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신사냥꾼-51화 (52/251)

< 13. 심연의 깊이(完) >

상인들은 여전히 입을 닫고 있었다. 갑자기 난입한 폭군. 아무리 암흑상인과 데몬로드가 불가침을 맺고 있다지만, 홀연히 나타난 나를 아예 무시할 순 없을 터였다.

2만 3천이면 당장은 부담스러울지 모르나 야차들의 가치를 생각하면 ‘거저’와 다름없었다. 특히 구화랑. 그의 가치는 심안으로 살핀 결과 10만을 넘어섰으니.

하지만 암흑상인들은 야차의 ‘보석’에만 중점을 두고 있었다.

마정석과 쌍벽을 이루는 야차의 보석은 확실히 활용가치가 많았다. 길들여지지 않는 종족이라면 마정석의 값으로만 산정해도 이해가 갔다.

“가까이 와 봐, 와보라고!”

“크아아아아!”

야차들이 발악을 했다. 가까이 다가가면 물어서라도 죽일 작정인 듯싶었다.

상인들이 혀를 찼다. 그러자 라이라가 앞으로 나섰다.

“어차피 길들여지지 않는 종족이다. 억지로 길들이려거든 시간과 더욱 많은 비용이 소모되지. 그뿐 아니라 정신을 무리하여 지배하려 든다면 그 반발력으로 육체가 약해지거나 제대로 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다.”

내가 괜한 것을 구매할 리 없다고, 그녀는 믿고 있었다.

심안을 통해 ‘꿰뚫어보는 자.’임을 라이라 디아블로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나를 돕고자, 다른 상인들을 납득시키고자 나선 것이었다.

틀린 말 또한 아니었다.

이곳은 1차 경매장이다.

이곳에서 상인들은 노예를 비교적 ‘싼 값’에 사들이지만, 교육이나 지배하는 시간과 비용은 구매한 상인이 고스란히 져야 했다.

결국 손님들이 접하는 건 그런 식으로 ‘교육이 끝난’ 괴물들뿐이었다. 아예 알의 상태로 건너온 것을 제외하면 말이다.

라이라는 이어서 말했다.

“단순한 마정석의 값으로 2만 3천이면 충분할 테지. 그 이상으로 소비를 행하며 과시를 부리겠다면 막지는 않겠다만, 과연 데몬로드께서 좋아하실 진 모르겠구나.”

“라이라 디아블로! 이곳은 신성한 경매의 장입니다. 그런 식으로 상인들을 위협하는 건 그만두십시오.”

“흥, 위협이라? 오히려 감사해야하는 것 아닌가? 저런 야만적인 종족, 어느 데몬로드가 관심을 보일까? 데몬로드 외의 존재가 저 야만적인 놈들을 다스리긴 힘들 듯한데······ 마정석 값이라도 건지는 걸 다행으로 알아야지. 그 이상은 경매를 방자한 폭리다.”

그 이상의 값을 받겠다는 건 부당한 이득으로 간주하겠다는 뜻이었다.

라이라의 말은 파급력이 있었다. 그녀는 나를 대신하여 오랜 시간 ‘데몬로드 대행’을 맡았다. 이곳에 있는 모든 상인들과 안면이 있다는 의미다.

게다가 그녀는 다른 데몬로드에는 부족할지 몰라도, 나름 ‘큰고객’에 속했으니 마냥 무시할 수도 없을 것이었다.

그때 병사의 투구를 쓴 상인 하나가 말했다.

“빌어먹을. 2만 3천이면 이놈들을 잡는데 들어간 본전도 못 됩니다!”

“너희들의 미련함을 우리에게 전가시킬 셈인가? 좋은 상품을 좋은 가격에 내놓는 게 너희들이 말하는 ‘상도덕’이었을 텐데?”

라이라는 한 마디도 지지 않았다.

병사의 모자를 쓴 암흑상인들. 그들은 나찰계를 침투했다가 대다수의 병력을 잃었다. 수백이 들어갔으나 돌아온 숫자는 고작 이십여. 거의 전멸에 가까운 숫자였던것이다.

라이라 덕분에 분위기가 넘어왔다. 동색의 왕관부터 날개가 달린 상인모자를 쓴 이들이 다시 웅성대기 시작했다.

“확실히 비싼 감이 있군.”

“저놈들을 교육시키는데 5만 포인트는 거저 들어갈 거야. 정신관련 마법은 굉장히 비싸니······.”

“마정석 값만 쳐줘도 다행이겠군. 깔끔하게 도축하고 보석을 뽑아내는 것도 일이니까.”

구매하고 교육하는데 10만 포인트 가까이가 들어간다면, 그동안의 노력과 마진을 위해서 못해도 13만 포인트는 받아야 함이었다. 하지만 그만한 포인트를 감당할존재는 데몬로드 외에는 거의 없었다. 그들의 구매욕을 돋우지 못한다면 결국 허공에 날릴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진행자가 한숨을 내쉬었다.

“2만 3천 나왔습니다. 2만 3천 이상으로 입찰하실 분 안 계십니까?”

