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신사냥꾼-52화 (53/251)

< 14. 라이라 디아블로(1) >

영지로 돌아온 이후 나는 이가 갈리는 걸 막을 수 없었다.

전신이 떨렸고 분노를 주체하지 못했다.

놈들이다.

놈들이 균열을 넓히는 주범이었다.

‘균열이 넓어짐에 따라 지구의 침략도 자유로워진다.’

균열이 넓어지면, 심연에서 지구로 향하는 제약이 점차 사라져간다. 지금은 5Lv 정도가 한계지만 후에는 모든 짐승과, 괴물과, 악마들이 지구로 향할 수 있는 것이다.

의문은 있었다.

균열은 어떤 식으로 넓어지는 건가?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커지는 걸까.

아니었다.

암흑인. 우리가 암흑상인이라 불렀던 그들.

그들이 세계의, 차원의 ‘침략’을 행할 때마다, 균열은 넓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절로 주먹이 쥐어졌다. 세계의 파괴는 데몬로드가 주도했지만, 그 문을 열어준 건결국 암흑인들이었던 셈이다.

‘어떻게 해야 그들을 방해할 수 있지?’

고민했다. 머리가 부서져라.

물론 나 혼자 위대한 별을, 암흑상회를 부술 순 없다. 그 강력한 데몬로드들이 괜히 그들과 ‘불가침’을 맺은 게 아닐 터였다. 마음에 드는 건 때리고, 부숴서 얻는 게 그들인 탓이다. 하지만 그들조차도 암흑상회에선 온순한 양처럼 경매에만 참여하지않았던가.

‘데몬로드는 데몬로드로.’

암흑인들이 하던 말을 떠올린다. 암흑인은 데몬로드를 건드릴 순 없다는 말. 반대로 다른 데몬로드라면 가능하다는 그 말!

그렇다면······ 암흑인을 포섭한다면 어떨까.

‘암흑인은 암흑인으로.’

순간 머릿속에 아주 작은 빛이 들어오는 기분이었다. 내가 건드리지 못한다면, 같은 암흑인끼리 서로 방해하도록 만들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선’을 어찌 만들어야 하는가에 대해선 숙제가 남아있었다.

‘그들은 계급주의다.’

그들의 계급은 마치 중세사회 같았다. 분명히 준남작, 백작, 후작 따위의 단어를 늘어놓았다. 말하자면 더욱 높은 계급이 되거든 그만큼 강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 정점에는 분명히 ‘왕’이 있을 터.

왕은 신하들의 의견을 듣고 모든 대사를 처리하는 법이었다. 말하자면, 왕의 측근에 끄나풀을 심을 수만 있다면 균열이 열리는 걸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암흑인을 지배한다면?’

내가 가진 지배자의 권능.

분명히 암흑인을 지배할 순 있었다. 그들 역시도 ‘value’가 떠올랐다. 각자 가치가 다르고 지배의 대상에 들어온다는 것이다.

하지만 신중해야 했다. 내가 지배한 암흑인이 다른 암흑인에 의해 탄로 나게 될 경우, 그 후폭풍은 지난할 터였다.

나 정도의 약소 데몬로드 하나쯤은 그 즉시 정리가 될 지도 모른다. 그들이 당장 카르페디엠에게 조금의 힘만 실어줘도 힘들어질 게 자명했으므로.

‘심는 대상을 골라야 하고, 나 자신의 힘도 키워야겠군.’

결론을 내렸다. 그게 무엇이든 소홀히 해선 안 된다고.

나는 그동안 ‘오한성’으로서의 나만을 중요시하고 있었다. 우리엘 디아블로의 몸에 다시 들어오지 못하는 경우의 수도 계산한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엘 디아블로가 내가 다져 논 기반으로 성장하거든 죽 쒀서 개 준 꼴만 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이판사판이었다. 나는 그 가능성을 배제했다. 설혹 그럴지라도, 오한성으로서의 나를 더욱 빠르게 성장시키면 될 뿐이었다.

최대한 균열이 열리는 걸 늦추고 데몬로드들을 방해하는 건 이로 보나 저로 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로드시여. 야차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성 안. 나는 왕의 좌에 앉아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포박되어 옮겨진 야차들. 그 중에는 ‘구화랑’이 있었다.

그들은 나를 올려다봤다. 지금 나는 저들과 비교할 수 없는 존재였다. 아무리 그들이 강하다고 할지라도 데몬로드를 어찌할 순 없으니.

“우리를 어떻게 할 셈이지?”

구화랑. 그가 대표하여 물었다. 사나워 보이는 눈빛은 여전했다.

적룡 구화린의 친오빠이며, 화련대의 대주를 맡고 있는 강자.

