간이 없을 텐데? 즉시 준비하고 연무장에 모이도록. 잠시 후 대련을 할 것이다.”

매일 같이 라이라와 야차들은 대련을 하며 실력을 증진하고 있었다.

라이라에겐 야차의 무공을, 야차에겐 라이라의 변칙적인 공격법을 익히게 만들며 확실하게 실력을 상승시키기 위함이었다.

이그닐에게도 가르치려 해봤지만, 녀석은 그다지 흥미를 보이지 않았고.

구화랑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로드와 우리의 차별이 너무 심한 거 아니오?”

“로드는 내가 섬겨할 분이며, 너희들은 내가 부려야 할 자들이기 때문이지.”

“너무하는군.”

한숨을 내쉰 구화랑이 터덜터덜 성 안으로 들어갔다. 슬라임을 구별하여 나눠놓고 다시 연무장에 모여야 했다.

“안 가 봐도 되나?”

대련을 하려면 라이라도 준비를 해야 함이었다.

이에 묻자, 라이라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조금만 더 함께하면 안 되겠습니까?”

이전보다 적극적으로 변한 것 같다면, 착각일까?

대답하지 않고 앞서나가자, 일분일초가 아쉽다는 듯 라이라가 눈을 빛내며 내 옆으로 바짝 붙으며 걷기 시작했다.

* * * * *

푸른 산호의 섬.

이름 그대로 푸른 산호가 지천에 깔린 작은 섬이었다.

그곳에 거대한 궁전이 하나 지어져 있었고, 수많은 존재들이 모였다.

인산인해가 아니라 괴산괴해(怪山怪海)라고 해야 할 정도였다.

그야말로 괴물천지. 쥐의 모습을 한 어린아이 크기의 ‘쥐도령’부터, 흡혈귀나 온갖 보석으로 치장한 오크, 트윈헤드 오우거, 심지어 데스나이트마저 있었다.

간혹 보이는 메두사와 같은 강력한 괴물들. 가장 파괴적인 괴물이라 불리는 발록을 봤을 땐 숨이 멈추는 줄 알았다.

슈앙! 소리와 함께 게이트를 넘어 모습을 드러내자, 그 순간 주변이 시끄러워졌다.

“라이라 디아블로?”

“정말 라이라 디아블로라고?”

“믿기지 않는군.”

나보다 라이라가 더욱 주목을 받았다.

오히려 저들은 나를 모르는 것 같았다. 하기야, 암흑상회에서나 구분하는 자들이 있었지, 공식적으로 우리엘 디아블로는 100년간 활동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이런 장소에 모습을 드러낸 건 처음 아닌가?”

“하! 여전히 용맹하고 아름답군.”

“저런 차림은······ 설마 짝을 찾으러 온 건 아니겠지?”

“제, 젠장. 너무 대충 입고 온 거 같은데.”

폭발적인 인기였다. 라이라는 별 것 아니라는 듯이 행동했다. 오히려 저런 관심이귀찮아 보이기까지 했다.

라이라가 내게 더 가까이 다가오자, 그제야 시선이 나에게 몰렸다.

“그런데 옆의 마족은 누구지?”

“음. 심상치 않은 마력이 느껴지는군.”

“저 모습은 분명히······.”

그제야 나를 경계했다.

그중엔 나를 알아차린 자도 있긴 했지만 극소수였다.

천천히 주변을 둘러봤다.

수많은 괴물들. 하지만 분명히 ‘포인트 냄새’가 났다.

괴물 주제에 차려입고 온 녀석도 많았다. 그들이 가져온 것, 착용한 것 등을 심안으로 살피자 곧 이 연회의 의미를 눈치 챌 수 있었다.

‘과연.’

왜 크리퀴가 ‘아름답고 멋있게 차려입고 오라’고 했는지 알겠다.

심연의 대부호들이 모이는 장소. 하지만 이들은 단순한 대부호가 아니었다.

군단의 주인, 종족을 이끄는 지도자, 혹은 갖은 도시의 주인들.

아마도 다른 데몬로드 또한 있을 테지.

그러니 오늘 이곳의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더욱 높은 도약을 위해선 말이다.

나는 라이라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로, 로드시여?”

“여유 있게 웃으며 걸으라. 너무 뻣뻣하군.”

“아, 알겠습니다.”

라이라가 억지로 웃어보였다.

어색하긴 했지만 봐줄 만 하였다.

그 상태로 우리는 연회장에 발을 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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