암흑상인들이 서로의 눈치를 봤다. 막 잡힌 날것을 데몬로드가 직접 찾아와 입찰하는 경우는 없었다. 구경할 때는 있었지만, 그뿐이었다.

기본적인 교육조차 되어있지 않은 노예를 누가 구하려 하겠는가. 용의 알과 같이 교육자체가 필요 없는 것들을 제외하면 야생의 괴물들은 그다지 인기가 없었다.

하물며 야차들을 교육시키고 다시 재판매하는 것도 문제였다. 라이라 디아블로의말마따나, 데몬로드들의 구매욕을 고취시키지 못한다면 그 손해는 고스란히 상인 자신이 져야 한다.

‘이곳의 상인들도 하나로 뭉쳐있진 않다.’

나는 작게 깨달을 수 있었다. 암흑상회라는 이름으로 묶여있지만, 상인들 역시 ‘각자’ 존재한다는 것을. 그들 또한 서로 경쟁하며 ‘격’을 높이고자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이 쓴 모자는 ‘지위’의 상징이다. 위대한 별의 하수인이라지만 더욱 많은 영광을 위해선 지위를, 격을 올려야 한다는 걸 어렵지 않게 예측할 수 있었다.

더불어.

‘나찰계를 공격한 게 의도적이진 않았던 모양이군.’

내가 문을 열었듯이, 저들도 무작위로 생성 된 문 안으로 들어간 게 전부인 것 같았다. 하지만 나찰계는 매우 강력한 곳이었고, 겨우 야차 40여명 정도만 건져올 수 있었다. 서고나 무공을 노리려고 의도하여 들어온 게 아닐 가능성이 무척 높았다.

물론 이런 식으로 많은 ‘세계’를 공격한다는 건 분명히 문제였다. 데몬로드들이야심연에서의 전쟁이 어느 정도 마무리 된 다음 지구로 향한다지만, 암흑상인들은 ‘약탈’을 위해 시시때때로 침략을 행한다. 저들의 발을 묶어놓을 좋은 방법이 없을까?

“야차 무리가 2만 3천 포인트에 ‘우리엘 디아블로’께 낙찰되었습니다. 축하합니다.”

내가 생각을 거듭할 무렵 1차 경매가 마무리됐다. 진행자나 상인들과는 별개로, 병사 모자를 쓴 이들은 주먹을 꽉 쥐었다. 모든 병력을 소모해가며 얻어온 게 거저 팔려나간 것이다.

하지만 자업자득이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라이라를 바라봤다.

“라이라.”

“말씀하십시오, 로드시여.”

이번 경매는 라이라의 도움이 컸다. 그녀 혼자였다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짓이다.어쨌거나 자신의 자존심을 죽여 가며 오로지 내게 도움이 되고자 솔선수범 나선 것이니. 과거의 일과는 별개로 굉장히 기특한 일이었다.

하지만 칭찬이 쉽게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야차들을 챙기고 영지로 돌아가라. 나는 따로 할 일이 있으니.”

“그 일이 무엇인지 물어도 될는지요?”

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라이라도 굳이 더 묻진 않았다.

대신 약간 서운하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명을 따르겠습니다.”

나 혼자 해야 할 일. 이곳 상인들의 뒤를 캐는 거다.

정확히는 저들이 어떠한 방식으로 ‘다른 세계’로 향하는지 알고 싶었다.

그것을 묻는다고 대답해줄 리도 없으니, 뒤를 쫓을 수밖에.

라이라도 이에 대해선 모를 것이었다. 물건의 출처보단, ‘좋은 물건’을 구하기 위해 이곳을 찾는 자가 전부였기 때문이다.

나는 병사 모자를 쓴 암흑상인들이 건물의 뒤로 향하는 걸 보았다.

‘대아귀도 함께 왔을진대.’

어디 있을까?

저 뒤를 쫓아가면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칠흑의 손길.’

공간을 검게 물들이고, 죽음의 손을 소환하는 공격마법.

하지만 단순한 공격마법인 것은 아니었다. S랭크였고, 레벨이 오르면 그 어두운 영역 ‘안’으로 나 자신을 집어넣을 수도 있었다.

칠흑의 손길을 사용하자 수많은 검은 손들이 나를 잡아당겼다. 검은 공간 안으로 들어간 나는 그대로 병사 모자를 쓴 암흑상인의 ‘그림자’ 흉내를 내고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다행히 암흑상인들은 나를 눈치 채지 못했다.

불가침의 영역이라지만, 공격만 하지 않으면 딱히 다른 제재를 받진 않는 듯싶었다.

20여 명. 병사 모자를 쓴 암흑상인들의 숫자였다. 그들은 좁은 골목으로 움직이며 이야기를 나눴다.

“이대로 있다간 귀족위 반납은 확정이겠군. 2만 3천으로 다시 병력을 꾸려봤자 한계가 있는데.”

“어떡하시려고요?”

“대아귀는 아직 죽지 않았겠지?”

“그래봤자 시간문제 아니겠습니까? 앞으로 3일 정도면 다 죽을 겁니다.”