나는 그의 처리를 두고 고민하는 중이었다.

경매에서 그를 구매한 순간, ‘지배자의 권능’이 발휘되긴 하였다. 하지만 온전하진 않았다.

[지배자의 권능이 발휘되었습니다. 그러나 야차의 보석, 야차의 혼은 ‘지배’의 힘으로부터 저항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는 ‘위대한 전사’가 그의 후계자인 야차와 나찰에게 내리는 영구적인 축복의 힘입니다.]

지배저항!

효과가 아예 없진 않았지만 완벽하지도 않았다.

위대한 전사가 누구인지는 몰라도 야차들이 품은 보석엔 그러한 효과가 있었던 모양이다.

‘권능도 만능은 아니었군.’

하기야 권능이 만능이었다면 다른 데몬로드도, 거신 또한 지배할 수 있었으리라. 그게 불가능한 건 지배자의 권능이 완전하지 않다는 방증이었다.

나는 짧게 답했다.

“너희들은 나를 위해 싸우고, 지키며, 죽을 것이다.”

구화랑이나 다른 강한 야차들을 놀릴 순 없는 노릇이었다. 특히 구화랑. 그는 8Lv을 넘어선 초 강자 중 하나였다.

그가 나를 위해 싸워준다면 카르페디엠과의 전쟁이 한결 수월해질 것이다.

내가 가진 것 중에서도 그와 견줄 수 있는 건 라이라뿐이었다. 이그닐과 이타콰는아직 성장을 덜했다.

구화랑이 눈썹을 치켜들었다.

“누군지도 모르는 자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라?”

“나는 우리엘 디아블로다. 구화랑, 너의 새로운 주인이지.”

“······!”

구화랑이 눈을 크게 떴다. 어째서 자신의 이름을 내가 알고 있는지 의아할 것이다.

하지만 내가 나찰산에서 가장 먼저 눈을 떴을 때 본 게 구화랑, 그였다. 심안이 없더라도 모를 수가 없다.

하지만 구화랑이 이내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

“묘한 자로군. 허나 나는 나보다 약한 자를 위해 싸우지 않는다. 이는 다른 야차들 또한 마찬가지다. 아니······ 설혹 우리엘 디아블로, 그대가 나보다 강하다고 할지라도······.”

“돌아가게 해주마.”

“······ 뭐?”

나는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를 위해 최선을 다하라. 그리하면 나찰각으로 너를 돌려보내줄 것이다. 또한, 나찰각의 모든 것들이 죽고 사는 건 나에게 달렸다.”

허언이 아니다. 확신할 수 있었다.

나찰각의 결계는 뚫린다. 108결계이니, 그보다 더한 것을 친다고 할지라도, 암흑인들이 다시금 침공을 시작할 것이다.

결국 시간문제였다.

문득 나찰, 월천을 만났던 때를 떠올렸다.

그는 나를 ‘찬탈자’라고 했다. 내가 찬탈자이니 그를 쫓던 이들이 나를 찾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해보면, 나는 나찰계의 인간이 아니었다. 암흑인들도 그 세계의 주민이 아닌 나를 찾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어쩌면 월천은 암흑인들에게 쫓기고 있던 것이 아니었을지.

나찰각은 그때 이미 멸망한 것이다.

그곳이 멸망하지 않으려면, 미래를 바꾸려면, 나밖에 없다.

민식이가 나찰계에 당도할 때엔 이미 많은 게 늦을 수 있었다. 게다가 민식이는 ‘인류의 영웅’이 될 생각이지, ‘나찰계의 영웅’이 될 생각은 추호도 없으므로.

결국 그들이 죽고 사는 게 내 노력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너는······ 대체 누구지?”

구화랑의 얼굴에 미묘한 풍파가 일었다. 어찌하여 그 모든 걸 내가 알고 있냐는 태도다.

하지만 내가 밝힐 이유가 없다. 내가 오한성이라고 하여도 그가 믿을 리 없었다. 이 상태에선 더욱 의심만 살 것이었고, 의심을 사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나는 침묵할것이었다.

대신.

“우리엘 디아블로. 너의 새로운 주인 될 자.”

이 하나만은 확실히 새겼다.

그리고 라이라를 향해 말했다.

“라이라. 저들에게 누가 위인지 알려주도록.”

“괜찮겠습니까?”

“쉽지 않은 상대다. 너 또한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라이라가 작게 미소지었다.

그 미소는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걱정 마시옵소서, 로드시여. 저는 약한 적을 상대할 때도 최선을 다한답니다.”

어련할까.

나 역시 그녀의 말이 진실임을 알고 있었다.