“3일 안으로 빠르게 여장을 꾸려서 다시 ‘침투’를 할 수밖에.”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다른 차원의 생물을 타차원으로 들이면 제약이 큰데요. 저희가 움직이는 것도 무리가······ 차라리 해당 차원의 생물을 강탈하는 게?”

“시간이 없다. 게다가 대아귀라는 생물은 꽤 재생능력이나 적응능력이 탁월해. 저차원으로 침투하면 충분히 만회할 수 있을 거다.”

“후우, 어쩔 수 없군요. 설마 그 정도로 상위차원일 줄은 몰랐습니다.”

“그 차원을 다스리는 자에게 ‘침투’하려 했지만 반대로 죽을 뻔했지. 빌어먹을! 백작급은 되어야 겨우 도전이나 해볼 수 있을 거다. 나는 이제 고작 준남작이니, 욕심이 너무 컸어.”

그들의 대화는 따라가기 어려운 면이 있었다. 하지만 대아귀를 타고 다시 어딘가로 공격을 행하려 한다는 건 알았다. 저들 중 대장으로 보이는, 뿔이 달린 은색의 투구를 쓴 암흑상인. 그가 이 모든 일의 주범인 듯했다.

“로드 우리엘 디아블로. 그만 아니었으면 두 배는 받을 수 있었을 텐데.”

“저희와 거래하는 자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들에게 부탁하면······.”

“아무리 그래도 우리 암흑인이 ‘위대한 별’의 후보인 데몬로드를 공격할 순 없다. 그들끼리 이간질을 시키는 거라면 모를까.”

“로드 카르페디엠과 사이가 좋지 않다고 들었습니다.”

“우리에게 그와 연결 된 ‘선’이 있던가?”

“‘산을 마시는 설인’이 카르페디엠과 함께 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산을 마시는 설인이라······ 좋다. 카르페디엠을 밀어준다. 하지만 저차원 ‘침투’를 성공시키는 게 먼저다. 강등만은 막아야 해.”

상인과 데몬로드 간의 ‘뒷거래’는 공식적으로는 불가하다. 하지만 데몬로드가 마냥 깨끗하게만 살아갈 리 없었다. 그것은 암흑상인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보아하니 이런 식으로 채널을 열어놓는 모양이었다.

암흑상인들이 스스로를 암흑인이라 부르는 것도 퍽 신기했다. 한 글자 차이지만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곧 그들이 암흑상회의 끝자락으로 향했다. 병졸 투구를 쓴 암흑인들이 몇 번이나 그들을 확인한 다음에야, 그 다음 장소로 나아갈 수 있었다.

‘보안이 철저하군.’

그림자에 녹아들지 않았다면 진즉에 걸렸을 것이다.

‘이곳은······.’

깊은 골짜기였다. 그 주변으로 수많은 암흑인들이 있었다. 족히 수만은 되어보였다. 모두 병사계급인 것 같았으며,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해서 골짜기로 몸을 던지고 있었다.

“공개된 저차원으로의 입장을 허락해주시오.”

골짜기의 끝에서 몸통만 한 구슬을 들고 있는 암흑인이 있었다. 그를 향해 병사가다가가서 말하자, 구슬을 든 암흑인이 고개를 갸웃했다.

“개척은 안 하는 건가?”

“놀리는 거요? 개척에 도전했다가 다 죽었소! 나도 강등 당하기 직전이란 말이오.”

암흑인이 구슬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흐음, 나찰계라. 고작 3%밖에 탐색하지 못한 건가? 이 정도면 18차원으로 지정해도 되겠어. 최소한 후작급은 되어야 도전할 만 하겠는데.”

“내 말을 무시하는 게요?”

“아아, 기다려 보게. 어디보자, 3차원이 열려있군.”

“3차원이면 기껏해야 카임 같은 짐승들뿐이 없지 않소? 지금 나보고 짐승들이나 침탈하라고?”

“자네에게 허락된 저차원은 그곳뿐이야. 그러게 나찰계를 10%는 탐색하지 그랬나. 그랬으면 꽤 큰 보상이 주어졌을 텐데.”

“후······ 젠장 할. 어쩔 수 없지.”

그가 거친 욕설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이윽고 구슬을 든 암흑인이 손가락을 뻗었다. 골짜기의 너머였다.

병사가 그곳을 향해 움직였고, 나는 여전히 그림자가 되어 병사의 뒤를 쫓았다.

이후 절벽 끝으로 다가가 골짜기를 내려다보았다.

쿠릉! 쿠르르르릉!

콰아아앙! 쾅! 콰르릉!

동시에 전신에서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골짜기의 아래.

수많은 검은색 소용돌이가 미친 듯이 휘몰아치는 장소.

마치 핵융합 마냥 서로 뒤엉키며 수많은 폭발을 낳는 곳!

암흑인들이 골짜기를 향해 몸을 던졌다. 그 순간 그들은 대아귀의 모습으로 변모했다.

‘대··· 균열!’

머릿속이 텅 비어버리는 것 같았다.

심연의 깊은 곳, 그곳엔 셀 수 없이 많은 균열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 13. 심연의 깊이(完)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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