‘괜찮겠습니까?’라고 물었던 건, 약하게 상대할 줄을 몰라 야차들에게 큰 상처를 줄 수도, 혹은 죽일 수도 있기에 내가 확인한 것이었다.

이에 나는 허락했고, 그녀가 날개를 펼쳤다.

촤르륵!

그리고 라이라가 그들의 구속구를 잘라냈다.

마력이 돌아오고, 육체적 제약이 사라지자 야차들의 눈빛에 생기가 돌았다.

주로 흉흉함만이 가득했다. 지배자의 권능마저 제대로 통하지 않는 게 야차다. 암흑상인들조차 그 흉포함에 혀를 내두르지 않았던가.

구속구를 푸는 순간 공격을 해오리란 사실은 자명했다.

나는 그들이 움직이기 전에,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약속하지. 라이라를 이긴다면 너희는 자유다.”

“자유? 돌아가게 해준다는 말인가?”

“그렇다.”

구화랑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 말을 어떻게 믿지?”

“믿지 않으면 어쩔 셈이지?”

“너를 죽이겠다.”

데몬로드를 죽이겠다, 라. 나에게 하는 말임을 알면서도, 마음에 들었다.

“그럼 돌아갈 수 없을 텐데?”

“이곳에 있는 모든 자들을 죽이면 그중 하나는 우리에게 길을 안내해주겠지.”

웃음이 나오려는 걸 참았다.

막으면 뚫고, 뚫어도 안 된다면 부숴버리겠다는 의지.

따르게만 만들면 큰 힘이 되어줄 건 자명했다.

“믿고, 안 믿고는 너희의 자유이다.”

그러자 구화랑이 고개를 끄덕이곤 말했다.

“우리는 다치고, 굶주렸다. 무기라도 쥐어주는 게 공평할 거 같은데.”

“라이라.”

“예.”

라이라가 손을 한 차례 휘저었다.

그러자 허공에 아공간이 나타나며, 각종 무기들이 쏟아졌다.

명품이라 칭할 건 없지만 대충 휘두를 정도는 되는 것들. 모두 라이라가 상대를 죽이고 빼앗은 전리품이었다. 좋은 건 모두 팔고 적당한 무기들만 남은 것 같았다.

“손에 익은 무기로 골라라. 이게 버릇없는 너희들의 마지막 핑계거리이니.”

라이라의 말에 가시가 솟아있었다.

나를 대하는 구화랑의 태도가 굉장히 마음에 안 들었다는 듯, 그러한 태도를 숨기지도 않았다.

반대로 구화랑은 미소를 지었다.

그가, 그들이 익힌 무공. 적당한 무기만 주어진다면 라이라 하나쯤은 이겨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하긴 쉬운 상대는 아니다. 구화랑의 종합능력치는 415. 다른 야차도 300언저리는 됐다. 거기다 40에 달하는 숫자였으니, 라이라도 방심하는 순간 패배할 가능성이 있었다.

‘궁금하군.’

나도 조금은 기대되었다.

라이라가 과연 인간이 아닌 야차들을 상대로도 과거 내가 보았던 ‘전율과 학살의 여왕’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지.

물론 진다는 생각은 안 했다. 라이라도 바보는 아니었다. 호언을 했다면, 마땅히 그 호언에 걸맞은 모습을 보여줄 것이다.

이윽고 야차들이 모두 무기를 골랐다.

그러자.

촤르르륵!

라이라의 발밑에서 가시가 솟아났다.

수많은 가시들이 라이라의 전신을 감싸고 모여들며 은색의 가면을 만들었다.

가면은 그녀의 얼굴 절반을 덮고 있었다.

이어 라이라가 오른손을 들었다. 그리곤 입술로 손바닥을 한차례 핥자, 피 한 방울이 손을 타고 흐르며 바닥에 떨어졌다.

순식간에 바닥으로 퍼져나간 피가 마법진을 만들었다.

육망성의 마법진이 전개되자, 바닥에서 까만색의 검 한 자루가 떠올랐다.

마검 검은 태양.

전율과 학살의 여왕을 대표하는 무기였다.

카르페디엠이 쉽게 나의 영지를 넘보지 못했던 결정적 이유.

그것을 라이라가 쥐는 순간.

스아아아아아아악!

전신에서 검은색의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마치 광전사와 같았다. 하지만 이지를 잃진 않았다. 마검 따위에 지배당하기에 그녀의 정신은 너무나도 위대했으므로.

은색의 가면 뒤로, 라이라가 고혹적인 미소를 지어보였다.

“나도 무기를 들었으니······ 그럼 시작해볼까?”

그녀만을 위한, 무대가 갖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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